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권 10화
제39장 북벌종횡(北伐縱橫) (10)
“사부님의 절반도 따라가지 못했으니 과분한 그 말씀을 받아들이기가 송구합니다. 숙부님의 기대에 부응할 수 있게 더욱 노력해서 정진하겠습니다.”
“네 겸손이 기특하구나. 대형의 절반이라? 그만큼의 능력만 갖춰도 무림에서는 상대할 수 있는 자가 손에 꼽을 테니 너는 좀 더 자신감을 가져도 좋을 것이다.”
절반만 갖춰도 충분히 무림을 호령할 수 있는 힘이라니. 다른 사람들이 들었다면 코웃음을 쳤을 내용이다.
그런 사람이 어디에 있냐고. 달마조사나 장삼풍의 이야기도 아니고 너무 허풍이 심하다며 비웃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부운화, 추룡, 조서인 중에 그 누구도 그 생각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이미 이십 년 전에 무쌍귀의 무공은 천하를 진동시켰었다.
붉은 악귀 장기린의 무공이 천하일절(天下一絶)이란 사실은 해가 동쪽에서 떠올라 서쪽에서 지는 것처럼 그들에겐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였다.
송구해하는 조서인과의 인사를 마치고, 부운화의 시선은 이윽고 조서인과 함께 온 두 명의 여인들에게 향했다.
“손님들이 오셨군. 일 층에서 추룡이 암구호를 대기 위해 험한 말을 했을 것이오. 기밀을 요하는 바람에 벌어진 일이니 부디 법도에 어긋났더라도 너그러이 이해해 주시길 바라오.”
부운화는 정중하면서도 당당했다.
관료의 위압감과 서생의 꼿꼿함, 그리고 무사의 사나움을 모두 지닌 사내다.
두 여인이 다급하게 손을 내저으며 괜찮다고 말하는 것을 보면서 조서인은 그제야 추룡이 했던 말의 진의를 깨달았다.
운우지락[雲].
꽃을 볼 수 있는 자리[花].
운화.
운우지락 운운하며 꽃을 볼 수 있는 자리를 달라고 한 건 부운화를 보러 왔다는 의미의 밀어(密語)였던 것이다.
“나는 과거에 작은 관직을 지냈던 사람이오. 이름은 부운화라고 하며 서인이의 사부가 나의 큰형님이시지. 소저들의 방명을 물어도 괜찮겠소?”
조서인은 아차 하는 심정으로 두 사람을 서둘러 소개했다.
“둘째 숙부님, 이 두 사람은 저를 도와주는 사람들입니다. 여기 이쪽은 하북팽가의 장녀인 팽자연 소저이고, 이쪽은 금룡상회 회주의 외동딸 문주희라고 합니다.”
팽자연과 문주희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거의 동시에 포권을 취했다.
“하북팽가의 장녀 팽자연입니다. 서인 오라버니의 둘째 숙부님을 뵙습니다.”
“금룡상회의 소상주 문주희입니다. 서인이와는 무산학관에서부터 오랜 시간 알고 지냈어요.”
격식과 분위기에서 두 사람은 많이 달랐다.
팽자연은 절도 있고 명쾌하여 누가 봐도 무가(武家)의 자식다운 모습이었고, 문주희는 낭랑하면서도 영리해 보이는 구석이 있었다.
부운화는 조서인에게 그랬듯, 특유의 차분한 시선으로 두 여인을 번갈아 응시했다.
“하북팽가에서 온 소저였군.”
“네.”
팽자연이 조서인이 팽가에 해 준 일을 설명하며 자연스럽게 대화를 이어 나가려던 그 순간이었다.
담담하게 이어지는 부운화의 말에 팽자연이 벼락이라도 맞은 듯이 몸이 굳어졌다.
“세상은 오호단문도가 실전되었다 말하며 팽가가 예전 같지 않다 말하지. 하지만 나는 북원이 중원을 지배하던 그 참혹한 시절을 꿋꿋이 견뎌 낸 팽가의 저력을 잘 알고 있었소.”
“네……?”
“하지만 아무리 뿌리가 튼튼한 나무라도 태풍에는 뽑혀 나가는 법. 시절이 하도 수상하여 도신(刀神)의 대가 끊기는 게 아닌가 걱정했는데 불필요한 걱정이었군. 소저에게까지 철혈(鐵血)이 이어졌으니 과연, 팽가를 걱정할 필요가 없음을 잘 알겠소.”
“……!”
“지닌바 천성이 곧고 솔직하니 어떤 어려움이든 잘 헤쳐 나갈 인재로군. 서인아. 네가 인복이 있는 모양이다.”
조서인은 자신이 칭찬받은 듯 기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제가 좋은 사람들을 만나는 운은 타고 났다고 생각합니다. 지금의 여정에서도 팽 소저의 도움을 많이 받았습니다.”
하북에서 숙소를 잡고 식사할 곳을 찾는 사소한 일부터 관문을 통과할 때의 신분 증명까지. 그녀가 없었다면 번잡했을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팽자연은 기쁘기도 하고 충격을 받기도 하여 포권을 취했던 자세 그대로 굳어 있었다.
죽립 아래로 살짝 드러난 그녀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놀라움? 감동?
그 정도가 아니다.
부운화가 아무렇지도 않게 흘리듯 말한 ‘철혈’은 팽가 가문의 비사였다.
팽자연은 부운화가 그녀의 그릇으론 감당할 수 없는 거인임을 절로 알게 되었다.
단순히 겉으로 보이는 팽가의 모습뿐만이 아니라 비밀리에 감춰 둔 비사까지 모두 꿰뚫어 보는 부운화의 식견은, 그녀에겐 귀신을 본 것만큼이나 놀라운 일이었다.
“그리고 금룡상회의 여식이라.”
부운화의 시선이 이번엔 문주희에게로 향했다.
부운화는 다른 사람들을 대할 때와는 분위기가 달랐다. 훨씬 차가운 모습이다. 적어도 조서인이 느끼기엔 그랬다.
“회주와는 인연이 되어 만난 적이 있었지. 일평생 한길만 파는 자를 장인이라 한다면 소저의 부친은 상도(商道)의 장인이라 칭하기 부족함이 없는 사람이었소.”
“아…….”
부친을 인정하는가?
눈에 띄게 안색이 밝아진 문주희가 부탁을 청하려던 찰나였다.
부운화의 이어지는 말들이 그녀의 입을 다물게 만들었다.
“허나 모든 길이 그렇듯 정도와 사도가 있는 법. 소저의 부친은 정도를 가는 상인은 아니었소. 면면부절 이어지는 하늘의 뜻은 그야말로 천망회회(天網恢恢: 하늘의 그물은 크고 허술해 보여도 악인에게 벌을 주는 일을 빠뜨리지 않음)라. 세상에 대가가 없는 일은 없소. 당장엔 대가 없이 넘어가는 듯 보여도 돌고 돌아 태극. 언젠가는 반드시 그 대가를 치르는 법이지. 그러니 어떤 일이 벌어지든 중심을 단단히 잡고 너무 상심하지 않길 바라오.”
조서인 일행이 왜 부운화를 찾아왔는지.
그리고 문주희가 그에게 하려는 부탁이 무엇인지를 이미 파악하고 있는 듯한 이야기였다. 문주희의 안색이 창백해진 채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대단하다.’
조서인의 입이 쩍 벌어졌다.
그리고 언젠가 이런 상황을 겪어 본 것 같은 기시감을 느꼈다.
‘맞다! 도인! 소호랑 돼지머리를 들고 찾아갔던 그 신비한 할아버지!’
문득 떠오르는 것은 천살성과 지괴성을 언급했던 백단장의 자양진인이다.
그때 느꼈던 것 같은 도인의 품격을 눈앞의 부운화에게서 느낀다.
만류귀종이라.
무도(武道)도 도의 일종이니 극한에 다다르면 도인이 되는 것은 마찬가지인 셈인지.
마치 천하 만물의 진리인 듯, 부운화가 내뱉는 모든 말에는 한 번씩 곱씹어 보게 되는 도가의 깊은 도(道)가 담겨 있었다.
“둘째 형님. 오랜만에 만났더니 도사가 다 되어 버렸군. 얼굴을 보자마자 대뜸 그렇게 관상 보듯 이것저것 말해 버리는 사람이 어딨소? 세속적인 황실에 처박혀 업무에 치여 사는 줄 알았는데, 나 모르는 새 무당파로 돌아가기라도 했던 거요?”
“그럴 리가. 본래 풍진세상에 치이다 보면 간절히 하늘의 도를 바라는 법이다. 관직에서 물러난 관인들이 왜 시골로 가서 농사를 짓겠느냐? 반대로 심심한 도관에서 매일 도경이나 읊던 사람들은 시끌벅적한 시장통 삶을 원하는 게 아니겠느냐?”
“또 돌고 돌아 태극이란 소리군. 누가 무당 출신 아니랄까 봐. 그놈의 태극태극. 지긋지긋하오.”
“그게 진리인 걸 어쩌겠느냐. 내가 이리 급하게 말한 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이 많지 않기 때문이다. 마음 같아서야 삼 일 밤낮으로 대화를 나누고 싶으나 여건이 그렇지를 못하니 별수 없는 일이지.”
담담하게 이야기하고 있지만 심상치 않은 상황이라는 것이 은연중에 드러났다.
생각해 보면 그렇다.
관문 근처의 이런 평범한 객잔에서 수십 명의 사람들을 동원해 일 층에 인(人)의 방벽을 세우고, 이 층에는 뛰어난 살수로 살진(殺陳)까지 펼쳐 두었다.
부운화의 무력을 생각하면 이런 일은 전혀 필요 없는 행위다.
또는, 그런 상상조차 뛰어넘을 적들이 있다는 것인가?
“역시 그랬군.”
지금껏 장난스레 되받아치던 추룡의 표정이 일변했다.
그는 심각해진 말투, 진지한 눈빛으로 되물었다.
“둘째 형님을 쫓기게 만들 만한 놈들이 있소? 아무리 생각해 보려 해도 적이 될 만한 자가 없는데, 혹시 역모라도 저질렀소?”
“험한 말투는 여전하구나. 그런데 역모를 저지른 거나 별로 다를 게 없으니 아니라고도 못하겠다.”
“……뭐요? 그게 무슨 소리요?”
반쯤 장난삼아 물었던 추룡이 되려 크게 놀라 언성을 높였다.
조서인, 팽자연, 문주희도 마찬가지다. 당황하는 그들을 달래듯 부운화가 가볍게 손을 내저었다.
“관직에선 파면되었고, 왕진을 따르는 환관 이십사아문과 동창, 금의위까지 황제의 ‘허가’를 받아 나를 쫓고 있다. 그쯤 되면 나라의 모든 힘이 나를 쫓는 셈이니 역모와 크게 다를 게 없는 상황이지.”
“그 무슨……!”
천하의 추룡이 할 말을 잃어버렸다.
조서인도 마찬가지다.
별일 아니라는 듯 저렇게 선선히 답할 일이 아닌데 저러고 있으니 도대체 이해를 할 수가 없다.
황제의 명을 받아 황실의 모든 힘이 한 사람을 쪼고 있다니. 이 얼마나 무서운 말인가?
명나라 땅 안에서는 마음 놓고 잠들 곳이 없을 것이며, 길을 가다 만나는 누구든 그의 위치를 누설하는 첩자가 될 수 있는 상황이다.
그 거대하고 광범위한 악의 앞에 개인의 무력은 하등 상관이 없다.
그저 한 사람의 존재를 말살하려는 절대다수의 거대한 힘과 거기에 짓눌리는 하찮은 한 명의 목숨만이 남을 뿐.
“형님, 이해가 안 되는데. 원래 관직도 꽤 높지 않았소? 광…… 광…… 그 뭐라고 하는 관직.”
“광록훈 광록대부.”
“그래, 그거. 그런데 왜 그리 허망하게 파직당한 거요? 겉보기엔 화초처럼 곱게 자란 도련님 같아도 막상 내면은 산전수전 다 겪은 노친네나 다름없는 둘째 형님이 그렇게 넋 놓고 파직당할 사람이 아닌데?”
부운화는 그를 높게 평가하는 건지 놀리는 건지 모를 말에 웃음을 터뜨렸다.
“상황이 공교로웠다. 따지자면 핑곗거리야 많겠지. 길들인 개처럼 얌전했던 왕진이 절묘한 시점에 칼을 빼 들었다는 점. 그를 따르는 조길상이라는 환관이 상상 이상으로 집요하고 교활했다는 점, 그리고 황제 폐하가 상상 이상으로 멍청하고 맹목적이었다는 점도 있다. 나도 사람인데 항상 완벽할 수야 있겠느냐? 방심한 탓에 크게 당해 이런 신세다.”
부운화는 그 모든 이야기를 잔잔하게 웃는 얼굴로 해 주었다.
조서인을 포함해 팽자연과 문주희 두 여인 모두가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황실의 실세라 불리는 왕진을 잘 길들인 개로 표현하고, 하늘의 아들인 천자를 멍청하다면서 욕을 해 버리는 사내의 말을 어찌 감당할 수 있겠는가.
그야말로 천외천의 모습이다.
대체 눈앞의 사내의 진정한 정체가 무엇인지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거짓말.”
추룡은 잠시 부운화를 노려보다가 대뜸 소리쳤다.
“딴 사람은 몰라도 나는 못 속이지. 둘째 형님, 노리는 게 뭐요? 왕진 놈이 문제면 밤에 가서 슬쩍 죽여 버리면 되는 일이지. 직접 나서기가 힘들면 내가 해 주는 게 좋겠소? 빨리 마무리를 지어야지. 대체 그런 식으로 피해 다니는 일에 무슨 의미가 있소?”
심지어 왕진의 암살 계획까지 논한다.
조서인은 손으로 귀를 막고 싶은 심정이었다.
“의미가 있지. 말했잖느냐. 황제의 ‘허가’를 얻은 자들이 쫓는다고, 지금이야 금의위의 장수 하나랑 동창의 간부와 친분이 있어 이렇게 피해 다니지만……. 그들을 죽이는 순간 난 진정으로 역모를 일으킨 무뢰한이 되는 거다. 그건 막아야겠지.”
차마 쫓아오는 자들을 죽일 수는 없으니 그저 도망만 다니고 있다는 소리다.
추룡은 여전히 미심쩍은 얼굴이었다. 부운화를 잘 아는 사람으로서는 도저히 믿기 어려운 이야기다. 하지만 부운화가 노리는 점이 있다는 것 또한 분명했다.
“알겠소. 다 좋다고 칩시다. 둘째 형님께선 그럼 우리에게 바라는 건 무엇이오?”
“역시 형제들은 말이 빨라서 좋군. 여전해.”
부운화에게서 도인 같던 분위기가 빠져나갔다.
도발적이면서도 강경한 분위기.
무인답게 사나운 웃음을 지은 부운화가 방금 작성한 서찰을 접어 추룡에게 내밀었다.
“섬서. 묘아장 부근에서 이미 전쟁이 시작되었다. 그곳으로 가라. 황제가 친정을 나간 그 전쟁터에 있을 소호에게 이 서찰을 전해 줘.”
모두의 시선이 서찰에 쏠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