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풍운객잔 2부-462화 (591/686)

19권 8화

제39장 북벌종횡(北伐縱橫) (8)

‘설마?’

머리로는 부정했지만 본능적으로 심장이 쿵쾅거리고 마음이 불안해졌다.

문주희는 그런 조서인의 심정을 짐작하는 듯 미안한 눈빛을 보냈다.

그녀는 극단적으로 절망적인 상황이었지만, 그래도 아직 상대의 마음을 살피는 배려를 보였다.

“네게는 믿기 힘든 이야기라는 걸 잘 알아. 내 말을 선뜻 믿을 수가 없지?”

“……솔직히 말하면 그래.”

“이해해. 서인이 너는 천무공자와 특히 친했었으니까. 내 말이 청천벽력 같겠지.”

문주희는 소호를 이름으로 부르지도 않았다.

그러고 보면 지난번에도 그랬다.

그녀는 어느 순간부터 천무공자라고 부를 뿐, 소호라고 이름으로 칭하는 걸 꺼렸다.

하얗게 질릴 정도로 앙다문 입술, 딱딱하게 굳은 안색은 흡사 겁이라도 먹은 듯하다. 마치 이름으로 부르면 다시 친구 관계로 돌아갈까 봐 경계하듯 그 호칭을 겁냈다.

“아마 넌 모를 거야. 흔히 등잔 밑이 어둡다고 하지? 때론 너무 가까워서 보이지 않는 일도 있어. 그 애는…… 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완벽한 친구는 아냐.”

“뭐라고?”

조서인은 처음엔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했다.

하지만 그 의미를 곱씹자 무지가 격노로 변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문주희,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야?”

소호를 꺾겠다고 마음먹긴 했으나, 그건 친구이자 스승님의 제자로서 결심한 것일 뿐.

소호가 나쁜 길로 들어서는 것을 막겠다는 것이지 소호와 원수가 되겠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소호는 여전히 조서인에게 가장 친한 친구였다.

“화내지 말고 들어 봐. 넌 항상 천무공자를 맹목적으로 믿고 따랐지? 흠결 하나 없이 천부적인 재능을 지닌 무인, 구김살 하나 없어서 늘 환하게 웃던 소년, 사람의 악의라는 것을 전혀 모르는 애처럼 천진난만한 친구. 네게 그는 그런 사람이잖아?”

“소호는 정말로 그런 애였어.”

“맞아. 그런 애였지. 너는 그런 친구를 거의 신처럼 숭배했고.”

문주희는 냉담했다.

악의를 갖고 비꼬는 게 아니라, 그저 진심으로 그게 아니라는 걸 알리고 싶은 사람처럼 담담하고 차가웠다.

“청룡방 최고의 수재였던 원형주가 왜 갑자기 주화입마에 걸려서 성적이 곤두박질쳤는지 알고 있어? 우릴 엄하게 이끌어 주던 철표 교관님이 왜 갑자기 무산학관을 그만두셨을까? 주작방의 전대 방장이었던 곽도엽 선배가 왜 그렇게 천무공자라면 치를 떨면서 싫어했을까? 왜 그런지 이유를 생각해 본 적 있어?”

“……무슨 말인가 했더니.”

조서인은 미간을 찌푸렸다.

불쾌했다.

그녀는 조서인의 추억 속 성역을 건드리고 있었다.

“네가 이야기 한 사례들은 나도 다 들었고, 그에 대해 생각해 본 적도 있어.”

“그래? 그럼 그렇게 된 이유가 뭐라고 생각했어?”

“시기와 질투.”

“하하.”

문주희는 비웃었다.

조서인은 마음 한구석이 싸늘하게 식는 것을 느꼈다.

문주희의 처지에 동정하고 도와주고 싶다고 여겼던 긍휼한 마음이 사라졌다.

화가 난다.

도대체 왜 이런 이야기를 듣고 있어야 하나 회의감마저 든다.

그런데 그 순간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얘는 왜 이렇게까지 말하는 거지?’

거기에 생각이 닿자 화가 조금 가라앉았다.

문주희는 바보가 아니다.

조서인이 본 무산학관의 동기 중에 가장 영리하고 요령 좋은 친구를 꼽으라면 그녀를 첫손에 꼽을 정도다.

‘굳이 내 마음을 안 좋게 만들 걸 알면서도 이런 말을 한다는 게 이상해. 동창에게 쫓기기까지 하는데 유일한 아군이랄 수 있는 사람을 밀어낸다고?’

“시기와 질투가 전혀 없다고는 안 할게. 걔는 진짜 천재니까. 그런데 그런 생각 안 해 봤어? 원형주는 이미 입관 시험 때부터 상대가 뛰어나다는 걸 알았어. 알고도 덤빈 거야. 철표 교관님은? 무산학관의 모든 걸 걸고 가르칠 만한 인재가 생겼다고 신나 하던 분인 걸 몰라? 그런 분을 놓고 어떻게 시기와 질투라고 해?”

“그럼 다른 이유가 있다는 거야?”

“당연하지.”

문주희는 고개를 저었다.

“넌 몰라. 천무공자한테 너는 자신을 숭배하는 가장 친한 친구니까 소중하게 대했겠지. 그런데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렇지 않았어. 다들 보이지 않는 곳에서 걔를 뭐라고 불렀는 줄 알아?”

“……뭐라고 불렀는데?”

“백호마왕(白虎魔王). 백호방에 사는 무시무시한 존재.”

조서인은 눈빛이 풍랑을 맞은 배처럼 흔들렸다.

비슷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과거에 무심히 넘겼던, 다른 기숙사의 동기들과 대화하다 보면 실수로 몇 번 언급되던 별명이다.

그땐 그저 그 당시에 백호방이 잘나가니 하는 말인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깊은 속사정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걔는 뭔가 달랐어.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 우리와 사는 세상이 달라. 본인이 너무 거대하다 보니 다른 사람들은 모두 개미처럼 하찮게 보이는 모양이야. 차라리 화를 내고 폭군처럼 굴었다면 우리도 걔를 미워했을 거야. 그런데 그렇지는 않았지. 걔는 우리에게 미워할 권리조차 뺏어간 거야. 우린 그를 그저 경원시하고 두려워하는 것밖에 할 수 없었어.”

“무슨 소린지 하나도 모르겠어. 그저 소호를 미워하고 싶은 핑계로만 들려, 내가 보기엔.”

“그래? 그럼 이렇게 말해 볼까? 걔는 별생각 없이 하는 행동들이 우리 같은 범부(凡夫)들에게는 무섭고 섬뜩하게 다가와. 원형주? 천무공자에게 한 번이라도 이겨 보겠다고 사사건건 시비를 걸던 애야. 그에 대한 보복인지는 모르겠어. 이유야 어찌 됐든 천무공자는 하루 날을 잡고 청룡방에 찾아와서 북경원가의 무공들을 숨 쉬는 호흡법부터 필살의 비전 도법까지 모조리 해체하고 비틀어서 초식마다 완전한 파훼법을 만들어 냈어. 그리고 그걸 모두에게 공표하고 직접 시전해서 보여 준 거야.”

문주희는 질린 듯한 표정이었다.

“청룡방 학생들이 모두 모여 있던 연무장에서 한 일이니 대부분이 봤지. 원형주의 심정이 어땠을까? 그걸 극복하겠다고 무리해서 수련하다 탈이 난 것도 이해가 되는 일이야.”

본인의 가전무공이 학관 동기의 손에 파훼되는 모습.

그 신랄한 파훼법이 온 세상에 공표되는 그 기분은 아무나 공감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무공을 익힌 무인이라면 누구나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화가 날 문제이긴 했다.

“철표 교관님? 겉으로는 차갑지만 어떻게든 자신의 힘으로 천재를 가르쳐 보겠다면서 온갖 무공서를 뜯어보고 연구하던 열정 넘치는 분이었어. 그런데 천무공자는 그런 분의 교육법이 틀렸다면서 잘못된 이유를 조목조목 짚어서 반박했어. 철표 교관님은 큰 충격을 받아 학관을 그만두셨고.”

결국 다 비슷한 맥락이었다.

조서인은 납득할 수 없어서 고개를 저었다.

“원형주 건은, 그에게만 그런 게 아니잖아? 내가 익힌 조가창법도 수업 중에 파훼됐었어. 그 당시 가문의 무공을 해체하고 파훼하는 건 무산학관의 유행 같은 거였잖아? 교관님도 마찬가지. 그분의 교육법이 좀…… 너무 시험적이었다고 나는 기억해.”

철사장의 수련법을 응용해 온몸을 담금질하는 방법이라든가, 몸의 유연성을 늘리기 위해 나무로 만든 수련기구인지 고문 기구인지 모를 곳에 앉아 관절을 다 제멋대로 꺾어야 하는 방식은 모두가 받아들이긴 힘들었다.

문주희는 그걸 부정하지 않았다. 인정은 하되, 그녀가 짚고 싶은 것은 따로 있었던 탓이다.

“그래. 그래서 내가 이야기했잖아. 미워할 권리조차 뺏긴다고.”

“그건 핑계야. 그냥 싫은 거겠지.”

“아니? 생각해 봐. 천무공자는 분명 악의가 없었을 거야. 작정하고 원형주와 철표 교관을 파멸시키겠다는 그런 건 아니었을 거라고. 그건 나도 인정해. 그런데 그 결과가 어떻게 되었지? 네가 몰라서 그렇지 학관에는 그로 인해 정신적으로 내몰렸던 애들이 너무 많아.”

“그건…… 소호의 잘못이 아니잖아. 받아들이는 쪽의 문제지.”

“그래. 원래 늘 천재는 잘못이 없지. 의도치 않아도 주변 사람들을 뒤틀어 버리니까. 그래서 대놓고 그를 미워할 순 없는 거야. 하지만 그의 주변에 있는 것만으로도 그의 발판이 되고 고통을 받아. 그래서 마왕이야. 제천대성이나 우마왕처럼. 가만히 있어도 주변을 망가뜨리는 마왕.”

“그건…… 너무하잖아.”

“아니? 그건 네가 마왕의 친구라서 그러는 거야. 그는 도중에 쓰러지고 비참해지는 사람들을 동정하지 않아. 그냥 약한 사람. 어쩔 수 없는 희생자로 생각하고 무심히 넘겨 버려. 그러고는 자신의 길만 뚜벅뚜벅 걷지. 그 길은 어떤 사람한텐 선망하는 모습이지만……. 어떤 사람들에겐 잠을 설칠 정도로 충격적인 모습이야.”

그저 가고 싶은 곳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갈 뿐인데 의도치 않게 주변엔 시신이 즐비하다.

그런 삶은 어떤 삶인가.

그에 대해 아는 사람이 있을까.

거기까지 생각이 닿았을 때 조서인은 문득 이곳에는 소호의 삼촌인 추룡이 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아! 그러고 보니 숙부님이 계셨어. 숙부님께서 화내실 수도 있겠는데……?’

조서인은 당황하여 그의 안색을 살폈다.

“어……?”

그런데 추룡은 화가 나지 않은 듯 보였다.

그저 흥미롭다는 듯이, 오히려 즐거워하며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문주희는 그런 조서인과 주변의 반응을 힐끔 살핀 뒤 자신의 이야기를 마무리했다.

“……그때의 천무공자를 안다면 지금 이 일도 충분히 가능하다는 걸 알 거야. 거슬리는 건 배제한다. 짓밟히는 건 신경 쓰지 않는다. 그러면 끝이니까. 하지만 이쪽에선 그럴 수 없어. 난 아버지와 금룡상회를 구할 거야. 그러려면 이번 일의 원인을 제공한 천무공자를 만나야 해. 그리고 담판을 짓겠어.”

그녀가 길게 이야기를 이어 나간 핵심은 간단했다.

조서인이 소호의 ‘무심함’에 대해 알아차리는 것.

원형주와 철표 교관이 의도치 않은 희생자가 되었듯, 소호의 계획에 있어 방해물이었던 금룡상회가 희생자가 되는 것도 충분히 가능하다는 사실을 알아달라는 이야기였다.

분명 고민해 볼 만한 부분이긴 했다.

정말로 소호가 금룡상회의 몰락과 관계가 있는가?

만약 관계가 있다면?

소호가 자신의 앞을 가로막는 걸 무심히 치워 가며 움직일 뿐이라면?

그건 옳은가? 나쁜가?

이렇게까지 해야만 하는가?

“그건…….”

조서인은 깊은 생각에 빠져들었다.

간단히 결론을 내릴 문제는 아니었다.

여건만 된다면 사흘 정도 조용히 이 문제에 대해 생각을 정리하고 싶을 정도다.

하지만 사건은 급박하게 흘러가고 있었고, 문주희는 자신의 아버지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이렇게 도움을 청했다.

“난감한 상황이구만.”

바로 그때, 지금까지 흥미진진하게 상황을 지켜보던 추룡이 나섰다.

“전혀 다르다 싶었는데 이렇게 들어 보니 꼭 닮았어. 우리 큰형님도 적들에겐 귀신 같은 존재, 아군에겐 믿음직한 존재였거든. 도중에 희생되는 것들에 대해 무심한 것까지 아주 판박이야. 원래 강자존(强者存)의 논리가 확고한 사람들은 그런 건 신경 쓰지 않아.”

추룡의 ‘큰형님’이라는 존재가 언급되었다.

지금껏 조용히 침묵을 지키던 팽자연이 눈빛을 빛냈다. 흥미로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조서인도 마찬가지.

명확히 답을 내릴 수 없는 답답한 상황에 경험 많은 추룡이라는 존재는 어둠 속에 비친 한 줄기 빛과 같다.

“숙부님.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조카야. 돕든 말든 그건 네가 결정한 일이지. 그런데 조언을 해 주자면, 급할수록 돌아가라고 했다. 금룡상회가 망한 게 소호 때문이라는 것도 추측일 뿐이잖냐? 그럼 좀 더 알아봐야지. 정말인가? 그리고 정말이라면 왜 그랬는가?”

추룡은 문주희를 보면서 웃었다.

사나운 웃음이다.

얼굴을 가로지르는 흉터가 꿈틀거리며 냉혹한 맹수 같은 분위기를 풍겼다.

“문 소저, 만약 소호가 금룡상회를 망하게 했다면? 그러면 안 되는 거야?”

“네?”

“금룡상회는 좋은 일을 많이 했나? 빈민들을 구제한다거나 그런 곳인가? 망했다는 소문이 들리면 수만 명의 사람들이 들고일어나서 아이고 큰일 났다! 금룡상회가 망했단다! 하면서 꺼이꺼이 울고 그럴까?”

문주희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눈 밑이 파르르 떨렸다. 동창에게 쫓길 때보다 더욱 절박해 보였다.

반면에 추룡은 여유롭다.

뾰족한 대나무 가시 하나를 입에 문 채 느긋하게 상체를 젖히고 있었다.

“그건…….”

“모르겠지? 그럼 인정에 호소하지 마. 피로 이어진 형제들끼리도 유산 때문에 칼부림이 나기도 하는 게 세상일이야. 이제 혈혈단신인데 순진하게 굴면 분명히 나중에 후회한다?”

“……!”

그 어느 때보다도 뼈아픈 충고였다.

과거의 인연과 인정에 호소해 조서인에게 도움을 청하려던 문주희는 심장이 멎을 듯한 충격을 받았다.

추룡은 문주희가 충분히 반성할 시간을 준 뒤 슬그머니 해결책을 꺼내 들었다.

“다행히 내게는 훌륭한 의형제가 있어. 북경 근처로 온 것도 그 형님을 만나러 온 것과 다름없으니까. 그분에게 물어보면 소호 문제든 이 일의 해결책이든 다 알 수 있을 거다.”

“그분이 누굽니까?”

추룡의 의형제라면 조서인에게는 사부인 장기린의 의형제이며, 또 한 명의 숙부나 다름없다.

추룡은 씩 웃으며 답했다.

“부운화 형님. 우리 둘째 형님이 근처에 있어. 그분께 물어보면 답이 나올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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