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권 18화
제37장 비무첩래(比武牒來) (18)
설마 일이 틀어진 게 아닌가 하는 불안감이 그녀를 엄습했다.
“이럇!”
팽자연은 주변을 경계하는 맹호도대를 내버려 두고 혼자서 먼저 박차를 가해 말을 내달렸다.
“아가씨, 잠깐 기다리셔야……!”
“됐다.”
팽자겸은 그녀를 만류하려는 맹호도대의 사내를 제지한 뒤 직접 그녀의 뒤를 쫓았다.
호리병처럼 생긴 좁은 지형 안으로 들어서는 그녀를 막아서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철풍단에는 경계병이 단 한 명도 없는걸까?
불안감을 갖고 말을 달려온 그녀는 너무나 놀라서 황급히 말고삐를 잡아챘다.
히히힝―.
그녀는 당황하여 울부짖는 말을 달래 줄 정신도 없었다.
“이럴수가.”
팽자연은 당황해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집채만 한 모닥불이 활활 타오르는 커다란 분지 안. 철풍단으로 보이는 백여 명의 사내들이 하나같이 쓰러져서 신음하고 있다.
사내들의 상세는 제각각이었다.
뼈가 부러지고, 찔리고, 베여서 바닥을 꿈틀거리는 자들이다.
사망자는 없는 듯했다.
확신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쓰러진 자들은 모두 몸을 꿈틀거릴 생명력은 남아 있는 상태다.
상대를 죽이지 않고 전투 불능으로 만드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는 무인이라면 다 알고 있다.
팽자연은 모닥불을 중심으로 잔뜩 쓰러진 사내들의 모습이 거미줄에 날벌레가 잔뜩 걸려 있는 것과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쓰러진 모두는 먹잇감.
포식자는 단 한 사람뿐이다.
모닥불 옆.
온몸에 피와 먼지를 뒤집어쓴 채 뜨거운 숨을 뿜어내는 한 사내를 본 팽자연은 심장이 멎어 버리는 것 같은 전율을 느꼈다.
“저게 정말 조 공자인가?”
어느새 곁으로 다가온 팽자겸도 팽자연과 똑같은 생각을 한 듯했다.
용맹무쌍한 하북팽가의 장자마저도 질린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 모두를 혼자서……?”
하북엔 아직 잘 알려지진 않았으나, 사실 팽가의 수뇌부가 위험하다 판단하여 주목하고 있던 자들이 철풍단이다.
“철풍쌍도 막지관, 철풍비객 비령, 비정혈검 맹자승.”
팽자겸은 자신이 아는 철풍단 절정 고수들의 이름을 나직히 읊조렸다.
“그 쟁쟁한 자들을 다 쓰러뜨리려면 맹호도대가 다 나서도 출혈을 감수해야 하거늘. 그걸 단신으로……?”
팽자겸은 감탄했다.
“낙일지협이 천하를 위진하더니 과연 그럴 만하다.”
팽자겸의 뒤로 주변 경계를 끝낸 맹호도대가 속속 도착했는데 그들의 반응도 팽자겸과 그리 다르지 않았다.
경악, 충격, 감탄의 감정이 모두를 휩쓴다.
한편 조서인은 팽가의 인물들이 등장했음에도 그들을 알아챈 것 같지 않았다.
멍한 눈빛.
어딘가 도취된 듯 초점이 멀어진 시선으로 무심하게 자신의 상처만 돌볼 뿐이다.
조서인은 금창약을 바르고, 찢어진 상처를 천으로 감는 행위를 반복했다.
그사이 바닥에 쓰러져 있던 철풍단 사내 세 명이 갑자기 벌떡 일어나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조서인에게 달려들었다.
“조 공자! 위험해요!”
팽자연의 경호성은 한발 늦었다.
철풍단의 사내들은 조서인과 가까운 곳에 있었고, 모두가 한 손에 흉악한 무기를 들고 있다. 심지어 그중 한 명은 숯과 흙을 조서인에게 뿌리기까지 했다.
흙덩어리가 퍽― 하고 터져 나간다. 뿌연 흙먼지가 조서인의 시야를 가렸다.
“안돼!”
팽자연의 절규와 함께 새빨간 핏물이 선연하게 뿜어졌다.
***
“후우. 후우. 스읍! 후우우.”
호흡은 흡기와 호기로 이루어져 있다.
흡기란 대자연의 기운을 몸안으로 받아들이는 하나의 작용이고, 호기란 몸안을 돌면서 탁해진 기운을 내뱉는 정화의 과정이다.
조서인은 호흡을 할 때마다 대자연과 ‘나’라는 존재가 소통함을 느꼈다. 건곤. 하늘과 땅을 이어 조화를 만들어 내니, 그것이 곧 조서인이라는 한 사람이 자연의 일부가 되는 과정이다.
검선일맥.
건곤조화신공은 그러한 무공이다.
퍽!
흙먼지가 터진다.
시야가 까맣게 흐려지는 것과 동시에 상처에 감은 천을 꽉 묶는 작업이 끝났다.
“스읍.”
조서인은 짧은 흡기를 취했다.
눈으로 보지 않아도 세 방향에서 각각 다른 동작으로 덤벼드는 세 사람이 느껴졌다.
조서인은 생각하고 행동하지 않았다.
이미 백여 번의 싸움을 거쳤다.
육신은 상처 입었고, 정신은 지쳤다. 하나하나 대응책을 고민하고 행동할 만한 여력은 없다. 마치 귓가에서 앵앵거리는 모기를 때려 잡듯, 살기가 느껴지는 순간 몸이 본능적으로 움직였다.
“후! 후우!”
짧은 호기 두 번.
몸의 일부 같은 은자창으로 좌측에서 덤벼드는 자의 무릎을 후려치고, 우측에서 덤벼드는 자의 복부에 창대를 꽂아 넣었다.
“끄악!”
“칵!”
숨 넘어가는 소리와 함께 두 사람이 휘청 넘어간다.
아직 한 사람 남았다.
뒤에서 덤벼드는 자.
하나 남은 적이 조서인의 뒤통수를 향해 칼을 내리쳤다.
창을 휘두르기엔 각도가 안 나온다. 시간도 맞지 않는다.
무릎을 얻어맞은 자가 맨손으로 창날을 잡고, 복부를 얻어맞은 자가 창대를 붙잡고 있었다. 필사적인 동작에서 창을 절대로 놓치지 않겠다는 의지가 느껴졌다.
창은 불가.
그렇다면.
조서인의 머릿속에 그 순간 한 가지 기억이 스쳐 지나갔다.
고민 따위는 없었다. 생각을 하기에 앞서 조서인의 몸이 회전했다.
왼손으로 품 안에 있던 전낭을 꺼내 그걸로 뒷목을 내리치는 칼날을 덥썩 붙잡았다.
푸욱!
까드득!
가죽 전낭이 뚫리고, 안에 있던 은자틈에 칼날이 낀다.
경악하여 부릅 뜬 사내의 얼굴이 보였다.
공수입백인.
칼날을 비틀며 손목을 튕겨낸다.
뻐억―!
조서인은 앞발을 끌어 올려 등각으로 사내의 명치를 올려찼다.
덜컥, 몸을 떠는 사내의 손에서 칼을 완전히 빼앗아 도끼로 내리치듯 상대방의 어깨를 내리쳤다.
“커헉!”
피가 치솟는다.
안색이 창백해진 사내는 숨을 꺽꺽거리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조서인은 그제야 마지막 숨을 가늘고 길게 내쉬었다.
“후우우우―.”
행위는 많았으나, 이 모든 일은 불과 한 호흡만에 일어난 일이다.
밖에서 보기엔 공격을 시도하던 자들이 거의 동시에 후두둑 쓰러지는 것처럼 보였을 터.
하나를 배우면 하나를 제대로 익히는 자.
시간이 지날수록 백전연마의 고수가 되어 가는 젊은 용이 이곳에 있다.
“으음.”
신음하는 세 사람을 일별한 뒤, 조서인은 그제야 팽가의 사람들이 분지에 도착했음을 알았다.
팽자연은 반가우면서도 놀란 얼굴이다.
도우러 온 것일까?
조심하라고 소리치던 여인의 목소리가 떠오른다. 그게 팽자연의 목소리였던 모양이다. 유백담의 계책일지, 아니면 팽자연의 판단이었을지 모르지만 어쨌거나 조서인을 도우러 왔다면 고마운 일이다.
팽자겸과 맹호도대의 사내들은 잔뜩 긴장한 얼굴이다.
조서인이 그들이 있는 방향으로 한 걸음을 내딛자, 깜짝 놀라 무기에 손을 가져갈 정도다.
‘왜 저렇게 긴장했지?’
조서인은 모른다.
주변의 참상을 만들어 낸 자신이 지금 어떤 꼴인지를.
피와 먼지를 잔뜩 뒤집어쓴 데다, 계속된 싸움으로 한껏 예민해진 기세가 팽가 사람들을 잔뜩 긴장시킬 거라고는 생각도 못하고 있었다.
조서인은 그들에게 다가가 인사를 할까 하다가 짧게 고개만 끄덕이는 것으로 끝냈다.
우선 아까부터 신경을 거스르는 기척부터 처리해야만 했다.
“이제 슬슬 나오는게 어떻습니까?”
조서인은 철풍단의 사내들 서너 명이 모여서 죽은 듯이 쓰러져 있는 곳을 창대로 쿡 찔렀다.
기절한 사내들은 신음만 흘릴 뿐 일어나지 못했다.
하지만 가장 아래쪽에 깔려 있던 한 사람은 달랐다.
움찔하며 잠시 침묵하더니, 들킨 것을 인정하고 슬그머니 일어섰다.
“어떻게 아셨소?”
철풍단의 복색을 입고 철풍단스럽게 두건을 푹 눌러써서 위장했으나 그는 유백담이었다.
그는 감탄했다는 듯이 웃으면서 능글맞게 되묻기까지 했다.
“대단하시오, 조 공자. 내가 독학으로 익힌 귀식대법을 찾아낸 이는 아직까지 단 한 사람도 없었거늘! 과연 낙일창! 철풍단을 홀로 무너뜨린 사내요!”
“왜 그랬어요?”
조서인은 이제 그의 화려하고 논점을 빗나가게 하는 화술에 흔들리지 않는다.
이미 경험했고, 그릇을 엿본 사내다.
유백담은 조서인의 시선을 피하면서 괜스레 호탕하게 웃었다.
“하핫! 무엇을 말하시는지 모르겠소.”
“왜 속였어요? 비령이랑 대련만 해서 쓰러뜨려 주면 된다면서요?”
“어허! 조 공자, 속이다니. 무슨 말씀을. 난 그저 살짝 등을…….”
“등을 밀어 줬단 말 따위는 하지 마세요. 마광이나 복숭아를 먹은 그 여인이면 몰라도 나는 등을 밀다 못해 절벽에서 민 거니까.”
마가촌의 아들 마광도 지금 조서인에게 얻어맞고 모닥불 근처에 기절해서 쓰러져 있다.
그 모든 싸움?
엄밀히 따지자면 눈앞에 있는 유백담 때문에 벌어진 일이다.
조서인은 보란 듯이 은자창을 땅에 쾅 내리찍었다.
유백담은 처음 만났을 때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의 조서인을 보며 크게 당황해서 식은땀을 흘렸다.
그는 항복한다는 듯이 양손을 들면서 털어놓았다.
“내가 거짓말을 한 건 아니오. 나 혼자였으면 그러려고 했소. 자기들 파벌끼리 싸우도록 슬쩍 등을 밀고……. 아까 보지 않았소? 이자들은 야만적이고 단순해서 자기들끼리 죽일 듯이 싸운다오. 그러고 나면 철풍쌍도도 좀 약해질 거니까. 그때쯤 내 명운을 걸고 한번 도전해 보자 하고 있었는데……. 아니, 떡! 하니 이렇게, 하늘에서 내려 준 것처럼 조 공자께서 나타나신 게 아니오? 이게, 이게 하늘의 선물이 아니면 무엇이오?”
유백담이 호들갑을 떨면서 감사하는 표정을 짓는 게 웬만한 경극배우 못지 않았다.
“그때 난 느낀 거요. 아아! 하늘이 돕고 있구나! 이거다. 이 정도면 위험을 무릅쓰고 철풍단을 장악하려 애쓸 게 아니라. 아예 토벌을 하자! 라는 생각이 들었들었소. 그…… 크흠! 조 공자, 그런 눈으로 보지 마시오. 솔직히 말하자면 지금 사태는 의외요. 이런…… 뭐랄까. 엄청난 사투는……. 내 계획이 아니었단 말이오. 난 철풍단을 지켜보다가 알아낸 게 있어서 그걸 명분 삼아 팽가에 도움을 요청했다오. 지금 저길 보시오. 팽가의 대공자와 맹호도대께서 친히 왕림해 주지 않았소? 저분들이 와 준 이유는 철풍쌍도 막지관이 적양문에서 얻은 양강신공을 배웠다는 사실을 내가 알아냈기 때문이오.”
조서인은 아지랑이를 일렁이며 뜨거운 기운을 뽐내던 막지관의 도법을 떠올렸다.
최근에 하북 무림에 진출했다고 소문이 자자한 적양문이 철풍단과 야합했다는 뜻이다.
하북 무림, 그중에서도 역사와 전통으로 패권을 쥐고 있는 하북팽가 입장에서는 마른 하늘의 날벼락. 아닌 밤중의 홍두깨나 다름없다.
하북팽가에서 다급하게 달려온 것.
유백담이 이렇게 계획을 변경한 것도 다 이해는 되는 일이다.
유백담은 조서인의 눈치를 힐끔거리며 헛기침을 해 댔다.
“어험! 원래대로라면 조 공자는 비령과 대련만 좀 하고, 철풍단의 주목을 받아서 시간이나 끌면 되는 일이었소. 그걸 위한 축제였고, 나는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하기 위해 이렇게 위험을 무릅쓰고! 나도 이런 모습으로 숨어 있었던 것이라오.”
자신도 위험했다는 것을 보여 주고 싶은 듯, 유백담은 흙투성이의 옷과 실낱 같은 상처를 가리키며 울상을 지었다.
“내 무공을 못 믿어서 막지관이라도 암습하려고 기다린 건 아니고요?”
“……어허! 무슨 말씀이오? 조 공자. 낙일지협의 소문이 자자한 조 공자의 무력을 어찌 못 믿겠소?”
말은 그렇게하지만 유백담의 시선은 정처없이 흔들렸다.
“잘 알겠습니다.”
유백담은 하북팽가에 어떻게든 능력을 인정받아야 하는 존재다.
철풍단이 적양문과 야합했다는 것을 알아채고, 막지관의 무공이 위험해졌다는 걸 알리는 건 큰 공이다.
하지만 그걸로는 부족하다.
팽가 직계 여식의 사위가 되려면 적어도 서열 삼 위 안의 절정 고수들 중 한 명의 목 정도는 필요했을 터.
그러니까 스스로 잠입해서 기다렸을 것이다.
최후의 순간을 위해.
만약 조서인이 실패할 경우, 수급을 취해 전공을 따내기 위해서 말이다.
‘타고난 책사구나. 유 공자, 이해는 되지만, 이렇게 이용당하고 나서 허허 웃어넘겨서야……. 스승님의 제자라고 말할 수는 없죠.’
마침 잘된 일이다.
어차피 조서인에게는 이뤄야 할 임무가 있었다.
“조 공자? 어어? 조 공자, 어딜 가시오?”
조서인은 뚜벅뚜벅 걸음을 옮겨 기절해 있는 철풍단의 서열 이 위, 비령의 품을 뒤져 서찰을 꺼내 들었다.
“그건……!”
서찰의 정체를 알아챈 유백담의 시선이 흔들린다.
조서인은 그 서찰을 유백담에게 내밀었다.
유백담이 몰래 작성해 철풍단에게 보낸 비무첩.
철풍단의 축제에 참가하겠다는 서찰을 본래의 주인에게 건네어 주니, 비무를 청하는 법도로는 부족함이 없을 터.
조서인은 낭랑하게 외쳤다.
“비무첩래(比武牒來)!”
유백담이 대경하여 주춤 물러섰다.
조서인은 피와 흙투성이, 처참한 몰골로도 가려지지 않는 정정당당한 기백을 뿜어냈다.
그는 명가의 기품을 담아, 정중한 자세로 유백담을 향해 포권을 취했다.
“하북 땅을 밟은 내 목표는 본래 하나뿐이었습니다. 창을 익힌 무인, 조서인이 유백담 공자에게 비무를 청합니다.”
간계에 능한 이는 정수를 당해 낼 수 없는 법이다.
심지어 지은 죄가 있으니 업보를 어찌할까.
궁지에 몰린 유백담이 그동안 익힌 수만 가지 계책을 떠올리며 이런저런 핑계를 궁리해 보았으나, 지금 눈앞에서 형형하게 눈을 빛내고 있는 젊은 용을 물러나게 할 방도는 도저히 떠오르질 않았다.
유백담은 결국 눈을 질끈 감으며 신음을 흘렸다.
“꼭, 나를…… 개 패듯이 패야 직성이 풀리겠소?”
“한 수 배우겠습니다.”
단호한 조서인의 대답에, 유백담은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며 검을 뽑아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