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풍운객잔 2부-441화 (570/686)

18권 13화

제37장 비무첩래(比武牒來) (13)

유백담은 흥미로운 사내다.

별 볼일 없는 마가촌에서 사기나 치고 돌아다니는 걸 보면 영락없는 모리배인데, 방금 전에 팽자연을 알아보기 전에는 곧바로 노궁을 쏴서 상대를 죽일 것 같은 살기를 찰나간에 드러냈었다.

섬뜩한 느낌에 등골이 오싹했다. 어찌나 놀랬던지 조서인은 곧바로 창을 던질 뻔했다.

지금 저렇게 유들유들하게 웃는 얼굴만 봐서는 상상도 못할 일이지 않은가.

“나는 그쪽으로 다시 올라가겠소. 놀라서 창으로 찌르지 말아 주시오. 아직은 살아서 하고 싶은 일이 너무 많소.”

유백담은 말과는 달리 전혀 긴장하지 않은 모습으로 다시 절벽 위로 기어 올라왔다.

유백담의 무공은 약하지 않다.

호흡, 자세, 발을 딛는 모습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무공 실력은 일류. 검기상인은 훨씬 지났다.’

팽자연과 비교하자면 조금 강한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조서인이 긴장을 해야 하냐고 묻는다면, 그건 아니라고 할 수 있다.

팽자겸이 그를 두고 또래보다는 조금 나은 실력이라더니. 그 평가가 정확했음을 이제야 깨달았다.

‘하지만 무공이 전부는 아니지. 심계에 있어서는 절대로 방심해선 안 될 인물이야.’

조서인은 유백담의 호흡 하나 놓치지 않겠다는 마음으로 경계심을 갖고 그를 살폈다.

유백담도 조서인을 흥미롭게 바라봤다.

“자연 누이는 내가 오래 알던 사람이고, 그쪽 호위는 누구시오? 나는 호북 유가장 출신 유백담이라고 하오.”

“저는 조서인이라고 합니다.”

유백담이 먼저 정중히 포권을 취하니, 조서인도 마주 포권을 취했다.

유백담은 자신을 지금은 몰락한 학자 가문의 후예라고 소개했다. 그는 조서인의 이름을 듣자 크게 반색했다.

“조서인? 혹시 낙일지협의 그 조서인이 맞소?”

“……예, 맞습니다.”

“귀인을 보는구려! 반갑소. 내가 낙일지협의 이야기를 듣고 얼마나 감탄했는지 모르오.”

유백담의 두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조서인은 유백담의 시선이 슬쩍슬쩍 자신의 손과 등에 맨 창을 살피는 것을 느꼈다.

팽자연이 인상을 찌푸리며 나섰다.

“지금 우리는 환담이나 나누려고 찾아온 게 아니에요. 지금 어떤 상황에 처했는지 몰라요? 마가촌에서 사기는 또 왜 치고 다닌 거예요?”

“아, 거기도 갔었소? 으음, 그럼 대충 사정을 알겠군.”

유백담은 주변의 눈치를 살피더니 손바닥으로 신호를 보냈다.

“일단 다들 잠깐 몸을 낮춰 주시오. 이제 시작할 것 같소.”

유백담은 장난을 성공한 어린아이같이 웃는 그는 순수함과 유들유들한 사교성을 동시에 갖춘 사람이었다.

그가 먼저 납작 엎드려서 절벽 아래를 살핀다.

이쪽에 대한 경계는 조금도 없다.

조서인과 팽자연은 서로의 눈치를 살폈다.

이걸 강제로 끌고 가야 할까?

아니면 설득을 해서 데려가야 할까.

팽자연이 못 이기겠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고, 결국 두 사람은 함께 몸을 낮추고 산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드넓은 평야에 모여 있던 철풍단의 동태가 심상치 않았다. 웅성거리는 소리가 점점 더 커지는가 싶더니, 결국 언성을 높이면서 당장이라도 칼을 뽑을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단장! 자꾸 미루면 축제는 대체 언제 한단 말입니까! 올해 서열을 정하지 않을 겁니까!”

분위기를 주도하던 사내의 목소리가 쩌렁쩌렁했다.

덩치가 큰 사내였다.

커다란 곰 한 마리를 사람의 형태로 빚어 놓으면 저렇게 생겼을 것 같은 사내다.

얼굴형도 단단하게 각졌고, 코는 뭉툭했으며 눈은 동그랗지만 사나운 인상이다.

머리를 뒤에서 한 가닥으로 땋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북쪽의 오랑캐 같으면서도 강렬했다.

허리에 비스듬히 찬 검은 손잡이와 검집이 온통 붉은색이다.

“저 사람은 비정혈검 맹자승이오. 철풍단의 서열 삼 위이지.”

유백담은 뭐가 그리 즐거운지 방긋방긋 웃으면서 설명해 주었다.

“철풍단은 일 년에 한 번 ‘축제’라 불리는 비무 대회를 열어 자신들의 서열을 정한다오.”

맹자승은 우악스러운 생김새와 달리 철풍단 내부에서 상당히 인망을 갖춘 듯 보였다. 맹자승의 말에 동조하는 자들이 삼분지 일이나 되었다.

“맹자승! 단주에게 예의를 갖춰라! 어디서 언성을 높이는가!”

맹자승을 비난하며 나선 것은 반대편에서 조용히 무게를 잡고 서 있던 빼빼 마른 사내였다.

그는 눈매가 매섭고 턱이 뾰족했다. 언제든 검을 뽑아 들 것처럼 섬뜩한 살기를 온몸에 두르고 있는 사내였다.

“이보시오, 비령.”

“뭐? 비령?”

“왜? 그게 싫으시면 철풍비객이라 불러 드릴까? 예의라니. 누가 들으면 우리가 공자 왈 맹자 왈 하는 학당에 있는 줄 알겠소?”

“뭐라고?”

“마적단 도적놈들에게 예의가 어디에 있소, 예의가. 힘으로 서열만 확립하면 끝이지.”

맹자승이 당당하게 외치자 전체 철풍단의 절반에 조금 못 미치는 인원이 고개를 끄덕이며 그에게 동조했다.

철풍비객 비령이 섬뜩한 목소리로 으르렁거리듯이 말했다.

“네가 정말로 뒤지고 싶구나, 맹자승.”

“누가 살수 출신 아니랄까 봐 죽이겠단 말부터 나오는구려. 거 무서워 죽겠구만. 철풍비객답게 암습이라도 할 거요?”

비령이 검에 손을 가져갔다.

맹자승도 자신의 혈검을 당장이라도 뽑을 듯이 손을 얹어 둔 채다.

일촉즉발의 순간.

비령을 따르는 자들과 맹자승을 따르는 자들이 각각 서로를 노려보며 무기를 살짝 뽑았다.

“서열 이 위인 철풍비객 비령과 서열 삼 위인 비정혈검 맹자승은 서로 앙숙이오. 작년의 축제 때 싸움에서 져서 한 단계 내려오긴 했지만 어차피 실력은 한 끗 차이라서 맹자승도 비령의 말에는 사사건건 대들고 본다오.”

신이 나서 말하는 내용들이 전부 철풍단의 비사들이다.

조서인은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을 지으며 물었다.

“그런 것들을 다 어떻게 파악한 겁니까?”

“술. 고금 천하에 사람의 속내를 술술 끌어내는 데 술만 한 게 없지 않소? 철풍단 사람이랑 술 몇 번 마시면 저언―부 다 알 수 있는 내용이오.”

유백담은 별것 아니라는 듯이 대답했지만, 그렇게 간단한 일일 리는 없었다.

그러던 중, 팽자연이 누군가를 발견했는지 탄성을 내뱉었다.

“저 사람, 마광이에요.”

팽자연이 가리키는 방향은 비정혈검 맹자승 쪽이다.

머리를 하나로 땋은 거구의 사내가 존재감이 너무 강하다 보니 못 보고 있었다.

이제 보니 정말로 마광이 맹자승의 곁에서 보좌하듯이 서 있는 게 아닌가.

“아! 맞네요. 그 사람입니다.”

조서인 또한 알아보았다.

마광은 맹자승의 곁에서 용맹무쌍한 얼굴로 칼을 반쯤 뽑아 든 상태였다.

아마 호심경 덕분일 것이다.

그는 칼을 잡지 않은 왼손으로는 가슴의 호심경을 붙들고 있었다.

“유 공자.”

“음? 왜 그러시오, 조 공자?”

“마광에게 가짜 호심경은 왜 준 것입니까?”

“가짜라니요.”

유백담은 엎드린 상태로 눈을 찡긋거렸다.

“상대가 진짜라 믿으면 진짜인 거 아니겠소?”

“…….”

“아니, 그런 눈으로 보지 마시오. 크흠, 뭐, 조금 ‘과장’을 하긴 했지만, 그거 사실 나쁜 물건이 아니오. 하북에서 제법 은자를 두둑이 주고 사 온 호심경이란 말이오.”

의외의 이야기였다.

초패왕의 유물이라 허풍을 떨었던 것치고는 완전히 쓸 수도 없는 가짜는 아닌 모양이다.

“그런데 뭉개진 화살로 연기까지 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것까지 알았소? 흐음, 세간에서 낙일창은 순박하고 선하다던데, 역시 강호의 소문은 믿을 바가 못 되는 듯…… 아얏.”

유백담은 옆구리를 잡고 지렁이처럼 몸을 꿈틀거렸다.

팽자연이 방금 불꽃처럼 뜨겁게 꼬집은 손가락 두 개를 보여 주면서 유백담에게 경고했다.

“조 공자는 선한 사람이에요. 사기꾼 같은 당신이 함부로 놀리지 말아요.”

“허? 허어?”

유백담은 당황하면서 팽자연과 조서인을 번갈아 쳐다보더니 헛웃음을 흘렸다.

“알았소, 알았어. 조심하겠소. 크흠! 아무튼, 아무도 피해를 본 것 없소. 내가 한 일은 그저……. 뭐랄까.”

유백담은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양 손바닥으로 살짝 미는 시늉을 했다.

“그냥, 망설이는 사람의 등을 살짝 밀어 준 것뿐이오. 거기서 자신감을 얻었다면? 원래 그럴 사람인데 계기가 없었을 뿐이지. 그게 죄가 되겠소?”

“으음.”

“말해 보시오. 혹시 그들 중에 괴로워하는 사람이 있었소?”

복숭아를 먹고 외모의 자신감을 얻은 여인이든, 호심경을 얻고 용기를 얻은 사내든.

다들 본인이 행복해하니 된 것 아니냐는 소리다.

“없지 않소?”

어깨를 으쓱하는 유백담에게서는 죄책감이라고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다.

조서인은 계책 같은 것은 모른다.

하지만 사람의 진심.

상대가 무언가를 노리고 있는지 아닌지 정도는 구별할 수 있다.

조서인은 본질만을 바라보았다.

“그렇군요.”

“이해해 준 것이오?”

“아뇨, 그저 당신에 대해 알게 되었을 뿐입니다.”

처음으로 유백담이 조서인을 진지하게 돌아본다.

조서인은 시선을 피하지 않은 채 가만히 그의 속내를 들여다보았다.

“……내 무엇을 알게 되었소?”

“자꾸만 속을 숨긴다는 점이요.”

“세상에 속을 다 드러내는 사람도 있소?”

“있죠. 그리고 대부분 유 공자처럼 습관적으로 속내를 감추지는 않습니다.”

조서인은 처음 유백담을 만났을 때부터 묻고 싶었던 질문을 대뜸 던졌다.

“팽자화 소저에게는 왜 그랬습니까?”

유백담은 마치 돌멩이를 물고 있는 것처럼 입을 굳게 다물었다.

유백담의 시선이 흔들린다.

그는 처음으로 속내를 숨기지 못했다.

“그저, 인연이 아니었을 뿐이오.”

“그래요?”

“그렇소.”

“그렇다는데요?”

조서인이 팽자연을 바라보자, 이미 그녀는 폭발 직전이라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하는 중이었다.

“죽여 버리겠어.”

“아니, 잠깐. 왜 그러시오, 자연 누이.”

“누이 같은 소리. 그딴 말은 입에 올리지도 마. 우리 자화가 지금 어떻게 지내는데. 목매달겠다는 걸 겨우 말렸는데!”

“……!”

유백담의 안색이 하얗게 질린다.

그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냉정을 잃어버렸다.

“왜, 왜……?”

“왜에?”

“아니, 화 매는 대체 왜……! 내가 나쁜 놈이니 미련 갖지 말라고 그렇게 말했건만……!”

“…….”

“화 매는, 화 매는 지금 괜찮소? 다친 데는 없소? 목을 매다니. 그런 흉악한 짓을. 혹시 그 예쁜 목에 상처라도 생겼소?”

“이 파렴치한.”

그녀는 다른 건 다 참아도 유백담이 팽자화를 걱정하는 것만큼은 더 이상 참지 못했다.

팽자연이 벌떡 일어나 칼을 뽑으려 하는 것을, 유백담이 무릎을 꿇은 채 다급하게 그녀의 칼집을 붙잡으며 말렸다.

“자, 잠깐. 여기 말고 다른 데서 이야기합시다. 다른 데서.”

“철풍단? 흥, 볼 테면 보라지. 자화에게 단 한 번도 상의하지 않고 도망치듯 떠났으면서, 지금은 반성도 하지 않다니. 죽여 버리겠어!”

“잠깐! 잠깐만, 자연 누이.”

두 사람 다 투덕거리고 있지만 속삭이는 듯한 목소리였다.

둘 다 넘지 말아야 할 선은 철저하게 지키고 있다.

조서인은 한숨을 내쉬었다.

차라리 유백담이 나쁜 놈이었다면 좋았을 텐데. 일이 복잡해져 버리지 않았는가.

“나중에 내가 다 설명하겠소. 자연 누이. 잠깐만 기다려 주시오. 저들의 이야기를 들어야 하오. 이건 놓쳐선 안 될 이야기란 말이오.”

“설명은 무슨. 둘 중 하나 결정해. 당장 나랑 같이 팽가로 돌아가서 자화를 위로해 주던가. 아니면 이 자리에서 내 칼에 죽어.”

“……지금 돌아갈 수는 없소.”

“그럼 죽어야지.”

“주, 죽는 한이 있어도 지금은 돌아갈 수 없소. 조금만 기다려 달란 말이오.”

“드데체 에, 이음 모아으에?”

도대체 왜 지금 못 가는데?

팽자연이 이를 얼마나 악물었는지 말을 알아듣기도 힘들었다.

“믿어 줄지 모르겠지만, 나는 화 매랑 이뤄지기 위해 최후의 발악을 하는 중이오. 그러니 제발 기다려 주시오.”

유백담은 진실된 얼굴로 싹싹 빌었다.

“누이의 그 마음은 잘 알겠소. 내가 죽일 놈이지. 그런데 나도 그럴 만해서 그러는 거란 말이오.”

“후우.”

팽자연이 화를 가라앉히려는 듯 숨을 몰아쉬자, 유백담은 지금의 기회라는 듯이 재빨리 말을 이었다.

“철풍단. 난 철풍단을 휘하에 두겠소. 그러니 이왕 이곳에 온 김에 나를 좀 도와주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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