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풍운객잔 2부-452화 (581/686)

18권 24화

제38장 위명찬란(偉名燦爛) (6)

그녀는 뭔가를 더 말하려다가 팽자연을 힐끔 보고는 입을 꾹 다물었다.

“오랜만에 만났는데 너무 일 이야기만 했네. 미안해, 서인아. 네가 섣불리 맡을 수 없다고 말하는 것도 이해해. 사실 그게 당연한 거니까. 바로 옆에 금룡상회에서 운영하는 객잔이 있는데 거기로 초대해도 될까? 내가 제일 좋은 방으로 준비하라고 말해 둘게.”

문주희는 사실은 집으로 초대하고 싶은데 참는 거라고 말하면서 다시 웃는 얼굴을 보여 주었다.

그들은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환담을 나누다가 금룡상회를 빠져나왔다.

문주희와는 나중에 객잔에서 다시 만나기로 하고 헤어졌다.

금룡상회에서 완전히 빠져나오자마자 팽자연이 표정을 굳히면서 조서인의 소매를 잡아당겼다.

“서인 오라버니. 방금 전의 대화는 잊어버려요. 문 소저의 부탁을 들어주면 안 돼요.”

“……어어, 음, 난 이미 거절했잖아요?”

“금룡상회가 쉽게 포기하지 않을 것 같아서 하는 말이에요.”

팽자연은 그 어느 때보다 진지했다.

그녀는 오뚝한 콧날 아래, 도톰한 입술을 일자로 다물어 다부진 표정을 지었다.

“거대한 문파 사이에 낀 중재자라는 건 쉽지 않은 자리예요. 보통은 머리랑 수염이 새하얀 명성 높은 노고수들이 하죠. 심지어 산전수전 다 겪은 그런 노고수들조차 발 한 번 잘못 디뎌서 누명을 덮어쓰거나, 졸지에 계략에 휩쓸려서 공범이 되기 일쑤예요.”

“중재라는 게 그렇게 무서운 일입니까?”

“당연하죠. 만약 일이 잘못 흘러가서 천무련이랑 금룡상회가 철천지 원수가 되면요? 금룡상회를 변호해서 중재하려던 서인 오라버니한테 원망이 쏟아질 텐데, 그 원한을 감당할 수 있어요?”

“어…….”

그게 감당이 될 리는 없다.

하지만 조서인은 선택에 대가가 따른다면 그건 피하지 않는 주의다.

“감당해야 한다면 해야겠지요.”

“……그러면 안 되는 거예요.”

팽자연은 감탄과 분노가 섞인 눈빛으로 한숨을 내쉬더니, 이내 날이 선 표정으로 금룡상회를 힐끔 노려보았다.

“내가 서인 오라버니를 무림 강호에 한 획을 그을 존재라고 하긴 했지만, 아직 이런 일을 맡을 상황은 아니에요. 이해가 안 되네. 내가 문 소저를 잘못 봤나 봐요. 어떻게 이런 부탁을 하지?”

“……절박해 보였어요. 이유가 있는 것 같았습니다.”

“물론 이유야 있겠죠. 그런데 생각해 봐요. 문 소저는 결정적으로 금룡상회가 왜 천무련이랑 척을 졌는지 이야기를 하지 않았잖아요?”

팽자연이 지적은 날카로웠다.

사실 대화를 나누면서도 그 부분은 조서인도 의아해하던 문제였다.

“천무공자의 비무행은 그렇게 장황하게 설명하면서 정작 가장 중요한 걸 설명 안 한 거예요. 솔직히 난 금룡상회가 떳떳하지 못할 만큼 지은 죄가 있다는 생각밖에 안 드네요.”

“으음…….”

“사람을 얼마나 우습게 봤으면! 오랜만에 본 친구에게 그렇게 큰 부탁부터 한담?”

팽자연은 분을 참지 못하고 숨을 씩씩거리기까지 했다.

이렇게까지 화를 내는 걸 보니 아까 그 자리에선 용케 참아 주었다 싶다.

소호 이래로 처음 겪는 기분.

누군가가 진심으로 내 편에서 싸우고 화내 주는 건 썩 기분 좋은 일이었다.

조서인은 숨김 없이 감정을 표현했다.

“고마워요.”

“……네?”

“나 때문에 화내 줘서 고마워요, 자연 누이.”

팽자연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더듬더듬, 입만 벙긋거릴 뿐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굳어 버렸다.

“하하핫.”

한 발 떨어진 채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던 추룡이 그 모습을 보고 웃음을 터뜨렸다.

“한 방이 있는 놈일세. 그래. 창 쓰는 놈은 원래 그래야지.”

“예?”

“무슨 말인지 모르면 됐어. 그래서? 조카야, 넌 어떻게 하고 싶으냐?”

“이번 일…… 말씀이시죠?”

“그래. 중재를 해 줄 거야, 말 거야?”

추룡은 어느 쪽이라도 괜찮다는 듯한 태도였다.

조서인의 입장에선 상당히 의외였다.

“숙부님은 반대 안 하시네요?”

“내가 왜?”

“그……. 아무래도, 소호랑 대립각을 세우는 일이니까요.”

“무슨 소리야? 내가 전에 말한 거 잊었어? 결국엔 소호랑 대결해서 이기는 게 목표인데. 고작 대립각 좀 세우는 정도로 내가 왜 반대해?”

멍하니 있던 팽자연의 고개가 훽― 하고 돌아오는 게 느껴졌다.

놀라움과 경악, 그리고 선망의 기색이 가득하다.

세상에, 천무공자를 노리고 있었다니! 라는 생각이 전해져 온다.

조서인은 얼굴이 뜨거워졌다.

“그, 그건. 최후의 일이랄까. 한 참 뒤의 목표일 뿐이죠.”

“그거나 그거나. 어차피 해야 할 일인데.”

추룡은 코웃음쳤다.

“하고 싶으면 중재해. 과거의 인연을 못 잊고 도움을 주고 싶으면 주는 거지.”

“……탐탁지는 않으시군요?”

“탐탁지 않다기보단, 솔직히 네 의견이 중요할까 싶다.”

“예?”

“조카야. 넌 상회라는 곳이 어떤 곳이라고 생각하냐?”

추룡은 팔짱을 낀 채 목에 두르고 있는 오색 천 사이로 턱끝을 파묻었다.

이럴 때의 추룡은 매우 진지하게, 연륜에서 우러나는 말을 해 주곤 했다.

조서인은 공손한 태도로 경청했다.

“잘 모르겠습니다. 돈을 버는 곳 아닐까요?”

“그래. 핵심은 그거야. 상회는 돈을 벌기 위한 놈들이 모인 곳이다. 일하다가 마시는 물 한 잔, 하인들이 먹는 쌀 한 톨, 어쩌다 가게에 들어온 손님이 물건을 샀을 때 거기서 남는 이문. 그런 걸 머릿속에서 끊임없이 주판을 두드리면서 계산하는 놈들이 모인 마굴(魔窟)이 저 상회라는 곳이야.”

“어…… 마굴이요?”

“왜? 과장하는 것 같냐?”

“아뇨, 아닙니다. 숙부님 말씀이신데요.”

“내 말이라서가 아니라, 그냥 맞는 말이야. 서역이든 여기든 상인 놈들은 다 똑같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숨 쉬는 시간까지 돈으로 계산하는 족속들이 상인이야. 그런데 그런 자들이 아까 팽 소저가 말한 것처럼 경험도 없고 명성도 부족하고, 가진 거라곤 천무련주와의 친분뿐인 애송이를 중재자로 내세운다고? 그것도 온갖 조건을 내걸고 비싼 돈을 들이면서?”

추룡은 웃음을 터뜨렸고, 조서인은 머릿속에 벼락이 치는 듯한 기분이었다.

“왜? 어차피 돈 쓸 거면 그냥 돈 많이 써서 명성 높은 팔파일방의 노고수 한 명 데려오는 게 더 낫지 않을까? 소호랑 안면은 없어도 그래도 노고수의 체면이 있는데 문전박대는 안 하겠지? 어때? 팽 소저, 금룡상회 정도면 친분이 있는 무림 문파도 있지 않아?”

팽자연은 추룡의 날카로운 식견에 감탄하며 곧바로 대답했다.

“추 숙부님의 말씀이 맞아요. 금룡상회는 대륙 전역에 지부를 두고 있고, 대부분의 팔파일방과 관계를 맺고 있으니까요.”

“그렇지? 거봐. 내 생각엔 어차피 금룡상회도 네게 정확히 바라는 부분이 있어. 네가 해낼 수 있다고 생각해서 부탁을 하는 거야.”

“아…….”

“네가 문 소저와의 인연을 생각해서 돕고 싶으면 돕고, 돕기 싫으면 돕지 마. 여기서도 배울 점이 있겠지. 네 마음이 가는 대로 결정하는 게 좋겠다.”

추룡은 억지로 바른 길로 질질 끌고 가는 성향의 어른이 아니었다.

늘 그렇듯 조언만 해 줄 뿐, 결정은 조서인이 스스로 하도록 만들었다.

“거절하겠습니다.”

“그래? 후회하지 않겠어? 문 소저와의 인연은?”

“주희는 다른 일로 도울 수 있으면 도와야죠. 중재자 역할은 소호와의 친분을 돈을 받고 파는 것 같아서……. 안 하는 게 옳다고 생각합니다.”

추룡은 순순히 알겠다고만 말해 주었다. 팽자연은 잘 생각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금룡상회에서 내준 금룡객잔의 최상층은 상상 이상으로 호화로웠다.

붉은색 비단 천과 온갖 금박 장식물들이 늘어선 모습은 압도적이기까지 했다.

과하다.

너무 화려하긴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마치 자신이 만금을 지닌 부자가 된 것처럼 느껴지게 만드는 방이었다.

팽자연은 팽가로 돌아가거나 근처에 마련된 팽가의 별장으로 갈 줄 알았는데 객잔에서 함께 묵겠다고 말했다.

한 층 전체를 조서인 일행이 쓸 수 있게 되어 있어서, 각 방을 한 명씩 사용해도 공간이 많이 남기는 했다.

추룡은 또 한 번 웃음을 터뜨렸고, 팽자연은 쑥스러워하면서도 즐거워했다.

손님은 저녁 식사를 마치고 차를 한 잔 마시며 쉬고 있을 때쯤 찾아왔다.

당연히 문주희일 거라 생각하고 반겼는데, 찾아온 사람은 처음 보는 중년의 사내였다.

그리 크지 않은 키에 호리호리하면서도 단단한 체구.

주황빛의 비단 옷에는 화려한 문양이 비단 자수로 수놓여 있었고, 머리에 쓴 흑건이 매우 잘 어울렸다.

무공을 익힌 것 같지도 않은데 작은 눈에 힘이 가득해 맹수 한 마리가 눈앞에 서 있는 듯했다.

‘어디선가 본 듯한 인상인데.’

알 듯 말 듯 익숙한 얼굴이다.

“그대가 최근 무림에 명성이 자자한 낙일창 조서인 공자요?”

“네. 명성이 자자한지는 모르겠으나 그런 이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나는 금룡상회를 운용하는 문갑룡이라고 하오. 내 딸과 같은 동문 친구라고 들었는데.”

“주희 아버님이셨군요.”

조서인은 정중하게 포권을 취했다.

“조서인입니다. 주희와 같은 무산학관에서 수학했고, 이번에 초대를 받아 금룡상회에 오게 되었습니다.”

“반갑소. 들어가도 괜찮겠소?”

“물론입니다. 숙부님, 괜찮으시지요?”

문갑룡은 추룡과 정중하게 인사를 나누고, 놀란 기색의 팽자연과도 이미 안면이 있는 듯한 인사를 나눴다.

그가 자리에 앉자 뒤따라 들어온 시비들이 따뜻한 차와 온갖 다과들을 들고 들어왔다.

순식간에 다탁에 온갖 과일들이 차려지니 눈이 즐거울 정도다.

크게 의미 없는 환담을 잠시 나눈 후, 문갑룡은 곧바로 본론을 꺼내들었다.

“조 공자, 우리 딸아이가 말하기를, 어제의 제안은 거절했다고 하던데.”

조서인은 찻잔을 내려놓고 진중하게 문갑룡을 응시했다.

“예. 제게는 과분한 제안인 것 같습니다.”

“내가 보기엔 절대로 과분하지 않던데.”

“소호와의 친분을 담보로 이용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다른 도움이 필요하다면 돕겠습니다.”

문갑룡은 품 안에서 넓적한 종이를 꺼내 들었다.

옆에서 팽자연이 헛숨을 삼켰다. 종이에 적혀 있는 금액을 확인한 것이다.

“은자 천 냥일세. 여비로 써 주게.”

“……회주님.”

“가서 한마디만 해 주면 되네. 천무공자에게 금룡상회가 화해를 청하니 한번 생각해 보라고. 그 말만 해 주면 되네.”

조서인의 눈빛이 흔들렸다.

은자 천 냥이라니.

농민 한 가정이 한 달 먹고살 수 있는 돈이 은자 한 냥이니. 말 그대로 천 가구를 한 달간 먹여 살릴 수 있는 돈이다.

‘크다. 크긴 한데…….’

예전 같았으면 액수를 보자마자 심장이 쿵쾅거리며 떨렸을 터.

그런데 신기한 일이다.

도박장에 가 봤던 덕분일까?

큰 액수긴 한데, 비현실적이지는 않다.

이 또한 추룡의 교육 덕분에 조서인의 그릇이 커졌다고 봐야 할 것이다.

조서인은 은자 천 냥이 공짜로 생길 상황임에도 평정을 유지할 수 있었다.

“괜찮습니다.”

“조 공자. 말 한마디요. 오랜만에 친구를 만나고, 말 한마디를 해 주면 은자 천 냥을 얻는 것이오.”

“회주님, 돈의 문제가 아닙니다.”

“이 세상에 돈의 문제가 아닌 것은 없소. 액수의 문제일 뿐이지.”

다른 사람이 했다면 속물적이라고 비난했을 말인데, 신기하게도 문갑룡은 그 말이 신뢰가 가게 만드는 묘한 박력이 있었다.

쿵.

문갑룡은 품 안에서 전표를 한 장 더 꺼내 다탁에 내려놓았다.

아까와는 다른 색.

전표 종이에 황금 세공이 들어가 있었다.

“은자 만 냥이오. 천 냥은 여비로 쓰고, 천무공자에게 말을 전하면 만 냥을 드리겠소.”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