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권 22화
제38장 위명찬란(偉名燦爛) (4)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 물어볼 걸. 찾는 사람이 여자라는 말은 안 했잖아요?”
팽자연이 나직하게 볼멘소리를 한다.
들릴 듯 말 듯, 교묘하게 조서인에게 들리는 혼잣말이다.
조서인은 크게 당황해서 어쩔 줄을 몰랐다. 도움을 구하고자 추룡을 쳐다보니 그는 이미 반쯤 고개를 돌린 채 어깨를 들썩이고 있었다.
‘하여간 숙부님,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웃기나 하고!’
도대체 어떻게 이 사태를 수습해야 하는가?
필사적으로 생각을 거듭했지만, 그런 걸 생각해 낼 수 있다면 그건 조서인이 아니었다.
우물쭈물하는 사이 최후의 변명을 할 수 있는 기회는 지나가 버렸다.
이 층에서부터 쿵쾅거리던 발소리가 계단을 통해 가까워진다. 가녀린 체구가 성큼성큼 계단을 뛰어내리다시피 하며 가까워졌다.
“아.”
조서인은 그녀를 보자마자 알았다.
문주희.
평범한 중원의 여인들과는 달리 귀밑에서 싹둑 잘라 버린 특이한 머리 모양과 사내처럼 펑퍼짐한 바지를 입은 모습은 여전했다.
키는 늘씬하고 허리는 잘록했으며, 깨끗한 얼굴 위 그리 크지 않은 눈이 반가움을 가득 담아 호선을 그리고 있었다.
“서인아!”
문주희가 조서인을 보자마자 크게 반가워하며 머리 위로 손을 흔들었다.
그 모습에선 지난 몇 년간 연락이 없었던 거리감 따위는 조금도 없다.
마치 몇 년 전 무산학관으로 돌아간 듯한 기분이 들었다. 아무런 걱정 없이 그저 무공에만 몰두하던 시절의 즐거운 기억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다.
“주희야.”
조서인은 마주 손을 흔들려다가 문득 옆에서 차가운 시선을 느끼고는 몸을 멈칫했다.
가슴 한편이 서늘해진다.
팽자연은 분명히 웃는 얼굴인데, 이상하게도 분위기가 시리도록 차갑다.
‘나, 뭔가 잘못했나?’
조서인의 혼란스러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문주희는 조서인만 바라보고 뛰어오다 그제야 곁에 함께 있는 팽자연과 추룡을 발견했다.
특히 팽자연을 발견하자 문주희의 표정이 바뀌었다. “아?” 문주희는 탄성을 내뱉으며 반가워했다.
“팽 소저! 팽 소저도 오셨네요? 어쩐 일이에요? 우리 만나기로 한 날은 아직 보름 정도 남았잖아요?”
“이번엔 안내해야 할 사람이 있어서 좀 일찍 왔어요. 문 소저는 언제 하북으로 왔어요?”
“삼 일 정도 됐어요! 안 그래도 제가 팽 소저한테 줄 선물이 있었는데 어떻게 알고 왔어요? 이번에 비단길 통해서 물건이 많이 들어왔어요. 하나같이 팽 소저가 좋아할 만한 것들이에요. 궁금하지 않아요?”
“어머나, 그것 참 흥미롭네요.”
놀랍게도 팽자연은 문주희와 안면이 있는 듯했다. 심지어 상당히 친분이 깊어 보였다.
문주희가 자연스럽게 팽자연에게 다가가려 했는데, 팽자연이 살짝 몸을 틀어 그녀와 거리를 둔다.
“응?”
문주희는 어린 시절부터 눈치가 매우 빠른 소녀였다. 그녀는 팽자연의 태도가 평소와 미묘하게 다르다는 것을 눈치챘고, 지금 그녀가 조서인과 함께 있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문주희의 눈빛이 처음으로 흔들렸다.
“혹시 안내해 줘야 한다는 사람이……?”
“여기 이분.”
팽자연이 살며시 조서인의 팔을 붙잡았다. 은어처럼 길고 하얀 손가락이 팔을 감아 오자, 조서인은 벼락이라도 맞은 것처럼 몸이 딱딱하게 굳었다.
“서인 오라버니가 무산학관의 동기를 만나야 한다고 해서 안내해 주러 따라왔어요.”
“……그래요?”
이번엔 문주희가 말을 잃었다. 마치 방심하고 있다가 허를 찔린 표정이었다.
반면에 팽자연은 얼굴에서 미소를 잃지 않았다. 미리 준비한 자와 준비하지 못한 자의 싸움은 이렇게나 차이가 컸다.
“무산학관의 동기라고 해서 누군가 했더니. 이제 보니 금룡상회 회주의 외동딸이었네요. 서인 오라버니, 진작 말을 해 주지 그랬어요? 문 소저랑 저는 어린 시절부터 얼굴을 보고 지냈어요. 보세요. 문 소저도 깜짝 놀랐잖아요?”
“그랬……습니까?”
놀란 건 문주희만이 아니다.
지금 이 순간 그 누구보다 깜짝 놀란 건 조서인이다.
‘문주희가 팽 소저랑 어릴 때부터 아는 사이였던 데다…… 금룡상회 회주의 딸이었어?’
무산학관은 각자의 가문이나 뒷배경에 대해 드러내 놓고 이야기를 잘 안 하는 분위기였다.
물론 처음엔 자신이 명문가의 후손이라면서 떠들던 사람도 있었지만, 가문의 이름을 내놓고 좋은 성적을 내지 못하면 오히려 부끄러운 일이었기에 차츰 출신을 언급하지 않게 되었다.
‘주작방에 있을 때부터 상재가 있다는 건 알고 있었는데……. 주희가 원래 상인 가문에서 태어났구나.’
설마 문주희의 가문이 이름난 거대 상회였을 줄이야.
“아아.”
침묵은 잠시.
충격을 받았던 문주희는 오래지 않아 평정심을 회복했다.
그녀가 누구던가.
홀로 무산학관에 들어가 끝내 주작방의 방장 자리까지 꿰찼던 여걸이다. 그녀는 영민한 눈빛으로 조서인과 팽자연을 번갈아 쳐다봤다.
그러고는 모든 것이 판단이 끝난 듯, 빙긋 웃으면서 팽자연에게 감사를 표했다.
“서인이는 제가 무산학관에서 가장 친하게 지내던 친구였어요. 바쁘셨을 텐데 팽 소저가 이렇게 직접 상회까지 안내해 줘서 고마워요.”
“문 소저가 고마워할 만한 일은 아니었어요. 서인 오라버니는 큰 오라버니랑 호형호제하는 사이인데, 이 정도는 해야 하지 않겠어요?”
“그러셨구나. 그래도 제 입장에선 금룡상회의 손님을 잘 안내해 주셔서 너무 감사해요. 그리고 서인아, 혹시 뒤에 계신 분도 일행이셔?”
그러고 보니 일행의 가장 큰 어른인 추룡은 소개하지도 않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고 조서인은 크게 당황했다.
“맞아. 여기 계신 분은 내게 숙부 되는 분이시고, 여정을 함께하면서 내게 많은 걸 가르쳐 주고 계셔.”
“그러셨구나. 인사가 늦었습니다, 숙부님. 무례를 용서하세요. 저는 서인이의 친한 친구인 문주희라고 해요. 무산학관에서 입관 날부터 친해져서 많은 걸 함께했어요. 그렇지, 서인아?”
“어, 응.”
꽈악.
팔을 잡고 있던 팽자연의 손길에 힘이 들어간다. 당황하여 살피니 팽자연은 웃는 모습 그대로 표정이 경직되어 있었다.
반면에 문주희는 사근사근한 얼굴로 추룡을 향해 예의를 갖춰 포권을 취했다.
“호오.”
추룡이 흥미진진하다는 듯 턱수염을 쓰다듬으며 눈을 빛낸다.
지금의 이 상황.
그리고 팽가의 여식과 대등한 기세를 뽐내는 여걸의 등장에 흥미가 동한 듯했다.
“반갑군. 난 추룡이라고 하네. 서인이와 친구라고 하니 편하게 대해도 되겠지?”
“물론이에요. 서인이는 제 일생의 친구이니 저를 부디 조카처럼 대해 주세요.”
“하핫! 화통하구만. 조카야, 네가 다른 건 몰라도 인복은 있는 모양이다. 여기 이 소저도 걸물이야.”
“별말씀을요. 걸물이라니. 몸 둘 바를 모르겠어요.”
문주희는 말로는 그렇게 하면서도 대담하게 눈을 빛내며 이번엔 팽자연을 향해 웃으며 물었다.
“팽 소저, 지금부터는 서인이와 이야기를 나눌까 하는데, 어떻게 하시겠어요? 접객실로 모셔서 차를 한잔할까요? 아니면 팽가로 돌아갈 수 있게 마차를 불러 드릴까요?”
팽자연이 미간을 좁혔다.
문주희의 말투는 얼핏 친절하고 사려 깊은 듯이 들리지만, 그 속뜻은 냉랭하기 짝이 없다.
즉, 조서인과의 대화에 끼지 말고 차나 한잔하든가, 아니면 그냥 지금 돌아가라는 축객령이 아닌가?
팽자연이 잠시 고민하다가 뭐라고 말을 꺼내려는 찰나였다.
추룡이 그건 아니라는 듯 앞으로 나서서 손을 내저었다.
“여기에 있는 팽 소저는 하북팽가를 대신하여 우리와 함께하는 중이고, 이번 여정에도 많은 도움을 주었네. 용무가 끝났으니 돌아가라고 하는 것은 예의가 아닌 듯하군. 별일 아니라면 합석하는 게 어떤가? 설마 서인이에게 팽가가 알면 안 되는 일을 부탁할 셈은 아니겠지?”
추룡은 심각한 사안을 마치 별일 아닌 것처럼 이야기하는 재주가 있었다.
아니면 어쩔 수 없지, 라는 듯한 태도지만 여기서 아니라고 하면 문주희 입장에선 금룡상회에서 팽가 몰래 뭔가 일을 꾸미고 있다고 자백하는 것과 다름없다.
“아…….”
“으음.”
팽자연과 문주희 모두 핵심을 찔러 버리는 추룡의 말에 감탄하였다.
두 사람의 신경전에 일침을 가한 것과 마찬가지니, 문주희는 곧바로 승복하고 고개를 숙였다.
“네, 숙부님, 제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팽 소저, 접객실로 함께 가 주시겠어요? 좋은 차를 대접할게요.”
“네. 비단길에서 온 물건들이 뭔지도 궁금하네요.”
암묵적인 휴전을 선언한 두 사람의 여걸들이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
추룡은 이어지는 상황들을 따라가지 못한 채 바보처럼 멍하니 있는 조서인의 옆구리를 손가락으로 쿡 찔렀다.
“조카야. 문 소저에게 금룡상회 좀 구경시켜 달라고 부탁해 보는 게 어떻겠냐?”
즉, 환영해 주어서 고맙다고 말하고 얼른 들어가자는 소리다.
이 자리의 주인공은 누가 뭐라 해도 조서인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주지시키는 말이기도 했다.
이미 금룡상회에서 일하는 자들이 힐끔거리면서 주목하고 있는 상황.
조서인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문주희에게 인사를 건넸다.
“오랜만이야, 주희야. 어…… 저기……. 금룡상회와 관련이 있는 줄은 몰랐어. 어서 들어가자.”
조서인의 순박하면서 어설픈 태도가 모두에게 호감을 준다.
문주희는 웃는 얼굴로 조서인과 추룡, 팽자연 세 사람을 위쪽의 접객실로 안내했다.
***
“그랬군요. 낙일지협의 일화는 들었었는데, 철풍단을 무너뜨리고 팽가를 도왔다니…….”
팽가를 돕기 위해 철풍단과 싸운 일에 대해 설명한 것은 조서인과 추룡이 아니고, 팽자연이었다.
그녀가 누구보다 신이 나서 조서인의 활약상을 이야기하니 정작 당사자인 조서인은 난감해져서 얼굴이 빨개진 채 묵묵히 차만 들이켰다.
그 후로도 팽자연은 철풍쌍도가 붙잡혀 온 일, 그리고 그 덕분에 팽가가 얼마나 큰 시름을 놓게 되었는지를 유려한 말솜씨로 설명했다.
이미 내부 사정을 추룡에게 들은 조서인이 듣기엔, 적양문에 관한 내용만 빼고는 대부분 정확했다.
“그랬군요. 그래서 팽 소저가 오라버니라 부르게 된 거군요.”
“여정을 함께하면서 많은 것을 배웠어요. 서인 오라버니는 분명히 무림사에 한 획을 그을 거예요. 큰 오라버니가 서인 오라버니에게 호형호제를 청한 것도 당연한 일이에요.”
“자연 누이. 그건 좀…….”
“왜요? 저는 확신해요.”
마치 자기 자랑을 하는 것처럼 뿌듯해하는 팽자연을 보며 조서인은 난감해졌다.
문주희는 고민하는 듯 보였다.
살짝 내리깐 눈.
긴 속눈썹을 처마처럼 늘어뜨린 채 고민하던 그녀는 크게 숨을 한 번 들이쉬더니 천천히 본래의 목적을 꺼냈다.
“서인아. 사람을 보내서 널 찾은 건……. 물론, 친구의 얼굴을 보고 싶은 이유도 있지만, 사실 우리 금룡상회에서 네 도움이 필요해서 그랬어. 결론부터 말하자면 우릴 좀 도와줬으면 해. 그에 대한 대가는 금룡상회에서 네가 원하는 걸 협의해서 대부분 들어줄 거야.”
본론이다.
조서인은 직감적으로 느껴졌다.
예전부터 그랬다.
문주희는 부탁이 있으면 그 대가를 제시한다. 돌려 말하거나 계책을 감추지는 않는다.
“어떤 도움이 필요해?”
“이건 아버님, 금룡상회의 회주께서 생각하신 일이야. 네가 알고 있는지 모르겠는데……. 최근에 천무련이라는 곳의 기세가 욱일승천하고 있어.”
“천무련…….”
“알고 있지?”
“……알지.”
“무림 문파와 상회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야. 그런데 우리는 섬서에서 실수를 하나 했고, 그 때문에 천무련과의 관계가 틀어졌는데 이게 갈수록 상황이 심각해지고 있어. 우리 금룡상회에선 돌이킬 수 없어지기 전에 그들과 협의를 하고 싶은데 이게 쉽지가 않네.”
문주희는 잠시 목을 한 번 축인 뒤 조심스레 부탁을 이어 나갔다.
“서인아, 난 네가 우리 금룡상회와 천무련 사이의 중재자가 되어 주었으면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