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풍운객잔 2부-455화 (584/686)

19권 1화

제39장 북벌종횡(北伐縱橫) (1)

어스름한 새벽녘.

말발굽에 천을 감아 소리를 죽인 일단의 무리가 고요한 물처럼 움직였다.

해가 뜰 때쯤의 새벽은 늘 경계가 가장 허술한 시간이다. 그쯤되면 보초병들이 졸린 탓도 있지만, 새벽녘엔 어둠과 빛이 뒤섞이면서 많은 그림자를 만들어 낸다.

말을 탄 무리들은 그 그림자를 따라 움직이는 법을 기가 막히게 잘 터득하고 있었다.

산등성이, 나무 사이, 시야가 가려지는 돌더미를 거쳐 마침내 그들은 장성에 도달했다.

푸르륵―.

말들의 투레질 소리가 새벽녘의 고요를 살며시 흔들었다. 말에 타고 있던 이들이 목덜미를 쓰다듬자 말들은 천천히, 이런 일에 익숙한 듯 숨소리를 낮췄다.

외장성(外長城).

길고 긴 석벽과 일부 커다란 관문이 존재하는 중원인들의 방벽을 보며, 오이라트의 대족장 에센[也先]은 가소롭다는 듯이 코웃음쳤다.

“명인(明人)들은 어째서 스스로 저런 상자 속에 들어가는가? 이해를 할 수 없다. 선을 긋지 않으면 저 위대한 대칸처럼 말을 달리는 그곳까지가 모두 영토인 것을.”

만리장성은 한 나라의 거대한 경계선이지만, 에센이 보기엔 곡물과 황금을 잔뜩 담아 둔 상자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오이라트의 기병들은 초원의 율법을 착실히 지키는 전사들이다. 하루 종일 말을 달리며 말 위에서 잠을 잔다. 가파른 절벽을 타고 내려오면서도 말에서 내리기는커녕 오히려 환희의 소리를 지르는 사내들이다.

마음만 먹으면 저 정도 성벽은 언제든 넘어다닐 수 있는 일인데 그동안 굳이 그러지는 않았다. 명나라가 마시(馬市)를 통해 제값 이상의 돈을 주고 말을 사 주는데 굳이 전쟁을 일으켜 애꿎은 목숨을 잃을 필요가 무에 있을까.

그런데 돈을 받고 평화를 주던 그 좋은 관계를 정작 명나라가 없애 버렸다.

우습지 않은가?

명나라에선 겉으로 조공을 주고받으며 무역을 하니 정말로 군신(君臣) 관계라도 된 줄 아는 모양이었다.

“명나라 놈들. 오분지 일로 말값을 후려쳤다지? 그렇다면 이런 보복도 예상했어야지.”

에센이 손을 들자 그림자 속에 있던 기병들이 은밀히 흩어졌다.

주변을 경계하고, 다른 경로를 통해 공격 중인 삼군(三軍)에도 소식을 전하기 위해서였다.

모두가 흩어지는 와중에 에센의 곁에 남은 유일한 사내가 한 명 있다.

건장한 체구에 회색 늑대의 가죽을 어깨에 걸치고 오이라트의 전사들이 입는 갑옷을 입었으며, 목에는 붉은색 천으로 띠를 만들어 두른 자였다.

한쪽 허리에 커다란 칼을 찬 그는 가만히 서서 숨만 쉬어도 주변을 긴장시킨다.

대초원의 나담(축제)에서 최고의 전사로 등극한 이다.

지금은 에센의 곁에 설 자격이 충분했다.

“붉은 늑대여. 어떻게 생각하나? 저들은 싸움을 준비하고 있을까?”

“아니.”

붉은 늑대라 불린 사내의 대답은 거칠고 단호했다.

북쪽 억양이 어색하지만, 뜻만은 명확했다.

“하지만 준비했더라도 상관없다.”

“그렇군. 과연.”

에센 타이시는 최근에 새로 만든 갑옷 만큼이나 눈앞의 사내를 마음에 들어 했다.

만난 지는 얼마 안 됐다.

함께 나고 자라서 말 타는 법을 배운 동무들도 많은데, 중원에서 올라온 사내 따윈 본래대로라면 에센의 앞에 서 있을 자격조차 없을 사내다.

그런데 그는 달랐다.

오만하고 자부심 강한 초원의 전사들을 차례로 격파했다. 항상 대결은 정정당당하고 치열했으며, 초원의 문화에 대해 예의를 갖출 줄 알았다.

빠르에서 자고, 축제에서 마유주를 마시며 초원의 사내들과 씨름을 한 뒤 정신이 나간 것처럼 춤을 추기도 했다.

대초원에 상대할 자가 거의 없어졌을 무렵부터 그는 본래의 이름보다는 별명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붉은 늑대.

과거 쿠빌라이를 곁에서 호위했던 위대한 푸른 늑대 이후로, 늑대라는 별명이 붙은 건 처음이다.

그만큼 그가 지닌 무예는 강렬했다.

“에센, 궁금한 것이 있다. 그대는 칸이 될 것인가?”

모두가 멀어진 지금.

둘만이 남았을 때 붉은 늑대는 에센에게 물었다.

“그런 걸 묻는 건가? 아직은 모른다. 붉은 늑대여. 하늘신께서만 아실 문제다.”

“과연.”

“네가 계속 곁에서 돕는다면 대칸 자리도 꿈은 아니지.”

에센 또한 한 시대를 풍미하는 걸물.

강렬한 시선이 붉은 늑대에게로 향했다.

“난 복수를 하고 싶을 뿐이다. 환관 왕진. 그자만 잡을 수 있다면 얼마든지 돕겠다.”

“그 목표는 눈앞에 다가왔다. 이제는 그 너머를 바라보는 것이 어떠한가? 북경의 용상에 앉을 때는 너도 곁에 있어야 한다.”

에센의 목소리엔 열망이 가득했고, 남자라면 가슴이 떨릴 법한 야망이 충만했다.

하지만 붉은 늑대는 일희일비하는 가벼운 성품이 아니었다.

그는 대답은 하지 않은 채 묵묵히 말에서 내려 말과 이마를 맞대고 인사를 나눴다.

안장에 걸려 있던 길쭉한 협봉검 한 자루를 등에 차니 이제는 완연히 전투를 앞전에 둔 사나운 전사다.

에센은 대답도 않는 이 무례하고 강인한 전사를 보며 그저 조용히 웃음만 터뜨렸다.

“정말로 혼자 오를 텐가? 바람새 몇 명을 붙여 줄까?”

“필요없다. 충분하다.”

붉은 늑대가 그림자 속으로 성큼성큼 걸어간다.

에센은 그의 뒷모습을 잠시 지켜보다가 장성의 성문과는 반대 방향으로 말을 움직였다.

***

횃불과 화롯불이 관문 인근을 은은하게 비추고 있었다.

타닥타닥 불똥이 튀어오를 때마다 화로 근처의 그림자가 멀어졌다가 다시 가까워지길 반복한다.

“흐아암.”

말 열 마리가 동시에 지나가도 될 만한 커다란 관문 위에서 오늘의 번(番)을 서던 병사 두 사람이 참지 못하고 하품을 했다.

한 명이 하면 바로 옆에 있던 사람도 따라하게 되는 것이 하품이다.

“졸려 죽겠네. 날씨도 으슬으슬하고.”

“흐아암, 강 씨, 몸 안 좋은 거 아녀? 춥지는 않은데?”

“공 씨는 안 추워? 몰라. 이상하게 몸이 떨리네. 왜 그러지?”

몸을 부르르 떤 강 씨가 옆으로 비스듬히 내려 두었던 창을 다시 집어 들려는 찰나였다.

살짝 몸을 숙였던 그는 관문 앞쪽에 은은하게 피워 놓은 화로 근처에서 그림자가 움직이는 것을 느꼈다.

“저, 저게 뭐야.”

“어? 왜 그래, 강 씨?”

“공 씨, 공 씨. 저거, 저거, 나만 보여? 저기 뭐 있지 않아?”

딱딱하게 안색이 굳은 채로 강 씨가 손가락을 앞으로 뻗는다.

미간을 잔뜩 좁힌 채 눈을 끔뻑거리는 그에게선 믿을 수 없다는 듯한 기색이 역력했다.

“저기에 뭐가 있다고…….”

괜히 이상한 소리하지 말라고 타박을 주려는 그때였다.

퍽!

아름드리 나무를 도끼로 찍은 것 같은 소리가 발밑에서 났다.

“어?”

공 씨는 본능적으로 소리가 난 방향을 바라봤다.

그들이 경계를 서고 있는 성벽 아래.

발밑으로 한 척 정도 내려간 곳에 칼 한 자루가 꽂혀 있었다.

던진 위치도 절묘했다.

돌벽과 돌벽 사이다.

머리카락 한 올만큼 벌어져 있는 돌틈에 정확하게 칼이 꽂혀 있다.

“뭣……?”

이게 왜 이런 곳에 꽂혀 있지? 라는 의문도 잠시.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머릿속이 새햐얗게 변했다.

때론 그런 순간이 있다.

그저 본능적으로 누가 와 있다는 것을 아는 감각.

온몸의 신경들이 제발 조심하라고 경종을 울려 대는 그런 감각 말이다.

관문 앞 화롯불 사이에 한 사람이 서 있었다.

강 씨가 가리켰던 바로 그 방향이다.

그는 누가 봐도 북방 이민족의 복색을 갖춰 입고 있었다.

짐승 가죽을 덧댄 갑주를 입고, 목에 붉은 천으로 띠를 두른 모습이 섬뜩하다.

눈이 마주치는 순간 역광을 받아 그림자처럼 보이던 인연이 훅― 사라진다.

강 씨와 공 씨, 두 사람이 헛숨을 삼키며 몸을 떨었다.

무슨 일인가?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진 건가?

“귀, 귀신?”

현실을 부정하고자 했던 강 씨의 말은 공허했다.

티이잉―――.

비조처럼 뛰어올라 돌벽 사이에 꽂혀 있던 칼을 짓밟은 사내가 십 장 높이의 관문 위로 단박에 뛰어올라왔다.

눈앞에 그림자가 드리워진다.

비를 맞은 짐승 가죽 같은 노린내가 두 사람을 덮쳤다.

공 씨의 반응은 빨랐다.

“적습!”

그는 호각을 입에 물면서 봉화를 올리기 위해 황급히 몸을 돌렸고, 그 반응 덕분에 강 씨보다 조금 더 목숨을 연장했다.

“컥?”

반면에 당황했던 강 씨는 본능적으로 허둥대며 창을 들이밀었고, 붉은 늑대는 왼손으로 창을 밀어내며 오른손으로 강 씨의 목을 붙잡았다.

우두둑―.

목뼈가 부서진다.

강 씨는 비명조차 내지르지 못했다.

붉은 늑대는 당연하다는 듯이 손을 털고, 성벽 너머로 기우뚱 상체를 기울였다. 돌벽 사이에 박아 넣었던 칼을 다시 뽑아냈음에도 칼날은 조금도 상하지 않고 날카로운 예기를 뽐냈다.

삐이이익―――.

호각이 울려 퍼진다.

새벽의 고요함이 깨졌다. 관문 옆에 세워진 병사들의 숙소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붉은 늑대는 마치 주변의 상황이 보이지 않는 사람처럼 여유롭게 걸음을 옮겼다.

몇 걸음 만에 그는 죽을힘을 다해 달리는 공 씨를 따라잡았다.

어둠 속에 피어나는 향기처럼 은밀하고 재빠른 보법.

암향표의 묘리로 움직이는 그를 한낱 성벽의 보초병이 떨쳐낼 수 있을 리가 없다. 붉은 늑대는 막 봉화대에 불을 올리려던 공 씨의 목을 뒤에서 일격에 벴다.

툭.

바닥으로 떨어진 공 씨는 여전히 겁에 질린 얼굴이었다.

“……!”

공 씨의 몸은 머리가 떨어진 뒤에도 자신이 죽은 줄 모르는 것처럼 허우적거리다가 풀썩 옆으로 쓰러졌다.

붉은 늑대는 물끄러미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봉화대 자체를 향해 칼을 휘둘렀다.

서걱―.

돌을 쌓아 만든 봉화대가 무참히 썰려 반 토막이 나는 모습은 보통 사람이 보기엔 너무나 비현실적인 광경이었다.

우르르 쏟아지는 돌덩이들이 목을 잃은 공 씨의 몸을 무덤처럼 덮어 주었다.

공 씨는 봉화를 올리는 데는 실패했지만 딱 하나 성공한 게 있다.

공 씨의 호각 소리에 깬 초소의 병사들이 각자 무기를 들고 우르르 몰려나온 것이다.

붉은 늑대는 장성 안쪽으로 훌쩍 뛰어내렸다. 십 장에 달하는 높이를 단박에 뛰어내리는 모습에 몰려든 병사들이 경악하여 눈을 부릅떴다.

수십 명의 병사들이 그를 향해 날카로운 창과 활을 겨누었다.

그들은 붉은 늑대에게서 범상치 않은 기색을 느끼고는 그의 움직임을 극도로 경계했다.

“누구냐!”

“침입자다! 사로잡아라!”

“석 장군님을 불러! 어서!”

이곳이 뚫리면 곧바로 산서 대동이었다. 묘아장, 선부나 울주. 그 후엔 거용관이다.

북경의 코앞까지 뚫리는 것이다.

“네놈은 누구냐!”

서둘러 뛰쳐나온 참장 석정(石鼎)은 소림의 속가 제자 출신으로 무공을 제대로 익혔던 사람이었다.

십팔반병기에 능한 소림 무맥.

게다가 무과까지 통과한 인재이니 창을 겨누는 자세가 안정된 제대로 된 고수다.

한데 붉은 늑대는 그런 그를 힐끔 보았을 뿐 그다지 의식하지 않았다.

오히려 주변의 동태를 살피고, 포위한 병사들이 몇 명인지 숫자를 세는 여유까지 선보였다.

“생각보다 많지 않군.”

한어가 능숙했다.

이민족의 복색을 했지만 한족이 분명했다.

“이놈! 어서 정체를 밝혀라!”

석정이 한 발 앞으로 내디디며 창을 상단세로 겨누는 순간, 그는 눈앞에서 거대한 나무 한 그루가 자라나는 듯한 환상을 보았다.

“흡?”

압도적인 무형기.

사람의 몸통만큼이나 두꺼운 나뭇가지에서 수백, 수천 송이의 꽃이 꽃잎을 피워 내는 듯했다.

천지 사방.

피할 곳은 없다.

나름 무림 강호에서도 통할 만큼 무공을 익혔다 자부하던 석정은 단 일 수에 무력화되어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이건……!”

창을 내밀기도 전에 무형기에 압도되었고, 그 후에는 마치 점혈을 가하듯 혈 자리를 노리고 오는 칼 끝에 어깨를 찔렸다.

“컥!”

창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석정은 창을 놓치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썼지만 그 전에 멱살을 잡혀 앞으로 훅 끌려가는 게 먼저였다.

“석 장군님!”

경악한 병사들이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소리쳤다.

산서쪽 관문 최고의 고수가 단 일 수에 쓰러진 것을 그들은 믿을 수가 없었다.

석정은 더했다.

그는 크게 경악하여 이민족의 복장을 한 사내를 올려다보았다.

“매화……! 화산!”

“그래.”

붉은 늑대.

아니, 강호 무림에선 오매검마라 불리던 육모담은 무감정한 목소리로 석정의 추측을 긍정했다.

“내가 돌아왔다.”

육모담은 한 손으로 석정을 제압한 채 관문을 지탱하던 지지목을 베어 버렸다.

거기에 두꺼운 밧줄까지 끊어 버리자 거대한 관문이 서서히 바깥쪽으로 열리기 시작했다.

“저건……!”

“적습! 적습이다!”

“어서 봉화를 올려!”

“봉화대가 무너졌어!”

“석 장군님! 어떻게 해야 합니까!”

혼란에 빠진 상황 속.

진정으로 그들을 절망케 할 무리가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두두두두―.

거센 땅울림과 함께 장성 밖의 관도에서 거대한 흐름이 몰려오고 있었다.

선두에 선 자는 에센 타이시.

오이라트의 기마병이 지평선 끝에서부터 가득 몰려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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