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풍운객잔 2부-451화 (580/686)

18권 23화

제38장 위명찬란(偉名燦爛) (5)

침묵이 감돌았다.

문주희의 말이 끝나는 순간 모두가 이 일이 쉽지가 않겠다는 것을 직감했다.

당찬 성격의 그녀가 고민하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사실 천무련과 금룡상회라는 두 이름만 들어도 웬만한 사람들은 손사래를 치며 도망칠 것이다. 거대한 집단 사이의 중재자라니. 그게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일 리가 있겠는가? 상대가 상대인 만큼 그 누구든 쉽게 받아들여선 안 되는 자리다.

‘그래도, 주희가 하는 부탁이니까……. 으음.’

조서인은 부탁의 무게감을 잘 알고 있었고, 그렇기에 더욱 진지하게 고민했다.

하지만 생각을 하면 할수록 가슴 한편이 불편해져만 갔다.

“금룡상회는 큰 곳이지? 그럼 인재도 많을 것 같은데, 굳이 내게 부탁하는 건 나와 소호의 친분 때문이야?”

문주희는 순순히 수긍했다.

“응. 맞아.”

“으음, 그러니까. 지금 금룡상회가 어떤 상황인지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결론적으로는 소호한테 가서 금룡상회랑 싸우지 말라고 해야 하는…… 그런 거지?”

“……비슷해.”

조서인은 머리를 긁적였다.

옆을 보니 추룡은 조언해 줄 생각이 없는 듯 어깨만 으쓱할 뿐이었다.

팽자연 역시도 함부로 끼어들 일이 아니라 생각했는지 골똘히 생각에만 잠겨 있었다.

‘이건 아냐.’

사실 상대가 문주희라서 고민을 좀 더 하긴 했지만 결론은 처음부터 정해져 있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주희야. 나는 너를 잘 알지만, 금룡상회는 잘 몰라. 내가 중재자 역할을 하는 건 이치에 안 맞는 것 같아. 미안하지만 거절할게.”

설마 이렇게 단번에 거절할 줄은 몰랐던 것일까.

문주희의 시선이 흔들렸다.

그녀는 아랫입술을 꽉 깨물더니 간절한 얼굴로 끈질기게 붙어 왔다.

“부탁할게. 우리에겐 너무 중요한 일이야. 이대로 포기할 순 없어.”

“주희야.”

“대가는 치르겠어. 뭘 원해? 돈? 앞으로 있을 무림행의 지원? 대궐 같은 큰집? 우린 네가 바라는 일의 대부분을 해 줄 수 있어. 금룡상회는 그 정도 능력은 있어.”

“문주희.”

조서인은 이런 문주희는 처음 본다고 생각했다.

간절하게 숨이 가빠진 가운데 또 한편으론 영민하게 손익을 계산하는 여걸이 눈앞에 있다.

극한 상황에 몰려 절박하기에 더더욱 계산에 몰두하는 듯한 얼굴이다.

바꿔 말하면, 그녀는 그 모든 것을 조서인에게 제공하는 것보다 더욱 큰 손해를 눈앞에 두고 있다는 소리다.

조서인은 탄식이 절로 나옴을 느꼈다.

“주희야. 뭘 두려워하는 거야?”

“…….”

“솔직하게 말할게. 나는 소호가 이유 없이 상대를 적대하지는 않을 거라 믿어.”

조서인과 소호의 우정을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무산학관에서 오랜 기간 백호방의 끈끈함을 보아 온 문주희는 그 누구보다 두 사람의 우정을 잘 아는 사람 중의 하나다.

그럼에도 이렇게 억지를 부리는 게 조서인이 머리로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었다.

“이유……. 이유는 있어. 하지만 그 때문에 우리 금룡상회가 사활을 걸어야 한다면 그건 어떻게든 막아야 하잖아?”

“사활을 걸어야 한다고?”

“그래. 지금 화해를 못하면 앞으로 십 년 이상 우리의 앞날이 불투명해질 거야.”

대륙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드는 상회라고 들었는데, 그런 금룡상회가 앞으로 십 수년의 앞날을 논한다.

천무련은 생긴 지 얼마 되지도 않은 단체다. 그 정도의 힘이 있었던가?

조선인의 머릿속이 멍해졌다.

“……천무련이 금룡상회를 공격이라도 하겠대?”

“차라리 그런 거면 좋겠네.”

문주희는 냉소를 띄웠다. 그리고는 아차 싶었는지 양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쓸어내리는 모습이 심히 허탈해 보였다. 그녀는 호흡을 가다듬으며 상체를 뒤로 뺐다.

“원래 난 상담(商談)을 이런 식으로 안 나누는데……. 나도 상대가 서인이 너라서 너무 솔직했던 것 같네. 제가 실수했네요. 불쾌하셨다면 죄송해요, 숙부님. 미안해요, 팽 소저.”

문주희는 조서인을 제외한 나머지 두 사람에게 정중히 사과의 뜻을 표한 뒤 담담하게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서인아. 넌 천무련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것 같아. 최근 정세가 어떤지 설명해 줄게. 소호는 예전에 우리가 알던 소호가 아니야.”

“그게 무슨 말이야?”

“소호가 비무행을 한 건 알고 있어?”

“비무행?”

전혀 알지 못했다.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조서인은 물론이고 추룡도 흥미를 느끼고 눈을 빛냈다. 팽자연만이 들은 적이 있는 듯 차분한 기색이었다.

“천무련이 안휘성을 완전히 장악하고, 섬서에선……. 종남파까지 완전히 협력 관계로 끌어들인 소호는 갑자기 비무행을 선언했어. 천무련의 깃발을 등에 업고 무작정 하남의 이름난 무림 문파들을 찾아가기 시작한 거야.”

“하남을……!”

하남이라고 하면 소림사.

소림사라고 하면 하남.

사실 소림사라는 걸출한 무림의 태산북두가 있어서 하남의 다른 문파들이 등한시되기 쉽지만, 알고 보면 하남에는 무공이 뛰어나기로 정평이 난 중소 문파들이 꽤 많았다.

옛말에 넘어진 김에 쉬어 간다고 하지 않던가. 자신의 무공을 증명하고자 소림사를 찾아간 호기 넘치는 무인들이 이왕 온 김에 눌러앉는 곳이 바로 하남이다.

심지어 숭산 인근은 소림사의 속가 제자 출신들이 만든 문파가 대부분이었다. 소림사 출신, 혹은 소림사에서 무예를 겨루고 싶어 찾아온 자들이 모여 있는 곳이 하남이다.

그런 곳의 무인들이 약할 리가 있겠는가.

“처음엔 복룡권(伏龍拳)으로 유명한 복룡권문의 문주가 현판을 내렸어. 이때 소호는 별다른 무공도 사용하지 않았다고 해. 천무의 깃발을 등에 매고 당당히 들어와서 비무를 신청하고, 묵묵히 복룡권 이십팔수의 초식을 다 받아 낸 뒤 마지막에 깔끔한 정권과 원앙각으로 승리했다고 하더라.”

“아…….”

조서인은 마치 그 자리에 있었던 것처럼 소호의 당시 모습을 선명히 떠올릴 수 있었다.

화려한 비단 무복. 금빛 영웅건을 쓴 소호가 당당하게 복룡권문의 문주를 쓰러뜨리는 모습이 눈에 선하다.

정권에 원앙각.

무산학관에서도 소호가 늘 사용하던 기본적인 무공이다.

이십팔수의 무공을 다 직접 받아 낸 것도, 그저 무공에 대한 호기심 때문이었으리라.

“문제는 그다음부터야. 강뢰각(降雷脚)으로 유명한 맹자방(猛者幇)에 가서 방도들을 복룡권으로 다 쓰러뜨려 버렸어. 같은 하남의 문파들이라 무공을 잘못 볼 리가 없었지. 처음엔 다들 의심했지만, 복룡권 이십팔수를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소호를 보고는 감탄을 금치 못했다고 해.”

“소호답네.”

호사가들이 소호의 재능 세 개를 가리켜 천무삼보라고도 하지 않던가.

소호가 그 뛰어난 눈으로 상대의 무공 비결을 한눈에 알아채는 건 그리 놀랄 만한 일도 아니었다.

문주희는 납득하여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맞아, 소호답지. 심지어 복룡권문의 문주도 맹자방의 강뢰각을 압도하진 못했는데, 정작 무공을 눈으로 익혀 간 소호가 복룡권으로 강뢰각을 이겨 버린 거니까.”

“그렇구나.”

그쯤 되니 조서인은 소호의 생각을 알아챘다.

“복룡권문에 맹자방. 거기서 끝나지 않은 거지?”

“친구는 친구네. 맞았어. 그게 시작이었어. 그다음은 서천검문(西天劍門)으로 가서, 하남 무림 최고수로 열 손가락 안에 들던 서천검을 상대로 강뢰각을 펼쳐서 제압했어. 강뢰각은 시의적절했고, 서천검법의 치명적인 조문들을 철저히 파훼했지. 비무가 끝나고 서천검문의 문주는 내 검술은 허점투성이였다고 외치면서 직접 무릎을 꿇고 현판을 부쉈대.”

전설 같은 이야기였다.

누가 들어도 그게 말이나 되냐며 코웃음 칠 이야기지만, 조서인은 그 이야기가 한 치의 과장도 없는 사실이라는 걸 너무나 잘 안다.

소호라는 사람.

하늘이 내린 무.

천무공자라 불리는 사내가 어떤 존재인지를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믿을 수 있는 일이었다.

“소호 혼자서 하남 무림을 뒤집어 놓았구나.”

“뒤집은 정도가 아냐. 하남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드는 무림 문파들을 차례차례 격파하는데, 정작 소호는 천무공자라 불리는 독문 무공은 쓰지도 않았어. 몇십 년이 넘게 서로 간에 엎치락뒤치락하던 하남 무공에 당해 버린 거야. 뻔히 아는 무공에 당해 버렸으니 다들 난리가 나지 않겠어?”

하남 무림인들의 반응은 뻔했다.

누가 누구보다 낫니, 누가 누구보다 강하니 떠들면서 순위를 정하는 건 무림인들의 숙명이었다.

“복룡권이 원래 강뢰각보다 뛰어났다느니, 서천검은 원래 강뢰각한테 안 된다느니 떠들면서 하남 사람들끼리 하루가 멀다 하고 서로 신경이 곤두서서 싸웠다고 하더라.”

“파격적인 행보인데……. 반발은 없었어?”

“당연히 있었어. 한 문파의 생명이나 다름없는 무공을 통째로 도둑질해 간다는 말도 있었고. 무공을 되찾아와야 한다고 오히려 무공을 뺏긴 문파들보다 더 난리를 쳤다더라.”

문주희는 숫제 질린 얼굴이었다.

“그런데 그런 언쟁도 얼마 못 갔어. 세 번째까진 그래도 무공 탓을 할 수 있었지만, 소호는 그걸로 하남에서 열 손가락 안에 꼽히는 문파들을 다 그런 식으로 꺾었거든. 그때 다들 깨달았지. 무공의 상성 문제가 아니고, 사람의 문제였구나! 하남 십대 무공 따윈 천무공자가 탐낼 필요조차 없었구나! 하고 말이야. 하남 사람들은 보통 사람들의 기준으로는 장소호라는 무인을 판별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지.”

“하하…….”

“그래. 헛웃음이 절로 나오지? 그쯤 되니 당연한 수순이었어. 깃발을 등에 맨 소호를 쫓는 사람들의 숫자가 수백에 달하고, 천무공자의 행보가 천하를 진동시키니, 이제 하남 제패까지 고작 한 걸음. 하남에서 천무공자의 무공에 무릎을 꿇지 않은 문파는 하나밖에 안 남았으니까.”

문주희가 말하는 문파가 어디인지는 아마 세 살짜리 아이도 알 것이다.

하남 무림의 상징.

무림 강호의 태산북두.

“하남표국을 통해 전달된 비무첩이 소림사에 전달되는 그 순간부터 온 천하 무인들의 시선이 다 소림사로 집중되었어. 소림은 승낙했고, 그 비무를 보기 위해 모여든 사람들로 숭산 입구는 전례 없는 인파로 인산인해를 이뤘어. 소호를 적대시하는 사람들, 그에 열광하는 사람들. 온갖 인파가 다 몰렸거든.”

“결과는?”

“하남 십대 무공을 한데 모은 것 같은 기묘한 무공으로 승리. 소호는 그걸 승천무(昇天武)라고 불렀어. 소림의 나한승들은 십팔나한의 나한진을 펼치고도 소호를 붙잡지 못했어. 대력금강장은 복룡권으로 박살 났고, 용조수는 강룡각에 힘을 잃었어. 마지막엔 소림사 계율원주가 금강장(金剛杖)을 펼쳤는데, 서천검법으로 선장을 두 동강 냈다더라.”

문주희는 목소리를 떨고 있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조서인은 그리 놀랍지 않았다. 소호는 그럴 만한 인물이니까.

‘역시 대단해. 어찌 그런 일을 할까?’

그 대범함, 뭐든지 실행하는 용기가 놀라울 뿐.

조서인이 아는 소호는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만한 재능을 지닌 인물이다.

그런데 문주희는 감상이 좀 다른 모양이었다.

“그래선 안 되는 거야. 하남 무림에서 소림사는 절대적인 신이었어. 무공으로도 역사로도 절대로 넘볼 수 없는 곳이었다고. 그런데 그걸 평생 열등감을 지니고 있던 하남 무림인들의 십대 무공을 써서, 정작 종주인 소림사의 무공을 보란 듯이 꺾다니. 하남 무림인들이 열광하는 것도 당연하잖아?”

상상이 된다.

평생 소림사는 넘을 수 없는 벽이라 생각하고 자신들끼리 무공을 겨뤄 왔는데, 갑자기 저 하늘 위의 소림사가 자신들의 무공에 무너진 것이다.

그들이 느낄 고양감.

끓어오르는 호연지기를 자연스레 상상할 수 있었다.

‘그리고, 적들도 많아졌겠지.’

눈에 띄는 자리는 그만큼 적이 생기는 법이다.

소호는 정중한 태도로 예의를 갖춰서 자신의 독문 무공으로 소림사와 비무를 했어야 했다.

그런데 그걸 뽐내듯이.

하늘이 내린 자신의 재능을 자랑하듯 자신의 것도 아닌 무공으로 소림을 무참히 꺾는다?

이건 능욕이다.

그 오만함.

자신에 대한 절대적 확신을 눈엣가시처럼 여기며 증오할 이도 분명히 생기리라.

“그날 복룡권문과 맹자방, 서천검문 같은 하남 무림 십대 문파들이 모두 천무련에 무릎을 꿇고 충성을 맹세했어. 소림도 천무련에 합류를 선언했고. 솔직히 이젠 인정해야 해. 지금은 천무련의 시대야.”

문주희는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그리고 그 천무련이, 우리 금룡상회와 척을 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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