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풍운객잔 2부-467화 (596/686)

19권 13화

제39장 북벌종횡(北伐縱橫) (13)

주기진이 앉아 있던 의자가 뒤로 넘어졌다. 덩치가 큰 주기진이 체통 불문하고 벌떡 일어나는 바람에 벌어진 일이었다.

용상이 넘어지다니.

근처에 있던 환관들이 다급하게 종종걸음으로 다가와 용상을 다시 일으켜 세웠다.

불경한 일이다.

불경한 일이야.

환관들이 당황하여 속삭이듯 말했다. 용상은 넘어져선 안 되는 황제의 상징이다. 이보다 더 작은 일로도 나라를 망칠 흉조라며 치도곤을 치는 시대였다. 용상에 찻물을 흘린 궁녀가 죽기 직전까지 매를 맞은 기억이 생생했다.

그들은 마치 용상이 쓰러진 적이 없는 것처럼 얼른 용상을 세우고 주기진의 눈치를 살폈는데, 황제는 다행히도 용상 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주기진은 두 눈을 부릅뜨고 곽경을 노려보았다.

“대패라니. 어느 정도의 패배를 말함인가.”

“폐, 폐하…….”

“소상히 말하라. 적장이 얼마나 되는 병력을 이끌고 덤벼 왔으며, 그대는 얼마나 되는 병력을 잃었나?”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던 곽경의 귀가 하얗게 질렸다.

곽경은 마른침을 꼴깍꼴깍 삼키다가 절박하게 외쳤다.

“적장 에센의 병력은 이만……, 아니, 삼만, 아니, 오만은 되어 보였습니다! 적들은 모두가 기마병이고 그 움직임이 마치 갈까마귀 떼가 덤벼들 듯 맹렬해서 그만……. 저희 선봉군은……. 모두가 장렬히 전사하고, 저를 지키던 호위대 십여 명만이 살아남았나이다.”

주변에서 탄식이 터져 나왔다. 보고에서 드러나는 곽경의 무능함에 대한 탄식이었다.

특히 병부상서 광야는 하얀 수염을 잔뜩 일그러뜨리면서 두 눈을 부릅떴다. 그의 손등에 힘줄이 돋아 있었다. 그는 도저히 참지 못하고 일갈했다.

“선봉군의 지휘관이라는 자가 적의 숫자조차 파악하지 못하다니! 이리도 무능하고 모자란 자였던가!”

곽경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했다. 그는 그저 무릎을 꿇고 이마를 땅에 박은 채 부들부들 떨기만 했다.

보통 사람이 그러면 그 모습이 안타깝고 불쌍했을 텐데 곽경은 달랐다.

회의장 곳곳에서 탄식이 터져 나왔다.

그는 나라의 명운을 건 전쟁의 선봉장이었다. 장수의 무능함과 나약함은 연민의 대상이 아니다. 오히려 모두의 화를 돋울 뿐이다.

무거운 침묵에 빠진 주기진을 대신해 왕진이 앞으로 나섰다.

“곽경. 폐하의 어전입니다. 충격이 심하겠지만 정신 차리고 똑바로 대답하세요. 선봉군이 전멸했다니 안타까운 일입니다. 허나 적들도 피해가 막심했겠지요? 용맹하게 끝까지 맞서 싸웠다는 뜻이니 적들의 피해도 만만치 않았을 것 아니에요?”

왕진은 속에서는 천불 같은 화가 들끓었지만 얼굴만큼은 웃음을 잃지 않았다.

그는 황제의 스승이자 당금 황실의 실질적인 지배자다.

이런 자리에서 화를 내 봤자 품위만 떨어질뿐더러, 곽경은 왕진 자신이 선봉군의 사령관으로 꽂아 넣은 자였다.

‘사령관은 역모를 일으킬 수도 있으니 경계해야 하는 자리라고, 믿을 수 있는 곽경 태감에게 맡기라고 내가 추천을 했었는데, 이런 식으로 내 권위에 먹칠을 하다니!’

이 자리에서 가장 곽경을 죽이고 싶은 자가 있다면 왕진일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최대한 곽경의 편을 들어줘야만 했다.

모두의 따가운 시선을 이기지 못했음인가. 곽경은 다급하게 상황을 실토했다.

“예, 예. 분명 오랑캐들의 피해도 막심할 것이옵니다. 도망 다닐 수 없도록 대동에서 선부로 향하는 방향의 좁은 평원까지 끌어들여 정면으로 싸웠으니. 분명 저들도 피해가 클 것이지요. 예.”

“허.”

왕진의 웃음이 깨졌다.

그는 입술의 모양이 비틀어지고 말았다.

또다시 병부상서 광야가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

“피해가 막심할 ‘것이다?’ 분명 저들도 피해가 클 ‘것이고?’ 말투가 이상하군. 추측이 너무 많아. 사령관이라는 자가 여기로 도망쳐 오기 전에 싸움의 향방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온 것인가?”

“그게…….”

“게다가 좁은 평원에서 싸웠다? 거세고 사납기로 유명한 북원의 기마병을 상대로 보병들을 이용해 정면으로 그들을 막았다는 건가? 그걸 전략이라고 짠 게야?”

광야는 자신의 허리춤에 칼이 있었다면 당장 뽑아서 목을 치고 싶은 것처럼 손가락을 꿈틀거렸다.

그 순간 왕진은 판단을 내렸다.

이대로는 안 된다. 싸움의 후유증이 큰 탓인지 곽경이 상상 이상으로 바보짓을 하고 있었다.

그는 다급하게 주기진을 향해 읍소했다.

“폐하. 승패병가지상사(勝敗兵家之常事)라 했습니다. 승리할 때가 있다면 패배할 때도 있는 것이지요. 우선은 상황이 위중하고 다급하니 곽경의 책임을 묻는 것은 나중으로 하고 우선 적들의 상황을 먼저 알아보는 것이 어떨런지요?”

“태감의 말이 옳군. 우리는 전쟁 중이며 이곳은 전장이다.”

주기진은 노화가 들끓는 얼굴로 곽경을 쏘아보다가 자신의 미간과 코끝을 문지르며 애써 화를 삭였다.

“여봐라. 패장 곽경을 내 앞에서 치우거라. 그리고 패전이 벌어졌다는 그곳을 내 눈으로 직접 봐야겠다.”

“폐하! 그것은 아니 되옵니다!”

병부상서 광야가 크게 놀라 주기진을 만류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오랑캐들이 눈과 귀를 열고 폐하의 동향을 주시하고 있을 것이옵니다. 본래 전장이란 언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늪과도 같은 곳이니 만에 하나라도 폐하의 옥체가 상하는 일을 경계하셔야 하옵니다.”

“그게 무슨 말이오. 병부상서. 짐을 깨지기 쉬운 도자기처럼 여기는 것인가? 친정까지 나온 마당에 싸움을 두려워해서야 어찌 황제이며 천자라고 할 수 있겠소?”

“폐하, 무릇 군주에겐 군주의 도(道)가 있는 것이옵니다. 전장을 살피는 일은 노신과 무장들에게 맡기시옵소서. 노신이야 만에 하나 큰일이 생기더라도 이곳에 유능한 무장들이 있으니 걱정이 없으나, 천하에 천자는 단 한 분뿐이시옵니다.”

광야의 말에는 깊은 충심이 묻어났다.

하나 주기진은 광야의 말을 들을 마음이 없었다. 그는 광야가 그를 어린아이 취급한다고 생각했다.

들끓는 마음.

일평생 그 어떤 욕망도 참아 본 적이 없는 황제는 지금 당장이라도 감히 장성을 넘어온 오랑캐들을 발아래에 무릎 꿇리고 싶었다.

“병부상서의 충심은 짐이 가슴 깊이 새기도록 하겠소. 허나 숨어서 목숨만 보전하려 한다면 짐은 북방 오랑캐들에게 대명제국의 위엄을 보이지 못할 것이오.”

분노로 인한 폭주인가.

아니면 어리석은 젊은이의 치기인 것인가.

주기진의 의견은 확고했고, 결국 아무도 황제의 뜻을 막지 못한 채 오십만 대군이 선봉군이 패배한 장소를 향해 움직이게 되었다.

울창하게 들풀이 자라난 협로를 지나는 도중, 자진하여 앞으로 나선 주기진은 위풍당당하게 움직이다가 자신도 모르게 말고삐를 잡아당겼다.

“이게 무슨 냄새냐?”

머릿속이 아찔할 정도의 불쾌한 악취가 코를 찌르고 있었다.

냄새를 맡은 것은 주기진뿐만이 아니었다. 왕진 또한 소매로 코를 막고 있었다.

주변을 지키는 금의위와 고위 관료들, 선두에서 나아가던 호위대 병사들도 모두 눈살을 찌푸린 채 코를 막았다.

사방으로 퍼져 주변을 경계하던 척후군 한 사람이 다급하게 다가와 병부상서 광야에게 무언가를 속삭였다.

광야는 무거운 안색으로 주기진에게 경고했다.

“전장의 냄새이옵니다. 폐하, 마음의 준비를 하십시오.”

병부상서 광야의 말은 그의 말을 들을 수 있는 모두에게 큰 경각심을 주었다.

오십만 대군이 점점 진해지는 악취를 향해 일각의 시간 동안 나아갔다.

좁은 협로를 지나 탁 트인 평야가 나타났다.

곽경이 좁은 평야라고 했던가?

큰 산과 협곡이 양옆으로 있으니 틀린 말은 아니나, 그렇다고 해서 그리 좁지도 않았다.

애초에 만 단위의 병력이 부딪칠 만한 평야였다.

좁다고 한들, 한 사람이 고개를 오른쪽 지평선까지 돌렸다가 왼쪽 지평선까지 돌릴 정도의 너비는 충분한 넓은 곳이었다.

그런데 그 넓은 평야가 시신으로 가득 차 있었다.

만 단위의 시신.

그 대부분은 화살과 칼에 난도질당한 처참한 모습으로 죽어 있었다.

칠월의 따뜻한 날씨는 불과 며칠 만에 시신들 대부분을 부패시켰다.

하늘 위에는 까마귀 떼가 지옥의 아귀들처럼 돌아다녔고 섬뜩한 안광을 지닌 들개들이 시신을 뜯어먹다가 갑자기 등장한 병사들을 경계했다.

윙윙거리는 파리 떼가 한 덩어리가 되어 이곳저곳을 달라붙으며 옮겨 다니는 모습을 보니 이곳이 지옥인지 현세인지 구분이 되질 않는다.

모든 이들이 숨을 쉬기 힘들다고 생각했다.

불쾌하고 독한 악취는 눈에 보일 것처럼 진한 시독(屍毒)을 뿜어대고 있었다.

천천히.

창백한 안색으로 그 모든 참상을 바라보던 주기진이 그 모든 참상의 한가운데 꽂혀 있는 긴 철창과 그 위에 걸려 있는 두 개의 수급을 발견했다.

둘 다 명나라 군령을 지닌 장수의 투구를 쓰고 있었다.

광야가 신음하듯 말했다.

“서렬후 송영…… 그리고, 무진백 주면입니다.”

주기진의 손끝이 파르르 떨렸다.

둘 다 잘 아는 사람들이다.

불과 얼마 전에 오랑캐를 막으라며 자신이 직접 임명하여 군령을 넘겨준 선봉군의 장수들이다.

곽경 태감 따위 허수아비가 아니라, 실질적으로 병사들을 이끌었던 지휘관이지 않은가.

이제야 이곳이 전장이라는 것이 실감이 났다.

광야가 말하지 않았던가.

전장이란 언제 어떤 일이 벌어져도 이상하지 않을 늪과 같다고.

주기진은 숨이 막히는 것을 느꼈다.

발밑에서 끈적거리는 무언가가 그를 잡아끌고 있었다.

지휘관.

그렇다.

자신도 저 꼴이 될 수 있다.

서렬후 송영과 무진백 주면처럼.

철창 위에 꽂힌 수급의 얼굴이 자신의 얼굴처럼 보였다.

“쿠웨엑!”

주기진은 참지 못하고 고개를 옆으로 돌려 오늘 먹은 모든 것을 토해 냈다.

음식을 게워 낸 걸로도 모자라 눈물, 콧물을 쏟으며 위액까지 뱉었음에도 구토가 멈추질 않았다.

“폐하께선, 우욱, 피곤하시다! 어서 가마 안으로 모시거라!”

왕진 또한 울렁거리는 속을 꾹 참으며 간신히 환관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주기진은 혼이 빠져나간 듯한 모습으로 환관들의 부축을 받아 가마 안으로 모셔졌다.

이런 처참한 광경을 보며 속이 안 좋은 건 황제 한 사람뿐이 아니었다.

황제의 곁을 지키는 환관들과 고관대작들 모두가 차마 입을 벌려 크게 숨을 쉬기 힘들어할 정도로 괴로워했다.

이번에 징집되어 전장을 처음 경험하는 병사들은 사색이 되었다.

하늘 위의 존재인 줄 알았던 황제와 고관대작들이 구토를 하고 괴로워하는 상황이다. 믿을 구석이 없어진 병사들이 창백해진 얼굴로 여기저기서 구토를 하고 사기를 잃어 갔다.

“병부상서! 무얼 하나요! 확인은 끝났습니다. 어서 회군하죠. 이런 불쾌한 곳에선 한시라도 폐하를 모시고 싶지 않아요!”

날카로운 외침에도 광야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는 서릿발처럼 굳은 얼굴로 장수들에게 지시를 내렸고, 그들 중 한 사람이 빠르게 말을 달려 송영과 주면의 수급을 회수했다.

그사이에 광야의 명을 받은 호위대의 병사들이 전장을 크게 한 바퀴 살핀 뒤 돌아왔다.

“병부상서께 보고드립니다. 대부분의 시신이 명군의 복색을 하고 있으며 오랑캐의 것으로 보이는 시신은 수십 구를 넘지 않았습니다.”

“확실한가?”

“눈이 좋은 자들입니다. 확실합니다.”

병부상서는 침통한 얼굴이 되었다.

“적들이 생각보다 더 강하구나. 영국공은 어떻게 생각하시오?”

“전황의 결과가 압도적입니다. 지금이라도 당장 폐하를 모시고 회군해야 합니다. 이자들은 대군을 보고 겁먹을 것 같지 않습니다. 자칫 폐하께서 옥체에 손상이라도 입으신다면 그건 전쟁에서 진 것보다도 큰일이지요.”

“옳은 말이오.”

대월국과의 전쟁 경험이 많은 영국공 장보가 광야와 동일한 의견을 냈다.

광야는 군의 장수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본래는 시신을 모아 태워야 하겠으나, 지금은 적들에게 발견될 수 있으니 삼가는 게 좋겠다. 우선은 회군하도록 한다. 시신들의 수습은 차후에 한다.”

오십만 대군이 진행 방향을 바꾸는 것은 큰일이었다.

꼬리가 긴 뱀처럼 똬리를 틀 수도 없으니 결국 평야를 향해 다가오는 후열의 병사들과 좌우로 거리를 벌려서 스치듯 지나갈 수밖에 없었다.

문제는 좁은 협로로 다시 진입하려는 그때 벌어졌다.

갑자기 수풀이 흔들리더니 짐승 가죽을 덧댄 갑옷을 입고, 목에는 붉은색 천을 감은 이민족 사내가 야생동물처럼 불쑥 나타났다.

“누구냐!”

대열의 선두를 나아가던 호위대가 크게 놀라 창을 겨눈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민족 사내.

타타르와 카라코룸에선 ‘붉은 늑대’라 불리는 육모담이 수십만 대군을 앞에 두고도 당당한 태도로 검을 뽑았다.

스릉―.

그의 시선이 가는 곳은 오직 한 곳뿐이다.

화려하기 짝이 없는 황제의 가마 옆.

얼굴에 분칠을 한 환관이 그의 시야에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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