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권 3화
제39장 북벌종횡(北伐縱橫) (3)
오히려 상대방이 놀란 듯 두 눈에 이채를 띤 채 오호를 돌아보았다.
서걱―.
무심하게 휘두른 칼이 또 다른 정예 병사의 몸과 머리를 분리했다.
“이놈!”
실력이 뛰어난 정예 병사만 골라 죽이는 건 분명히 의도가 있을 것이다.
기마병의 특성상 한 번 공격하고 나면 크게 호선을 그리며 돌아와 다시 공격해야 한다.
그사이 오호의 뒤를 따르는 오백의 정예병들이 제각각 기마의 힘을 담아 공격을 가했다.
채채챙―!
후웅―.
쒜에엑!
검, 도, 창.
화살까지 날아갔으나 제대로 적중된 공격은 단 하나도 없다. 상대방의 몸놀림은 비록 적이지만 경탄이 나올 정도였다.
신법은 가볍고, 내리치는 칼은 경쾌하면서도 사납다.
기마병들은 분해서 이를 갈면서도 기마를 멈추고 무리해서 공격하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가자!”
오호의 지시는 명확했다. 크게 호선을 그리며 다시 육모담을 향해 돌진하는 군세는 마치 소용돌이와 같다.
군기(軍氣)가 치솟는다.
오백 명의 선두에 선 오호에겐 혼자의 힘뿐만이 아니라 병사들이 뒤를 받쳐 주면서 생기는 막강한 기세가 함께하고 있었다.
오호는 말 고삐를 놓아 버리고 허벅지의 힘만으로 안장을 꽉 조여서 몸을 지탱했다.
그는 검을 양손으로 거머쥐고 검날을 기울였다.
오호는 해남검파에서 검을 익힌 사람이었다.
남해검(南海劍)은 흔히 정도에서 어긋났다는 평을 듣기는 하지만 그 강함만큼은 전 무림의 인정을 받는다. 기세가 번개같이 빠르며 날카로워 상대방에게 반드시 상처를 입히는 실전 중심의 살기 가득한 검술이었다.
“챠하앗!”
오호는 전력을 다했다.
상대방은 강하다.
힘을 남길 만한 여유 따윈 없었다. 가진 내공을 모조리 끌어 올리자 검 끝에 기운이 단단하게 맺혔다.
두두두두―.
군기까지 함께하는 막강한 일격.
그에 반해 육모담은 제자리에서 오로지 오호만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러다 펄쩍.
육모담이 위로 뛰어오르는 순간 거대한 나무 한 그루가 자라나듯 육중하고 안정적인 무형기가 오호를 덮쳤다.
감히 맞상대할 수 없는 거대한 무학의 흐름이 그를 휩쓸었다.
‘이 검술은!’
오호는 큰 충격에 휩싸였다.
전면을 덤불처럼 뒤덮은 수백 개의 나뭇가지.
그 나뭇가지에서 톡톡 터져 나가는 수천 개의 꽃잎을 감히 누가 검으로 막을 수 있을까.
“으아아악!”
오호는 악을 쓰며 검을 휘둘렀다.
설령 다 막지 못한다 한들 최선을 다해 남해검을 전개하는 것만이 그가 살 수 있는 길이었다.
비스듬히 기울인 검으로 날카로운 참격이 찰나의 순간을 쪼개며 수십 번이나 터져 나갔다.
푸화학!
오호는 전신을 난도질당하면서도 급히 말의 고삐를 옆으로 잡아챘다.
히히힝!
그만한 무공에 당하고도 즉사는 하지 않았으니 그게 다 갑옷을 입은 덕분이다.
다만 오호는 자신의 한쪽 눈이 갑자기 꺼멓게 변해 보이지 않음을 느꼈다.
“쿨럭.”
삐이이―――.
기침을 한 번 했을 뿐인데 양쪽 귀에서 이명이 들린다.
눈과 귀, 거기에 반고리관까지 큰 타격을 입었다. 머릿속이 아찔했다. 그 어느 때보다 죽음이 가까이 왔음을 느꼈다.
‘이자는 그냥 고수 정도가 아니다. 기마를 타고 싸워선 승산이 없어. 이 정도 무공이면 천하를 넘본다.’
무림 십대고수라 불리는 이들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명성 높은 팔파일방.
그 안에서도 이만한 무공을 지닌 자는 몇 명이나 있을까.
정면 대결로는 필패.
그러니 도망쳐야 한다.
그런데 도망치면?
그다음은 승산이 있는가? 오천 명의 병사들을 방패막이로 놓고 자신이라도 도망쳐야 할까?
습관처럼 돌아본 장성 양화구에는 아직도 봉화가 오르지 않았다.
으득―.
오호가 고통과 분노를 이겨 내기 위해 이를 악무는 사이, 육모담은 연이어 달려드는 기마병들을 향해 무시무시한 참격을 연이어 뿜어냈다.
두 번의 돌격으로 유의미한 상처는 입히지 못했다.
상대방의 갑옷에 생채기는 좀 남겼으나 그뿐.
오히려 이쪽의 정예 기마병들만 쓰러졌으니 손해도 이런 손해가 없다.
“큭.”
오호는 하나만 남은 눈으로 육모담을 응시했다.
“화산의 무예를 쓰는 자여. 이름을 알고 싶다.”
“붉은 늑대.”
“그런 오랑캐의 별호 말고 이름은 없는가?”
“잊었다. 의미도 없고.”
육모담은 오히려 오호를 노려보았다.
아까와는 다른 태도였다.
오호의 남해검을 본 뒤에 생겨난 감정이었다.
“너도 배신자였던가. 해남파. 남해검문의 무공을 익혔음에도 관직에 올라 아첨을 하는 꼴이라니!”
짐승처럼 으르렁거리는 목소리엔 뜻 모를 분노만이 가득했다.
‘화산…… 화산……. 그렇군. 흑시군에게 멸문지화를 당하고 황실을 원망하는가.’
오호는 육모담의 심정을 이해하고 쓰라린 심정이 되었다.
매화검을 쓰는 자이니 화산과 관련이 있는 무인일 터.
그렇다면 똑같이 박해를 받은 구파일방의 무인들 중에 그들을 박해한 흑시군에 몸담은 자가 있다면 배신자로 보일 것이다.
육모담은 사납게 노려보다가 갑자기 호각을 불었다.
삐리리릭―――.
날카로운 소음과 함께 천하가 소란스러워졌다.
땅이 울고, 하늘이 진동했다.
황급히 주변을 둘러보니 멀리서 까마귀들이 날아오르는 모습이 보였다.
무언가에 놀란 모습.
대규모의 인원이 이곳으로 가까워지고 있었다.
“어찌 이렇게 빨리?”
지평선 너머에서 달려오는 것 같은데 가까이 다가오는 속도가 상상을 초월했다.
오호는 핏대를 세워 소리쳤다.
“진형을 갖춰라! 전투를 준비하라!”
추상 같은 외침에 오천의 기마병이 싸움을 준비한다.
“양화구로 퇴각한다! 말을 달려라!”
육모담은 그런 오호의 지시를 비웃었다.
“그게 가능할 것 같은가?”
이미 움직이기 시작한 오천 명의 흐름 속에서, 육모담의 존재는 흐름을 방해하는 개울 한가운데의 바위와 같았다.
육모담의 말이 맞다.
도망치려면 아까 뒤도 보지 않고 도망쳤어야 한다.
괜히 육모담을 잡겠다고 진형을 펼친 탓에 도망칠 시점을 놓치고 말았다.
“이놈!”
오호의 예상보다 오이라트의 기병들은 훨씬 더 움직임이 빨랐다.
묘아장을 원형으로 크게 둘러싸는 기마병의 속도가 상상을 초월했다. 병력은 얼추 보아도 이만에 달했다.
지평선을 메우는 이민족 군사들은 지옥에서 기어나온 아귀들처럼 사납고 거칠어 두려운 기백을 발했다.
특히 그들의 선두에 선 자.
그 누구보다 건장하고 강렬한 분위기를 지닌 이민족의 사내가 있다.
멀리 떨어져 있음에도 오호는 똑똑히 볼 수 있었다.
그 사내가 양손으로 무언가를 들고 있음을.
그가 손을 높이 들어 올리자 익숙한 얼굴 두 개가 보였다. 아까 오호가 정찰을 보낸 조장 두 사람의 머리를 양손으로 들고 있었다.
이민족 사내는 씩 웃었다.
여유로운 그의 표정은 마치 사냥감을 잡은 것을 확신한 사냥꾼의 그것과 같았다.
“이놈들……!”
그 순간 오호는 천명을 느꼈다.
이곳이다.
명나라의 국운이 기울고 있는 이 전쟁 최초의 싸움.
오이라트의 침공을 맞아 선봉의 역할을 맡은 참장 오호, 최후의 결전은 바로 이곳에서 끝을 맺는다.
“무기를 들어라! 돌파한다!”
싸울 것인가, 말 것인가.
오호가 목숨을 걸 각오로 노려보자 육모담은 굳이 그를 막지 않고 옆으로 비켜섰다.
오호는 이미 만신창이인 몸.
어차피 비참한 최후가 예정된 사내를 굳이 죽일 필요는 못 느낀 듯한 모양새다.
오히려 그 모습을 보며 오호는 큰 갈등을 느꼈다.
차라리 이자에게 모두가 달려들어야 할까?
물론 오천 명이 모조리 달려들면 한 명을 못 죽이겠냐만, 대군에 포위가 되었는데 그런 짓을 하는 것은 자살행위나 마찬가지다.
‘나는 최후까지 싸울 것이다.’
육모담의 싸늘한 웃음을 마지막으로 눈에 담은 채, 오호는 전력을 다해 말에 박차를 가했다.
두두두두―.
육모담의 모습이 멀어진다.
그런데 오이라트의 기병들은 명군의 기마병들을 비웃듯 너무나 쉽게 그들의 속도 이상으로 말을 달렸다.
아무리 달려도 거리가 벌어지질 않는다. 심지어 명군의 기마병은 잘 닦인 관도를, 오이라트의 기마병들은 다듬어지지 않은 돌길을 달리는데도 그렇다.
그뿐인가?
여유롭게 옆에서 말을 달리던 그들이 에센의 지시에 맞춰 일제히 몸을 틀어 화살을 하늘로 겨누었다.
피슈슈슈슈슉―.
하늘을 향해 쏘아지는 화살들.
잠시 후, 벌 떼가 몰려드는 듯한 소리와 함께 오호가 이끄는 기마대의 머리 위가 까만 화살들로 뒤덮였다.
***
북경의 자금성.
문무백관들이 모여 열린 회의에서 한 사내가 열변을 토했다.
건장한 체구, 고집스러운 외양의 중년 사내는 피가 끓는 듯한 심정으로 무릎을 꿇고 간청했다.
“폐하! 신(臣)이 장성을 침공한 오랑캐들을 패퇴시키겠나이다! 부디 저를 보내 주십시오!”
병부시랑 우겸.
일찍이 오이라트의 위험성을 경고하고 성벽을 높이고 방비할 것을 건의했던 우국충정의 사내였다.
그는 오로지 나라를 아끼는 마음만을 담아 외쳤으나 용상의 반응은 싸늘했다.
천자의 곁에서 조언을 하는 독사 같은 자가 있었던 탓이다.
“지나치군요, 병부시랑. 나라의 군권은 오로지 폐하께서 결정하실 일입니다. 소리를 지른다고 되는 일이 아니에요. 폐하께서 용단을 내리실 수 있도록 충분한 시간을 드리세요.”
냉랭한 목소리에 우겸은 참지 못하고 눈을 부릅떴다.
“이렇게 여유를 부릴 시간이 없소. 묘아장에서 참장 오호가 장렬하게 옥쇄하고, 서렬후와 무진백은 양화구를 지키느라 힘든 싸움을 겪고 있다고 들었소. 지체할 시간 없이 지금 당장이라도 군을 결집해 바로 출격을 해야 한단 말이오!”
“애초에 방비를 잘했다면 없었을 싸움이에요. 병부시랑으로서 국경을 제대로 살피지 못한 책임이 있음에도 이리도 목소리를 높일 수 있다니. 어쩜 이리 뻔뻔한가요?”
“……나는 오이라트를 경계하고 성벽을 보수해야 한다는 의견을 꾸준히 내놓았소. 왕 태감, 내가 정녕 마시(馬市)에서 생긴 일을 꺼내야 하겠소? 이 사태가 왜 벌어졌는지 몰라서 하는 말씀이오?”
“하! 그때 그 결정은 폐하께서 내리셨어요. 나를 통해 폐하를 탓하는 것인가요? 정녕 이 사태의 책임을 폐하께 물어야겠어요?”
우겸은 크나큰 분노로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아무리 그래도 황제에게 책임을 돌리냐는 질문에 긍정을 할 수는 없는 일이다.
우겸은 이를 갈 듯 대답했다.
“폐하께 책임을 묻는 것이 아니오. 난 그대에게 책임을 묻는 것이오, 왕 태감.”
왕진의 시대.
환관들이 황실을 장악하고 동창에서 역모죄를 만들어 내는 이런 시대에 왕진을 비판하는 건 보통 용기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왕진은 싸늘하게 웃었다.
가소롭다는 듯한 웃음이었다.
“나는 조언자일 뿐 폐하께서 결정하신 일에 불만을 토로하니 그게 곧 폐하께 책임을 묻는 것이지요. 다시 묻지요. 병부시랑 우겸, 폐하께 책임을 묻는 건가요?”
“……폐하께 책임을 묻는 것이 아니오.”
“좋아요. 그럼 더는 그 이야기를 꺼내지 말도록 하세요. 마시의 이야기요? 그거라면 얼마든지 말할 수 있습니다. 오랑캐들이 이천 필의 말을 팔아 놓고 삼천 필을 팔았다고 거짓말을 하는데 어찌 돈을 많이 주나요? 귀한 황실의 재원을 그런 곳에 낭비할 수 없어 행한 일입니다.”
“말값을 절반도 치르지 않았다고 들었소.”
“감히 대국(大國)을 기만하려 드는 자들에게 본때를 보여 줬을 뿐이에요. 그동안 내내 이런 식으로 우리를 기만하는데 어찌 제값을 치러 주나요.”
조공 무역은 원래 그런 것이라는 본래의 사정이야 어쨌든 당장 이곳에서 왕진이 하는 말에는 틀린 점이 없었다.
십수 년간 피바람이 부는 황실내부에서 입담으로 살아남은 자를 우겸이 말싸움으로 이길 수 있을 리가 만무했다.
왕진은 기세등등한 눈빛으로 우겸을 깔아본 뒤, 용상에서 고민하고 있는 정통제 주기진에게 공손히 허리를 굽히며 말했다.
“폐하, 엄연히 병부상서 광야가 있는데 병부시랑의 이야기를 시시콜콜 들어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싸움터에 나서겠다는 충정만은 높이 사되, 병부상서에게 의견을 묻는 것이 어떨지요?”
“옳은 말이로군.”
주기진은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고민하다, 조용히 옆에서 기다리고 있는 노장에게 질문을 던졌다.
“병부상서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대가 군을 이끌겠나? 아니면 병부시랑을 보내는 게 옳은가?”
병부상서 광야는 영락제를 모시며 북로전쟁에 안남 정벌까지 함께 한 백전의 노장이었다.
그는 이미 수염이 허옇게 변한 노인이었으나 온갖 사선을 넘어온 자 특유의 형형한 눈빛을 여전히 유지하고 있었다.
광야는 크게 읍하며 말했다.
“병부시랑의 무재(武才)가 뛰어나나 아직은 이 노구의 힘이 더 쓸 만하니 제가 나서는 게 옳다고 생각합니다, 폐하.”
“그렇군.”
광야에게서 원하던 대답이 나오자 왕진은 눈을 빛냈다.
‘좋아. 일이 잘 흘러가고 있다.’
우겸의 상소를 묵살한 일.
마시에서의 사건.
그 모든 것들은 그가 ‘왕진이 했을 법한 일’을 하다 보니 생겨난 사고였다.
이치에 맞으면서 과감하게.
황실의 재원을 아끼면서 한편으론 딴 주머니를 차서 왕진이 운용하는 동창의 운용비를 만들어 내는 것이야말로 왕진이 늘 해 오던 일인 것이다.
그런데 선이 모르는 게 있었으니, 왕진은 몰래 재산을 축적하되 그로 인한 잡소리가 나오지 않도록 한편으론 손해를 본 자에게 과할 정도로 은혜를 베푸는 면도 있었다는 점이다.
선은 암기력과 재능이 뛰어나 왕진을 똑같이 베껴 내었으나 요령이 없어 생겨나는 어쩔 수 없는 빈틈이었다.
‘우겸에게 공을 세울 기회를 줘선 안 된다. 우겸을 보냈다가 승리를 하기라도 했다간 논공행상 때 내 책임을 묻게 되어 버릴 거야.’
위기는 기회로.
사건은 더 큰 사건으로 덮을 수 있는 법이다.
그는 공손하고 활기찬 목소리로 주기진에게 읍소했다.
“폐하, 병부상서께서는 백전노장의 명장이시니 북방의 오랑캐 따위는 일거에 물리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참에 무도한 오랑캐들에게 폐하의 위세를 알리는 게 어떨지요?”
“짐의 위세를 알린다?”
주기진이 눈을 반짝이며 관심을 표했다.
왕진은 속으로 빙긋 웃으며 더욱 깊이 허리를 숙였다.
“예. 대군을 이끌고 폐하께서 직접 친정을 가시면 그 위세를 본 오랑캐들이 크게 놀라 도망칠 것이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