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풍운객잔 2부-443화 (572/686)

18권 15화

제37장 비무첩래(比武牒來) (15)

삐이이익―.

파란 염료를 물에 풀어놓은 듯한 하늘 위로 매 한 마리가 날개를 펼친 채 미끄러지듯이 날고 있었다.

마치 날렵한 범선이 바다를 가르며 달려오는 듯했다.

매가 날갯짓 몇 번만에 지평선 끝에서 머리 위까지 날아오는 모습은 장관이다.

먹이를 찾기 위해서인가.

아니면 무언가를 찾기 위해서인가.

까마득한 하늘 위.

밑에서 보기엔 손가락 한 마디만 한 크기도 안 되는 매를 조서인은 걸음을 멈춘 채 멍하니 올려다보았다.

“벌써 세번째 보는 것 같은데…….”

의심이 안 생길 수가 없는 상황이다. 조서인을 보기 위해 매가 날아온다고 생각할 만했다.

“혼자라 그런가? 내가 쓰러지면 잡아먹으려고?”

황무지에선 혼자 다니는 사람 뒤를 들개가 졸졸 따라다닌다는 이야기도 있지 않던가.

손을 흔들어 보았지만 매는 가까이 오거나 반응하지 않았다.

그냥 머리 위를 빙빙 돌다가 왔던 방향으로 다시 되돌아갔다.

“갔네.”

알다가도 모를 게 사람 마음이라더니. 갑자기 따라올 땐 의심스러웠는데 막상 떠나고나니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땡볕에 달궈진 바닥은 뜨거웠고, 붉은빛이 감도는 먼지가 시야를 뿌옇게 가리고 있었다.

문득 이렇게 혼자 움직이는 건 오랜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돌이켜 보면 그는 늘 소호와 함께였다.

학관에서 공부할 때는 물론이고 학관의 졸업을 앞두고 받은 마지막 임무도 함께였으니 근 십 년 가까이를 매일 소호의 얼굴을 보고 살을 부대끼며 살아온 셈이다.

은자촌에서는 사부나 어르신들과 함께였고, 그곳을 나와서는 추룡 ‘숙부님’을 만났다.

늘 누군가와 함께였던 삶.

누군가에게 무언가를 배우던 시간들.

그리고 비로소 그 숙부님과도 따로 떨어진 지금, 마침내 조서인은 자신이 이 넓고 광활한 세상에서 홀로된 존재임을 깨닫는다.

그 기분은, 솔직히 말하자면 썩 나쁘지가 않았다.

‘팽 소저가 혼자 가는 걸 이해해 줘서 다행이네. 그래. 혼자 오길 잘했다. 내가 내 의지대로 무림 강호를 걷고 있구나!’

혼탁한 먼지 폭풍 속을 걷고 있는 것은 오로지 조서인 혼자다.

나아갈 것인가 되돌아갈 것인가.

남의 눈치를 볼 필요 없다.

그의 의지대로 나아가며, 그의 뜻대로 걸음을 조절할 수 있다.

유백담을 돕기로 결정하고 이렇게 일면식도 없던 사람과 비무를 하러 가게 된 것 또한 오로지 조서인의 결정이었다.

팽자연은 다른 방면에서 유백담을 돕겠다고 말했다. 마지막까지 유백담과 티격태격하긴 했으나 그래도 이왕 돕기로 했으니 설마 쓰러뜨리고 팽가로 압송하진 않을 것이다. 그렇게 믿고 있다.

히히힝―.

뿌연 흙먼지 너머에서 말발굽 소리와 함께 몇 사람이 다가왔다.

서로의 얼굴을 알아볼 수 있을 만큼 가까워졌지만 그들은 조서인을 보고도 놀라지 않았다.

“조서인?”

빼빼 마른 몸.

온몸이 흉터투성이인 데다 눈빛이 깊고 날카로운 섬뜩한 인상의 사내다.

호흡도 길고 느껴지는 무형기도 날카로웠다.

그는 유백담이 언덕 위에서 설명했던 철풍단의 서열 이 위 철풍비객 비령이었다.

“우릴 만나고 싶다고 서찰을 보낸 게 너냐?”

비령은 말 위에서 내려오지 않은 채 깨끗한 서찰 하나를 손에 쥐고 흔들었다.

‘유백담이 보냈구나.’

이름을 어떻게 알고 있나 했더니 미리 서찰을 보낸 모양이었다.

조서인은 주변을 살폈다.

묘한 분위기가 흐르고 있었다. 흙먼지 때문에 시야가 흐리긴 한데, 비령과 그 뒤의 철풍단 무인 세 사람이 조서인을 경계하는 것이 보였다.

“내 이름은 조서인이 맞습니다. 철풍비객 비령에게 한 수 배우기 위해 왔지요.”

“그래?”

“비무는 여기서 하시겠습니까?”

조서인은 등 뒤에 비스듬히 매고 있던 은자창을 뽑아 양손으로 붙잡았다.

싸움의 준비는 언제든 되어 있다.

싸움에 이런저런 조건을 달아서야 절정 고수로서의 자격이 없다.

뒤쪽의 수하 세 명이 함께 덤빌 경우도 이미 상정해 뒀다.

“힘도 좋은 놈이군.”

헌데 비령은 싸울 생각은 않고 비웃듯이 피식 웃더니 조서인을 가소롭다는 듯이 바라봤다.

“나랑 비무를 하겠다? 곧바로 철풍단의 서열 이 위인 나와?”

“안 됩니까?”

“안 될 건 없지. 외부인이 축제에 참가하겠다고 해서 어떤 놈인가 싶었는데 제법 배짱이 좋은 놈이었군.”

이유는 모르겠으나 비령은 조서인이 꽤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흉터투성이 얼굴로 씩 웃는 모습에선 조서인에 대한 호감마저 느껴진다.

근데 비령의 그런 호의가 조서인의 머릿속에 경종을 울렸다.

‘잠깐, 축제라고?’

무언가가 잘못되었음을 깨달았으나 분위기는 이미 걷잡을 수 없게 흘러가고 있었다.

조서인은 다급하게 물었다.

“축제라니? 저는 비무를 원할 뿐입니다.”

“그러니까 축제에 참가해야지.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서찰에는 축제에 참가시켜 주지 않으면 철풍단 전원을 쓰러뜨려서라도 참가하겠다고 협박을 했으면서.”

“……예?”

“왜? 이제야 겁이 나는 건가? 그럼 늦었다. 네놈은 이미 우리 철풍단의 축제에 참가했어.”

비령은 마치 자신이 대장군이라도 된 것처럼 호방하게 웃으며 말머리를 돌렸다.

조서인은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듯했다.

‘유백담 이 인간. 무슨 짓을 한 거야? 오늘은 축제 전날이라 조용히 비령이랑 비무만 해 달라며?’

거센 바람과 함께 흙먼지가 옆으로 쓸려 날아갔다.

시야가 넓게 확보되자 호리병 처럼 넓은 분지에 이미 잔뜩 모여서 자리를 잡고 앉아 있는 철풍단 마적들이 보였다.

그들은 자신들의 파벌에 따라 크게 세 갈래로 나뉘어 앉아 있었는데 그 수가 수백에 달했다.

비령은 당연하다는 듯이 조서인을 데리고 그 중앙을 가로질렀다.

분지의 정중앙에는 거대한 모닥불을 피울 만한 목재들이 과장 좀 보태서 작은 언덕만큼이나 크게 쌓여 있었다.

탁자 위에는 돼지 한 마리를 통째로 구워 만든 먹음직스러운 요리가 올라와 있고, 그 곁에는 철풍단의 간부들로 보이는 거친 사내들이 어깨를 깃털로 장식한 채 결연한 분위기로 앉아 있었다.

조서인은 그제야 깨달았다.

철풍단은 오늘 축제를 한다.

누가 봐도 축제를 한다는 걸 알 수 있을 만큼 명백했다.

‘유백담에게 완전히 속았구나. 이걸 보라지. 축제 준비가 다 되어 있잖아? 오늘은 축제 전날이 아니라 축제를 하는 날이야!’

사람이 너무 어이가 없으니 화가 나는게 아니라 웃음이 나왔다.

우연?

그럴리가 없다.

유백담이 그 의뭉스러운 얼굴로 눈을 찡긋거리며 웃는 표정이 눈앞에 선했다.

앞서가던 비령은 조서인이 실소하는 모습을 보고 무슨 생각을 했는지 더욱 흡족하게 웃었다.

“단주! 오랜만에 철풍단의 축제에 참가하고 싶어하는 외부인이 찾아왔습니다! 가장 먼저 나랑 비무를 하고 싶다고 말할 정도로 대찬 놈이오!”

비령의 목소리는 의외로 낭랑해서 분지 안에 모인 수백 명의 사내들이 다 들을 수 있을 정도였다.

조서인은 그제야 태사의에 앉은 철풍단의 단주를 직접 눈앞에서 볼 수 있었다.

앉아 있는 의자도 큰데, 의자에 앉은 사내는 그보다 훨씬 큰 거구 중의 거구였다.

손바닥이 사람의 머리통을 사과처럼 붙잡을 수 있을 만큼 컸다.

이렇게나 날씨가 흐린데도 빛을 반사시키는 매끈한 대머리에, 옆머리와 뒷머리만은 길게 자라서 뒤로 땋은 전형적인 북쪽 오랑캐 머리를 하고 있었다.

눈은 퉁방울처럼 튀어나왔고 코는 뭉툭, 입술은 두꺼워서 고집스러운 인상이다.

호랑이 가죽을 통째로 걸친 것같은 옷을 입고 있는데, 가장 중요한 건 그의 무공이 조서인 입장에서 승부를 장담하기 힘들 만큼 강해 보인다는 점이다.

‘하북에서 대적할 자가 없다더니. 허언이 아니었구나.’

하북팽가에 도신과 도왕이 다 있기에 허풍이라 생각했건만, 직접 보니 오히려 그 평가가 모자란 바가 있다고 느껴졌다.

철풍쌍도 막지관.

그는 막강한 존재감을 뽐내며 불쾌한 내심을 드러냈다.

“그런 건 아무래도 좋다. 그보다 나는 너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 비령.”

“무슨 일입니까?”

“왜 그런 여자를 내게 보냈지?”

“뭐라고요?”

비령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다 늙어서 아이도 낳지 못할 것 같은 여인이다. 그런데 자신을 경국지색의 미녀처럼 생각하더군. 도대체 무슨 뜻으로 내게 그런 여자를 보낸 거지?”

‘어?’

조서인의 머릿속에 서왕모의 복숭아를 먹은 여인이 떠올랐다.

‘설마?’

철풍단 단원들의 시선이 막지관과 비령 사이를 왕복했다.

“다 늙은 주제에 주제도 모른다는 말을 하고 싶었나? 나를 평소에 그렇게 생각했던 거냐, 비령?”

“단주, 이 좋은 축제날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요? 그 여자는 마가촌 제일 미녀라서 보냈을 뿐이오.”

“그렇게 말할 줄 알았지. 마가촌 제일 미녀라고? 지나가던 개가 웃겠군. 비겁하구나. 사내답지 못한 처사다, 비령. 차라리 당당하게 내 앞에서 말해! 이제 자리에서 내려올 때가 되었다고 말이다!”

비령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수치심과 분노로 그는 몸을 떨고 있었다.

“오해는 둘째치고……. 그런 잡스러운 이야기를 지금 이 자리에서 해야만 하겠소? 이 좋은 축제날, 단원들이 모두 보고 있는데?”

“못할 게 무엇이냐! 내가 철풍단의 단주다! 누구의 눈치를 보란 말이냐!”

탕!

막지관이 분노를 담아 태사의를 내리치니 오른쪽 손잡이가 뚝 부러져서 아래로 떨어졌다.

부러진 손잡이는 마치 비령의 마음과도 같았다.

“단원들 앞에서 날 이렇게 욕보이다니. 정말로 나와 연이라도 끊겠다는 것이오?”

“연을 끊겠다?”

“말했듯이. 마가촌 제일의 미녀라서 단주에게 보냈을 뿐이오. 북쪽 유목민 출신이라 그런거요? 도대체 여색을 밝히면서 만족하는 법이 없질 않소?”

마침내 비령의 입에서도 공격적인 말이 나오자, 막지관은 기다렸다는 듯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드디어 본색을 드러내는구나.”

“뭐하자는 것이오? 기어이 철풍단을 갈라놓아야 겠소?”

“갈라놓다니. 무슨 소릴. 내 자리를 노리는 자를 쳐 죽일 뿐인데.”

“내가 언제 단주의 자리를 노렸소?”

“아니라는 건가?”

“아니오.”

막지관과 비령이 서로를 노려보며 불안한 분위기를 조성했다.

“그럼 비령은 모르고 한 일이니 저딴 여자를 보낸 건 마가촌이 나를 모욕한 셈이군? 그럼 마가촌 놈들을 다 잡아 죽이면 되나?”

막지관은 당장이라도 자신의 쌍도를 뽑아 들 것처럼 위협적이었다.

그 말에 반기를 든 건 비령이 아니었다.

철풍단을 삼등분하고 있는 세 개의 세력 중 하나.

서열 삼 위, 비정혈검 맹자승이 벌떡 일어나 막지관에게 소리쳤다.

“그게 무슨 미친 소리요, 단주? 마가촌이 어떤 곳인데. 우리 철풍단에 마가촌 출신이 얼마나 많은지 몰라서 하는 말이오?”

맹자승이 자신의 혈검을 언제든 뽑을 것처럼 위풍당당하게 소리치자, 그의 수하들이 기가 살아났다.

실제로 맹자승의 수하들 중에는 마가촌 출신이 많았다.

손목과 발목에 비구를 차고, 허리춤에는 단검을 여러개 매달고 있는 사내.

마가촌 촌장의 아들 마광도 그 중 한 명이다.

그는 목에 핏대를 세우며 맹자승을 응원했다.

“마가촌엔 죄가 없소! 종려가 얼마나 예쁜데!”

“옳소!”

“종려는 미인이다!”

마가촌 출신들이 입을 모아 응원하자, 나머지 철풍단 사내들도 어리둥절해졌다.

옛말에 삼인성호(三人成虎)라고 했다.

세 사람만 입을 모아 호랑이가 있다고 하면 없던 호랑이도 있는게 되어 버린다는 뜻이다.

하물며 마가촌 사내들 수십이 미녀라고 소리치는데 어찌 안 믿을 수가 있겠는가.

“이놈.”

막지관이 호랑이 같은 기세로 마광을 노려봤다.

“내가 거짓말을 했단 소리냐?”

맹수가 이를 가는 듯한 목소리였다.

마광은 막지관을 보며 안색이 창백해졌으나, 가슴의 호심경을 만지작거리며 용기를 되찾았다.

그의 앞을 묵묵히 지켜 주는 서열 삼 위 비정혈검 맹자승 또한 그에게 용기를 주는 존재다.

그는 크게 숨을 한 번 들이쉰 뒤 당당하게 소리쳤다.

“그렇소! 단주는 거짓말쟁이요! 게다가 마가촌을 다 죽이겠다니. 제정신이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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