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풍운객잔 2부-442화 (571/686)

18권 14화

제37장 비무첩래(比武牒來) (14)

“철풍단을 휘하에 두겠다고?”

당연한 일이지만 팽자연은 그의 말을 믿지 않았다.

미간을 좁히고 눈살을 찌푸린 모습에선 불신만이 가득했다. 설령, ‘화 매랑 이뤄지기 위해 최후의 발악을 하는 중이라는’ 그 말을 만에 하나 믿는다 해도 기분 나쁜 점은 또 있다.

“도와달라니. 이거 아주 뻔뻔한 인간 아냐?”

울컥 화가 치솟는 건 사람이라면 당연한 일이다.

하나뿐인 여동생을 그렇게나 괴롭게 만든 놈이 기껏 얼굴을 마주하니 한다는 소리가 이왕 온 김에 도와달라니.

애써 화를 가라앉힌 것이 아무 소용없었다.

팽자연이 분기탱천해서 칼을 뽑으려는데 단단하게 굳은살 박인 손바닥이 덥석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

“아?”

“팽 소저, 잠시만요. 화가 나고 속상하시겠지만, 이야기는 한번 들어 보는 게 좋겠습니다.”

팽자연은 붉으락푸르락한 얼굴로 고민하다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알겠어요. 조 공자가 그렇게 말한다면 일단 한 번 참도록 할게요.”

“예. 감사합니다.”

“……그러니 손은 좀…….”

“아! 죄, 죄송합니다.”

조서인의 얼굴이 빨개졌다.

다급하게 막느라 손을 잡았다지만, 외간 여자의 손을 계속 붙잡고 있다니. 예의에 크게 어긋나는 일이다. 사과의 뜻을 표하려 했지만 팽자연이 고개를 돌리고 있어 뒷모습만 보인다. 살짝 보이는 귓불이 빨개져 있었다.

“크흠!”

조서인은 묘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유백담의 시선을 애써 모른 체하며 헛기침을 했다.

“유 공자, 계속 설명해 주십시오. 철풍단을 어떻게 휘하에 두겠다는 건지. 그리고 설령 그게 가능하다고 해도, 철풍단의 단주가 되면 팽자화 소저와의 관계가 어떻게 달라지는지. 상세히 말해 주세요.”

당황스러운 건 당황스러운 거고, 유백담의 발언은 그냥 넘어갈 일이 아니다.

조서인은 대충 넘어갈 생각이 없었다.

애초에 팽자겸의 분노에 공감하며 연민을 갖고 뛰어든 일이지 않던가.

동생이 농락당했다고 생각하는 팽자겸의 분노. 그 마음에 공감하지 못할 사람이 어디에 있을까.

유백담이 그리 악해 보이지 않는다고 한들, 그가 팽가의 많은 이들을 고생하게 만든 사실만큼은 변하지 않는다.

“알겠소. 다 설명하겠소. 그러니 부디 몸 좀 낮춰 주시오. 어찌되든 간에 저들에게 들키면 피곤해지지 않겠소?”

유백담은 팽자연의 눈치를 힐끗 본 뒤 양손을 모아 간절히 부탁했다.

조서인이 순순히 몸을 낮추자 팽자연도 그 옆에서 떨떠름하게 몸을 낮췄다.

“철풍단부터 설명하겠소. 철풍단은 아까 말했듯이 일 년에 한 번 벌어지는 축제로 서열을 정하오. 그런데 그 축제의 규칙 중엔 재밌는 게 있소. 바로 외부인도 자유롭게 참여할 수 있다는 것이오.”

“외부인도 참여할 수 있단 말입니까? 철풍단이 아니라도?”

“바로 그렇소.”

“도대체 왜?”

이 세상 어느 집단에서도 자신들의 서열 싸움에 외부인도 끼워 주는 일은 없다.

사승 관계, 혈연관계가 왜 있겠는가.

그게 다 사람 사이의 관계를 단단히 하기 위한 것들이며, 그런 관계가 없는 사람은 언제든 적으로 돌아설 수 있는 생판 남일 뿐이다.

아무런 관계도 없는 외부의 강자를 집단 안에 들인다?

그건 언제든 외부인이 집단을 집어삼킬 위협을 감수한다는 이야기밖에 되지 않는다.

“철풍단에선 그 이유를 두 가지로 들고 있소. 첫 번째는 단주의 규칙 때문이오. 축제에서 서열 일 위가 되면 곧바로 철풍단의 단주가 되지만, 그자가 순수한 철풍단이 아니라 외부 세력에 소속된 불순한 자라면 서열 이 위부터 나머지 모든 철풍단이 칼을 뽑아 들고 덤벼들게 될 것이오. 그게 약속이오. 무공만 강한 외부인이 단주가 된다고 한들 제대로 일을 안 하면 다들 눈이 뒤집혀서 죽이러 온다는 소리요. 함부로 철풍단 단주가 되려 하면 후환이 크다는 소리지.”

“그 약속이 정말로 지켜집니까?”

“지켜진다오. 청풍단은 상상 이상으로 단순한 자들이라, 약속을 지키겠다고 하면 지키는 자들이오. 외부인이 단주가 되면 어디 한번 해 봐라 하긴 해도, 서열 일 위 자리만큼은 순순히 내줄 사람들이지.”

놀라운 일이었다.

겉으로 봐서는 어떠한 규칙도 지키지 않을 도적 떼 같은데, 그런 기묘한 규칙을 철저하게 지키는 집단이었다니. 직접 철풍단을 내려다보면서 듣고 있음에도 믿기지가 않을 정도다.

“그럼 두 번째는 뭡니까?”

“단주의 강함.”

유백담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면서 손가락으로 조심스레 철풍단을 가리켰다.

“철풍쌍도 막지관은 가공할 만한 무공을 지녔소. 그야말로 하북 무림에선 비교할 자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오.”

“그자가 그렇게 강합니까?”

“낭인왕이 될 거라 손꼽히던 파산권이 철풍쌍도에게 열 합도 못 버티고 죽은 것은 유명한 이야기요. 소문으로는 막지관이 북원의 잔당 중 하나라는데. 실제로 그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소. 그 정도로 강하니 외부인이 축제에 아무리 참가해도 막지 않는 것 아니겠소?”

“그렇군요. 막상 축제에 참가했는데 그 외부인이 단주가 되지 못하면 그는 그저 철풍단의 부하 중 하나가 될 뿐이군요.”

“바로 그 점이오. 철풍단이 외부인의 축제 참가를 막지 않는 이유이지. 조 공자는 이해가 빠르구려.”

“으음, 철풍단주가 그렇게 강한 사람인데 유 공자는 축제에서 이길 자신이 있습니까?”

유백담은 의외로 자존심을 세우지 않고 선선히 인정했다.

“정면에선 불가능하오.”

“……뒤에선 가능하고요?”

“여러 가지 손을 써뒀소.”

그 순간 마을에서 봤던 서왕모의 복숭아를 먹은 여인과, 초패왕의 호심경을 찬 사내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게 어떻게 철풍단 단주를 이기는 걸로 연결이 되는 거지?’

조서인의 머리로는 도저히 이해할 만한 답이 나오질 않았다.

힐끔 옆을 보니 팽자연도 마찬가지인 듯 그녀는 입술을 질끈 깨물고 있었다.

문제는 또 있다.

조서인이 생각하기에 이 일은 실패할 경우에 잃을 것이 너무 많은 도박이다.

“유 공자, 그러다 실패해서 철풍단의 부하가 되어 버리면 어떻게 합니까? 팽자화 소저는 물론이고 당신의 앞날이 철풍단에 묶여 버리는 일 아닙니까?”

“조 공자는 꿈이 너무 없구려.”

“예?”

“실패할 걸 먼저 생각해서야 대체 무슨 일을 할 수 있겠소? 그런 건 나 유백담이 할 만한 일이 아니오.”

조서인은 어안이 벙벙해지고 말았다.

말도 안 되는 말인데, 묘하게 가슴을 건드린다.

“고개 빳빳이 들고 열심히 노력하다 보면 언젠간 성공하겠지. 아니 그렇소?”

유백담은 백면선생 같은 얼굴에 먼지를 잔뜩 묻힌 채 씩 웃었다.

그 어떤 두려움도 없는 얼굴이다. 천진하게까지 보이는 그 얼굴이 사내다운 매력을 뿜어내니, 어째서 팽가의 천금 같은 여인이 허풍만 센 사내에게 마음을 빼앗겼는지 충분히 짐작이 간다.

거짓.

사기.

허풍.

대책도 없이 그런 허황된 짓거리를 하는데도 밉지 않은 매력이 있는 사내다.

그동안 소호에게 휘둘리며 말도 안 되는 일들을 해 온 탓일까? 조서인은 무모한 이야기를 듣고도 헛웃음만 짓고 넘겼다.

“좋습니다. 그렇다고 쳐요. 철풍단의 단주가 된다면, 뭐가 바뀝니까?”

“……그 이야기는 나중에 하면 안 되겠소?”

“안 됩니다.”

“거 너무 단호한 거 아니오?”

“옆에 팽 소저 얼굴을 봐요. 그게 납득이 안 된다면 지금 유 공자를 끌고 팽가로 돌아가는 게 나을 것 같은데요.”

협박이 아니라 사실이다.

유백담은 신음을 흘리다가, 빨리 말하라고 눈으로 욕을 하는 듯한 팽자연의 얼굴을 보고 몸을 움츠렸다.

“석 달 전쯤……. 팽가의 대공자를 뵌 적이 있소. 정확히는, 화 매와 내가 서로를 아끼며 만나고 있다는 걸 알게 된 후, 대공자가 나를 찾아왔소.”

이 이야기는 팽자연도 몰랐던 것 같았다.

팽자연의 눈이 동그래진다.

“대공자께서는 호북 유가가 나라에 큰 죄를 지어서 몰락한 것도 알고 계셨소. 팽가의 능력은 정말 대단하더구려. 내가 방계 출신인 것과, 일찍이 열세 살 때쯤 강호의 협객을 만나 그분의 무공을 사사하기 위해 가문을 떠난 것도 다 알고 있었소. 호북 유가 사람은 나를 제외하곤 아무도 안 남았을 텐데 대체 어떻게 알았는지 모를 일이오.”

유백담은 최대한 담담하게 이야기하지만 눈 밑이 파르르 떨렸다.

“내가 가진 거라곤 내 몸뚱어리 하나뿐인 것을 이미 다 알고 있는데 뭐라고 할 수 있겠소? 그분께서 나보고 팽가의 금지옥엽을 책임질 만한 사람이냐고 묻는데, 희한한 일이오. 평소엔 그리도 잘 떠들던 허풍이 안 나오는 게 아니겠소? 가만히 있었더니 그분께서 그러더이다. 가문과 혈통은 중요하며, 명가의 기품을 겉치레로만 배운 자에겐 동생을 줄 수 없다고. 일가를 이룰 자질이 없는데 어떻게 동생을 건사하겠냐고 묻는데 내가 뭐라고 할 수 있겠소?”

팽자연의 눈빛이 흔들렸다.

담담하게 말하는 척하지만 마음의 상처였을 대화다.

조서인은 과연 팽자겸이 할 만한 말이라고 생각했다. 가문과 혈통, 기품을 중요시하는 팽가의 대공자다.

팽자겸이 나쁜 사람이라는 것은 아니다.

하북에서 최고로 꼽히는 명가에서 상대방에게 그에 걸맞은 가문과 기품을 요구하는 게 무엇이 과할까.

“그런데 나도 참, 꼴에 사내라고 배알이 꼴려서 큰소리를 치고 말았소. 하북팽가가 깜짝 놀랄 만한 능력을 갖추고 찾아올 테니 걱정 말라고 한 것이오.”

“그래서 여기로 온 겁니까? 팽가가 깜짝 놀라도록, 철풍단의 단주가 되어서 다시 찾아가려고?”

“바로 그것이오.”

유백담이 눈을 번뜩인다.

미래에 대한 야망과 집념이 뒤섞인 눈빛이다.

“난 반드시 성공해서 철풍단을 이끌고 하북팽가로 돌아갈 것이오. 그래서 당당하게 화 매와 부부의 연을 맺을 수 있도록 인정받고 말겠소.”

사내의 자존심이다.

그는 목숨을 걸고 도전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조서인이 공감한 ‘사내의 낭만’이라는 것은 팽자연이 보기엔 여전히 한심했던 모양이다.

그녀는 세상이 다 끝난 것처럼 깊은 한숨을 쉬었다.

“세상에, 이런 모자란 사람이 있다니. 잘난 척은 다 하면서 정작 하는 짓은 바보가 따로 없네. 그래서 자화에게 이제 인연이 다했으니 헤어지자고 한 거예요? 자화가 얼마나 힘들어할 줄은 모르고?”

“……나는 목숨을 걸었소. 만약 실패한다면 팽가로 돌아갈 수 없을 테니 잠시 내가 나쁜 놈이 되는 게 그녀에게 더 나은 것 아니겠소?”

“네에, 네에, 그러시겠죠. 이 한심한 사람아. 차라리 멋진 모습으로 돌아올 테니 기다리라고 하든가. 아니면 허심탄회하게 자화에게 사정을 이야기하고 가문에 허락을 받을 수 있게 도와달라 하든가. 방법은 얼마든지 있는데. 아무리 한심해도 곁에 있어주는 게 최고라는 걸 대체 왜 모르는 거죠?”

“그건…….”

조서인은 왠지 유백담이 뭐라고 할지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예감은 정확하게 들어맞았다.

“멋있지가 않소.”

“……뭐라고요?”

“사내가 어찌 그리 비굴하게 굴겠소? 그래서야 어찌 당당하게 화 매를 부인으로 맞아 행복하게 살 수 있겠느냔 말이오.”

팽자연은 이제 화를 내지 않았다.

마음을 비운 듯, 흡사 부처라도 된 것처럼 해탈해서 깊게 한숨을 내쉴 뿐이었다.

유치하고 제멋대로인데, 그 뜻은 나쁘지 않다.

낭만과 허세가 섞인 화술이 기가 막히다면 기가 막힐까.

참으로 신기한 사내가 아닌가.

‘팽 소저가 또 화나겠는데. 이대론 이야기 진행이 안 되겠다.’

조서인은 자신이 나서야 할 순간임을 깨달았다.

“유 공자, 만약에 말입니다. 정말 만약에 우리가 돕는다면, 어떻게 돕길 바라는 겁니까?”

“……정말 도와주시겠소?”

“들어 보고요.”

유백담은 크게 반색하며 방긋방긋 웃는 얼굴로 기다렸다는 듯이 요구 조건을 꺼냈다.

“철풍단의 서열 이 위. 철풍비객 비령이 조금만 약해지면 내 계획의 성공률이 올라갈 것 같소. 내가 시간과 장소를 알려 줄 테니 조 공자께서 비령과 비무를 해서 내상을 입혀 줄 수 있겠소?”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