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풍운객잔 2부-456화 (585/686)

19권 2화

제39장 북벌종횡(北伐縱橫) (2)

정통 십사 년. 초여름이 다가오는 칠석 즈음. 북원의 후예인 오이라트 족장 에센 타이시가 이만 병사를 이끌고 산서의 장성으로 쳐들어왔다.

동쪽으론 만주, 서쪽으론 감숙에 이르는 네 개의 방면에서 기습을 감행한 에센의 병력은 명나라에 큰 충격을 주었다.

원래 나라 대 나라의 전쟁은 이런 식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사신을 주고받고, 선전포고를 담은 서칙들을 교환한 뒤 일시를 정해 당당히 싸우겠노라 밝히고 싸움을 하는 것이다.

심지어 오이라트와 명나라는 얼마 전까지 국경에서 마시(馬市)를 열고 하하호호 환담을 나누며 거래를 하던 사이가 아니던가?

이런 식의 공격은 도적 떼나 할 법한 짓이었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과 역시 북쪽의 오랑캐들은 어쩔 수 없다는 반응이 섞여서 나왔다.

명나라의 모든 관료는 답을 원했다.

오이라트는 대체 왜 공격을 했는가?

그들은 얼마나 강하며, 장성을 공격한 그들의 목적은 무엇인가?

그런데 막상 원인을 캐다 보니 이상한 정보들이 튀어나왔다. 마시(馬市)는 원래 말을 제값보다 더 비싸게 쳐 주는 조공 무역인데 날이 갈수록 규모가 커졌다거나, 그런 와중에 ‘누군가’가 명 황실 재원에 딴 주머니를 차고 말값을 오분의 일밖에 쳐 주지 않았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원래 오이라트 쪽에서 지속적으로 마시의 규모를 올려 달라는 제안을 하고 혼담까지 넣었다는 사실도 알려졌다. 황제의 어전에 올라가기 전에 모든 상소문을 확인하고 관리하는 ‘누군가’가 그걸 잘라 버려서 허가는커녕 황제가 확인조차 못했다는 사실도 알려졌다.

천하 만민이 분노할 만한 전횡이었으나, 그 ‘누군가’가 누군지를 너무나 잘 알고 있는 관료들은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지금은 그 누군가의 천하다.

그걸 부정할 수 있는 대가 센 인물은 이제 명 황실에 몇 명 남아 있지도 않았다.

에센이 남하했다는 소식은 반나절이나 늦게 전해졌고, 황실에선 급한 대로 황실의 종친인 서렬후 송영(宋瑛)과 무진백 주면(朱冕)에게 명을 내려 기존의 변경 수비대를 이끌고 오이라트를 막도록 했다. 그리고 선봉군의 책임은 환관인 태감 곽경(郭敬)에게 맡겼다.

누가 봐도 탐탁지 않은 인사였으나 이 역시도 나서서 비판할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지금은 국가적인 비상 상황.

명나라는 대대적으로 군사를 모아 나라를 지키기 위해 움직이고 있었다.

“석정이 죽었다고? 그 정도의 무인이 몸을 뺄 시간조차 없었단 말이냐? 심지어 봉화도 올라오지 않았어!”

명 군부 참장 오호(吳浩)는 도저히 상황을 납득하지 못하고 소리를 질렀다.

사건을 증언하던 병사는 어깨를 움츠린 채 잔뜩 기가 죽어 눈치만 보았다.

참장(參將)이라 하면 상장군이나 대장군을 보좌하는 고위 무관이다.

계급도 계급이거니와, 참장 오호에게는 또 다른 별명이 있었다.

산서 군문(軍門) 제일의 고수.

그는 팔파일방이라 불리는 강호 무림의 정통 무문을 이었으며 무과의 장원을 따낸 유능한 인재였다.

덩치도 크고 성정도 불같은 사내다.

그런 그가 소리를 지르자, 일개 병사는 감히 숨도 크게 쉬지 못했다.

“제, 제가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습니다. 습격자는 한 명이었으며, 그자가 귀신 같은 몸놀림으로 보초를 서던 이와 석 장군을 죽였습니다. 그 뒤엔 관문이 열렸고, 거기로 오이라트의 기마병들이 들이닥쳐서…….”

“한 명? 믿을 수 없다. 그런 고수가 장성 너머에 있단 말이냐.”

“이, 이 모든 것은 사실입니다. 만약 아니라면 목을 치셔도 좋습니다.”

오호는 넙죽 엎드려 죽을죄를 지었다 청하는 병사의 몰골을 보고는 혀를 차고 말았다.

병사는 얼마나 넘어지고 굴렀는지 흙투성이에 처참한 몰골이었다.

사태를 전하는 전령이긴 했으나, 관문의 모두가 봉화도 올리기 전에 모조리 살육당하는 상황에 혼자라도 살아남는 일은 매우 어려웠을 것이다.

“됐다. 서렬후와 무진백께서 변경군을 이끌고 양화구(陽和口)를 지키러 오실 테니, 너는 내게 말했던 그 모든 사실을 그분들에게 낱낱이 고하거라.”

“존명!”

결연하게 외치는 병사를 마지막으로 일별한 채, 오호는 자신이 급히 이끌고 온 오천의 군사와 함께 사건이 벌어졌다는 관문으로 향했다.

서렬후 송영과 무진백 주면이 장성을 방어할 변경 수비대를 이끄는 것은 오호가 보기엔 그리 탐탁지 않은 일이었다.

그들은 황실의 종친일 뿐 전쟁은커녕 흔한 싸움 한 번 안 겪어 봤을 인물들이다.

그런 자들이 거칠기가 야생마 같은 북방의 오랑캐들을 상대할 수 있을까.

보자마자 도망치지나 않으면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나라의 인사가 왜 그렇게 흘러가는지는 잘 알고 있다. 군령을 지닌 장수가 반란을 일으킬까 봐 그러는 것 아니겠는가.

도독급의 대장군들은 대부분 황실 종친과 혈연으로 맺어진 귀족들이라는 사실을 이미 잘 알고 있으나, 막상 이런 상황이 되니 그렇게나 불안할 수가 없었다.

‘내가 막아야 한다.’

오호는 다시 한번 마음을 다졌다.

산서 군문 최강의 무인이자, 그나마 군관으로서 경험이 있는 자는 오로지 자신뿐이었다.

그는 마음을 다지며 양화구를 지나 묘아장(猫兒庄)에 들어섰다.

이곳은 장성 밖.

관문이 뚫린 이상 묘아장은 이미 적지나 다름없다.

오호는 군의 전력을 다시 점검했다.

그가 이끌고 온 병사들의 수는 오천.

모두가 기병인데 그중 오백 정도는 자신이 직접 훈련시킨 정예병력이고, 나머지 사천오백은 군문에서 훈련만 받았을 뿐 실전 경험은 거의 없는 병사들이었다.

‘급하게 끌어모으느라 어쩔 수가 없긴 했지만, 정예가 너무 적다. 오래 싸우기엔 부족한데.’

오호는 뒤를 힐끔 바라보았다.

멀리 보이는 장성 인근 양화구가 변경 수비대의 주전장(主戰場)이다.

그곳에서 서렬후 송영과 무진백 주면은 공성하며 방어전을 펼칠 것이다.

자신이 할 일은 지금부터 적의 동태를 살피며 시간을 끄는 일이니, 서렬후 송영은 방어진의 편성이 완료되면 봉화를 올려 신호를 주기로 했다.

“부장 두 사람은 각각 스무 명씩을 이끌고 묘아장 주변을 정찰하라.”

“존명!”

정찰병들이 양옆으로 갈라져 멀어지자 흙먼지가 피어올랐다.

일각의 시간이 흐른 후, 이변이 없자 조심스레 묘아장의 중심부로 나아간 오호는 길 한가운데 가부좌를 틀고 앉은 한 사내를 발견했다.

“허어?”

오호는 감탄했다.

이민족 복장의 사내다.

짐승 가죽을 안감으로 덧댄 갑옷을 입고, 머리에는 깃털로 장식한 투구까지 썼다. 목에 붉은색 천을 띠처럼 두르고 있는 모습이 특이했다.

묘아장엔 원래 일반 농민이나 유목민들도 살았을 테지만 지금은 인기척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죽은 듯한 마을.

고요한 땅에서 오천의 병사를 기다리고 있는 한 사람이라니.

“네놈이군. 석정을 죽이고 관문의 병사들을 몰살한 자.”

무인은 무인을 알아보는 법.

한눈에 상대의 강함을 알아챈 오호는 지체 없이 칼을 뽑아 들었다.

오천 명의 병사들도 한 사내를 향해 일제히 칼과 창을 겨누었다.

한 명 대 오천 명이다.

기가 죽을 만도 하건만, 이민족 복장을 한 사내는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다.

“에센은 어디에 있나? 그는 무엇을 바라고 있지?”

오호의 질문에 대한 답은 들을 수 없었다.

사내가 칼을 뽑으며 일어서는 순간 섬뜩한 예감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위험하다. 이자, 상상 이상이다.’

아무리 강한 무인이라고 한들 사람이라면 오천의 기마병을 눈앞에 두면 기가 죽는다.

참장 오호 역시도 산서 최강을 자부하는 절정 고수지만, 그럼에도 갑주를 갖춰 입은 정규 병사가 상대라면 한 번에 백 명이나 감당할 수 있을까 싶다.

무인이라고 해서 전부 금강불괴가 되는 것은 아니다.

특수한 외공을 익히지 않은 이상 무인도 똑같이 살아 숨 쉬는 사람이며, 아차! 하면 한 번의 실수로 목숨이 날아갈 똑같은 인간이다.

마음이야 수백, 수천도 이긴다 믿고 싶지만 현실은 그리 녹록치 않다. 하늘을 덮을 만큼 쏘아 대는 화살은 어찌할 건가?

두꺼운 갑주를 입고, 무예를 배운 병사들이 주변을 둘러싸고 사방에서 칼을 찔러 오는데 그걸 어떻게 다 이기나?

한데 눈앞의 사내는 마치 이겨 버릴 것 같은 분위기다.

숫제 홀로 오천을 상대할 것처럼 섬뜩한 기백을 뿜어내니, 폭이 넓은 이민족 특유의 만도가 관우의 청룡언월도처럼 보일 지경이다.

‘아무리 그래도 말이 안 되지. 저자가 아무리 강해도 오천을 홀로 쓰러뜨릴 리가 없다. 믿는 바가 있는 게야. 저자는 시선을 끌 뿐 매복이 있는 게 분명하다.’

고민은 잠시.

오호는 군령을 지닌 장수로서 명령을 내렸다.

“매복을 경계하라! 이조! 저자를 붙잡아라! 반항한다면 죽여도 좋다!”

잘 훈련된 병사들은 오호의 지시를 단번에 이행하였다.

서로 간의 방향을 조금씩 틀어서 크게 원형을 그리는 진법으로 변형했다.

창은 바깥쪽을 향했고, 날카로운 시선으로 사방을 살폈다. 만약 화살을 쏘거나, 바깥에서 습격을 가하면 언제든 반응할 수 있는 진형이다.

“장군의 명이다! 순순히 오라를 받으라!”

쩌엉!

“……!”

하지만 오호의 예상은 틀렸다.

상대는 ‘어느 정도 강한’ 이민족의 무인이 아니었다.

역사가 깊은 화산의 무학.

집혼기를 토대로 한 삼 갑자가 넘는 내공.

거기에 철천지원수를 잡겠다는 일념 하나로 피나는 노력을 하고, 북원에서의 치열한 실전 경험까지 더해진 자.

이 순간 군신(軍神)에 가장 가까운 사내였던 것이다.

“크헉!”

푸확―!

가까이 다가갔던 기병의 창이 일격에 부러지고, 말목과 함께 가슴이 베여 쓰러졌다.

손속이 과한가?

아니다.

육모담은 오히려 힘을 조절하고 있었다.

사람을 반 토막 낼 힘이 있으나 그는 그런 식으로 힘을 낭비하지 않았다. 딱 사람을 쓰러뜨릴 만큼의 힘.

그 정도의 힘만을 사용하며 상대를 일격에 살해한다.

싸움은 순식간에 급물살을 탔다.

육모담은 일보, 일보 걸음을 옮길 때마다 칼을 한 번씩 휘둘렀다.

차분한 걸음걸이인데 도법은 그렇지 않았다.

두꺼운 갑주를 입은 병사들이 사나운 일도를 감당하지 못하고 피를 뿜으며 픽픽 쓰러져 갔다.

오호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부릅떴다.

양중호(羊中虎)라는 말이 딱 맞다.

그야말로 양 떼 속에 호랑이 한 마리가 들어간 것처럼 저자를 아무도 막지 못하고 있지 않은가.

“저런 자가 있다니?”

오호는 뒤를 돌아보았다.

멀리 보이는 장성.

양화구의 봉화는 아직 올라오지 않았다.

‘일반병으로는 상대할 수 없다. 큰일이군. 설마 저 한 명 때문에 일이 잘못되면……?’

아직 오이라트의 에센 타이시의 정예 병사들은 구경도 못한 상황이다.

고민이 되었으나, 다행인지 불행인지 아직 매복은 없었다.

“물러나라! 방벽을 구축하라! 방패! 활!”

처척―.

순식간에 오호의 전면에 방패를 구축한 기마병들 뒤에서 활을 꺼내 든 일백 명이 일제히 상대방을 겨누었다.

육모담은 물러나는 병사들을 붙잡지 않았다.

처음부터 끝까지 그의 박자는 변함이 없다.

한 걸음, 한 걸음.

느리지도 그렇다고 빠르지도 않은 걸음걸이로 일정하게 다가오는 그는 마치 피할 수 없는 죽음의 화신과도 같다.

“개진(開陣)! 일조의 정예병만 나를 따라라!”

기마병이 멈춘 채 싸워서야 기마병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선두에 선 오호를 시작으로 오백의 기마병이 내달리는 모습은 그것만으로도 장관이다.

비스듬하게 호선을 그리며 달려간 오호는 제자리에 우뚝 선 육모담에게 화살을 퍼부었다.

피슈슈슈슉―!

백 개의 화살이 순차적으로 열 번이나 쏟아졌는데, 육모담은 귀찮은 듯 검을 몇 번 휘둘러 날아드는 화살들을 다 튕겨 냈다.

하지만 그사이 그들은 귀중한 시간을 벌었다.

“챠하아아앗―!”

돌진하는 기병.

달리는 기마의 파괴력까지 더해진 오호의 검이 비스듬하게 육모담을 베고 지나쳤다.

쩌어엉!

“흡.”

오호는 일순간 들고 있던 검을 놓칠 것 같은 큰 충격을 입었다.

퍽!

섬뜩한 소리와 함께 오호의 턱 끈이 끊어져 쓰고 있던 장군의 투구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엄청난 쾌도다.’

오호는 식은땀을 흘렸다.

일검을 겨뤄 보고 알았다.

그가 급하게 몸을 꺾지 않았다면 그는 일격에 목이 날아갔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