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풍운객잔 2부-447화 (576/686)

18권 19화

제38장 위명찬란(偉名燦爛) (1)

철풍단의 근거지에서 돌아오던 중 이야기가 어떻게 전달되었는지는 몰라도 하북팽가는 조서인을 극도로 정중하게 대접했다.

단순한 손님이 아니라 무림의 명숙을 대하듯 예와 성을 갖춘 대우여서 적응이 안 될 정도다.

팽가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대문이 활짝 열려 있었으며, 범처럼 용맹해 보이는 맹호도대의 호걸들이 일렬로 사열한 채 일제히 포권을 취하며 예를 표하기까지 했다.

조서인은 너무 놀라서 말에서 거의 고꾸라지듯 황급히 내려왔다.

처음엔 팽자겸을 향해 예를 표하는 줄 알았다.

그런데 다들 팽자겸에게는 짧은 포권으로 끝냈을 뿐, 오히려 조서인에게 길게 예를 표하는 게 아닌가.

“왜, 왜들 이러세요?”

철풍단 백여 명과 싸울 때는 눈 하나 깜짝 안 하던 조서인이지만, 이렇게 대대적으로 예를 받으니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조서인은 서둘러 이리저리 포권을 취해 답례했다. 팽가 사내들의 입가에 미소가 떠오른다. 팽자겸 또한 웃는 얼굴로 다가와 조서인을 만류했다.

“조 공자, 하북팽가의 호걸들은 뜨거운 사람들이오. 철풍단을 홀로 토벌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감격하여 저러는 것이니 너무 괘념치 마시오.”

“아니, 제가 뭘 그리 큰일을 했다고…….”

“허어.”

팽자겸은 호감 가득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자신을 낮추지 마시오. 우리 팽가에서도 예의 주시만 하면서 함부로 손대지 못하던 철풍단을 처리해 주었는데, 이렇게 본인을 낮춰서야 우리 입장이 어떻게 되겠소?”

“아……. 이야기가 그렇게 되나요?”

“그렇소. 조 공자는 대단한 일을 해냈소. 철풍쌍도 막지관 같은 고수가 있는 도적단을 홀로 싸워 모조리 쓰러뜨리다니.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지 않소? ”

팽가의 하인과 시비들이 다가와 조서인의 말을 끌고 들어가며 조서인을 안채로 안내했다.

“아버님과 조부께서 적양문과의 회담 때문에 안 계신 것이 안타깝소. 조 공자께서는 우리 팽가의 큰 손님이니 부디 이곳에서 격의 없이 편히 지내길 바라오.”

진수성찬이 가득한 식사를 대접받고, 자세한 이야기는 내일 하자면서 누가 봐도 귀빈들이 묵을 법한 큰 방을 제공받았다.

팽가의 식객들이 묵는 객채에서 가장 큰 방이었다.

“으음…….”

격세지감이라는 게 이런 걸까.

벼락출세에도 정도가 있지. 갑작스레 대우가 너무 달라지니 당혹스러울 지경이다.

“피곤하긴 한데…….”

시비가 떠다 준 따뜻한 목욕물로 몸을 닦고 있자니 철풍단과의 싸움으로 누적된 피로가 온몸을 덮쳐왔다.

눈이 자꾸만 깜빡거리고 머리가 무거워진다.

초점이 흐릿해진다.

조서인은 홀린 것처럼 푹신한 침상으로 다가가 머리를 대자마자 기절하듯 쓰러져 정신을 잃었다.

삐이이익―.

어디선가 매 울음소리가 들려온다.

조서인은 자신이 창문을 닫지 않았던가 의아해하며 살며시 눈을 떴다.

어스름한 달빛이 창틈으로 새어 들어오는 한밤중이었다. 활짝 열린 창밖으로 다소곳한 초승달이 은은하게 빛났다.

“깼냐?”

“컥.”

조서인은 괴상한 신음을 지르며 침상에서 튕기듯이 몸을 일으켰다.

어찌나 급하게 움직였는지 허리근육이 펄떡거린다.

온몸에 소름이 돋는다.

이 정도로 무방비했다니, 비정한 무림 강호를 떠도는 무인으로서 실격이다.

조서인은 침상 옆에 내려놓은 창을 붙잡고 허리를 구부정하게 낮춘 채 주변을 경계했다.

어스름한 달빛이 새어 들어오는 창틀 아래.

건장한 체구에 이국적인 옷을 입은 사내가 술병을 흔들고 있었다.

“숙부님?”

“오냐.”

추룡이었다.

목에 잠자리 날개 같은 오색빛깔 천을 두르고 목에는 은으로 만든 십자 목걸이를 찬 사내가 하북 땅에 둘 이상 있을 리가 없다.

조서인은 허탈해서 눈을 끔뻑거리다가, 문득 상황을 파악하고는 다시 한 번 놀랐다.

“아니, 대체 어떻게 들어오셨어요? 여긴 객잔이 아니라 팽가잖아요?”

“팽가면 뭐? 오히려 이렇게 지역에서 오랫동안 실세로 군림한 가문은 들어오기가 쉬워.”

“그래……요?”

“그래. 생각해 봐라. 하북에서 누가 감히 팽가에 몰래 침입하겠냐. 침입자가 웬만해선 없는 데다, 팽가의 사내놈들 성격 봤지? 진법 설치하고 함정 파 놓고 이런 걸 좋아할 것 같아?”

“그건…… 그렇네요.”

“그래. 그러니까 이렇게 허술한 거야.”

추룡은 별일 아니라는 듯이 손을 휘휘 내저었다. 그는 여유롭게 손을 뻗어 식탁에 남아 있는 음식 중에 고기 한 점을 집어 입에 넣고 우물거렸다.

“그래도 음식은 괜찮네. 좋은 숙수가 있는 모양이야. 과연 명가는 명가다.”

조서인은 헛웃음이 나왔다.

추룡은 정말 신기한 사람이다.

하북팽가에 몰래 숨어 들어오면서 저런 배짱과 여유로운 태도라니.

나이가 들면 자신도 저런 사람이 될 수 있을지. 저렇게 잘 익은 술처럼 향기가 깊은 사내가 될 수 있을지 참으로 궁금했다.

‘맛있어 보이네.’

아까 비몽사몽에 멍하니 조금 먹었는데, 푹 자고 나니 배가 더 고파졌다.

“비무 성공했다며?”

“예. 내일 말씀드리려고 했는데, 어떻게 아셨어요?”

“어떻게 알긴. 하북 전체가 시끌시끌하구만.”

“예?”

“낙일지협으로 유명한 낙일창 조서인 공자! 하북 경계에 있던 마적단 철풍단을 홀로 토벌하다! 철풍단의 단주 철풍쌍도 막지관은 북원의 잔당으로서, 한창때의 매화검수를 죽인 적도 있는 절정 고수! 하지만 무림의 신예 낙일창 앞에서는 속수무책! 추풍낙엽!”

경극 배우처럼 과장하며 말하는 추룡의 말에 조서인은 얼굴이 달아올랐다.

“아니, 그 이야기가 그렇게……. 으음, 벌써 그렇게나 퍼졌어요?”

“퍼지다뿐이냐? 지금 이 순간에도 술자리에서 무림 강호에 요만한 지식이라도 있는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서 그 주제로 토론하고 있겠지.”

추룡은 새끼손톱을 내밀면서 허헛, 소리 내어 웃었다.

“대체 어떻게…….”

“요즘 무림 강호가 조용하다 보니 주목을 좀 받기도 했고, 게다가 일이 묘하게 되어 버렸거든.”

조서인은 창을 내려놓고 추룡의 곁에 가서 앉았다.

식탁을 사이에 두고 술잔을 건네자 추룡은 자연스레 자신이 갖고 있던 술병을 기울여 술을 따라 주었다.

쪼르륵―.

잘 숙성된 오량액 특유의 쌉싸름하면서 향긋한 주향이 올라왔다.

“하북팽가에는 도신 팽무혁과 도왕 팽만식이 있다지? 그 사람들 여기 없지?”

“예. 팽자겸 공자가 그분들은 적양문과 회담을 하러 갔다고 했습니다.”

“그래. 몰랐는데, 그 회담이 북경에서 진행되고 있었더라고.”

“아…….”

“우린 직접 봤었잖아? 무림맹이 하북을 포기한 걸.”

“풍운객잔에서 말씀이시죠? 그랬죠. 적양문주는 흡족해하면서 돌아갔고요.”

한여름 태양의 뜨거운 열기를 사람 모양으로 압축해 놓은 듯한 사내가 적양문주 고흠이었다.

태양염왕.

극한의 양기를 뿜어 대는 염라대왕.

누가 지었는지 참 탁월한 이름이다. 맞서는 자는 그게 누가 됐든 비참하게 불에 타서 지옥으로 떨어뜨릴 것 같은 막강함을 지닌 초인이지 않던가.

‘숙부님은 그에 대항해서 무시무시한 살기를 끌어 올렸었고.’

조서인 입장에선 천재지변과도 같았던 그때의 상황을 잊을 수 있을 리가 없다.

추룡은 감탄하는 조서인을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술잔을 흔들었다.

“당연한 일이지만 적양문은 이참에 하북 무림 전체를 통제하려 할 테고, 원래 하북 무림에서 역사와 전통이 있는 하북팽가가 그걸 쉽사리 인정할 리가 없지. 서로 조건을 내밀고 한 치도 물러서지 않다 보니 회담이 벌써 십 일째 지연되고 있는 모양이야.”

“오오, 그렇군요.”

한 지역의 패권을 논하는 무림 거인들의 자리라니. 일개 애송이 무인인 조서인 입장에선 상상도 가지 않는 거대한 이야기다.

그야말로 별세계나 다름없지 않은가.

조서인은 신기해하면서 쌉쌀한 오량액을 입에 털어 넣었다.

“그런데 팽팽하던 그 회담의 줄다리기를 조서인이라는 갑자기 나타난 애송이가 뚝 끊어 버린 거지. 끊어 버린 정도가 아니라 그냥 상을 냅다 뒤집어 버렸어.”

“푸흡.”

마시던 술잔을 떨어뜨릴 뻔했다.

조서인은 당황하면서 입가에 주르륵 흘러내린 술을 닦아 냈다.

“제가 뭘 했다고요?”

“회담을 비틀어 버렸더라고.”

“회담을요? 제가요?”

아닌 밤중에 날벼락도 정도가 있는 법이다.

“그래, 인마.”

추룡은 그 모든 것들을 재밌어했다.

“제가 뭘…….?”

“철풍단 단주가 양강기공을 익혔다며?”

“아, 네. 분명히 그랬습니다. 칼을 분명히 막았는데도 손이 뜨거운 데다 옷이 자꾸 타서 신경이…….”

거기까지 말하고 나니 문득 떠오르는 기억이 있었다.

비무를 하기 직전에 유백담이 하던 말들이다.

“저분들이 와 준 이유는 철풍쌍도 막지관이 적양문에서 얻은 양강신공을 익혔다는 사실을 내가 알아냈기 때문이오.”

팽가의 맹호도대를 가리키며 열변을 토하던 유백담이다.

그때는 그게 그리 큰일일 거라 생각을 못 했다. 그저 철풍단과 팽가가 그렇게 엮였구나 하고 생각했을 뿐.

계속된 싸움에 지친 데다, 그때는 유백담에게 속은 것을 어떻게 갚아 줄까 고민하느라 딴생각은 조금도 못했다.

“이제 알았나 보네.”

“그…….”

조서인은 술 대신 옆에 있던 식은 차를 냅다 들이켰다.

“후우, 그게 그렇게 엮이는 일이었습니까? 그렇게 큰일이었어요?”

“적양문은 자신들이 무림맹주에게서 정당하게 얻은 권리로 하북을 가지려 할 뿐이니 순순히 복종하라는 입장이었고, 하북팽가는 너희들이 비겁한 술수를 쓰고 있는 거 다 안다, 이 사파 놈들아! 정당한 권리는 무슨, 하북은 원래 우리 거다! 이런 입장이었고.”

“아…….”

“무림 강호에선 좋든 싫든 명분이 있어야 해, 명분이.”

“싸우면 팽가가 힘들겠죠?”

“아무래도 그렇겠지. 그렇다고 적양문 입장에서도 무조건 힘으로 찍어누르면 체면이 안 살지. 그걸 명분으로 주변의 다른 정파들이 다 힘을 합해서 적양문을 적대시할 수도 있고. 그냥 악랄한 사도 무림 문파 하나가 아니라 위대한 사파의 종주가 되려면 그러면 안 되거든.”

“아…….”

“근데 팽가는 밀리고 있었지. 마냥 뻗대기에도 명분이 없거든. 적양문과 싸우자니 너무나 위험한 일이고 그렇다고 숙이고 들어가자니 자존심이 너무 상하고. 그런데 딱 좋게 어디서 명분이 뚝 떨어졌네?”

추룡이 웃으면서 젓가락으로 조서인을 가리켰다.

“적양문이 협약 전부터 몰래 하북에 수작을 부리고 있었다는 증거. 철풍단이라는 마적단에 무공을 건네줘서 팽가를 괴롭히려 했다는 살아 있는 증거를 누가 잡아 버린 거지.”

“그…….”

조서인은 약간의 억울함을 담아 하소연해 보았다.

“적양문한테 양강기공을 받았다는 건 유백담이 찾았는데요?”

“찾으면 뭐하나? 증거가 없는데. 그렇게 따지면 집집마다 금두꺼비 하나쯤은 다 갖고 있지 않아? 말로는 뭘 못해?”

“……결국 잡은 놈이 임자다?”

“그렇지.”

조서인은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도망쳤다가 유백담이랑만 비무를 하는 건데요.”

“내가 시킨 것도 그거였잖아? 어쩌겠냐, 그게 네 운명인걸.”

맞는 말이었다.

이제 와서 후회하면 어쩌겠는가.

그때로 돌아간다면 어차피 똑같이 철풍단 전원과 싸웠을 것을.

“숙부님, 상황이 많이 심각합니까?”

“난리 났지. 팽가에서 기세등등해서는 이것 봐라, 수작을 부리고 있었지 않느냐. 이러고도 네가 하북의 맹주가 될 자격이 있느냐? 하면서 난리도 아니다.”

“하…….”

“왜 팽가에서 이렇게 좋은 방을 주고 귀빈 대우하는지 알겠지? 대단하다, 조서인. 작게는 하북, 크게는 천하 무림의 향방을 뒤틀었구나.”

추룡이 박수를 치며 놀릴수록 조서인의 한숨은 깊어졌다.

“천하를 움직이는 무인이 따로 있는 게 아니다. 너는 무공은 천하를 논하기엔 아직 멀었지만, 네 무공의 여파가 천하를 움직인 것이야.”

“……제가요?”

“그래.”

추룡은 씩 웃으면서 술잔을 들어 올렸다.

“위명이 쟁쟁한 무인이 된 걸 축하한다, 조카야.”

“……숙부님.”

“내일부터 상당히 피곤해질 거야.”

추룡의 그 말은 마치 예언처럼 조서인의 가슴을 무겁게 내리눌렀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