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풍운객잔 2부-458화 (587/686)

19권 4화

제39장 북벌종횡(北伐縱橫) (4)

주기진은 크게 회가 동한 얼굴이었다.

당당한 군주.

화려한 갑주를 입고 수만의 군사들을 움직이는 화려한 황제의 모습을 상상한 게 분명했다.

미간을 찌푸리며 입꼬리를 살짝 올리는 얼굴이 그 증거다.

“짐의 위세를 본 오랑캐들이 도망친다?”

“예. 분수를 모르고 공격한 오랑캐들에게 딱 좋은 처사이지요.장성 안은 우리의 땅. 그들이 무엇을 노리고 쳐들어왔든 저희는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랑캐들이 얼마나 되는 병력을 끌고 왔든 우리는 그 몇 배나 되는 병력을 보내면 될 것이니까요. 숫자가 크게 차이나면 감히 덤벼들지도 못할 것입니다.”

“하긴, 그도 맞는 말이군. 오랑캐 놈들. 이번에 크게 벌을 받아야 다시는 이런 일을 벌이지 않을 테지?”

“지당하신 말씀이십니다. 더군다나 그런 대군을 폐하께서 이끄시면 장성 너머 오랑캐들에게 폐하의 위세가 생생히 전해질 것이옵니다.”

주기진은 왕진의 절묘한 조언에 탄복하며 병부상서 광야에게 물었다.

“병부상서, 오랑캐들의 병력이 얼마나 되는가?”

“양화구에서 확인된 병력은 이만 정도라고 하였으나, 네 곳으로 분산된 병력을 합치면 오만가량 될 것으로 예상됩니다, 폐하.”

“생각보다 적군. 태감의 말이 맞아. 겨우 그 정도의 숫자라면 두려워할 필요가 없겠다. 우린 그의 몇 배…… 아니, 열 배가 좋겠군. 열 배의 병력을 끌고 진군하지.”

“폐하.”

병부상서 광야는 사태가 이상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는 것을 눈치채고는 급히 황제를 달래 보려 했다.

“병력을 움직이는 것에는 큰돈과 식량이 들어가지요. 오만의 열 배라면 오십만인데, 그만한 병사들을 움직이면 국운이 좌우될 중대한 사태가 될 것이옵니다.”

“지금은 국운이 걸린 사태가 맞지 않나?”

“그렇긴 하오나, 저를 비롯한 병부의 용장들을 믿고 보내 주신다면 팔만의 병사로 오랑캐들을 막아 보이겠나이다.”

광야로서는 지극히 상식적이고 합당한 대답이었으나, 그 답은 주기진에게는 납득되지 않는 이야기였다.

주기진은 손바닥으로 용상의 손잡이를 탕! 거칠게 두드렸다.

“그건 하수의 이야기다! 짐은 병법을 통달하진 못했으나, 병부상서의 말대로 고작 팔만으로 저들을 막으려면 상당한 희생이 있을 거라 예상할 수 있다. 짐의 말이 틀렸는가?”

“아니옵니다. 옳은 말씀이십니다, 폐하.”

“그런데 우리가 오십만의 병력을 이끌고 나선다면, 저들은 열 배나 되는 숫자의 차이에 겁을 먹고 감히 덤벼들 생각을 하지 못할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싸우지도 않고 이기는 손자의 병법이 아닌가?”

광야는 크게 놀라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는 솔직한 내심으로 정통제를 크게 평가하고 있지 않았다. 평소에 정무에는 관심도 없이 향락에만 빠져 지내는 모습을 보니 철혈의 황제였던 영락제와 더욱 비교되어 도저히 관심을 둘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막상 이야기를 들어 보니 의외로 제대로 된 근거를 가지고 의견을 내놓은 게 아닌가?

놀라울 따름이었다.

노장의 두 눈에 작은 열기가 타올랐다.

“노신의 생각이 짧았나이다. 폐하께서 이 늙은이에게 부디 가르침을 주시옵소서.”

“가르침이랄 것까지는 없다. 병부상서, 짐의 위엄을 보여 주는 친정(親征: 임금이 몸소 나선 정벌)이다. 돈과 식량 따위를 아껴서야 되겠는가? 생각해 보면 우리는 그간 너무 평화로웠다. 오히려 이를 기회로 삼아 고관들이 전쟁을 경험하고 멀리 장성 너머에 짐의 위세를 떨친다면 향후 백 년에 달하는 평화가 보장될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나라의 참된 이익이 아닌가?”

“폐하의 말씀이 참으로 옳습니다.”

주기진은 영락제를 닮은 의외의 무재(武才)인가?

아니면 단지 화려한 갑주를 입고 전장에 나가고 싶은 철부지인가?

그 진실은 아무도 모르지만 주기진의 주장은 겉으로는 합리적이었고, 반박할 거리가 없는 정론이었다.

심지어 무릎을 꿇고 있던 우겸마저 크게 놀라 고개를 번쩍 들었다가 무거운 표정으로 다시 고개를 숙였다.

‘분명 일리는 있지만, 중요한 점이 빠졌다. 오이라트의 에센은 황금씨족이 아닌 게 안타깝다는 평을 들을 정도로 걸물이라고 했다. 그런 그가 큰마음을 먹고 장성을 넘었는데 숫자가 많다고 해서 순순히 포기하고 돌아갈 것인가?’

우겸은 먹구름이 드리워진 하늘처럼 답이 보이지 않는 상황에 답답하기만 했다.

그 후 병부상서 광야가 주기진의 언변에 크게 감동한 탓에 이야기는 일사천리로 진행되고 말았다.

전국 각지에 병사와 군수 물자를 끌어모으는 전군 동원령을 내리고, 오십만에 달하는 대병력을 정통제 주기진이 직접 이끌고 친정에 나서는 것이 확정되었다.

이는 국운을 건 크나큰 행사이며, 고관들은 모두 출정에 함께 할 의무를 지닌다.

수많은 관료가 전장에 함께 나가라 호명되었으나, 그 이름 중에 병부시랑 우겸은 없었다. 텅 비어 버릴 북경과 병부의 업무를 지속하는 것이 그의 임무였다.

전쟁이란 모든 인력과 자원을 갈아 넣는 용광로와 같아서, 한번 전쟁을 결정하자 마치 천하가 북쪽으로 크게 기운 것처럼 나라가 들썩였다. 한쪽 방향으로 점점 더 속도를 더해 가는 명나라.

그리고 그 흐름에서는 무림 강호도 자유롭지 못했다.

***

소호는 천무련의 연무장 바로 옆에 마련된 중후한 전각 안으로 들어갔다.

천무련은 매일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확장을 거듭하고 있었다.

최근 들어 주춧돌을 세우고 기둥을 올리는 목수들의 망치 소리가 끊기는 날이 없었을 정도다. 도철의 군사기지였던 그 넓은 땅이 모자랄 정도로 천무련엔 하루가 다르게 사람이 늘었다.

그렇게 매번 새로운 전각을 지어 올리지만, 그럼에도 아직 이만큼 중후한 전각은 련주의 집무실을 제외하면 천무련에 단 두 채뿐이다.

하나는 총군사인 섭주해가 군사들을 이끌고 있는 문상전(文上殿). 그리고 나머지 한 곳이 바로 소호의 눈앞에 있다.

―무상전(武上殿).

천무련 제일의 문인(文人)인 섭주해가 문상이니, 천무련주를 제외하곤 천무련 제일의 무인(武人)인 패원강은 자연스레 무상이라 불리고 있었다.

딱딱한 글씨체로 적힌 현판이 마치 방문객을 짓누르듯 머리 위에 비스듬히 걸려 있었다.

전각에는 함부로 사람이 드나들 수 없도록 가슴 높이의 담장이 쳐져 있었고 청소를 하거나 상주하면서 건물을 지키는 하인도 없었다.

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더라도 소호는 전각 안에 그가 찾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진즉에 알아채고 있었다.

피부가 저릿저릿했다.

무상전 안은 천무련의 다른 장소와는 공기부터 달랐다.

천무련에 온갖 인재들이 몰려오고 있다지만, 이 정도로 강한 무형기를 발하는 무인은 흔치 않다.

정, 기, 신.

사람이 날 때부터 갖고 태어나는 세 가지 힘을 극한까지 단련한 사람의 무형기는 백 보 밖에서도 느껴질 만큼 강렬했다.

구파일방의 정수를 모아 길러낸 단 한 명의 후계자. 정파의 적통(嫡統)다운 기백이지 않은가.

“무상. 나 왔어요.”

소호는 긴 소맷자락을 흔들면서 헤실헤실 웃는 얼굴로 전각의 문을 열었다.

드르륵―.

마보 자세를 취하고 있던 천무련의 무상 패원강은 소호를 힐끔 바라보았지만 곧바로 동작을 풀지는 않았다.

수련을 급히 중단하고 함부로 자세를 바꾸면 자칫 주화입마에 걸릴 수도 있었다.

게다가 두 사람은 이미 사흘 밤낮 동안 겨뤄 보고 서로 어떤 무공을 익혔는지도 빤히 아는 사이니, 굳이 이제 와서 무공 수련을 엿본다고 칼부림을 낼 만한 사이도 아니었다.

“흐음?”

소호는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마보참춘공(馬步站椿功)을 수련하나 싶었는데 자세히 보니 전혀 달랐다.

앞으로 양손을 쭉 내민 모습을 보면 소호가 익혔던 마보참춘공과는 달랐다. 패원강은 왼손 손가락으로는 불가의 인을 맺고 나머지 오른손으론 계란 하나를 거머쥔 것처럼 가볍게 주먹을 쥐고 있었다.

혹시 나한십팔수(羅漢十八手) 중의 혼원일기세(混元一氣勢)인가 싶었는데 그 또한 아니다.

묘한 자세.

기묘한 위압감이 흘렀다.

마치 어두운 밤중에 나찰상을 본 것처럼 심중의 공포를 자아내는 묘한 기백이 있었다.

“후우우우.”

패원강이 길게 내쉬는 숨이 마치 용의 숨결처럼 뜨거웠다.

호흡만으로도 문가에 서 있는 소호에게 훅― 하니 열기가 끼쳐 들었다.

그러다 툭.

가볍게 거머쥔 주먹이 마치 어린아이의 몸을 건드리듯 정면의 극점(極點)을 살짝 두드리고 재빨리 회수되었다.

후웅―.

통(通).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자연스럽게 소호의 머리 근처를 꿰뚫고 지나갔다.

하늘하늘한 솜뭉치처럼.

그러면서도 가을에 내리치는 마른 벼락처럼 번뜩이는 무언가가 소호가 뒤로 묶은 긴 머리카락을 흔들었다.

멍하니 지켜보던 소호의 얼굴이 밝아졌다.

“와아.”

소호는 감탄했다.

이 세상에 새롭고 신묘한 무공처럼 흥미로운 것이 또 있을까?

그는 패원강이 정권을 뻗었다가 수습하는 동작에서 크나큰 기(氣)의 흐름을 보았다.

단언컨대, 지금까지 어디서도 보지 못했던 움직임이었다.

“대단하네요.”

원래 세상 모든 일은 아는 만큼 보이는 법이다.

거리가 멀리 떨어져 있는데도 분명히 패원강의 권격이 소호에게로 ‘닿았다’가 멀어졌다.

이건 권풍을 쏘았다거나, 권기, 혹은 권강을 뿌려 상대를 격살하는 그런 단순한 무공이 아니다.

굳이 비유하자면 심검(心劍).

패원강은 마음을 다해 주먹을 내질렀고, 그 주먹은 서로 간에 떨어진 거리와 무관하게 찰나의 거리를 좁히며 소호에게 곧바로 닿았다는 이야기다.

이 얼마나 놀라운가?

“그 무공은 이름이 뭐예요?”

“공화존께서 가장 최근에 얻은 심득인데 이름은 짓지 않았다고 하였소. 몇 번이나 물었는데 그때마다 이름이 없는 게 이름이라 하시더군.”

“이름이 없는 게 이름이라고요?”

“난 그냥 무명권이라 부르고 있소.”

“하하핫!”

소호는 오랜만에 진심으로 웃음을 터뜨렸다.

“공화존자께서도 대단하시네요. 아니, 존자의 심득을 넣어 대단한 성취를 이뤘는데 이름이 없는 건 너무하지 않아요?”

“그런가?”

“당연히 그렇죠. 이런 좋은 무공에 이름이 없어서야 쓰나요.”

“으음, 나도 작명에는 소질이 없어서……. 그럼 소형제가 이름을 좀 지어 주겠소?”

“제가요? 그래도 되겠어요?”

“강호에 명성이 높은 천무련주께서 지어 주시면 영광인 일이지.”

땀으로 번들거리는 몸을 천으로 닦으면서 패원강은 너스레를 떨었다.

소호는 잠시 고민하다가 좋은 이름을 떠올리고 환하게 웃었다.

“마음으로 쳐 낸 권격이 천지를 통(通)하고, 깨달은 순간에는 이미 등[背]으로 빠져나오니. 통배권이라 하면 어떨까요?”

“통배…… 통배권이라…….”

패원강은 미묘한 표정이었으나 곰곰이 생각해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할수록 정이 가는 이름이오. 신기하군. 소형제라면 용(龍)이니 천하(天下)니 그런 거창한 이름을 넣을 줄 알았는데.”

“제가요? 왜 그런 생각을 했어요?”

소호는 진심으로 이해가 되지 않아 되물었다.

패원강은 모르는 척 땀만 닦으면서 의뭉스럽게 입꼬리를 씩 끌어 올렸다.

“본인부터가 천무공자 아니오? 하늘이 내린 무(武)라니. 그런 광오한 별호를 쓰는 사람이 이렇게 담백한 이름을 지을 수도 있는 것이오?”

“뭐라고요? 무상, 정말로 나에 대해 모르시네요. 천무공자는 제가 지은 별호가 아니잖아요?”

“그럼 소형제는 본인의 별호가 마음에 들지 않소?”

“그냥 그래요. 익숙해져서 별생각이 없기는 해요.”

패원강은 호탕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소호가 미간을 좁힐 정도로 그의 웃음소리는 컸다.

“흐하핫! 그런 광오한 별호로 불리면서도 그간 별생각이 없다는 점에서 이미 소형제는 특이한 것이오.”

“……그런가요? 뭐, 생각해 보니 그런 것 같기도 하고.”

“보통 사람이 그런 별호를 감당할 수 있었을 것 같소?”

“으음, 무인들이 덤비려나? 그러고 보면 무산학관을 막 졸업했을 때는 저한테도 덤비는 낭인들이 많았어요.”

“그야 당연한 일이지. 하늘이 내려 준 재능이라는데 무인으로서 관심이 생기는 건 당연한 건 아니오?”

패원강은 사내답게 씩 웃었다.

“어쨌든 고맙소. 통배권이라. 생각해 보니 딱 어울리는 이름이군. 상대가 누구든 배를 뚫어 버릴 수 있으니 참으로 강맹한 이름이오.”

“아니, 그런 뜻으로 지은 이름은 아니었는데. 사람이 왜 이렇게 난폭해졌어요?”

“무림 강호는 냉혹한 곳이라오.”

“무림 출두한 후에 조용히 천무련에만 있었으면서 무슨 소리예요.”

무림 강호에서 손꼽히는 젊은 인재 두 사람은 그렇게 시시껄렁한 웃음을 주고받으며 잠시 환담을 나누었다.

“그건 그렇고, 이렇게 찾아온 건 용무가 있는 듯한데. 무슨 일이오?”

“무상, 얼마 전에 이야기했던 것 기억하죠? 내가 북쪽에 가야 한다고 했던 거요.”

“오매검마에게 복수하겠다고 했던 것 말이오? 아니, 잠깐. 그럼 오늘 온 게 혹시?”

“네, 맞아요.”

패원강은 소호가 비를 잔뜩 맞아 축 처진 모습으로 음울하게 이야기했던 한 여인과 그녀를 죽인 자에 대한 ‘복수’를 떠올리고는 크게 놀라고 말았다.

“북쪽에 좀 다녀올게요. 천무련을 부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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