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권 9화
제39장 북벌종횡(北伐縱橫) (9)
통주(通州)는 북경에서 동남쪽으로 백 리 거리에 있는 지역이었다. 물류의 교통지로 역사가 깊어 북경의 동문(東門)이라 불리는 곳이지만, 불행하게도 조서인에게는 그런 풍류를 감상할 만한 여유가 없었다.
‘사부님의 의동생. 둘째 숙부 부운화.’
잠깐이지만 만난 적도 있었다.
늘 바쁜 사람이라 객잔에서 차만 한잔하고 떠나 버려서 제대로 이야기를 나눈 적은 없지만, 그래도 조서인은 영광스럽게도 장기린의 제자로 소개된 적이 있었다.
그때 그의 극적인 반응, 차분하면서 기품 어린 분위기는 지금도 강한 인상으로 기억에 남아 있다.
장기린이 ‘내 빈자리를 채우고도 남는 동생’이라 평한 것은 빈말이 아닐 것이다.
대석은 어땠던가? 그는 어눌한 말투로 부운화를 ‘뭐든지 해결해 줄 수 있는 형님’이라고 표현했다.
‘분위기는 무겁고…….’
조서인은 양옆을 흘깃 바라봤다.
싸늘한 분위기가 흐르는 게 마치 한겨울 칼바람 같았다.
팽자연과 문주희, 두 여인은 조서인을 사이에 두고 묵묵히 말을 몰아가며 서로를 단 한 번도 직접 쳐다보지 않았다.
다만 ‘누군가’에게 하는 듯한 혼잣말을 했다.
“후우, 이게 무슨 일이람. 그냥 친구에게 할 수 있는 부탁이 아닌데. 이런 은(恩)을 어떻게 갚으려나. 아니, 갚을 수는 있을까?”
“자기한테 부탁한 것도 아닌데 왜 생색을 내는지 모르겠네. 우리가 어떤 사이였는지 무슨 상관이야? 지금이라도 방해되니까 돌아갔으면 좋겠는데.”
두 사람이 혼잣말처럼 내뱉는 말이 서로를 공격할 때마다 조서인은 등 뒤에서 식은땀이 흐르는 것 같았다.
차라리 서로 뺨이라도 때리는 게 오히려 속이 편할 것만 같았다. 냉랭한 공기가 뒷골을 쿡쿡 찌르는 듯했다. 여인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전혀 모르는 조서인 입장에선 당장이라도 이 상황을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만 계속했다.
휘리릭― 휘릭―.
팔자 좋은 휘파람 소리가 들려왔다.
지금 이 순간 유일하게 속이 편한 한 사람이 부는 휘파람이었다. 커다란 말에 느긋하게 몸을 싣고 풍광을 감상하고 있는 모습에선 근심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숙부님, 부럽습니다.’
추룡은 통주의 풍광을 감상하며 태평가를 부르다가 대로에 가장 가까운 객잔을 손으로 가리켰다.
“조카야. 배고프지 않냐? 차 한 잔 마시고, 잠깐 쉬면서 만두라도 먹고 가자. 소저들 생각은 어때?”
팽자연은 밝은 목소리로, 문주희는 가라앉은 목소리로 좋다는 뜻을 밝혔다.
조서인에겐 당연히 이견이 있을 리가 없다.
지금 이 상황을 벗어날 수 있다면 그는 맨몸으로 강에 뛰어들 준비도 되어 있었다.
촤르륵―.
마중 나온 객잔 점소이들에게 말을 맡기고 주렴을 걷으며 안으로 들어서자 이미 만석이 된 객잔 안이 보였다.
넓은 공간에 탁자와 의자가 수십 개는 되는데 비어 있는 자리가 단 하나도 없다.
제각각 다른 옷을 입은 사내들이 삼삼오오 모여서 차와 음식을 즐기고 있었다.
‘이 사람들……?’
조서인의 안색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때 안쪽에서 점소이로 보이는 중년의 사내가 황급히 뛰어나와 추룡의 앞에서 굽실거렸다.
“죄송합니다. 손님, 오늘은 자리가 이미 꽉 차서, 기다려 주시거나 아니면 다음번에 와 주셔야겠습니다.”
“자리가 꽉 찼다면 어쩔 수 없지. 그런데 위층엔 자리가 없나? 운우지락(雲雨之樂)을 즐기면서 꽃을 볼 수 있는 자리가 있으면 좋겠는데.”
조서인은 양옆에 있는 팽자연과 문주희가 움찔하는 것을 느꼈다.
죽립을 써서 얼굴을 가리고 있기는 하지만 아마 당황하며 얼굴을 붉혔을 것이다.
운우지락이라 하면 옛날 초회왕(楚懷王)의 고사를 뜻하는 말로, 흔히 남녀 간의 정을 통하는 일을 뜻했다.
순진한 처녀는 물론이고, 마찬가지로 순진한 청년인 조서인이 귓불까지 붉어졌다.
입이 떡 벌어진다.
조서인은 자신들의 일행이 남자 둘, 여자 둘로 숫자가 맞춰져 있다는 점에 생각이 닿았다.
‘숙부님. 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설마 어떻게든 방을 잡기 위해 무리한 설정을 한 것일까?
졸지에 운우지락을 나누는 헤픈 여인이 된 팽자연과 문주희 입장에선 화를 내도 이해가 가는 상황이다.
“으음.”
그런데 점소이의 반응이 이상했다.
당황한 얼굴.
어찌해야 좋을지 모르겠다는 듯한 난감한 표정으로 힐끗 주변을 살핀다.
조서인은 객잔 안이 조용하다는 것을 알아챘다.
입구 근처에서 거나하게 취해 일장 연설을 늘어놓던 중년인도, 구석 자리에서 열심히 식사 중이던 거한들도 일제히 입을 다물고 침묵했다.
모두의 시선이 모인다.
운우지락 운운하며 놀린다거나 조롱하는 듯한 시선이 아니었다. 지극히 냉정한 무인의 눈빛들이 쏟아졌다.
“흡.”
옆에서 팽자연이 숨을 삼키며 허리에 손을 가져갔다.
객잔 안의 모두가 무공을 익힌 무인이며, 그들 모두가 한 패거리였다.
‘만만치 않다. 하나같이 고수들이야.’
절세 고수는 아니라도 최소한 일류의 경지를 넘은 자들이 수십 명이다.
조서인도 등 뒤의 은자창에 손을 가져가려다가, 정작 가장 선두에 있는 추룡이 태연한 모습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숙부께서 믿는 바가 있으시구나.’
아니나 다를까.
무심하고 차가운 목소리가 점소이에게 명령을 내렸다.
“대인께 모셔라.”
객잔의 주방 안에서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검은색 옷을 입은 중년의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동창?’
어깨에 검 세 개.
동창 견검대. 그것도 대주급이다.
그가 명령을 내리자 객잔 안의 모든 이들이 언제 그랬냐는 듯 그들로부터 시선을 거뒀다.
“이쪽으로 오십시오.”
동창 견검대주는 냉랭하고 차가웠지만 말투는 정중했다.
그가 선두에 서서 먼저 등을 보였다.
이쪽에 대한 경계를 풀었다는 의미다.
그가 먼저 계단으로 올라가고 그다음 추룡, 조서인, 팽자연, 문주희 순으로 위층으로 올라갔다.
추룡은 마치 이 모든 상황을 예측했던 것처럼 차분했다. 오히려 흥미진진한 얼굴로 객잔의 이곳저곳을 살피는 여유까지 보였다.
“대인, 손님이 오셨습니다.”
동창 견검대주 정도 되면 종삼품 이상의 고관대작 앞에서도 허리를 안 굽힌다.
언제든 역모로 잡아넣을 수 있는데 무엇이 겁나겠는가.
그런데 그 정도 되는 사람이 마치 하인처럼 굴고 있었다.
그 의미를 생각하며 놀라길 잠시, 분명히 안쪽에 사람이 아무도 없었는데 문이 저절로 열렸다.
드르륵―.
‘어?’
텅 빈 내실이 보인다.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귀신이 문을 열어 준 것인가 의심이 된다. 그때 내실 너머 또 하나의 문이 열렸다.
드르륵―.
‘어어?’
또다시 텅 빈 내실.
드르륵―.
그리고 세 번째 문이 열린 뒤에야 그들은 안에 있는 ‘대인’이라는 사람을 볼 수 있었다.
거리로는 삼 장.
큰 걸음으로 열 보 정도지만 실제로 체감되는 거리는 훨씬 더 멀다.
차분하게 앉아 곧은 자세로 붓을 들고 있는 그는 보자마자 감탄이 나올 정도로 그림 같은 신비로운 모습이었다.
진한 먹 향이 물씬 풍겨 오는 듯했다. 선비 중의 선비가 있다면 저런 모습일 터.
차분한 녹색 관복을 입고 긴 머리를 단정하게 틀어 올려 관모를 썼다.
나이는 사십 대를 조금 넘었을까.
추룡보다 연상이라고 하니 그보다 더 될 테지만 얼굴이 매끈하고 수염이 없어서 더욱 젊어 보이는 외모였다.
‘이럴 수가.’
조서인은 큰 충격을 받았다.
불혹을 넘은 나이가 믿기지 않을 만큼 멋진 모습도 놀랍지만, 가장 놀라운 건 따로 있다.
조서인은 두 눈으로 그를 보고 있음에도 그의 기척을 느낄 수가 없었다.
살수처럼 기척을 숨겼는가?
아니다.
그는 자연스레 숨을 쉬고 먹 향이 듬뿍 나는 방 안에서 조용히 서찰을 들여다보고 그에 맞는 글을 쓰며 일할 뿐이다.
그런데도 안 느껴진다.
분명히 눈앞에 존재하는데 ‘무인의 감각’으로 보면 완전히 없는 사람이나 다름없었다.
이 얼마나 놀라운가.
마치 사과를 눈으로 보면서 먹으려고 손을 뻗었는데 만져지지 않는 것과 똑같은 충격이다.
자연과의 동화.
검아일체가 아니라 문아일체(文我一體)라는 말이 있다면 지금 사용해야 할 것이다.
장기린 이후 추룡 이상의 충격을 느낀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저번에 뵈었을 때랑은 전혀 달라. 이럴 수가. 저분, 원래 이 정도로 강한 분이었던가?’
장기린이 내 빈자리를 채우고도 남을 동생이라 평했던 것이 절실히 와닿는다.
부운화는 정말로 장기린에 버금가는 걸물인가?
조서인의 의문이 해결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둘째 형님. 잘 계셨소?”
추룡은 씩 웃으면서 양팔을 벌려 반가움을 표했다.
그러자 관모를 쓴 사내가 천천히 법도에 맞춰 붓을 내려놓는다.
기품 있는 모습.
차분하게 웃는 얼굴로 그는 추룡을 반겨 주었다.
“여전하구나. 추룡.”
너무나 듣기 좋은 목소리였다.
절제되고 동화되어 마음에 직접 와닿는 듯한 울림이 있었다.
그 순간 자연과 완전히 동화되어 있던 그의 무형기가 언뜻 그림자를 드리웠다. 말 한마디에 거대한 존재감의 편린이 살며시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아아…….’
등골이 오싹해진다.
조서인의 예상이 맞았다.
상대는 감히 측량할 수도 없는 거인이었다.
“여전하다니. 난 많이 강해졌다고 생각했는데. 둘째 형님이 보기엔 내가 변한 게 없어 보이나 보오?”
“내가 보기엔 여전히 장강에서 물장구나 치던 철부지다.”
“하핫! 날 그렇게 보는 건 이 세상에 큰형님과 둘째 형님뿐일 거요.”
“변한 게 있긴 하구나.”
“그래? 뭐가 변했소?”
기대감에 눈을 빛내던 추룡의 얼굴이 이어지는 대답에 팍 일그러졌다.
“그런 이상한 천을 목에 감고 다니다니. 그러고 보면 너는 옛날부터 배자(褙子: 소매가 없는 옷)같은 특이한 옷을 좋아했었지.”
“이게 얼마나 비싼 건데……! 아니, 됐소. 말을 말아야지.”
“하핫, 잘 왔다. 온 세상이 혼란한 가운데 이렇게 오랜만에 반가운 사람을 만나니 기분이 좋구나.”
두 사람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를 덥석 끌어안았다.
가족을 오랜만에 만났으니 반갑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서로의 등을 두드리는 그들은 이미 피를 나눈 거나 다름없는 사이다.
“아?”
그때, 추룡의 뒤를 따라 텅 빈 첫 번째 내실에 발을 들이던 팽자연이 탄성인지 신음인지 모를 소리를 냈다.
그녀는 황급히 입을 가렸으나 이미 소리는 흘러나왔다. 죽립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음에도 그녀가 얼마나 당황했는지 움츠린 어깨 너머로 손가락이 파르르 떨렸다.
놀란 건 팽자연 뿐만이 아니다.
문주희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마치 다른 집에 데려다 놓은 고양이처럼 허리를 뻣뻣이 세운 채 발끝으로만 서 있었다.
긴장한 모습.
허리춤의 단검에 손을 댄 그녀의 목 뒤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이럴 수가.’
조서인은 등줄기를 타고 오르는 섬뜩함을 느끼며 팽자연이나 문주희와 마찬가지로 위를 힐끗 올려다보았다.
검은색 옷, 검은색 복면으로 온몸을 가린 사내들 네 명이 대들보에 올라타고 있었다.
팽자연이든 문주희든, 일류를 넘어선 무인들이 기척조차 느끼지 못할 만큼 절정의 경지에 오른 숙련된 살수들이다.
‘여긴 완전히 사지(死地)구나. 고작 열 걸음인데 만리장성만큼이나 멀게 느껴진다.’
살수들이 숨어 있는 텅 빈 내실이 두 개.
삼 장의 거리를 천천히,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갔다.
포옹을 푼 부운화가 드디어 조서인과 일행들에게 시선을 주었다.
“오랜만이구나. 서인.”
“둘째 숙부님께 인사드립니다.”
조서인은 존장에 대한 예를 갖춰 정중히 포권을 취했다.
부운화는 차분한 시선으로 조서인을 응시하다가 부드럽게 웃었다.
“대형께서 처음에 너를 제자로 받아들일 때는 사실 의구심이 있었다. 무쌍한 무공의 계보를 네가 감당할 수 있을까 걱정이 되어서였지. 그런데 지금 보니 큰 성취를 이뤘구나. 이렇게 잘 컸으니, 역시 나는 대형을 이길 수가 없음을 알겠다.”
갑작스러운 큰 칭찬이 조서인의 마음을 크게 뒤흔들었다.
더할 나위 없는 감동이 물결처럼 밀려왔다.
울컥 치미는 격정을 참으며 조서인은 더욱더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