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권 11화
제39장 북벌종횡(北伐縱橫) (11)
서찰은 가볍고 얇았지만 비단 재질의 붉은색 띠를 두르고 있었다.
누가 봐도 중요한 서찰이며, 그 안에는 기밀을 요하는 심각한 사안이 적혀 있을 것만 같았다.
추룡은 서찰을 물끄러미 보다가 손을 뻗으면서 물었다.
“운화 형님. 소호와는 연락을 하고 계셨소?”
“하고 있었지.”
“요즘 소호가 많이 바빠 보이던데 조언 같은 것도 해 주고 그랬소?”
꾸욱.
추룡은 서찰의 끝을 잡았고, 반대쪽 끝을 잡고 있던 부운화는 아직 서찰을 놓지 않았다.
서로를 바라보는 두 사람 사이가 얇은 서찰 한 장으로 이어져 있었다.
추룡을 마주하는 부운화는 언제나 그랬듯 물처럼 담담했다.
‘둘째 형님도 참, 속을 안 드러낸다니까.’
추룡이 알기로 부운화는 형제들 중 심계가 깊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운 사람이다. 책사인 섭우생을 제외한다면 사람의 속내를 읽는 데에 그보다 능수능란한 사람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소호는 변하지 않았어. 어린 시절에 우리가 봤던 그대로다. 동료를 아끼고 정면으로 한 길만을 나아가지. 내 조언 따위는 크게 필요가 없더구나.”
부운화가 추룡의 질문에 담긴 저의를 읽고 묘한 대답을 들려주었다.
툭.
부운화가 서찰을 놓았다.
추룡은 입을 꾹 다물고 잠시 고민했으나, 묵묵히 서찰을 받아 품 안에 넣었다.
“운화 형님, 내가 알기로 세상에 변하지 않는 사람은 없소.”
“그래? 추룡, 너는 변했더냐?”
“변했지. 내가 비단길 너머에서 얼마나 많은 걸 겪고 왔는지 형님은 모를 거요.”
“경험이 사람을 만든다? 좋은 말이다. 사람이 배움을 손에서 놓지 않으면 나이가 들면서 지식과 예의를 갖추고 처세에 능숙해질 수는 있겠지. 하지만 사람의 본성은 변하지 않는 법이다.”
“어째서 그렇소?”
“네가 아무리 서역의 복색을 입고 화려한 천으로 목을 감고 다녀도 장쾌하고 도도하게 흐르는 장강의 기상을 잃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다.”
아무리 경험과 지식으로 치장해도 장강수로맹 출신 추룡의 호쾌한 성정은 변치 않는단 소리다.
추룡은 신음을 흘렸다.
과연 맞는 말이다.
서역을 다녀오면서 온갖 것들을 보고 배웠으나, 그 와중에도 불의를 못 참고 버럭버럭하는 불같은 성미는 고쳐지지 않았으니까.
다만 나이가 들면서 성질머리대로 움직이기보다는 신중하게 한 번 더 생각하는 요령이 조금 생겼을 뿐이다.
“본성을 잘못 봤을 리는 없는 것이오?”
“글쎄다. 그건 각자의 판단이니 뭐라고 할 수가 없구나. 모든 것은 상대적인 것이다. 대형은 우리에겐 피붙이보다 더 친한 가족이지만, 적들에겐 세상에 둘도 없을 귀신이라 불린 것처럼 말이야.”
이 또한 옳은 말이다.
추룡은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되었다.
소호는 정말로 변한 것인가?
아니면 그를 보는 자신의 위치와 시선이 변한 것인가?
“알겠소. 반성하게 되는군. 일단은 다시 만나 봐야겠어.”
“그거야 좋겠지. 삼촌과 조카 사이가 아니냐. 하지만 소호도 지금은 많이 바쁠 것이다.”
“형님과 협의한 일을 하느라?”
부운화는 소호와 협의해 뭔가를 계획하고 있다.
추룡이 느끼기엔 그랬다.
부운화는 가타부타 말해 주지 않고 부드럽게 웃기만 했다.
“내가 준 서찰은 한시가 급한 일이다. 빨리 전해 주지 않을 거냐?”
“그런데 운화 형님. 이런 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오. 밑에 층에 있는 사람 아무에게나 맡겨도 되는 일 아니오?”
“왜 직접 안 하냐는 소리로군.”
“솔직히 말하자면 그렇소.”
“이유는 별것 아니다. 바로…….”
부운화는 힐끗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이래서지.”
“으음?”
추룡의 표정이 서늘하게 굳었다.
부운화가 먼저 느꼈고, 그다음엔 추룡이 느꼈다.
아래층이 소란스러워지고 있었다. 두 사람 모두 전쟁터에서 십 수년을 지낸 사람들이다. 적의를 지닌 자들이 몰려드는 기척에는 그 누구보다도 예민했다.
“적?”
두 사람의 뒤를 이어 기척을 느낀 조서인이 깜짝 놀라 창밖을 내다보았다.
눈까지 가리도록 온통 검은색 천을 뒤집어쓴 자들과, 비슷한 복색이지만 머리에 흰두건을 쓴 자들이 객잔 입구로 우르르 몰려들고 있었다.
“이쪽엔 이쪽의 싸움이 있다. 아까 황실이 나를 쫓는다고 했지? 그들만 나를 쫓는 게 아니다. 내가 움직이면 일이 커져. 지금 나는 신(新) 북로전쟁과 연관되면 안 되는 이유가 있다.”
콰드득! 쾅!
채채챙!
객잔의 입구에서부터 무언가가 부서지고 박살 나는 소리가 들려왔다.
커다란 충격이 객잔을 흔들었다. 병장기가 부딪치는 소리가 시시각각 가까워졌다.
“대인! 혈귀입니다! 칠성교도들도 있습니다!”
아래층에서 다급하게 뛰어올라온 견검대주가 경고를 하는 것과 동시에 아까 조서인 일행이 부운화를 만나기 위해 통과한 장지문 세 개가 탁, 탁, 탁 소리를 내며 차례대로 닫혔다.
이제 문 하나당 일 장 남짓한 작은 공간이 살수들이 들끓는 사지(死地)로 변할 것이다.
조서인 일행이야 편하게 지나왔지만 침입자들에게는 사정이 다르다.
조서인은 등 뒤에 비스듬히 메고 있던 애창 은자를 붙잡았다.
“숙부님. 싸울까요?”
부운화와 추룡 모두에게 물었는데, 부운화가 대답했다.
“아니, 싸우는 건 나 하나로 충분하다. 월신. 문을 열어 주게.”
월신이라는 말에 추룡이 두 눈에 이채를 띄고 위를 올려다보았다.
조서인, 팽자연, 문주희 세 사람도 천장을 올려다보았지만 단단한 오동나무 대들보만 보일 뿐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끼리릭―.
마차 바퀴가 도는 것 같은 소리가 들리더니 부운화가 앉아 있던 바로 뒤의 바닥이 갑자기 옆으로 밀려나며 한 사람이 간신히 통과할만한 통로를 만들어 냈다.
“기관 장치!”
모두가 깜짝 놀라는 사이, 추룡은 신음하며 머리를 긁적였다.
“둘째 형님, 정말 안 도와줘도 되는 거요?”
“잠시 안 본 사이 내가 누군지를 잊었구나.”
부운화가 웃는다.
그의 몸에서 섬뜩할 만큼 잘 갈린 예기가 솟구쳤다.
문인 같기도 하고 도인 같기도 하던 면모는 어디에 집어 던졌는지.
이제는 완전히 전장에서의 싸움을 앞둔 장수의 모습이다.
추룡은 그립다는 듯이 피식 웃었다.
“잘 알지. 표풍검(飄風劍). 언제나 회오리바람처럼 적들을 난도질하는 무적의 검수.”
“그래. 그게 나다.”
아까와 똑같은 웃음인데도 느낌이 완전히 다르다. 부운화는 그들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닫혀 있는 장지문을 응시했다.
“추룡. 회포는 전쟁이 마무리 된 후에 풀도록 하자.”
“아쉽군. 알겠소. 끝나고 봅시다.”
추룡은 새삼 다시 느꼈다.
부운화를 걱정하는 것은 마치 늑대가 호랑이를 걱정하는 것만큼이나 무의미한 일이라는 것을 말이다.
추룡은 통로 안으로 성큼성큼 움직였다.
“무운을 빕니다, 숙부님.”
“무운을 빕니다.”
조서인과 팽자연마저 부운화에게 작별의 인사를 건네고 돌아서자 문주희는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그녀가 고민하다 부운화를 향해 한 발을 내딛으려는 순간이었다.
“서인아.”
“예? 예, 둘째 숙부님.”
문주희가 말을 걸기 전에 부운화는 한발 먼저 조서인을 불렀다.
“소호가 왕진에게 금룡상회를 살려 달라 말하면 그렇게 될 수도 있는 건 분명한 사실이다.”
“……소호에게 그런 힘이 있었군요.”
“네가 결정하거라. 다시 한 번 말하지만, 금룡상회가 그리된 것은 회주 자신의 업보다. 소호와 척을 진 사건 또한 자신들의 선택이자 업보였고.”
문주희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조서인을 향해 말하고는 있으나 사실 문주희에게 들으라고 하는 말인 것을 왜 모르겠는가.
그녀는 얼마나 입술을 세게 깨물었는지 아랫입술에서 피가 흘러나왔다.
더 이상 문주희를 직접 상대하지 않겠다는 부운화의 불편한 마음을 눈치챈 조서인이다.
그는 망설임 없이 정중히 포권을 취해 감사의 뜻을 표했다.
“조언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숙부님. 일단 소호와 이야기를 나눠 보겠습니다.”
“그래. 언제나 대화가 가장 중요한 법이지.”
부운화는 웃었고, 조서인 또한 다부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조서인이 비틀거리는 문주희를 부축하여 통로 안으로 내려설 때쯤 가장 바깥쪽의 장지문이 박살 나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크아악!”
푸확!
“캬학!”
비명, 신음, 절규.
마치 지옥 밑바닥의 아귀들이 질러 대듯 섬뜩한 소리였다.
살수들을 이용해 삼중으로 준비된 방어진은 강력했으나 쳐들어온 자들의 사나움도 그에 못지 않은 듯했다.
객잔이 통째로 흔들리는 것 같았다.
부서지고, 박살 나고.
마침내 마지막 장지문이 찢어지듯 금이 가며, 흑의 괴인들이 불쑥 머리를 내밀었다.
스릉―.
부운화가 허리 뒤에 차고 있던 한 쌍의 장군검을 뽑아 드는 모습은 그림처럼 장쾌했다.
장군들이 지휘용으로나 쓸 법한 저 큰 검을, 어찌 두 개나 쓸 수 있을까.
편안하게 어깨를 편 자연체로 양팔을 늘어뜨렸는데 한 쌍의 장군검이 각각 그의 좌우를 비스듬히 겨누고 있었다.
아무도 넘어오지 못한다.
조서인을 향한 부운화의 등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캬하앗!”
견검대주가 ‘혈귀’라고 부른 자들이 괴성을 지르며 협봉검을 휘둘러왔다.
빠르고 사납다.
검끝이 좌우로 정신없이 흔들리는 사도(邪道)의 검술이지만 그 위력만큼은 우습게 볼 수 없었다.
부운화는 덤벼드는 혈귀가 가까워질 때까지 묵묵히 자연체를 유지하다가 딱 일 보를 내디뎠다.
후우웅!
검이 휘둘러지고, 사납게 달려들던 혈귀는 마치 몽둥이에 얻어맞은 사람처럼 퍽! 하는 소리와 함께 옆으로 날아가 벽에 부딪친 뒤 정신을 잃었다.
눈 깜빡할 새에 벌어진 일이다.
부운화는 언제 검을 휘둘렀냐는 듯 양발을 나란히 두고 팔을 늘어뜨린 자연체로 돌아와 있었다.
후우웅!
퍽!
퍼퍽!
혈귀가 둘이 들어와도, 셋이 한꺼번에 파도처럼 몰아쳐도 부운화의 행동은 늘 똑같았다.
분명히 검으로 베었는데 몽둥이로 후려친 것처럼 혈도가 제압되었다는 점에서 그의 높은 경지를 알 수 있다.
일보. 일격.
불과 이초식이나마 겨룰 수 있는 자가 없다.
그저 한 초식을 뻗어 낼 뿐인데 그걸 감히 받아 내는 자가 없으니 그야말로 일초무적이다.
다만 일정한 법칙이 있었는데, 우수로 검을 쓰면 다음번엔 좌수로 검을 썼다.
오른쪽 발을 내디뎌 검을 휘두르면 그다음엔 왼쪽 발을 내디디며 검을 휘두르는 식이다.
멍하니 그 모습을 지켜보던 조서인은 자신도 모르게 멈춰서서 탄성을 내질렀다.
개울가에 사람들이 세워 둔 돌탑을 보면 가끔 완벽한 균형을 맞추고 있는 돌덩어리를 볼 때가 있다.
완벽하게 조화를 이룬 돌은 몸집보다 작은 점 하나에 몸을 누이고 있음에도 몸이 흔들리지 않는 법이다.
조서인은 마치 그렇게 완벽하게 균형 잡힌 돌을 보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돌고돌아 태극.
음과 양의 조화라는 말이 이렇게나 어울리는 검술이 또 있을까?
내딛는 일보, 일보는 마치 구름을 사다리 삼아 걷는 신선들처럼 군더더기 없는 제운종(梯雲縱)이고, 휘두르는 검은 완벽한 태극의 이치를 품은 태극혜검이다.
감히 측량할 길이 없는 검의 경지를 보게 되니 충격에 빠져 시선을 돌릴 수 없었다.
그때 아래층에서 다급한 목소리가 올라왔다.
“칠성군이다!”
“젠장, 마군이 셋이나! 못 막습니다! 뚫고 올라갑니다!”
콰직! 쩌정!
객잔 바닥을 뚫어 버리며 올라오는 무시무시한 기운들이 있었다.
느껴지는 기운만으로도 조서인이 몸서리 치게 만드는 초절정의 고수들이다.
대체 저들을 어떻게 막을 것인가?
걱정하는 사이, 적들을 마주하던 부운화가 힐끔 옆으로 조서인을 돌아보았다.
드드드드―.
조서인은 자연스레 기관이 작동하며 다시 닫히는 비밀 통로가 아쉽다고 생각했다.
통로가 닫히자 더 이상 위는 보이지 않는다.
다만 엄청난 격전에서 발생되는 쾅쾅거리는 충격만이 그들이 딛고 있는 통로를 울렸다.
“월신이라면 은자촌 묵신 할아범의 후계자일 텐데, 언제 그와 결탁을 했지? 둘째 형님은 참 대단한 사람이다.”
어두워진 통로 안.
멀리 통로 끝에서 들어오는 햇빛에 의지해 걸어가면서 추룡은 헛웃음을 흘렸다.
“매번 느끼지만 대형과는 또 다른 방향으로 놀라운 형님이야. 소호에 대한 생각은 나와 좀 다르다만, 그래도 전장에서만큼은 대형만큼이나 믿을 수 있는 분이 바로 둘째 형님이다. 그러니 걱정할 것 없어.”
세상을 오시하며 사는 추룡이 이만큼이나 존경을 표하는 사람은 흔치 않다.
그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조서인은 그제야 불안했던 마음이 가시는 것을 느꼈다.
비밀 통로는 객잔뿐만이 아니라, 인근 거리의 뒷골목 방향으로 뻗어 있어 추룡을 비롯해 조서인, 팽자연, 문주희 모두가 무사히 빠져나올 수 있었다.
그들의 행선지는 이제 하나다.
묘아장.
황제가 이끄는 북벌에 동참한 소호를 찾기 위해 전쟁터로 향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