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풍운객잔 2부-449화 (578/686)

18권 21화

제38장 위명찬란(偉名燦爛) (3)

“역시 내 촉은 틀리지를 않는군. 무서울 정도야.”

추룡은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조서인은 감격을 주체하지 못하고 몸을 부르르 떨었다.

저 말이 무슨 뜻인지 아는 사람은 조서인뿐이다. 팽자연은 대체 무슨 소린지 이해를 못하고 고개를 갸웃했다.

“할 수 있으면 해 보라고 하긴 했는데, 정말로 해 버릴 줄이야.”

추룡이 껄껄 웃을수록 조서인의 얼굴은 금방이라도 터질 것처럼 빨개졌다.

하북팽가에서 유백담에 대한 부탁을 하기 전, 분명 추룡은 그런 말을 하긴 했었다.

“혹시 연애를 할 수 있음 연애도 해 보고.”

“……예에?”

“젊은 남녀가 함께 여정을 떠나는데 정분이 안 날 수가 없지.”

조서인은 이마를 탁소리가 나게 치고 싶었다.

왜 이제야 이 말이 떠오르는가싶다.

말머리를 나란히 한 채 길을 가는 젊은 남녀라니. 밖에서 보기엔 누가 봐도 부부거나 연인으로 볼 게 분명했다.

“숙부님 강녕하셨습니까? 일을 마치고 지금 돌아왔습니다. 이쪽은 북경까지 동행하게 된 팽자연 소저라고 합니다.”

추룡이 히죽히죽 웃는 모습을 최대한 외면하며 조서인은 겉으로는 웃어른에 대한 공손한 예를 보였다.

팽자연은 크게 놀라면서 말에서 내려 추룡을 향해 정중하게 포권을 취했다.

“서인 오라버니의 숙부님이셨군요? 처음 뵙겠어요, 숙부님. 팽가의 장녀 팽자연이라고 합니다.”

허리를 굽히지만 자세는 바르고, 손끝의 각도 하나까지 범상치 않다.

포권이라는 것이 무인의 예라고는 하지만 그것도 팽자연이 하니 잘 어울렸다. 지극히 공손한, 명가의 기품이 듬뿍 묻어나는 인사였다.

“오라버니이?”

추룡이 또 한 건 잡았다는 듯이 웃으면서 조서인을 본다.

하여간 저 인간은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다고 생각하면서 조서인이 변명을 하려는 찰나였다.

“호칭이 너무 갑작스러우셨죠? 저도 부끄럽긴 하지만, 저희 큰오라버니와 서인 오라버니가 호형호제를 하는 관계가 되어 버리셔서, 사실 저도 아직 입에는 익지 않은 호칭이랍니다.”

조서인은 바람 소리가 날 정도로 급격하게 고개를 돌려 팽자연을 바라봤다.

이건 또 무슨 소린가.

분명히 출발할 때는 자기 입으로 먼저 서인 오라버니라고 부르겠다고 도발적으로 놀렸으면서, 이제 와선 부끄러운데 억지로 오라버니라 부르는 요조숙녀처럼 굴다니.

“반갑네, 팽 소저. 서인이의 숙분인 추룡일세. 조카 녀석이 소저를 곤란하게 만들었나 보군. 하여간 융통성이 없는 녀석이야. 내가 나중에 따끔하게 이야기를 해 둘 테니 소저는 너무 걱정하지 말게.”

“아뇨, 아직 부끄럽긴 하지만 저는 새로운 오라버니가 생겨서 너무 좋아요. 큰오라버니는 워낙 매사에 좀…… 어떻게 대해야 할 지를 몰랐거든요. 그런데 서인 오라버니는 늘 자상하게 챙겨 주니 얼마나 좋은지 몰라요.”

“내 조카놈이? 하핫, 우리 조카가 다 컸나 보군. 생전 처음 듣는 이야기야.”

“정말요? 저는 매번 들으셔서 지겨울 줄 알았는데.”

“이제부턴 많이 들을 것 같은 느낌이 들긴 한데……. 조카 놈이 팽 소저에게 어떻게 잘해 주던가?”

“그게 말이죠.”

추룡은 팽자연과 벌써 쿵짝이 잘 맞아서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눴다.

추룡은 어른스러운 매력이 있는 사람이었다.

너무나 자연스럽게 대화를 시작하며 별다른 격의 없이 상대를 대할 줄 알았다.

심지어 두 사람의 대화 주제가 조서인이다. 조서인은 대체 어찌해야 좋을지를 알 수가 없어서, 얼굴만 벌겋게 달아오른 채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가만히 서 있었다.

한참 대화를 나누던 추룡은 그런 조서인을 향해 툭 던지듯이 물었다.

“조카야. 그런데 정말로 괜찮겠냐?”

“예?”

“금룡상회에서 만날 사람이 있는데 팽 소저를 배웅하는 막중한 임무를 맡아도 괜찮겠어?”

문주희.

조서인이 무산학관에서 추억을 공유하고 있는 그녀를 보러 가는데 팽자연과 함께여도 괜찮냐고 묻는 것이다.

바꿔 말하자면, 여기서 지금이라도 거절을 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질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지금에 와서 어떻게 거절을 하고 보내……?’

조서인이 보기엔 이미 때늦은 질문이다.

팽가에서 팽자겸과 호형호제를 하고, 도저히 거절할 수 없는 상황을 만들면서까지 팽자연을 부탁해 왔다.

이제 와서 거절하고 돌려보낼 수야 없는 일이지 않은가.

‘게다가. 그녀는 오래전 일이고.’

무산학관의 여걸 문주희.

그녀의 기억은 강렬하지만 이미 삼 년이나 지난 일이다. 그녀의 소식은 몇 년간 듣지도 못했었는데 이제 와서 그녀를 과하게 신경 쓰는 것도 뭔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저는 괜찮을 것 같습니다.”

“그래?”

추룡은 별말 없이 고개를 끄덕인다.

눈치가 빠른 팽자연은 자신이 받아들여졌다는 것을 알고는 적극적으로 자신을 변호했다.

“저는 여정에 방해될 만큼 눈치가 없는 사람은 아니에요. 금룡상회와 안면도 있고요. 숙부님께서 걱정하시지 않도록 서인 오라버니를 잘 도울게요. 팽가의 사람들은 자기 앞가림은 다 하는 사람들이랍니다.”

팽자연은 부탁을 하면서도 비굴하지 않고 당당한 점이 신기했다.

추룡도 똑같이 느낀 듯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그런 건 척 봐도 알 수 있지. 팽 소저는 어디서 신세를 지거나 남에게 함부로 폐를 끼칠 사람이 아니야.”

“어머, 맞아요. 저는 신세 지는 걸 정말로 싫어해요. 어떻게 아셨어요?”

“연륜일세. 멋진 사내는 술과 같아서 나이가 들수록 그 속이 깊어지는 법이거든.”

씩 웃는 추룡은 조서인이 보기에 사내가 봐도 매력이 있었다. 이국적인 복장, 햇볕에 잘 그을린 피부, 까칠한 수염과 거친 흉터가 추룡이란 사내를 완성시키고 있었다.

“그럼 한동안 여정을 함께 하게 되었으니 잘 부탁하네. 조카를 단련시키는 중이라 가끔 뜬금 없는 일이 벌어질 수도 있지만 무가의 여식이니 이해해 주겠지?”

“물론이에요. 제가 여정을 떠날 때 큰오라버니가 숙부님께 많이 배우라고 분명히 말했어요. 혹시 저도 곁에서 한 수 배워도 괜찮을까요?”

“눈으로 배우는 걸 어찌 말리겠나. 팽 소저는 원하는 대로 하도록 하게.”

“감사해요.”

“그보다 큰오라버니라는 사람은 나를 어찌 알고 있나?”

“그게 말이죠…….”

팽자연은 팽가에서 벌어졌던 일들, 그리고 조서인이 팽자겸에게 설명한 자신의 상황을 반대로 추룡에게 설명해 주었다. 추룡은 때로는 웃고, 때로는 조서인에게 힐끔 눈치를 주면서 즐거워했다.

‘도대체 어쩌다 이렇게 된 건지 모르겠네.’

조서인은 당혹스럽고 어딘가 민망했지만, 재잘재잘 이야기하는 팽자연과 그런 그녀를 조카딸 보듯 보는 추룡을 보니 묘한 기분이 들었다.

나쁘지는 않다.

이런 여정도 괜찮을 것 같다.

***

“서인 오라버니. 오늘은 그 서역 검술 대련 안 해요?”

길가에서 노숙을 하는데도 늘 머리카락이 흐트러지지 않는 팽자연이 물어 왔다.

가만히 앉아 좌공을 수련하며 몸의 유연성을 높이던 조서인은 고개를 저었다.

“할 때도 있고, 안 할 때도 있습니다. 숙부님이 해야겠다고 판단하실 때 어느 장소에서든 갑자기 시작하시죠. 서역 검술을 처음으로 익혔을 때, 하남으로 향하는 배에서는 삼 일간 쉬지도 못하고 계속 대련만 한 적도 있습니다. 최근에는 자주 하지는 않아요.”

“그래요? 흥미롭네요. 배 위에서 가장 오래 하셨다니……. 제 생각에는 균형 감각을 기르기 위해 일부러 배를 선택하신 것 같아요. 흔들리는 배만큼 즉흥적인 체중 이동을 익히기에 좋은 곳이 없잖아요?”

“그렇죠. 잠시만 방심해도 휘청 몸이 넘어가니까 더욱 어려웠던 기억이 납니다. 숙부님은 그…… 물결에 따라 잠시 들썩이는 그 틈조차 놓치지 않고 파고드시거든요.”

“역시. 두 분이 어제 잠깐 대련하신 것도 말 위에서였잖아요? 그때도 범상치 않았어요. 말이 뒷다리로 땅을 박차는 그 작은 틈을 놓치지 않으시더라고요.”

“그걸 보셨습니까?”

“그럼요. 저도 무가의 여식인데요. 서인 오라버니가 팔목을 얻어맞고 목을 허용했잖아요?”

“부끄럽습니다. 다 익혔다 생각하면 항상 숙부님은 새로운 것을 선보이시니 이길 수가 없어요.”

팽자연의 눈이 반짝반짝 빛나는 데 조서인은 쑥스러워졌다.

진 것이 부끄러운 것은 아니다.

추룡은 당연히 그가 질 수밖에 없는 상대고, 조서인은 자신의 부족함을 찾으면 찾았지 승부를 탓하는 사람은 아니다.

그런데 어째설까.

팽자연이 승부를 지켜보고 자신과 같은 관심사를 표하니 기분이 싱숭생숭해진다.

“자연 누이는 서역 검술에 관심이 많은 것 같습니다.”

누이라는 호칭에 팽자연이 기분 좋은 얼굴이 되었다.

“그것도 그렇지만, 서인 오라버니와 그 환경에 대해 궁금한 거예요.”

“저를……?”

“철풍단을 홀로 다 쓰러뜨릴 만한 무공이 어디에서 왔나 싶었는데, 늘 이렇게 숨 쉬듯 무공을 접할 환경에서 살고 계셨구나 싶네요.”

“그건 팽가도 마찬가지이지 않습니까? 전에 식사 시간에도 칼을 잡고 있어야 하는 전통 같은 것은 저에게 큰 감명을 주었습니다.”

“어린 시절에는 그렇죠. 다 크고 나면 다른 데 신경 쓸 게 너무 많아져요. 다른 가문과의 관계, 예법, 관가와도 친해야 하고, 상가에도 얼굴을 내밀어야 하고, 팽가가 관리하는 땅에 사는 사람들이 누군지 파악하고, 공자 왈, 맹자 왈 하는 시서예화도 어느 정도 해야 하고……. 심지어 주판도 튕길 줄 알아야 한다니까요?”

팽자연은 내친김에 온갖 불만을 다 토로하는 듯했다.

뚱한 얼굴에 그간의 불만이 한 가득이다.

“큰오라버니도 대단하죠. 제가 앞서 말한 대부분을 저보다 더 잘하면서 무공까지 밤새워 단련하니까요. 누가 더 낫다고 하면 어렵지만……. 가끔 그런 생각을 해요. 혈혈단신으로 다른 건 일절 신경 쓰지 않고 무공만 익힐 수 있는 환경이 되면 얼마나 강해질 수 있을까? 하고요.”

팽자연은 “남들이 들으면 명가에서 태어나 축복받은 주제에 배부른 소리 한다고 하겠지만요…….”라고 말하며 씁쓸해했다.

조서인이 자신의 어린 시절을 떠올리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늘 술에 취해 있는 아버지, 입에 풀칠이라도 해 보기 위해 안 해 본 일이 거의 없는 조서인의 어린 시절, 괴로움의 마지막 종착지는 늘 무공이었고, 그 대가로 조서인은 잠자는 것조차 잊고 미친 듯이 수련하곤 했다.

그때마다 부러웠던 사람은 인근에 살던 신창양가의 사람들이다.

양가창을 수련하던 그 아이를 자신은 얼마나 부러워했던가.

좋은 아버지, 좋은 가문, 좋은 환경에서 받는 가르침들.

그런데 이제 보니 그런 위치에 있는 사람도 나름의 불편은 있는 모양이다.

“각자의 고충이 있나 봅니다. 사람의 일이란 직접 겪어 보지 않으면 모르는 것이군요.”

조서인은 새로운 것을 깨달았다.

이렇게 무공에만 집중할 수 있는 환경.

생각해 보면 모든 인생을 걸어 한 점만을 파고 들 수 있는 이 상황 자체가 축복임을 새삼 느낀 것이다.

‘더 열심히 해야 해. 작은 인정을 받았다고 만족해선 안 돼.’

조서인은 다시 한 번 마음을 다졌다.

목표는 소호.

자신은 언젠가 잘못된 길을 들어설지도 모를 친구를 억제할 그물망이 되기 위해, 좀 더 열심히 노력해야만 했다.

***

조서인은 자신이 팽자연을 동행에 ‘받아’ 주었다고 생각했는데, 북경에 들어가려 하니 오히려 그 반대였음을 깨달았다.

성곽을 지키는 관문의 병사들이 상대가 팽자연이라는 것을 알게 되자 검문은커녕 극진한 태도로 배웅을 해 주었던 것이다.

조서인과 추룡의 신분패는 검사를 하지도 않았다.

한 지역에서 백 년 이상 위세를 떨친 명가의 위력.

북경까지 퍼진 하북팽가의 영향력을 조금이나마 알 수 있는 대목이다.

팽자연은 제 집처럼 익숙한 태도로 두 사람을 금룡상회의 본점으로 안내해 주었다.

“금룡상회는 저희 가문과도 함께하는 일이 많아요. 주요 인물들과는 안면도 있고요.”

“으음, 자연 누이, 여기부터는 우리끼리 해도 됩니다.”

“아니에요. 제가 있으면 일이 더 쉬워질 거예요. 잠깐만 지켜보세요.”

금룡상회에서도 팽자연의 얼굴을 보자마자, 안쪽에서 사람들에게 지시만 내리고 있던 지부장급의 인물이 버선발로 뛰쳐나왔다.

“지부장님. 오늘은 제가 아니라 지인의 일로 왔어요. 서인 오라버니, 그러고 보니 지금껏 묻지를 않았네요. 어떤 분께서 오라버니를 찾는다고 했죠?”

추룡과 조서인이랑 있을 때와는 달리 금룡상회의 앞에서의 그녀는 명가의 여식답게 도도하고 고고한 모습이었다.

쩔쩔매는 지부장이 묘한 눈빛으로 조서인을 바라본다.

팽가의 직계 여식에게 오라버니라고 불리는 자가 어떤 자인지 그 값어치를 가늠하는 듯한 눈빛이다.

힐끔 옆을 보니 추룡이 웃음을 참는 듯했다.

조서인은 호흡을 가라앉히면서 최대한 아무렇지도 않은 듯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문주희라는 친구입니다.”

“……문주희?”

팽자연의 아미가 팍 찌푸려졌다.

미간을 좁힌 그녀가 눈빛으로 두 번, 세 번 되묻고 있었다.

진짜냐고.

정말로 찾는 게 문주희냐고 묻는 듯했다.

“……무산학관의 동기라면서요? 아! 동기는 맞겠네.”

팽자연의 분위기가 오묘했다.

눈이 점이 되어 버린 듯한 지부장이 잠시만 기다려 달라면서 어딘가로 뛰어가고, 잠시 후, 쿵쾅거리는 발소리가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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