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권 26화
제38장 위명찬란(偉名燦爛) (8)
공죽(空竹)이라는 놀이가 있다.
흔히 죽방울이라고도 부르는데, 손으로 쥘 수 있을 만큼 가는 대나무 두 개를 실로 길게 연결하고, 그 실에다가 동그란 죽방울을 걸었다가 튕기는 방식으로 이리저리 움직이면서 노는 놀이다.
죽방울은 마치 팽이 두 개를 뾰족한 부분끼리 붙여 놓은 것처럼 생겼다.
가운데는 홀쭉하고 양옆으로 벌어질수록 넓적하고 두꺼워진다.
한 번 죽방울을 위로 띄웠다가 받을 때는 힘 조절을 잘해야 하는데, 자칫 균형을 잃어버리면 죽방울이 실에 걸리지 않고 떨어지기 일쑤였다.
“이야앗!”
나이는 일곱 살.
평범한 체구에 통통한 볼살이 귀여운 꼬마는 한때 비학문의 문지기였던 장씨의 아들이었다.
하늘까지 닿을 정도로 힘차게 죽방울을 위로 내던졌던 꼬마는 막상 죽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하자 허둥거리며 안절부절못했다.
던질 때는 멋지게 받을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지만, 막상 떨어지는 죽방울을 눈앞에서 보니 너무나 빨랐던 것이다.
소년은 어쩔 줄 몰라 하며 손을 앞으로 쭉 내밀었다.
팅―.
“……!”
손을 내미는 시점은 좋았으나 양팔의 힘이 고르지 못했다. 결국 실 위에 안착시키지 못한 솔방울이 기우뚱 균형을 잃고 한쪽으로 기울어졌다.
“앗……!”
소년의 동공이 확장되고, 입이 쩍 벌어지는 그 순간이었다.
“읏챠!”
어느새 옆으로 다가온 한 청년이 땅에 떨어지기 직전의 죽방울을 발끝으로 톡, 차올렸다.
토옹―.
튀어 오른 죽방울이 기가 막힌 포물선을 그리며 소년이 들고 있던 줄 위에 안착했다.
“우와아!”
소년은 자신을 구해 준 구세주를 선망의 마음을 가득 담아 올려다보았다.
화려한 비단 장포가 날개처럼 펄럭인다.
품이 넓은 소매 위에 금사(金絲)로 섬세하게 새겨진 화사한 문양들이 햇빛을 받아 보석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길고 풍성한 머리를 말의 꼬리처럼 묶었고, 해사한 얼굴에 밝게 웃는 얼굴은 마치 화사한 태양과도 같다.
장소호.
천무공자라고도 불리는 천무련의 젊은 지도자가 구석에서 죽방울 놀이를 하는 소년을 영웅처럼 구해 낸 것이다.
소호는 입을 헤― 벌린 소년의 왼손을 부드럽게 손바닥으로 밀어 올렸다.
팅―――.
실이 파도치듯 출렁이며 죽방울이 다시 머리 위로 튕겨 올랐다.
“자, 허리는 꼿꼿이 세우고 어깨는 쫙 펴고. 무릎의 높이는 항상 동일하게.”
어깨와 허리 부근의 혈을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리는 것만으로도 소년의 자세는 일취월장해서 누가 봐도 늠름한 동작을 취하고 있었다.
“어어어?”
소년은 신기할 것이다.
분명히 자신의 몸인데 자기 멋대로 움직이고 있으니 말이다.
그런데 기이하게도 죽방울은 안정적으로 떨어져서 실에 출렁― 안착했다가 다시 위로 가볍게 튀어 올랐다.
허둥거리면서 손을 뻗으려는데, 소호가 소년의 팔꿈치를 손끝으로 톡 건드렸다.
“어떤 상황에서도 허리 아래는 흔들리지 말 것. 모든 동작의 기본은 하체야. 하체만 튼튼하면…….”
빙긋 웃은 소호가 소년의 오른쪽 어깻죽지를 검지로 꾹 밀면서 왼쪽 팔꿈치를 아래로 끌어내렸다.
“어어어!”
소년은 그 순간 꿈을 꾸는 듯한 경험을 했다.
왼손은 내리고 오른손을 올린 채 실 위에 죽방울을 얹은 채로 제자리에서 몸을 한 바퀴를 빙 돌아 회전한 것이다.
“우와앗!”
방금까지 죽방울을 얌전히 위로 튕겼다 받는 것도 못했는데 이런 고급 기술을 쓰다니.
소년의 입장에선 직접 행하면서도 믿기지 않는 일이었다. 소년이 흥분해서 두근거리는 표정을 지을수록 소호는 신이 나서 더욱 어려운 동작을 도와주었다.
끈이 달린 인형을 조종하는 인형사처럼, 소호가 손끝으로 혈도와 근맥을 건드릴 때마다 소년이 더 멋진 동작을 성공시켰다.
“이렇게, 멋진 기술도 얼마든지 할 수 있어. 명심해. 하체는 튼튼하게, 허리를 세우고 몸의 중심은 꼿꼿하게.”
소호가 소년의 몸을 톡톡 두드릴 때마다 소년은 죽방울을 휘감아서 위로 던졌다가, 실로 죽방울을 몇 번이나 휘감았다가, 다시 머리 위로 튕겨내는 멋들어진 동작들을 몇 번이나 반복했다.
“우와아아앗!”
깜짝 놀라 움츠리고 있던 것도 잠시.
차츰차츰 흥분하다 못해 격앙된 소년이 콧김을 내뿜을 때쯤 꿈같은 시간은 끝이 났다.
“하하핫! 재밌었어? 어때?”
“대, 대단해요!”
“역시 정 조장의 아들이야. 기본만 익히면 금방 몸 쓰는 법을 익히겠다.”
“우와아.”
세 걸음 정도 떨어진 곳에서 안절부절못하며 지켜보던 소년의 어머니와 아버지가 뛰어와 황급히 소년에게 인사를 시켰다.
“얘! 어서 련주님께 감사하다고 인사드려야지!”
“그래. 이 녀석! 너 이거 평생 못해 볼 경험이야. 평생 자랑해도 될 일이다. 어서 감사하다고 인사드려!”
소년은 아버지 정씨가 얼른 뒷머리를 누르자 공손하게 포권을 취했다.
어설프지만 예의를 갖춘 동작이다.
소년은 흥분이 아직 가라앉지 않은 얼굴로 눈을 반짝거렸다.
“감사합니다!”
“아냐, 시간 날 때 또 놀자.”
“또 놀아도 돼요?”
반색하며 고개를 번쩍 드는 소년을 정씨가 황급히 손으로 눌렀다.
“이 녀석아, 련주님이 얼마나 바쁜 분인데! 그렇게 함부로 말하면 안 된다!”
“아니에요. 정 조장, 시간 나면 또 놀면 되죠.”
소년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황송한 얼굴로 고개를 꾸벅꾸벅 숙였다.
어느새 주변엔 구경꾼들이 한가득이었다.
특히 똑같이 천무련 무인들을 부모로 둔 소년의 또래 친구들이 우르르 몰려와 소년에게 대체 어떻게 그런 묘기를 부렸는지 신기해하며 캐물었다.
그런 아이들의 부모들은 모두 감동한 얼굴로 소호를 응시한다.
햇살처럼 따스한 분위기가 감돌고 있었다. 모두에게 받는 호의란 이렇게나 마음을 평온하게 만든다.
“련주님.”
조용히 한발 물러선 곳에서 기다리던 섭주해가 소호에게 다가왔다.
형이 아니라 련주님이라 부른다는 건 공적인 업무라는 뜻이었다.
“응? 총군사, 무슨 일이야?”
“잠시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그래? 들어가서 이야기할까?”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겁니다. 이미 아시는 일이니까요.”
“……서인이?”
“네. 철풍단을 모조리 쓰러뜨리고 잡아들였다는 소식은 기억하시죠?”
“당연하지. 서인이 소식인데. 어제 내가 그 이야기 듣고 얼마나 흥분했는데? 혼자서 절정 고수가 포함된 백 몇십 명을 쓰러뜨렸다면서? 내 그럴 줄 알았지. 그동안 재능을 꽁꽁 숨겨 두더니, 이제야 그걸 드러내네.”
소호는 죽방울을 던지던 어린아이처럼 흥분했다.
아버지 일로 잠시 삐걱거리긴 했지만, 여전히 소호에게도 가장 친한 친구는 조서인이었다.
“어서 만나 보고 싶어. 언제쯤 천무련에 오려나?”
“그게, 지금은 맘 편히 올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응? 왜?”
섭주해가 나직한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금룡상회가 그와 접촉했습니다.”
“……금룡상회? 금룡상회가 왜? 섬서에서 우리 방해했던 건 사과받았고, 그 뒤에 관아에서 진목룡 풀어 준 걸로 끝냈잖아?”
“그들에겐 끝이 아니니까요. 오히려 끝내면 큰일 나는 사람들이죠.”
주변엔 여전히 천무련 사람들이 많았고, 겉으로 보기엔 소호와 섭주해는 둘 다 웃는 얼굴이다.
하지만 환담을 나누는 듯한 분위기와는 달리 대화는 진중하고 심각했다.
“문갑룡이었지? 문주희 아버지. 금룡상회 회주, 대뜸 돈부터 내밀어서 내가 웃어 줬잖아. 돈은 나도 많으니까 사죄부터 하라고. 그럼 풀어 주겠다고.”
“그랬죠. 결국 이런저런 수작을 부리다가 안 통하니까 사과도 다른 사람 시켜서 했고요.”
“진목룡이란 사람이 유능하지 않았다면 안 풀어 줬을 거야. 섬서에서 종남파를 도울 상회가 필요해서 어쩔 수 없었던 거지. 금룡상회는…… 유능하긴 한데 너무 돈밖에 몰라서 우리랑 안 맞아.”
“동의합니다. 그런데 그 금룡상회 회주가, 똑같은 짓을 조서인에게도 한 것 같아요.”
우뚝.
소호의 움직임이 멎는다.
꺄르륵 웃으며 몰려오는 소년들에게 손을 흔들어 주느라 소호는 등을 돌리고 있었지만, 섭주해는 그의 뒷모습에서 깊은 분노를 느꼈다.
“서인이한테 뭘 했는데?”
“큰돈을 주고 중재자로 고용했다는 소문이 파다합니다. 천무련과 금룡상회 사이를 중재해 줄 거라고 상인들이 떠들고 있어요.”
“서인이가?”
소호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갸웃하다가 상황을 깨닫고 서둘러 표정을 관리했다. 보는 눈이 많았다. 특히 아이들은 생각보다 어른의 감정 변화에 민감하다.
“그럼 서인이가 중재하러 오는 거야? 아니, 근데 금룡상회랑 중재할 게 있기는 한가? 딱히 뭐 우리가 공격하는 건 아니잖아?”
“공격은 안 했지만 대놓고 안 좋아하는 내색을 비추긴 했죠. 상회를 끼고 일해야 할 때 저희는 금룡상회한테는 한 번도 손을 내밀지 않았으니까요.”
“그건 그 사람들 업보고.”
“그렇죠. 근데 뼛속까지 상인인 그들이 보기엔 풀어야 할 숙제일 겁니다.”
“흐응.”
소호는 이미 이 상황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런데 문제는 정작 조서인은 중재자 역할을 거절했다고 말했답니다.”
“……역시.”
“거절할 거라 생각하셨어요?”
“그럴 거라 생각했어. 서인이니까.”
소호는 그 친구의 그런 고지식한 점을 좋아했다.
“돈에 좀 약하긴 했는데, 역시 원칙이 승리를 했네. 그런데?”
“그러니 맘 편히 천무련에 찾아오긴 힘들죠. 누가 보면 중재하러 오는 거라 생각할 테니까요. 이미 소문이 쫙 퍼져서 온갖 상인들이 다 달라붙었나 봅니다. 그 덕분에 하북 상계에 낙일창이 천무공자와 절친한 친구고 말만 잘하면 천무련이랑 중재해 준다고 소문이 나서 사람들이 난리예요.”
“……그러니까. 이용한 거네? 서인이를?”
“그렇죠. 그리고 제가 보기엔 여기엔 포석이 하나 더 깔렸습니다.”
“어떤?”
“련주님께 보라는 거죠.”
움찔.
소호의 긴 말총머리가 흔들렸다.
“세상 사람들아. 우린 천무공자의 친한 친구에게 부탁까지 했다. 이제 그가 중재를 하러 갈 거야. 그런데도 우리를 쳐 내면 천무공자는 피도 눈물도 없는 놈이다. 알지? ……뭐, 그런 포석으로 보입니다.”
“하아.”
소호는 한숨을 푹 쉬었다.
주변에서 소호를 지켜보던 아이들이 갑자기 왜 그러나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뜬다.
소호는 그런 시선에도 불구하고 침묵했다.
화가 치민다.
금룡상회 입장에서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을 찾아 최선을 다할 뿐이다?
안다.
이해는 한다.
하지만 그걸 용납하는 건 다른 문제다.
소호에게 그런 수작을 부리는 것.
소호의 친구일 뿐인 조서인을 이용해서 피해를 주는 것.
그 모든 것들이 하나같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금룡상회 회주는 무엇을 말하고 싶은 건가?
주변 상황을 허락할 수밖에 없도록 만들 테니 그냥 순순히 허락하라고?
못 이기는 척 한몫 떼 주면 더 큰 이득으로 되갚아 주겠다?
우습다.
소호는 무인이다.
상인이 아니다.
주변의 압력에 못 이겨 승낙하라면 그건 굴복하라는 것과 동일하지 않은가?
시대가 아무리 바뀌어도 진리는 변하지 않는다.
강요란, 강자만이 할 수 있는 행위다.
“감히.”
모욕감.
분노.
그 모든 감정이 가슴속에서 복잡하게 뒤섞여 휘몰아친다.
우우웅―.
청명경 일만 자의 법문이 마음을 다스리고, 자연스레 은은히 흘러나온 법광조차 소호의 분노를 완전히 없앨 수 없었다.
“서인이까지 이용해서 나한테 부담을 주겠다 이거지?”
“어떻게 할래요? 소호 형.”
이제야 다시 평소처럼 형이라 부르는 섭주해가 얄밉다.
섭주해는 어차피 소호가 어떤 선택을 할지 다 알고 있을 터.
공적인 이야기를 쭉 해 놓고, 정작 놀리듯이 물을 때만 형이라 부르는 점이 그러하다.
“금룡상회가 정확히 원하는 게 뭔데?”
“신(新) 북로전쟁이요.”
“그거 이미 이야기 끝난 거잖아?”
“자기들도 한몫 껴 달라는 거죠. 나라가 전쟁을 하는데, 거기에 말을 팔든 무기를 팔든 뭘 해도 돈은 쓸어 담을 테니까요.”
“대가는?”
“백만 냥.”
백만 냥.
한 나라를 움직일 만한 금액이 나왔으나, 소호는 코웃음 쳤다.
“돈. 돈. 돈. 변함이 없네, 그 사람들은.”
“상인 중의 상인이니까요.”
“한낱 상회에 휘둘려서야 무림맹을 이어받을 자격이 없지.”
“그럼 금룡상회는?”
소호가 대답하려는 찰나 소년들이 던진 죽방울 하나가 강한 바람에 휘말려 소호 쪽으로 날려왔다.
소호는 웃는 얼굴로 뛰어올라 죽방울을 검지 끝에 얹었다.
뱅글뱅글.
죽방울은 실이 아니라 손가락 끝에 있음에도 실 위에 있는 것처럼 회전했다.
“우와아아!”
아이들의 선망 섞인 웃음소리가 순수하다.
소호 역시도 환하게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
“왕 태감한테도 연락해. 금룡상회는 없애자고.”
수천 명.
아니, 대륙 전역으로 따지자면 만 단위의 생계가 걸린 금룡상회의 생사가 죽방울을 튕기며 웃는 얼굴로 결정되었다.
“소호 형, 더 고민하진 않아도 괜찮아요?”
“됐어. 어차피 지금 우린 그런 거에 신경 쓸 틈도 없잖아. 당장 더 중요한 게 있는데. 발목 잡는 잡초는 뽑고 가야 한다고 생각해.”
소호는 절묘하게 힘을 조절해 죽방울을 소년의 실 위에 얹어 주었다.
다시 한 번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어서 북쪽에 가서 육모담을 잡아야지.”
소호는 웃는 얼굴로 소년들에게 뛰어가 또 다른 아이를 죽방울의 달인으로 만들어 주었다.
까르르 웃는 소리가 흘러나오는 천무련.
밝은 분위기 속에서 천무련의 힘이 천하로 뻗어 나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