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풍운객잔 2부-460화 (589/686)

19권 6화

제39장 북벌종횡(北伐縱橫) (6)

“자아, 지삼선과 백주가 나왔습니다. 공자님들, 혹시 더 필요한 게 있으신지요?”

“아뇨, 괜찮아요. 잘 먹을게요.”

우몽은 몇 번이나 고개를 숙이며 총총 뒤로 물러났다.

그사이, 조용히 생각에 잠겨 있던 패원강이 고요한 시선을 보냈다.

“그렇군. 할 수 있으니 흑시군을 부순 거고, 할 수 있으니 황실의 견제에 대응해 천무련을 만든 거고. 할 수 있으니 이젠 전쟁에 참가한다는 것이오?”

“제가 해야만 하는 일이니까요. 직접 안 하면 아무도 안 나설 것 같더라고요.”

조금 더 사심을 보태자면 아버지를 뛰어넘고 싶었던 시절의 이야기다.

물론 지금도 그렇지만 그 당시에 소호는 ‘아버지를 넘어서서 나만이 할 수 있는 일’이라는 걸 맹목적으로 좇고 있었다.

“그 말을 들으니 한편으론 이해가 되면서도 참, 극단적이란 생각이 드오.”

패원강은 씁쓸해 보였다.

“소형제, 나는 예전에 공화존자께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소. 그분께서 말씀하시길 문무(文武)를 가리지 않고 너무 뛰어난 자는 평범한 사람을 이해하기 힘들다고 하셨소. 아마 본인께서도 시대를 관통하는 희대의 재능을 지니셨으니 할 수 있는 말이었을 것이오.”

공화존자라면 충분히 그런 말을 할 만한 사람이었다.

소림에서 약관의 나이가 되기 전에 장경각의 모든 무예를 다 익혔고, 문제를 일으켜 한 번 파계되었음에도 멀쩡히 무림 강호를 종횡하던 사람이 바로 공화다.

게다가 그 후에 능력과 업적만으로 다시 소림으로 돌아온 희대의 무인.

검선과 동급에서 논의된다는 사실만으로도 그가 얼마나 뛰어난지 충분히 짐작되지 않는가.

“그분께서 말씀하시길 뛰어난 자가 보기엔 세상에 당연히 할 수 있는 일을 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고 하셨소. 뻔히 결과가 보이는 일인데 그걸 모르고 헤매고 있으니 얼마나 답답하겠소? 어릴 때부터 그렇게 자라오면 결국엔 둘 중 하나가 된다고 하오. 사람에 대한 기대를 완전히 버리고 염세적이고 날카로운 사람이 되거나, 오히려 자신을 바보로 만들어서 주변과 애써 어울리며 살거나.”

“아……. 그런 것도 같네요.”

소호는 공화존자가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알 것 같았다.

“그렇소. 내가 지금껏 본 인재들은 대부분 그 두 개의 범주에서 벗어나질 못했소. 그런데 나는 지금 처음으로 공화존자의 말씀을 벗어나는 자를 보고 있는 듯하오. 사람들에게 실망했지만 염세적이지 않고, 바보가 안 되는 대신 밝은 모습으로 주변과 조화를 이뤄 내는군.”

무슨 말인가 했더니, 감당할 수 없을 만한 극찬이었다.

소호는 쑥스러워졌다.

사실 거창하게 공화존자의 이야기까지 나올 만한 일은 아니었다.

“높은 평가는 감사한데, 저는 그런 천재는 아니에요. 쑥스럽네요. 제가 그동안 뛰어난 사람들을 너무 많이 봐서요. 극찬을 받으면 민망해요. 저어― 멀리 화전촌만 봐도 대단한 어르신들이 너무 많거든요.”

“무의 재능을 말하는 것이 아니오. 재야의 고수가 모래알처럼 많다는 곳이 무림 강호이니 세상에 뛰어난 자는 많겠지. 하지만 그들 중에 ‘할 수 있으니 하는 사람’은 없소. 그 실행력이 대단한 것이오.”

“무상, 그렇게 자꾸 띄워 주면 민망하다니까요? 자, 지삼선이나 드시죠. 이 집 지삼선이 꽤 먹을만해요.”

소호는 노릿하게 잘 익은 가지를 들어 한 입 베어 물었다.

겉은 기름으로 튀겨서 고소하고 안은 부드러운 육즙이 가득해 맛이 좋았다.

“으음!”

소호가 감탄하며 백주를 잔에 따랐다.

이런 맛에 술이 빠질 수는 없는 일이다.

쪼르륵 흘러내리는 투명한 술에서 달큼한 향이 올라왔다.

패원강에게도 권하자 그는 거절하지 않았다.

“무상은요?”

“나 말이오?”

“무상도 마찬가지잖아요? 고르고 고른 정파 최고의 인재. 무골 중의 무골이라 구파일방의 공동 전인이 된 남자. 무상은 공화존자께서 말씀하신 유형 중에 어느 쪽이에요?”

소호가 패원강에게 동질감을 느끼는 부분이 그것이다.

문일지십의 인재.

무공에 한해서는 보기만 해도 상대의 내공 흐름까지 알아낼 수 있는 재능은 흔치 않다.

패원강은 잔에 가득한 백주를 한입에 털어 넣은 다음 웃었다.

“크음, 원래는 염세적이고 날카로운 사람이 될 뻔했으나……. 소형제처럼 할 수 있는 건 뭐든지 하는 사람이 되어 볼까 하오.”

“위험한 분일세. 그런 사람은 나 하나로 충분해요.”

“정상의 자리는 고독한 법이지. 하지만 혼자 갈 생각은 마시오. 내가 대결에서 지긴 했으나 그래도 근소한 차이 아니었소? 금방 따라잡아 버릴 테니 각오해야 할 것이오.”

패원강은 언제나처럼 사내답고 당당했다.

소호는 패원강과의 대결을 떠올렸다.

천무련에 데려오기 위해 사흘 밤낮을 싸웠던 그 싸움은 소호도 가진바 모든 것을 토해 내야 했던 치열한 싸움이었다.

소호가 이긴 것은 그야말로 한 끗 차이.

구파일방의 무예들이 온통 뒤섞여 혼란스럽던 와중에 아주 작은 차이가 승부를 갈라놓았었다.

‘난 그때 내가 오히려 진 것 같은 기분이었는데, 무상은 그 패배가 되게 컸나 보네.’

패원강은 집혼기가 없다.

나중에 들어 보니 대환단과 태청단을 간식 먹듯이 까먹으며 수련했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정말로 올곧은 방향으로 홀로 수련해서 소호와 근사한 무위까지 올라온 것이다.

그야말로 경이로운 일이지 않은가.

조서인을 제외하곤 유일하게 소호가 인정하는 진정한 재능이 패원강이었다.

“남아일언중천금이오. 난 천무련에 들어오기로 했고, 이미 들어와서 한 가족이 되었으니 소형제는 천무련을 걱정하지 마시오. 내 집이라 생각하고 건사해 보이겠소.”

쿵.

잔을 내려놓는 패원강은 한 입으로 두말을 할 사람이 아니다.

곧은 자세, 태산처럼 준엄한 콧대 위로 단단한 눈빛이 자리 잡고 있었다.

소호는 마음이 든든해졌다.

“믿을게요. 아마 이번 전쟁이 끝나고 곧바로 또 다른 싸움이 있을 거예요. 그때는 우리 천무련이 대대적으로 나서야 할지도 몰라요.”

“잘 알겠소.”

패원강은 의문을 갖지 않았다. 신의 있는 모습 또한 그의 좋은 점이다.

“천무련을 잘 부탁해요.”

“소형제, 소형제야말로 보중하시오. 복수를……. 성공하길 바라겠소.”

“해내야죠.”

소호는 자신의 잔과 패원강의 잔에 백주를 한 번씩 더 따라 주었다.

패원강이 자신의 잔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말했다.

“잔이 가득 찼군.”

“더 따라 줄까요?”

“그러다 넘치겠소. 아직 밖이 화창한데 얼마나 마시려고 그러는 거요?”

“전쟁터 나가기 전인데 실컷 마셔 둬야죠. 전 욕심이 많아요.”

“나 참, 세상 사람들은 천무공자가 이렇게 주당인 걸 알긴 하오?”

“모를걸요? 맨날 이슬만 먹고 신선처럼 무공 수련만 하는 줄 알던데?”

“파하핫!”

젊은 인재 두 사람은 서로를 보며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

금룡상회의 회주.

문갑룡은 평범한 하급 관료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글공부와 관직에는 관심이 없었고 어릴 적부터 주산(珠算)과 이문에 밝았다.

천하제일거상 석가장의 대붕상회에서 상도(商道)를 배웠고, 보부상과 온갖 행상의 경험을 거친 뒤에 분타주가 되는 대신 직접 간판을 만들어 자신만의 상회를 만들어냈다.

처음엔 모두가 비웃었다.

장사기반 하나도 없는 놈이 무슨 금룡(金龍)이냐고. 얌전히 대붕상회에서 일하면 탄탄대로일 텐데 뭐하러 위험을 감수하냐고 다들 떠들었다.

하지만 문갑룡은 확신이 있었다.

석가장의 대붕은 날개가 천하를 덮을 정도로 크지만, 그 날개는 그의 것이 아니지 않은가.

오로지 석가장 직계의 것.

대붕상회의 모든 이득은 석씨 성을 지닌 상주들의 날개였다. 문갑룡은 얌전히 남의 날개에 빗질이나 해 주는 건 도저히 성미에 맞지 않아 뛰쳐 나왔다.

그는 늘 공격적으로 살았다.

한 지역으로 찾아가서 그 지역에서 가장 장사가 잘되는 것을 찾고, 그걸 조금이라도 더 좋고, 싼 물건으로 바꿔서 그 지역의 유지였던 상회들을 잡아먹었다.

물론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온갖 일들이 있었고 험한 꼴도 많이 겼었다.

상계(商界)는 무림과 같다.

아니, 어찌 보면 더 치열했다.

찰나의 실수가 내 목숨만 뺏어가는 게 아니다. 자칫 잘못하면 자신의 가족, 자신을 믿고 따르는 상회의 식구들 모두가 목숨을 잃을 수 있는 살얼음판의 연속이었다.

“언젠가, 이런 날이 올 거라고 생각했지.”

문갑룡은 자신이 가장 좋아하던 푹신하고 고급스러운 자단목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는 늘 자신이 깔고 앉던 의자의 보료 아래에서 두툼한 종이 첩과 금룡상회를 상징하는 황금 인장, 그리고 대붕상회에서 환금할 수 있는 눈이 휘둥그레질 만한 금액의 전표들을 차곡차곡 비단 보따리에 넣었다.

언제부터였을까.

아마 금룡상회와 연이 깊은 종삼품 이상의 고위관료들이 하나둘씩 연락이 끊어지기 시작했을 때부터다.

갑자기 그들은 말도 안 되는 죄목이 붙어서 귀양을 가거나, 관직을 파직당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몇 명 관직에 남는 자들이 있었으나 그들은 금룡상회의 연락을 피하고 대화의 자리를 갖지 않았다.

그쯤 되면 눈치를 채지 못할 리가 없다.

금룡상회에는 비상이 걸렸다.

대체 원인이 무엇인지.

누구의 지시로 관부와의 연결이 끊어지고 있는 것인지 파악하기 위해 전력을 다했다.

그런데 상대는 이미 그런 금룡상회의 움직임을 읽고 있는 듯 보였다.

그들은 자신의 정체를 감출 생각도 없어 보였다.

금룡상회의 본점이 있는 하북에 검은 옷을 입은 관인들이 자주 보이기 시작했다.

동창.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밀정 정치의 첨병들이 하북을 샅샅이 헤집고 다녔다.

그들은 무례했고, 행동에 거침이 없었다.

어깨에 검 문양을 새겨 넣은 동창 견검대가 등장하면 하북의 모두가 긴장했다.

그들은 금룡상회가 오랫동안 거래해 오던 지역 상회에 다짜고짜 들어가 금룡상회와의 거래 내역을 들쑤시기를 일삼았다.

가끔 반항하고 의리를 지키려는 상회가 있었으나, 그들은 그동안 듣도 보도 못한 기묘한 죄목이 붙어 곧바로 감옥으로 압송되었다.

이럴 수가 있는 것인가?

하다못해 몽고에 지배를 받던 원나라 시절에도 이런 일은 없었을 것이다.

금룡상회가 최후의 인맥들을 더듬어 이 사태의 원흉이 사례감 태감 왕진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는 이미 사태는 걷잡을 수 없는 상태였다.

그나마 알아낸 점은 있다.

문갑룡이 직접 동창 견검대의 대주에게 일만 냥을 들이밀며 해법을 묻자, 그는 전쟁을 앞두고 군자금이 필요한 탓이니 얌전히 오라를 받으라는 조언을 해 주었다.

기가 찰 노릇이다.

그래도 만 냥의 값은 해 주려는지 원래는 곧바로 잡아가야 하는데, 이틀의 말미를 주겠다는 감사하다 못해 욕이 나오는 배려를 해 주었다.

“딸아.”

문갑룡은 눈물이 그렁그렁한 문주희를 보며 씩 웃었다.

“때가 왔을 뿐이다. 슬퍼할 필요 없으니 네 살길을 찾는 데 전념해라.”

“이건……. 이럴 수는 없어요. 이건 아니잖아요? 어떻게 이렇게 근거도 없이 사람을 짓밟아요?”

“어차피 모든 부는 내가 직접 이룬 것이다. 너도 할 수 있어. 너는 내 하나뿐인 딸이다.”

“난 못해요. 아버지니까 해낸 거예요.”

“너도 할 수 있는 일이다. 자, 받아라. 일평생 부족할 일 없는 자금이다. 내가 상회를 처음 일으켰을 때는 고작 은자 열 냥으로 시작했어.”

“그런 노인네 같은 이야기하지 말고요.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알려 주세요.”

“네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문갑룡은 이미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인 상태였다.

하지만 문주희의 생각은 달랐다.

“아니에요. 분명히 방법이 있을 거예요. 옥에 갇히더라도 거래를 잘하면 다시 나올 방법이 있을 거예요. 돈이야 다 줘 버리면 되죠.”

“금룡상회는 원한이 많다. 우리 때문에 망한 상회가 한두 군데가 아니지.”

문갑룡은 자신의 과거를 돌이켜보았다.

짧은 시간 안에 이만큼 성장하는 데에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비정함이 필요했었다.

그때로 다시 돌아간다고 한들 똑같은 방식으로 상행을 할 테지만, 딱 하나, 멀리 보면 그리 현명하지 못한 방식이었다는 후회 정도는 한다.

“일단 갇히게 되면 내가 그동안 쌓은 온갖 원한들이 쏟아질 거다. 그러니 뭘 하든 헛된 일이다. 쓸데없는 데 돈과 시간을 낭비하지 말거라.”

“흑.”

문주희는 더는 참지 못하고 구슬픈 눈물을 뚝뚝 흘렸다.

“네가 몸을 의탁할 만한 곳은 두 곳이 있다. 하나는 내가 상도를 배운 대붕상회고, 다른 하나는 나와 사사건건 부딪쳤지만……. 그래도 서로를 인정하던 운남의 유정상회다. 우리와는 다르게 인의가 있는 상회이니 너를 잘 받아들여 줄 거다.”

“그런 건 알고 싶지 않아요.”

“알아야 한다. 네 어찌 이런 대사를 앞에 두고 어리광을 부리느냐.”

“하지만…….”

“안타깝구나. 이럴 줄 알았다면 섬서에는 진출하지 말 것을.”

문주희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섬서라니.

섬서는 금룡상회가 괜히 종남파와 인연을 이으려다가 장소호와 부딪친 곳이다.

설마 천무공자가 이 일에 연루되어 있다는 뜻일까?

문갑룡이 모든 것을 이야기하진 않았기에 그녀는 그의 의중을 알 수 없었다.

그때, 금룡상회의 대문을 부수며 검은색 옷을 입은 일단의 무리가 우르르 몰려들었다.

문주희는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문갑룡은 당당하게 뒷짐을 진 채 준엄하게 말했다.

“가거라. 이 문갑룡의 딸답게 항상 당당하게 살 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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