18권 12화
제37장 비무첩래(比武牒來) (12)
“초패왕 항우요? 그, 저기, 제가 아는 그 초나라의 패왕 말입니까?”
“어허! 낮말을 쥐가 듣고 밤말은 새가 듣는다지 않소. 내가 유 공자의 친우니 말해 주지만, 다른 곳에는 알려지지 않게 비밀로 해 주시오.”
“아, 예.”
마광은 주섬주섬 앞섶을 여몄다.
그는 새로운 장난감을 자랑하는 어린아이처럼 가슴을 쭉 펴고 있었다.
“사실 나는 최근에 좀 고민이 있었소. 그런데 이런 귀물이 내게 오다니. 원래 진…… 진인…… 뭐시기라고 하듯, 이거야말로 하늘이 돕는 것 아니겠소?”
진인사대천명을 말하고 싶은 듯했다.
마광은 넓적한 손바닥으로 자신의 가슴을 팡팡 두드렸다.
“그동안 벼르고 벼르던 일을 이제 용기를 갖고 할 수 있게 되었소. 이게 다 유 공자 덕분이라오.”
“외람된 말씀이지만, 그 호심경이…….”
“진짜냐고?”
마광은 코웃음 쳤다.
그는 기다렸다는 듯이 허리춤을 더듬거리더니 갑자기 화살 하나를 쑥 내밀었다.
“이것 보시오. 얼마 전에 내가 가슴 한가운데 화살을 맞았는데 이 호심경 덕분에 살아났소. 화살은 수숫대처럼 튕겨 나왔지. 대단하지 않소?”
마광이 내민 화살은 망치로 두드린 것처럼 화살촉 부분이 뭉툭하게 뭉개져 있었다.
화살만 봐서는 어딘가 단단한 무언가에 부딪쳐 화살촉이 뭉개져 버린 것으로 보였다.
조서인은 화살촉을 한 번 만져 보았다. 뭉툭한 끝부분이 아주 매끈하게 우그러져 있었다.
뒤에서 기다리던 팽자연에게 건네자 그녀도 화살촉을 만져 보고는 흠칫하며 놀랐다.
“아아……!”
“만져 보면 느껴지지 않소? 그 화살이 이 호심경에 맞더니 그렇게 뭉개져 버렸다오. 이 호심경은 귀물이란 소리지!”
마광의 자신감도 알 만하다.
이야기를 들은 조서인조차 ‘혹시?’ 하는 생각이 들 정도인데 본인은 어떻겠는가.
“유 공자가 그러더군. 귀물은 그에 걸맞은 주인이 있는 법이라고.”
“그렇지요.”
“나 마광. 사나이로 태어나 꿈을 펼쳐 보기로 마음먹었다오. 힘들더라도 목숨을 걸어 볼 가치가 있는 일이지. 이 호심경이 내게 계시를 내려 준 거나 다름없소. 그러니 유 공자는 내게 큰 은인이고. 유 공자를 찾아온 친우도 손님으로 대하겠소.”
“고맙습니다.”
마광은 호탕하게 웃으며 머물다 가겠냐고 물었지만, 조서인은 유백담을 찾아야 하기에 시간이 없다고 에둘러 거절했다.
“알겠소. 그렇다면 이 또한 운명이지. 나는 곧장 산을 넘어야겠소”
“산을 넘으신다면…… 혹시 마 대협은 철풍단에 소속되어 계십니까?”
“그렇소.”
정말로 철풍단이었다니.
조서인은 첫인상을 보고 짐작하긴 했으나, 그가 정말로 마적단의 일원이라는 사실에 내심 놀랐다.
“혹시 철풍단으로 가면 유 공자를 찾을 수 있겠습니까?”
“아마 힘들 거라 생각하오. 단주가 유 공자를 그리 안 좋아하거든. 참, 보는 눈 없는 사람이오. 예전엔 안 그랬는데.”
단주에 대해 미묘한 감정을 드러낸 그는 황급히 수습하듯 헛기침을 몇 번 토해 냈다.
“그럼 나는 이만 떠나겠소. 유 공자를 찾기를 바라오.”
“예. 감사합니다.”
하늘에서 쨍쨍 내리쬐는 햇볕조차 마광을 화려하게 비춰 주는 듯했다.
자신감이란 게 이렇게 무섭다.
초라한 외모, 허름한 마가촌에서 나고 자란 촌부에 불과하건만.
마광은 무엇이든 해낼 것 같은 얼굴로 성큼성큼 멀어져 갔다.
“가짜죠?”
마광이 더 이상 눈에 보이지 않을 때쯤 팽자연이 슬쩍 물어왔다.
조서인은 씁쓸하게 웃으면서 답했다.
“예.”
“화살촉이 아주 매끈하더라고요.”
“호심경은 야차문, 귀신 문양 때문에 울퉁불퉁했습니다. 화살이 호심경에 맞아서 뭉개졌다면 저렇게 매끈하게 뭉개질 리가 없죠.”
“망치 같은 걸로 미리 뭉개 놨을까요?”
“그런 것 같습니다.”
당연한 이야기다.
초패왕의 호심경이라니.
그런 귀물이 존재할 리도 없을뿐더러, 만약 존재하더라도 유백담이 차 한 잔 얻어먹은 값으로 선뜻 내줬을 리가 없다.
“초패왕이라니.”
옆으로 다가온 팽자연이 허탈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서왕모 복숭아에 이어서, 이젠 초패왕의 호심경? 당황스럽네. 이 인간, 사기꾼일까요?”
“으음, 글쎄요.”
조서인은 함부로 대답할 수가 없었다.
복숭아를 받은 여인만 봤다면 그렇다고 답할 텐데, 지금 마광의 경우까지 보니 성급하게 사기꾼이라 부르기엔 좀 힘들어 보였다.
보이지 않는 뭔가가 있다.
아직은 확실히 알 수 없지만 분명히 뭔가가 진행되고 있었다.
조서인은 지금까지 본 것들을 쭉 다시 머릿속에 떠올리며 생각을 정리해 보았다.
“괜히 직접 찾으러 왔나? 만나게 해 줄 필요가 없을 것 같은데, 오라버니를 보냈어야 하나……?”
지금 상황만 봐선 그저 시골 마을에서 사기나 치고 다니는 모리배처럼 보일 뿐이니, 팽자연이 고민하는 것도 당연했다.
만약 유백담이 그녀의 말을 들었다면 경악했을 것이다.
지금 그의 목숨은 팽자연의 마음에 달려 있는 것과 마찬가지였으니 말이다.
“팽 소저, 그 결정은 아직 이른 것 같습니다.”
“왜죠? 이렇게 사기나 치고 다니는데?”
“만약에 제 생각이 맞는다면 그는 함부로 죽어선 안 될 것 같거든요.”
아직은 확신이 아니라 직감이다.
하지만 조서인이 느끼기엔 이건 그저 사욕을 채우기 위해 사기를 친 건 아닌 듯했다.
“그래요? 조 공자가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궁금하네요.”
“한 가지……. 한 번만 더 확인했으면 합니다.”
조서인은 팽자연의 뜨거운 시선을 받으며 몸을 돌렸다.
“일단 마을 밖으로 가시죠. 제 생각이 맞는다면 유백담은 저 산 위에서 찾을 수 있을 겁니다.”
“저 산이요? 마을 너머에 하나뿐인 저 산?”
“예. 저기입니다.”
마가촌의 경계선 너머, 뿌연 안개 사이로 우뚝 솟은 봉우리는 단 하나뿐이다.
“저긴 왜요? 만약 철풍단을 찾아가는 거라면 그건 저 산이 아니라, 저 산 너머 평야에 있어요. 산에 오르는 게 아니라 돌아가는 게 빨라요.”
“예. 그래서입니다.”
조서인은 의아해하는 팽자연에게 나를 믿고 한번 가 보자고 이야기했다.
그녀는 잠시 당황했지만 순순히 조서인의 말에 따라 주었다.
그들은 마차를 타지 않고 직접 신법을 사용해 움직였다.
팽자연의 어기신풍(御氣神風) 신법은 하북팽가의 직계답게 매우 훌륭했고, 조서인이 쓰는 신법의 속도에 조금도 뒤처지지 않았다.
평범한 촌민이라면 반나절은 꼬박 걸어야 올라갈 수 있는 거리일 테지만, 무공을 익힌 그들은 반 시진도 되기 전에 산봉우리 꼭대기에 올라갈 수 있었다.
땅도 불그스름했고 바위도 불그스름했다.
바람이 불 때마다 붉은색 흙먼지가 뿌옇게 피어오르는 모습은 마치 황량한 사막을 떠올리게 했다.
주변 마을에서 다 베어 버렸는지 그 흔한 나무도 보이질 않는다.
돌과 흙먼지만 가득한 봉우리에 올라보니, 산 너머 평야가 한눈에 들어왔다.
“어? 저기!”
“쉿!”
팽자연이 반갑게 손으로 가리키려는 것을 조서인이 황급히 만류했다.
산 너머 평야에는 수백의 험악한 사내들이 활활 타오르는 모닥불 하나를 가운데에 두고 둥그렇게 빙 둘러서 있었다.
위에서 아래가 보인다면 아래에서 위도 보일 수 있다는 뜻이다.
너무 눈에 띄는 행동은 좋지 않다.
“이래서 산으로 올라오자고 했군요?”
“예. 평야를 살필 만한 지형은 여기뿐이니까요.”
조서인은 팽자연과 함께 몸을 낮추고 그 광경을 유심히 살폈다.
“저들은 다 철풍단이죠?”
“다 같이 손목이랑 팔목에 비구를 차고 있는 모습을 보니 그런 것 같습니다. 아까 본 마광과 전체적인 옷차림이 똑같네요.”
“분위기가 험악해요. 싸울 것 같은 분위기인데?”
팽자연은 철풍단을 유심히 살폈고, 조서인은 철풍단보다는 그 밖의 공간에 집중했다. 그의 시선이 전후좌우 철풍단의 주변을 샅샅이 살폈다.
철풍단이 보일 만한 곳.
그곳의 동향을 한눈에 살피며 일을 꾸미기 좋은 곳 위주로 살피다 보니 드디어 한 사람을 포착했다.
“저기……!”
“네?”
“팽 소저, 유 공자를 찾은 것 같습니다.”
조서인은 그들이 올라온 산봉우리에서 평야 쪽 절벽을 가리켰다.
비스듬히 산세가 이어지다 절벽으로 뚝 끊어진 그곳에 자세히 보면 한 사람이 몸을 낮추고 철풍단의 동정을 살피고 있었다.
흙먼지가 풀풀 피어오르는 곳에서 주변의 땅과 비슷한 적갈색 천으로 온몸을 둘둘 두르고 있으니 무인의 눈으로 보더라도 찾기가 쉽지 않다.
산봉우리 위에서 보면 흙과 똑같은 색의 개미가 꿈틀꿈틀 움직이는 것 같은 정도다.
“세상에, 저런 걸 어떻게 찾았어요?”
팽자연은 감탄하면서 눈을 가늘게 뜨고 유백담으로 추정되는 이를 한참이나 살폈다.
“체형은 비슷한 것 같긴 한데, 여기서만 봐서는 잘 모르겠어요.”
“그럼 직접 가 보시죠.”
조서인이 먼저 몸을 날렸고, 그 뒤를 팽자연이 그림자처럼 따라붙었다.
그들은 평야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절벽으로 순식간에 내려갔다.
절벽은 신기한 곳이었다.
높이는 사람 키의 스무 배는 될 것처럼 높은데, 신기하게도 평야에서 나누는 대화가 웅웅 울려서 선명하게 귀에 들렸다.
소리는 아래에서 위로 올라가는 법이다.
평야에서 나누는 대화의 소리가 절묘하게 모이는 곳이 지금 그들이 서 있는 절벽이었다.
“없……?”
그런데 아무도 없다.
막상 절벽에 도착한 그들은 유백담으로 추정되던 이가 이미 사라져 버렸음을 깨달았다.
산봉우리에서 절벽까지 내려온 시간은 고작해야 반 각.
그 반 각 동안 대체 무슨 일이 벌어졌단 말인가.
조서인은 주변을 살피고, 팽자연은 철풍단이 있는 쪽으로 몸을 낮추고 절벽 아래를 슬쩍 내려다보는 그 순간이었다.
툭―.
절벽 아래에서 불쑥 튀어나온 노궁 하나가 날카로운 화살촉을 팽자연의 미간에 겨누었다.
“흡!”
“……자연 누이?”
흙과 비슷한 색감의 천으로 온몸을 두른 젊은 청년.
흙먼지를 뒤집어썼음에도 화화공자처럼 잘생긴 유백담이 깜짝 놀랐다.
그는 절벽에서 한 발 아래에 튀어나온 비밀 공간에 몸을 숨기고 있었던 것이다.
팽자연과 유백담의 시선이 허공에서 복잡하게 뒤엉켰다.
“자연 누이가 대체 왜 여기에 왔소?”
“……내가 할 말이에요. 여기서 대체 뭘 하는 거예요?”
스릉―.
조서인의 은자창이 쥐도 새도 모르게 다가와 유백담의 목을 겨누었다.
팽자연이 신음을 흘리는 순간부터 이미 움직였던 조서인이다.
유백담이 들고 있던 쇠뇌가 팽자연의 미간에 닿아 있고, 조서인의 창날이 유백담의 목덜미를 노리는 물고 물리는 상황이 되었다.
유백담은 그 상황에서 씩 웃었다.
“무섭구만. 자연 누이, 어디서 이런 무서운 호위를 찾았소?”
“친한 척하지 말아요. 당신을 잡으러 온 거니까.”
“잡으러? 다행이오. 자연 누이는 나를 좋게 봐줬구려. 곧장 죽이겠다고 칼을 들이밀지 않는 것만 해도 고맙소.”
“하? 매사에 유들유들하게 구는 건 여전하군요.”
“그게 내 유일한 장점인데 어떡하겠소? 그나저나, 호위에게 창을 좀 치워 달라고 해 주지 않겠소? 창날이 번쩍거리면 철풍단이 눈치를 챌 것이오.”
유백담은 그리 말하면서 자신이 먼저 팽자연의 미간에서 노궁을 치웠다. 양손을 들어 손바닥을 보여 주는 그 모습에선 적의가 느껴지지 않는다.
조서인은 그걸 확인한 뒤 순순히 은자창을 천으로 감아 다시 등 뒤에 맸다.
유백담이 고맙다는 듯이 빙긋 웃었다.
“내 말을 이해해 줘서 고맙소.”
“굳이 철풍단과 싸울 필요는 없죠.”
“내 말이 바로 그 말이오.”
유백담과 조서인의 첫 만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