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권 12화
제39장 북벌종횡(北伐縱橫) (12)
오십만.
거대한 숫자였다.
입 밖으로 꺼내기는 쉽다. 오십만이라는 숫자를 먹을 갈아 종이 위에 글로 쓴다면 고작해야 세 글자에 불과하다.
하지만 현실은 다르다.
한 마을에서 병사로 징집될 수 있는 사내의 숫자가 얼마나 될까?
작은 마을은 건장한 사내 열 명만 병사로 보내도 마을이 휘청거릴 것이고, 수백 명이 모여 사는 마을이라면 젊은 장정 백 명을 간신히 감당할 것이다.
전국을 돌며 마을 수백 개를 찾아 징집해도 일만 명을 채우기가 힘들다. 수천 개의 마을을 돌아다녀서야 겨우 십만 명의 젊은이를 징집할 수 있다.
병사를 뽑아간다는 건 마을에겐 큰 부담이었다. 농사는 거저 지어지지 않는다. 벼가 저절로 자라서 저절로 수확된다면 얼마나 좋겠냐만 키우고, 잡초를 뽑고, 수확하는 모든 일에는 노동이 필요했다.
공명심에 불타 출세 한번 해 보겠다는 젊은이들만으로는 당연히 숫자가 부족했다.
명의 관리들은 바쁘게 움직였다.
사서에 따르면 명나라 이갑(里甲)에 등록된 총 가구 수는 일만 호 정도다.
사람의 머릿수로 따지자면 오천만에서 칠천만 인구가 명나라의 넓은 땅에 살고 있단 뜻이니 그중에 오십만의 병사를 징집한다는 건 절대로 작은 일이 아니었다.
심지어 문제는 또 있었다.
오십만이라는 숫자를 채우는 것도 어려운데, 숫자만 채운다고 되는 것도 아니라는 점이다.
사람을 뽑아 놓고 넌 이제부터 병사라 명령한다고 해서 그들이 병사가 될까?
모든 병사에게는 의식주와 무기, 적절한 훈련과 보상이 필요했다.
그들에게 싸우기에 적절한 의복과 무기를 지급해야 하며 기간을 두고 싸우는 법도 가르쳐야 하니 그에 들어가는 물자는 어마어마한 수준이다.
먹고 자는 건 또 어떻게 할 것인가?
오십만의 인원에게 매일 밥을 해 주는 군량은 땅에서 솟아나지 않는다. 군량을 미리 준비해서 그때그때 밥을 해 먹여야 했다. 오십만이 이동한다면 그들을 먹일 군량의 양은 말 그대로 병사들이 각자 자신의 등에 쌀을 한 섬씩 지고 이동해야 할 만큼의 양이 필요했다.
그 모든 일은 절대로 쉽지 않으며 하루아침에 되는 일은 결코 아니다.
하지만 병부상서 광야와 북경 황실에 모인 모든 대소신료는 그 불가능에 가까운 일을 해냈다.
북경을 지키는 수비대까지 모조리 긁어모으니 오십만이라는 숫자가 채워졌다.
북쪽 국경에서 오랑캐가 장성을 넘어온 상황. 모두가 자잘한 일은 손에서 놓고 황제의 친정이라는 거대한 업무에 매진하자 이뤄낸 기적이었다.
정통제 주기진.
그리고 그가 이끄는 오십만 병사가 줄을 지어 진군하는 모습은 그야말로 거대한 용 한 마리가 굽이굽이 지평선을 넘는 듯 웅장했다.
“흥미로워.”
소호는 눈을 빛냈다.
오십만에 달하는 엄청난 인파가 움직이는 모습도 장관이지만, 나라 곳곳에서 모여든 온갖 인간 군상들이 진군하는 내내 곳곳에서 문제를 일으키는 것 또한 상당히 흥미로운 일이었다.
“이런 젠장, 이 무거운 쇳덩어리는 왜 들고 가는 거야?”
“몰라. 교위들이 안 가르쳐 주던데? 그렇게 따지면 저기 천으로 둘둘 감은 상자들은 뭔지 아나? 다 모르지만 들고 가는 거지.”
“그러니까 먹지도 못하는 이런 걸 왜 굳이 들고 가냐 이 말이야. 교위 놈들이 함부로 다루지 말라고 지랄지랄하는 걸 보면 뭔가 귀한 물건이긴 한 것 같은데.”
“우리야 모르지. 알 필요도 없고.”
“젠장할. 하여간 높은 자리에 있는 놈들은 아랫놈들 고충 따위에는 관심도 없지.”
“쉿! 쉿! 말조심해, 장 씨.”
투덜거리며 짐을 옮기던 사내들이 소호의 모습을 보고는 황급히 말을 아꼈다.
누가 봐도 소호는 고관대작의 자녀처럼 귀티가 흐르니 다들 말을 조심하는 것이다.
투덜거리는 사내들뿐만 아니라 주변의 모든 이들이 사람의 다리만 한 길이의 육각형 쇳덩이를 직접 손으로 들고 나르고 있었다.
주변의 수레에도 그들이 옮기는 것과 동일한 쇳덩이와 천으로 둘둘 말아 정체를 알 수 없는 상자들이 한가득 실려 있다.
소호는 그것들의 정체를 알아채고 눈을 빛냈으나, 병사들 중에는 그 물건의 가치를 아는 자들은 존재하지 않는 듯했다.
“뭐가 흥미로워?”
소호의 곁에 있던 남장 여인이 물었다.
뽀얀 피부와 예쁘장한 얼굴은 감출 수 없지만 그래도 키가 크고 골격이 좋으니 그녀를 여자로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적갈색 무복을 단출하게 차려입은 그녀는 소호가 흥미로워하는 일에 관심을 표했다.
“저거 봐, 미미야. 저 사람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들고 다니는 건 총통(銃筒)이라고 불러. 화약을 이용해 쏘는 화포 같은 거야.”
대미미는 곧바로 이해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들고 다닐 수 있는 화포라는 거지?”
“맞아. 햇빛을 못 보게 천으로 감아서 실어 놓은 상자는 아마 화약일 테고, 저기 보면 화창(火槍)이나 신화비아(神火飛鴉)도 있네. 무기로 쓸 수 있는 화기들은 다 가져온 모양이야.”
소호는 창날에 대나무 통을 달아 놓은 화창과 얼핏 새 모양 장식으로밖에 안 보이는 물건을 가리켰다.
“저게 다 화기였구나. 몰랐어. 하긴, 오라버니는 은자촌에 있을 때 광 할아버지랑 잘 지냈으니 알겠다.”
“응. 많이 봤지. 최근엔 기옥이가 이것저것 만지니까 옆에서 보기도 했고.”
소호는 그런 중요한 물건들을 나르는데 정작 군문의 사람들은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다는 사실에 크게 놀랐다.
“알려 주질 않으니 왜 중요한질 모르고, 왜 중요한지 모르니까 저렇게 불만이 생기는 거구나. 근데 저 사람들 화기의 사용법은 알고 있을까?”
소호는 탄식했다.
천하를 진동시킬 좋은 무기가 있으면 무얼 하는가. 쓸 줄 모르면 그건 그저 짐일 뿐이다.
“화기 사용법이 문제는 아닌 것 같아. 저 사람들, 대부분 싸울 준비가 안 되어 있는데?”
대미미는 주변에 보이는 병사들 태반이 그 흔한 죽창 하나도 안 들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열을 맞춰 잘 걷고 있기는 했지만, 기껏해야 그 정도다.
무공을 익힌 무인은 상대의 걷는 모습만 봐도 그 사람의 무공 수위를 짐작할 수 있는 법이다. 대미미는 병사들이 평생 싸움은커녕 무기도 들어 보지 못한 사람들이 대부분이라는 걸 장담할 수 있었다.
무기도 없고 갑주도 없이 가는 사람들이 전쟁터에서 싸울 수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사실 여기 오기 전에 하오문 사람들이 알려 줬어. 아무래도 오십만은 그저 숫자만 맞췄을 뿐이고, 실제로 싸울 수 있는 인원은 팔만 정도가 아닐까 생각된다고 하더라. 근데 직접 보니까 그 말이 맞는 것 같아.”
대미미는 하오문의 거화신녀라 불리는 명성답게 날카로운 안목으로 주변을 판단했다.
소호 또한 그녀의 의견에 동의했다.
“네 말이 옳다, 미미야.”
“그렇지?”
“척 봐도 대부분은 싸울 수 있는 상태가 아니야. 훈련받을 시간도 없었던 것 같고. 이쯤 되면 장수들의 의도가 애초에 숫자만 채우는 거였다고 봐야지.”
“숫자만 채우면 무슨 의미가 있어?”
“닭들이 싸울 때 털을 막 부풀리잖아?”
소호는 뜬금없는 이야기를 꺼냈다.
대미미는 동그란 눈을 잠시 끔뻑거리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서로 덩치가 커 보이려고 볏을 부풀린 다음에 싸워. 아! 혹시 닭처럼 우리도 덩치가 큰 척을 해서 겁을 주려 한다는 거야?”
“그런 것 같아. 쳐들어온 이민족들이 오만 정도 된다고 하더라. 상대가 그 열 배나 되면 일단 주춤하긴 하겠지?”
“흐음.”
“병부상서 광야는 영락제 때부터 활약한 경험 많은 장수라고 했어. 아마 아무 생각 없이 이런 실수를 하는 건 아닐 거야.”
“근데 적들이 겁을 먹을까?”
대미미는 입술을 앙다물면서 고민했다.
소호는 그녀를 보며 웃었다. 나이가 들고 성숙해지면서 얼굴이 갸름해졌음에도 불구하고 대미미의 얼굴을 보면 어릴 때의 통통한 미미가 생각난다.
“그건 말이지.”
소호는 멀리 지평선 끝에서 나아가고 있는 선두의 화려한 가마를 바라보았다.
“아마 양쪽 장수들의 능력에 달려 있을 거야.”
나라를 이끄는 문무백관들 중 가장 핵심이라 할 수 있는 귀족들 대부분이 이번 친정에 참가했다. 황제가 나서는데 군신 관계인 신하들이 감히 나서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이 싸움은 질 수가 없는 싸움이었고, 중요한 건 질 수 없는 싸움 안에서 얼마나 되는 공을 나눠 갖냐는 것이 관료들 사이의 핵심 화두였다.
그들은 유능했고 각종 경전을 독파한 수많은 지략을 지니고 있었으나 딱 하나 큰 문제를 갖고 있었다.
선대 황제들의 치세가 너무 평화로워 젊은 관료들은 전쟁 경험이 없었으며, 경험이 있는 사람들은 하늘을 찌르는 왕진의 권위 때문에 함부로 나설 수가 없는 구조였다.
오십만 대군이 치기 어린 황제와 그를 옆에서 조종하는 왕진 태감의 지휘 아래에서 나아가고 있었다.
“이제 곧 대동이군. 선봉군의 지휘는 누가 한다고 했지? 곽경 태감이었나?”
“그렇사옵니다, 폐하. 곽경 태감의 지휘 아래 서렬후 송영과 무진백 주면이 묘아장과 양화를 지키고 있습니다. 곽경은 용맹하고 손자병법을 통달한 자이니 어쩌면 선봉군만으로도 오랑캐들을 무찌를지도 모릅니다.”
“정말 그렇게 된다면 좋겠군. 아니, 아니지. 그러면 안 되는 건가? 짐이 여기까지 일부러 찾아왔는데 적들이 이리도 시시하게 물러나서야 어찌 짐의 체면이 서겠는가? 대명제국 황제의 위엄을 북쪽 오랑캐들에게도 전해 줘야 하거늘!”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폐하. 오랑캐들이 물러날 때 물러나더라도 폐하가 이끄는 대군의 위엄을 보고 물러나야 할 텐데 말입니다.”
“하핫! 과연 그렇다.”
호쾌한 황제의 웃음과는 달리 병부상서 광야를 비롯한 장수들의 안색은 그리 좋지 않았다.
특히 대월과의 싸움에서 전쟁 경험이 많은 영국공 장보와 호위대장 번충의 불만은 극에 달했다.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전불태라고 했다.
선봉군의 지휘관으로 환관을 지정한 것도 마음에 들지 않거니와, 적을 알려고도 하지 않고 무작정 오랑캐라고 무시하는 행태가 위험하다는 생각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대월의 오랑캐들도 만만치 않았다. 그들에겐 중원인들과는 다른 그들만의 강함이 있었어. 장성을 넘은 자들이 고작 마적단 수준일 리가 없다. 분명 북원의 정예들일 터. 이렇게 허술하게 처리해선 안 되는 자들이다.’
‘이렇게 느긋하게 상대해도 되는 것인가? 장성을 뚫고 내려온 자들인데? 그들을 정말로 선봉군만으로 물리칠 수 있을까?’
의문은 많았으나 감히 그 의견을 소리 내어 말할 수 있는 자는 적어도 이 자리엔 아무도 없었다.
그나마 말을 꺼낼 수 있는 사람은 병부상서 광야 정도일까.
그런데 그나마 광야도 이번 전쟁에선 전적으로 황제의 결정을 따르겠다는 노장의 충심을 보여 주고 있었다.
여러모로 장수들에게는 손발이 묶여 버린 상황이다.
“선봉군 사령관 곽경이 도착했습니다!”
그때 입구를 지키던 금의위 한 사람의 목소리에 회의장의 분위기가 급격히 차가워졌다.
‘곽경? 선봉군을 지휘하고 있어야 할 자가 왜 갑자기?’
‘폐하께 얼굴이라도 비추러 온 건가? 전쟁 중에도 오로지 아부뿐이군. 환관답게 교활한 자야.’
검은색 관복 소매가 잔뜩 찢어진 데다 피인지 먼지인지 모를 시커먼 것들을 뒤집어쓴 환관 곽경이 다급하게 뛰어 들어왔다.
그는 숨이 거칠었고, 안색은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모두가 침묵했다.
선봉군의 지휘관이 보일 만한 행색이 아니다.
그 순간 그 자리에 있던 모두가 불길한 예감을 느꼈다.
“폐하! 죽여 주시옵소서!”
곽경이 무너지듯 무릎을 꿇고 이마를 땅에 박았다.
그의 절절한 외침이 모두를 얼어붙게 만들었다.
“선봉군이 대패하였습니다! 적장 에센과 오랑캐들의 기세가 강맹하여 막아 낼 수가 없었나이다! 죽여 주시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