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권 25화
제38장 위명찬란(偉名燦爛) (7)
꿀꺽.
조서인은 자신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은자 만 냥이라니.
입안에서 되뇌면서도 참으로 비현실적인 액수였다.
어린 시절에 동전 열 닢 벌겠다고 온갖 허드렛일을 하던 기억이 불현듯 떠오른다. 세상엔 일평생 이만한 액수의 돈을 보지도 못한 채 죽는 사람이 대부분일 것이다.
‘만 냥…… 은자 만 냥……. 이건 이야기 속에서나 보던 거 아니었어? 이런 금액을 품 안에 넣고 다니는 사람이 실제로 있었던 거야?’
백 냥과 천 냥이 다르듯, 천 냥과 만 냥의 무게감은 크게 달랐다.
조서인의 마음이 흔들리는 것을 눈치챈 문갑룡이 다탁을 손으로 짚으며 상체를 살짝 앞으로 내밀었다. 그의 은근한 목소리가 조서인의 귓속으로 파고들었다.
“말 한마디요. 아까 말했듯이. 오래된 친우를 만나 말 한마디만 전해 준다면, 조 공자가 하고 싶은 일은 뭐든 할 수 있는 돈이 생기는 것이오.”
“…….”
“솔직히, 좋은 제안이라 자부한다오.”
은근한 속삭임은 마치 달콤한 꿀과 같았다.
부처를 유혹했던 마귀들이 이러했을까?
거부할 수 없는 유혹이 조서인의 마음을 뒤흔든다. 문갑룡의 자신감, 당당하게 내미는 은자 만 냥짜리 전표는 그만한 위력을 지녔다.
하지만.
“아뇨.”
조서인은 차츰차츰 마음을 가라앉혔다.
청명경 일만자의 법문을 되뇌자 마음속 번뇌가 차츰 가라앉았다. 들뜬 마음, 헛된 망상이 머릿속에서 사라져 갔다.
마음이 일고 몸이 일어나니 그야말로 심즉통(心卽通).
알을 깨고 나오는 듯한 청량한 한 줄기 기운이 온몸을 휘돈다. 건곤조화신공의 진기가 절로 일어나 온몸에 활력을 주었다.
“제안은 감사하나 제 생각은 변치 않을 것입니다. 말씀드렸듯, 돈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천 냥이든 만 냥이든.
돈을 받고 중재하는 순간 조서인은 소호와의 우정을 돈으로 환산한게 되어 버린다.
조서인의 기색이 변하는 모습을 실시간으로 눈앞에서 목격한 문갑룡은 감탄을 금치 못했다.
“놀랍군.”
문갑룡이 천천히 다시 상체를 뒤로 젖혀 푹신한 의자에 몸을 반쯤 파묻었다.
강렬한 눈빛으로 조서인을 응시하다가 가만히 아래로 내리깔고는 생각에 잠겼다.
거만해 보일 수 있는 자세인데, 신기하게도 그가 그런 자세를 취하자 거만하다기보다는 금룡상회의 회주다운 여유로 비쳤다.
“최근 오 년간, 돈에 욕심을 부리지 않고 내 제안을 거절한 사람은 단 두 사람뿐이오. 천무공자와 낙일창. 그런데 놀랍게도 두 사람은 서로 친구로군.”
천무공자라니. 소호도 만났었단 말인가?
조서인은 의외의 말에 크게 동요했다.
이역만리 먼 곳에서 절친한 친우인 소호의 발자취를 느낀다. 심지어 똑같이 돈에 동요하지 않았다는 말은 가슴을 들뜨게 만들었다.
“조 공자.”
문갑룡은 동요하는 조서인을 가만히 들여다보다가 툭 던지듯 질문을 던졌다.
“진심으로 돈의 유혹을 극복할 수 있는 사내는 드물지. 돈이 싫다면 내 딸은 어떻소? 혼인할 마음은 있소? 만 냥 대신 딸을 주면 어떻게 생각하오?”
“……예?”
조서인은 순간 잘못 들은 줄 알고 멍청한 소리를 냈다.
당연히 농담이겠거니 했는데, 문갑룡은 웃는 기색이 아니다.
살짝 의자에 몸을 파묻은 채 양손을 삼각형을 그리듯 모으고 있는 모습에서 진중함이 느껴졌다.
큽.
갑자기 옆에서 기침 소리가 나서 고개를 돌리니, 팽자연이 살짝 몸을 돌린 채 소매로 입을 가리고 있었다.
조서인은 당황스러웠다.
어찌할바를 몰라 허둥거리고 있자니, 갑자기 문갑룡이 피식 입꼬리를 끌어 올려 웃었다.
“돈보다는 훨씬 반응이 좋구려. 영웅호색이라더니. 옆에 팽가의 장녀와 함께라서 그쪽은 생각 안했는데, 괜히 돈을 먼저 꺼냈군.”
“아, 아닙니다. 그런 건.”
조서인은 얼굴이 화끈 달아오른 채 손을 내저었다.
“거절의 뜻은 잘 알겠소. 거절이라. 큰일이군. 그럼 우리도 다른 방도를 찾을 수밖에 없는데.”
문갑룡은 내키지 않는 얼굴이었다.
그는 잠시 고민하다가 황금 문양이 새겨진 전표를 다시 품 안으로 집어넣었다.
‘만 냥이 멀어진다.’
사람 마음이라는 게 참 간사하다.
스스로 거절했음에도 막상 눈앞에서 거액이 멀어지니 마음이 싱숭생숭해지는 것까진 막을 수 없었다.
조서인은 자신도 몰래 멍하니 전표를 바라보다가 황급히 마음을 다잡았다.
“그럼…….”
문갑룡은 자리에서 일어나 조서인에게 처음으로 포권을 취했다.
“아무리 딸의 친우라고는 해도 이렇게 돈부터 내놓은 게 예의가 아닌 건 잘 알고 있소. 그만큼 우리 상회가 절박했고, 이게 상인이 가장 성의를 보이는 방식이라고 부디 이해해 주시오.”
“저는 개의치 않았습니다. 신경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오히려 제가 부탁을 들어들이지 못해 죄송합니다.”
문갑룡은 조서인이 당황스러울 정도로 무례에 대한 사죄를 표했다.
“그렇게 말해 주니 고맙소.”
“잠시만요.”
조서인은 곧바로 몸을 돌려 나가려는 문갑룡을 황급히 다시 불렀다.
“이걸 두고 가셨어요.”
문갑룡은 만 냥짜리 전표만 챙겼을 뿐, 다탁에는 천 냥짜리 전표가 그대로 남아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걸 집어서 건네주자 문갑룡은 고개만 저을 뿐 받지 않았다.
“내가 그건 여비라고 하지 않았소?”
“예? 아뇨, 부탁을 거절했으니 여비도 받지 않는 게 옳지 않겠습니까?”
“그렇지 않소. 그건 이미 내 손을 떠난 돈이니 마음껏 쓰셔도 좋소.”
은자 천 냥을 이유도 없이 줘 버리다니. 도대체 왜 이러는 것인가?
조서인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순간적으로 온갖 생각이 다 들었지만, 결론적으로는 나쁜 쪽으로밖에 생각이 들지 않았다.
“……저는 중재의 역할을 하지 않을 것입니다.”
“알고 있소. 이미 나도 조 공자의 거절을 받아들였고.”
“…….”
“으음, 그 돈을 받는 게 불편하다면……. 이렇게 말하지. 내가 조 공자에게 실수를 한 것에 대한 사죄의 뜻이오. 부디 개의치 말고 받아 주시오. 그게 내 최소한의 성의니까.”
문갑룡은 조서인이 뭐라고 해야 할지 몰라서 멍하니 굳어 있는 사이 곧장 나가 버렸다. 그가 밖으로 나서자마자 기다리고 있던 상인들이 줄줄이 따라붙어서 서류를 들고 뭔가를 상의하며 멀어졌다.
시끌벅적하고 참으로 바빠 보이는 사람이다.
조서인은 자신의 손에 들린 천 냥짜리 전표를 멍하니 바라봤다.
“그것 참 찝찝한 돈이구만.”
추룡은 호탕하게 껄껄 웃으면서 즐거워했다. 이 모든 게 그에게는 무대 위의 경극처럼 보이는 모양이었다.
“이거 진짜로 받아도 될까요……?”
“안 받으면? 다시 찾아가서 돌려주기라도 하게?”
“으음, 모르겠어요. 그래야 할 것 같기도 하고. 천 냥인데…… 은자가 천 냥인데……”
“돈이 욕심나나 보구만.”
“그, 그건 아닙니다!”
“눈빛 흔들린다, 조카야.”
조서인은 손바닥으로 미간을 꾹꾹 누르면서 눈알을 진정시켰다.
추룡은 그 모습을 보면서 또 한 번 박장대소를 터뜨렸다.
“저 능구렁이 같은 인간이 다시 찾아오길 바라고 줬으려나? 뭐, 흑심이 있는 것 같긴 한데 내가 보기엔 저쪽은 그 전표 절대로 안 받아. 일단 잃어버리지 말고 잘 갖고 있어라.”
“……이거 드릴까요?”
“됐다. 네가 받은 돈 네가 써야지. 나중에 돌려줄 수도 있다며?”
추룡은 늘 그랬듯 돈에는 조금도 관심이 없는 사내였다.
돈을 싫어해서가 아니라, 정말로 더 높은 가치를 추구하는 사내이기에 보여 줄 수 있는 진실로 초탈한 모습이다.
‘나도 저런 남자가 되어야 하는데. 이런 은자 천 냥따위……! 천 냥 이따위……!’
속으로 구시렁거릴지언정 몸은 정직했다.
조서인의 손은 천 냥의 전표를 품 안에 넣고 있었다.
어디 흐르진 않을까 계속 전표를 만지작거리게 된다.
“닳겠다. 그렇게 꽉 쥐고 있으면 전표가 닳겠어.”
“아, 아닙니다. 제가 언제요?”
조서인은 화들짝 놀라 전표에서 손을 뗐다.
“금룡상회 회주님은 상행을 공격적으로 하는 걸로 유명하세요. 이야기는 많이 듣긴 했는데 저렇게 거금을 전표로 척척 내놓는 사람이었다니……. 오늘, 제가 모르던 걸 많이 알게 되네요. 저런 거금이 막상 눈앞에 있으면 거절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요?”
팽자연은 또 한 번 조서인을 칭찬하듯 말해, 전표를 놓칠세라 꽉 쥐고 있던 조서인을 쑥스럽게 만들었다.
그때의 조서인은 알지 못했다.
금룡상회 회주가 돈에는 얼마나 철저한 사람인지.
은자 천 냥을 그냥 줄 리가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 건 객잔 최고층에서 머무른 다음 날의 일이었다.
“조 공자!”
“낙일창 소협! 아니, 대협!”
“여기 좀 봐주십쇼! 에잉, 막지 마라! 나도 한번 이야기를 해 봐야지!”
“조서인 공자―!”
객잔에서 아침으로 가져다준 흰죽을 다 먹기도 전에 객잔 입구가 시끌벅적해져 있었다.
창밖으로 내다보니 객잔 앞은 화려한 비단 옷을 입은 사내들과 그들이 가지고 온 것으로 보이는 온갖 물건들로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었다.
게다가 그 사람들이 부르는 건 조서인의 이름이니 당황스럽지 않을 수가 없다.
“이게 무슨……?”
조서인이 죽을 먹던 숟가락을 떨어뜨렸다.
추룡은 죽 그릇을 든 채로 창밖을 내다보더니 아이고! 하고 탄식했다.
“객잔 점소이들만 고생이네. 상인 놈들 열정이 엄청나. 어떻게든 뚫고 들어오려고 하는데?”
씩 웃고 있는 추룡의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조서인은 남은 죽을 거의 마시듯이 들이켜고는 곧바로 아래로 내려갔다.
조서인이 일 층으로 내려오니 객잔이 더욱 시끄러워졌다. 간신히 앞을 막고 있는 점소이들 사이로 얼굴만 삐쭉 내민 상인들이 제발 자신 좀 봐 달라며 성화였다.
“제가 조서인입니다. 도대체 무슨 일인지요?”
상인들은 조서인이 나타나자 그제야 진정하고 질서를 되찾았다. 조서인은 황급히 뛰쳐나온 금룡객잔 총관에게 양해를 구했고, 몰려든 상인들 중에 가장 앞에 서 있던 사람과 마주했다.
그는 자신을 북경 인근에서 장사를 하는 하동상가의 사람이라고 소개했다.
“조 공자, 우리도 천무련과 친분을 쌓을 수 있게 도와주십시오.”
“예?”
이게 무슨 청천벽력 같은 소리인가?
당황하는 조서인의 표정을 보고 그는 기회라고 여겼는지 더욱 은밀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우리 상인들은 소식에 민감하지요. 남경에는 옥으로 된 장신구가 잘 팔린다는 소식을 듣고 바로 출발해도, 남보다 하루라도 늦게 출발한 장사치는 한 푼도 못 건지고 손 털고 나오는 일도 허다하니 말입니다. 그래서 말인데, 저희는 다 들었습니다. 어제 금룡상회의 회주와 회담을 하셨다면서요?”
“……만나 뵙긴 했죠.”
“그동안 금룡상회가 천무련과 삐걱거리는 듯 보여서 상계에선 화제였었습니다. 후훗, 조 공자께서 관계를 중재해 주시는 것일 테지요? 거기에 저희 작은 상가들도 좀 끼워 주십사, 이렇게 찾아온 것입니다.”
헛웃음이 나올 지경이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해명을 해야 할지 감도 잡히지를 않았다.
“어려운 것은 아닙니다. 천무공자께 한마디 해 주시면 그야, 더 바랄 게 없지만, 그게 부담되실 테니 그저 저희 상인들이 조 공자와 함께 길을 따라가게만 해 주십시오. 함께 온 사람들이다. 이 정도만 해 주시면 저희가 다 알아서 하겠습니다.”
“그…….”
“물론 그 대가는 충분히 치를 것입니다! 무림인이시니 몸에 좋은 약재도 필요하시지요? 제가 제법 귀한 영약이란 소리 듣는 것들을 좀 구해 봤습니다.”
친절한 얼굴로 보따리를 내미는 상인이 무슨 죄가 있겠는가.
그는 그저 자신의 일에 충실할 뿐인데.
굽실거리는 사내에게서 큰돈을 눈앞에 둔 상인 특유의 욕망이 느껴졌다.
조서인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하동상가뿐만 아니라,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는 저 상인들 모두가 이 남자와 외모만 다르지 똑같은 모습, 똑같은 분위기였다.
“뭔가 크게 잘못 아신 것 같습니다.”
“예?”
“이 자리에서 분명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금룡상회 회주님께 거절의 뜻을 표했습니다. 저는 천무련과의 중재 역할을 맡지 않을 것입니다.”
상인들 모두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자기들끼리 수군거렸다.
뒤쪽에 모여 있던 상인들 중 한 사람이 반론을 제기했다.
“거절을 했는데 어째서 금룡상회의 객잔에서 머무는 것입니까? 그저 우리 같은 작은 상인들과는 일하고 싶지 않아 하는 말이 아닙니까?”
“그렇구만!”
“그래! 제안을 거절했는데 왜 금룡객잔에서 묵겠어? 어제 낙일창과 만난 후에 나오던 금룡회주의 표정이 아주 밝았다던데!”
“그 말이 옳구만!”
수군거리던 상인들이 숫제 원망 섞인 시선까지 보내온다.
“그렇지 않습니다. 객잔에서 묵은 것은 제가 회주님의 자녀분과 인연이 있어서 묵은 것뿐이고, 제안은 분명히 거절했습니다.”
조서인은 당황하면서 변명을 했는데, 오히려 그게 더 큰 불씨가 되고 말았다.
“회주의 자녀와 인연이 있어?”
“금룡회주의 자녀라면 그 외동딸 한 명 아니었나?”
“뭐야? 이거 생각보다 더 큰 인연이었잖아! 한 가족이나 다름없네!”
“낙일창! 그러지 말고 우리도 좀 도와주시오! 다 같이 잘 먹고 잘 살아야 하는 것 아니겠소!”
상인들의 아우성이 점점 더 커진다. 조서인은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아무리 말해 봤자 사람들은 듣고 싶은 이야기만 듣는 모양이었다.
그 순간 사죄의 뜻이라며 천 냥짜리 전표를 놓고 간 금룡회주 문갑룡이 떠오르는 것은 왜일까.
‘주희 아버님, 혹시 이거 알고 계셨습니까?’
추룡의 말이 딱 맞다.
마굴(魔窟)이라더니.
맞는 말이다.
상회는 돈을 쫓는 상인들의 마굴이 분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