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권 20화
제38장 위명찬란(偉名燦爛) (2)
“전혀 기쁘지 않아요. 어깨가 천근만근입니다.”
“천하의 무게가 느껴지냐?”
“숨도 못 쉬겠는데요? 원래 천하를 논하는 무인이 되면 이런 걸 짊어지고 사는 겁니까?”
철풍단의 단주를 쓰러뜨린 일이 그렇게나 큰일이 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조서인 입장에선 마른 하늘의 날벼락이며, 망망대해에 뚝 떨어져 버린 것처럼 난감한 상황이다.
다행히 지금 곁에 있는 추룡은 ‘천하’에 이르는 무인이 어떠한지 그에 대해 물어볼 만한 사람이었다.
그는 중원 무림에서 명성을 떨친 사람은 아니지만, 조서인이 보기엔 분명히 천하를 논할 만한 무인이었다.
무쌍귀 장기린의 의제.
최근에 사파 무림의 하늘이 되어 가고 있는 태양염왕과도 자웅을 겨뤄 볼 만한 무공을 지닌 사람이 바로 추룡이지 않던가.
‘서역에서 공주랑 결혼할 뻔했다고 했잖아? 추룡 숙부님 정도라면 보나마나 그쪽 천하에 명성을 크게 떨쳤을 거야.’
다행히 추룡은 조서인의 그런 질문에 딱히 부정하지 않았다.
“그런 놈도 있고, 아닌 놈도 있고.”
“아닌 사람도 있다고요? 부담감이 없을 수가 있습니까?”
“들고 있으니까 무거운 거지. 내려놓고 싶으면 내려놓으면 그뿐이다.”
추룡은 어깨를 으쓱하며 씩 웃었다.
“근데 그게 잘 안 돼.”
“……숙부님처럼 서역으로라도 떠나야 할까요?”
“견문을 넓히겠다는 목적도 아니고 부담감을 못 이겨서 떠나겠다고? 웃기고 앉았네. 거기는 뭐 쉬운 줄 알아? 까딱 잘못하면 길거리에서 목이 날아가거나 산 채로 활활 태워지는 나라야.”
“길거리에서 태운다고요? 사람을요?”
“다 그런 건 아니지만, 생각보다 저 윗분의 힘이 세거든.”
추룡은 머리 위를 손가락으로 쿡 찌르듯이 가리켰다.
천인? 황제를 뜻하는 걸까?
조서인은 이해할 수 없었다.
“아서라. 네가 누구의 제자인지 잊은 거야? 그 정도 무게는 감당해야지?”
“그렇……죠?”
“무게란 상대적인 거지. 혼자 떠메고 갈 것이냐? 아니면 여럿이서 함께 그 무게를 견딜 것이냐?”
“아……!”
“아까 말했듯이, 싫어지면 내려놓으면 돼. 방법은 네가 잘 생각해 보고.”
추룡은 조서인이 부담을 느끼는 것이 기쁜 듯했다. 그는 낄낄거리면서 품위 없게 웃다가 스리슬쩍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 어디 가십니까?”
“조카 놈도 실컷 놀렸겠다, 이제 숙소로 가서 제대로 자야지.”
“여기서 주무시지 않고요?”
“굳이? 괜히 팽가 애들 놀래키고 싶지도 않아.”
“아…… 하긴, 팽가 사람들로서는 아침에 못 보던 사람이 와 있으면 놀라긴 하겠네요.”
추룡은 돌아서려다가 뭔가가 떠오른 듯 아! 하고 소리를 냈다.
“해 줄 말이 있다. 네가 철풍단애들이랑 노는 사이에 널 찾는 사람이 있었어.”
“저를요?”
조서인은 선뜻 생각나는 사람이 없었다.
그를 찾는 사람이 누구일까?
은자촌? 추묵환이 있는 녹림수로맹?
아니면, 소호?
“금룡상회의 사람이라던데? 지금은 북경에 있다더라.”
“……처음 들어 보는데요? 금룡상회라고요?”
“그래. 금룡상회의 중요한 인물이라던데. 이름이 뭐라더라. 문주희? 그런 이름이었는데.”
쿵.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듯한 충격이 왔다.
아까처럼 술을 마시던 도중이 아니라 다행이었다. 뭔가를 입에 머금고 있었다면 반드시 품위 없게 뿜었을 거다.
그가 어떻게 잊을 수 있겠는가.
무산학관에서 입관 시험 때부터 이어진 인연.
귀밑에서 머리를 짧게 자른 소녀, 계산이 빠르고 영악하며 참으로 당찬 주작방의 여걸은 지금도 조서인에게 강렬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흐흣.”
입을 벌리고 멍하니 있길 잠시. 추룡의 시선이 따가웠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여유롭게 웃는 얼굴을 보니 울컥 화가 치밀었다.
“숙부님. 일부러 그러셨죠?”
가는 척 자리에서 일어선 것.
기억이 안 나는 척하면서도 슬쩍 이름을 흘린 것.
다 계획된 것이다.
조서인을 방심시켜 그 진실된 반응을 보려 했던 모양이었다.
“그래, 인마. 역시 보통 사이가 아니었군. 내가 금룡상회 사람한테 이름을 듣자마자 촉이 왔어. 이런 쪽으로는 내 촉이 틀린 적이 없다니까?”
“아뇨, 보통…… 사이죠. 그냥 학관 같이 다닌 동기니까 보통 사이인데…….”
“왜? 짝사랑이라도 했냐?”
조서인은 입을 꾹 다물었다.
“얼굴 빨개지는 거 봐라? 진짜네?”
“아, 아닙니다.”
“뭐야, 뭐가 아닌데?”
“짝사랑은…… 아니에요.”
추룡은 박장대소했다.
“크핫! 뭐야. 연인이었냐? 이상하다. 분명히 그런 알콩달콩한 거랑 넌 전혀 인연이 없는 느낌이었는데?”
“너무하십니다.”
“크하핫!”
“연인은 아닌데…… 짝사랑도 아니에요.”
“흐음.”
추룡은 다 안다는 듯 홀로 팔짱을 낀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네 맘 다 안다.”
“다 아십니까?”
“그래. 짝사랑은 아니었다 믿고 싶겠지. 그건 너무 아픈 경험이니까. 그럴 수 있어. 다 이해한다, 조카야.”
“……!”
전혀 모르고 있었다.
이 울컥하는 감정을 뭐라 표현해야 할까.
조서인은 너무 억울하면 사람이 사나워진다는 사실을 새삼 알게 되었다.
실망, 억울함, 분노.
지금이라면 짐승처럼 으르렁거리며 추룡을 물어뜯을 수 있다.
무공으로 싸우면 지겠지만, 그래도 손가락 정도는 깨물 수 있지 않을까?
“내 손은 왜 봐? 왜? 깨물게?”
놀랍게도 추룡은 조서인의 마음까지 읽는 모양이었다.
“하여간 아직 멀었어, 인마.”
“뭐가 멀었습니까?”
“퉁명스러운 거 보게? 소심하기까지 하네?”
추룡은 귀엽다는 듯이 껄껄 웃었다.
하지만 그는 이내 웃음을 그치고, 차분하고 진지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금룡상회에서 온 놈 말인데, 꽤나 다급해 보이더라. 널 만나고 싶어 하는 태도가 간절해 보였어. 그런 건 둘 중 하나다. 누군가가 잃어버린 연인이나 가족을 찾고 있든가, 아니면 널 통해서 벌어야 할 돈이 있는 거지.”
신랄하다?
그럴지도 모른다.
낭만이라고는 조금도 없는 이야기였으니.
하지만 추룡에게는 그와 비슷한 경험이 있는 듯했다. 아련한 눈빛과 진지한 목소리가 설득력을 더해 주었다.
“금룡상회로 갈지 말지 네가 결정해. 팽가에선 내일 바로 나오고. 오래 있어 봤자 소문만 점점 더 퍼져서 귀찮아질 거다.”
창문을 붙잡고 넘어가려던 추룡이, 이번엔 정말로 깜빡했던 것처럼 아차! 하고 소리를 냈다.
“조카야.”
“예?”
“잘했다.”
조서인은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다가 깜짝 놀랐다.
“전낭으로 칼날잡기도 쓰고, 배운 걸 다 써먹던데? 능글 맞은 놈한테 화술이랑 책략 좀 배우라고 보냈더니 그걸 너다운 우직한 실행력으로 박살 냈어. 의외였다. 합격이야.”
추룡은 그 말을 끝으로 조서인의 대답도 듣지 않은 채 훌쩍 창문을 넘어 사라져 버렸다.
조서인이 황급히 창밖을 내다봤지만 대체 추룡이 어디로 어떻게 움직였는지 보이지도 않는다.
암만 살펴도 기척이 느껴지지 않는 걸 보니 은신술도 수준급인 모양. 두 눈을 부릅뜨고 어두운 주변을 아무리 살펴봐도 헛일이었다.
“대단한 분이라니까……. 방치한 줄 알았는데 날 계속 보고 계셨네. 설마 처음부터 끝까지 다 보신 건가?”
삐이익―.
어디선가 매의 울음소리가 아련하게 들려온다.
“심란하게…… 폭탄만 떨궈 놓고 가셨네.”
조서인은 혼란한 마음을 붙잡고 한참을 서성이다 침상에 다시 몸을 눕혔다.
***
“벌써 간다니. 너무나 아쉽소. 밤새 술을 마시다가 호형호제를 하려 했거늘.”
떠난다는 말을 하자 팽자겸은 크게 아쉬워했다. 마치 혈육을 떠나보내는 것처럼 얼굴에 아쉬운 표정이 역력했다.
“이렇게 잘 대접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호형호제라니요. 저 같은 사람에게 과분한 일입니다.”
“저같은 사람이라니. 조 공자는 어제도 그렇지만 겸손함이 과하군. 비록 우리가 만난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으나 위기 상황에서 함께하고 내 여동생들을 크게 도와줬으며, 가문을 위협하는 적들을 쓰러뜨려 주었소. 마음 같아선 매제로 삼고 싶구려.”
아무렇지도 않게 슬쩍 흘리듯 하는 말에 조서인은 숨이 턱 막혔다.
바로 어제 추룡에게 놀림을 당하지 않았더라면 너무 놀라 딸꾹질을 했을지도 모른다.
‘팽가처럼 큰 가문에서 나를? 아냐. 예의상 하는 말이시겠지.’
조서인은 정중히 손을 내저었다.
“말씀만으로도 감사합니다. 비록 술은 함께 마시지 못했지만…… 다음번에 뵐 때는 형님이라 부르겠습니다.”
“아쉽구려. 나는 진심인데. 으음, 하긴 이런 일은 억지로 진행해선 안 될 일이지.”
“예?”
“하핫! 다음번까지 기다릴 필요가 뭐 있겠소. 서인 아우. 앞으로는 더욱 친하게 지내세. 팽가에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말해 주게.”
팽자겸의 첫인상은 호탕하면서 사납고 차가운 면이 있는 호걸이었건만. 어느 순간부터 지나칠 만큼 친근했다.
“그렇게하겠습니다. 자겸 형님.”
“하하핫! 새로운 동생이 생겼는데. 이렇게 좋은 날 술 한잔 마실 수 없다니. 지금이라도 하루, 아니 이틀만 더 있다 가지 않겠는가?”
“죄송합니다. 저를 급하게 찾는 사람이 있어서. 우선은 가 보고 일간 다시 한번 찾아뵙겠습니다.”
“알겠네. 약속한 걸세. 찾아가는 곳이 금룡상회라고 했던가?”
“예. 지금은 북경에 있다고 들었습니다.”
“금룡상회라면 지금 나라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드는 큰 상회일세. 온갖 지역에 온갖 방식으로 돈을 모으는 곳이지. 서인 아우와 어떤 인연이 있는지 알려 줄 수 있겠나?”
“무산학관에서 친하게 지내던 동기가 그곳에 있는 모양입니다. 급하게 저를 찾는다 하여 가 볼 뿐이라 금룡상회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렇군. 동기라…….”
팽자겸은 눈에 띄게 안도하는 기색이었다.
어째서일까.
금룡상회에 대해 그리 호의적이지 않은 듯했다.
“금룡상회는 우리 팽가와도 종종 볼일이 있는 곳이지. 그래서 말인데, 서인 아우. 내가 부탁을 하나 해도 되겠나? 물론 아우의 여정에 방해될 일은 아닐 걸세.”
“그렇다면 들어드려야죠. 어떤 일입니까?”
“북경으로 가는 길에 우리 가문의 사람 한 명과 좀 동행해 주게. 요즘 시대가 수상해서 걱정이 많은데, 아우와 함께라면 든든할 것 같군.”
“그분도 북경에 볼일이 있나 보군요?”
“그렇다네.”
“저와 동행하시는 숙부님께도 여쭤봐야겠지만 저는 좋습니다.”
“그렇게 말해 줄 줄 알았네. 내 동생도 아우의 숙부님께 많이 배울 수 있으면 좋겠군.”
“……예?”
그때쯤 기다렸다는 듯이 안쪽에서 한 사람이 말을 타고 나타났다.
푸른빛이 감도는 비단 무복을 입고 허리에는 얇은 유엽도 한 자루를 찬 미모의 여성이다.
머리는 깨끗하게 틀어 올려 옥비녀를 꽂았는데 하얀 목선이 드러나 대단한 매력을 발산했다.
팽가의 솔직한 소녀.
팽자연이다.
그녀는 환하게 웃는 얼굴로 다가와 조서인에게 다부지게 포권을 취했다.
“잘 부탁해요, 조 공자. 북경까지 어떻게 혼자 가나 했는데 조 공자랑 함께 가게 되어서 다행이네요.”
“아…… 예. 잘 부탁드립니다.”
얼떨떨하게 포권을 마주 받으니, 팽자겸이 짐짓 근엄한 목소리로 경고했다.
“자연. 나는 서인 아우와 서로 호형호제를 하는 사이가 되었으니, 너도 마땅히 오라버니를 대하듯 서인 아우를 대해야 할 것이다. 알겠느냐?”
“알겠어요. 그렇게 할게요. 그럼 어떻게 하지? 서인 오라버니라고 부를까요?”
조서인은 크게 당황하여 눈빛이 흔들렸다.
“조 공자로 추, 충분합니다.”
“싫어요. 서인 오라버니라고 부를래요.”
“……!”
“난 자겸 오라버니한테도 이렇게 대하거든요.”
팽자겸이 헛기침을 했다.
“어허! 서인 아우는 내 부탁으로 너와 동행해 주는 것이니 그에게 실례를 하지 말거라. 여정을 방해하지도 말고. 그럼 서인 아우, 내 동생을 잘 부탁하네.”
대체 어쩌다 이렇게 되었는가.눈뜨고 코 베인다는 표현이 이렇게나 잘 맞을 수 없다.
조서인은 당황하면서도 팽자겸과 그 주변의 배웅 나온 팽가 사람들에게 정중하게 예를 표했다.
“예. 북경까지 잘 동…… 동행하겠습니다.”
조서인과 팽자연은 극진한 예를 받으며 그렇게 팽가를 함께 떠났다.
추룡은 팽가에서 번화가로 향하는 길목에서 덩치가 산처럼 큰 말을 타고 기다리고 있었다.
거리가 점점 가까워질수록 조서인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는 팽가에서 내준 위풍당당한 흑마를 타고 있었고 바로 옆에는 순한 갈색 말을 탄 팽자연이 함께 하는 중이다.
무슨 말을 들을지 상상이 된다.
아니나 다를까.
가까워지자 추룡은 조서인을 놀리듯 씩 웃으면서 은근한 눈빛을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