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권 14화
제39장 북벌종횡(北伐縱橫) (14)
“왕진.”
육모담은 뜨거운 감정을 드러냈다.
활활 타오르는 눈.
짐승의 그것처럼 정제되지 않은 살기가 순식간에 천지사방의 모든 것을 찢어 죽일 듯 강맹하게 피어올랐다.
그가 이 자리에 오기까지 얼마나 많은 길을 돌아왔던가.
대(大)화산파라 불리던 사문의 장문인과 사형제들이 모조리 죽었다.
육모담은 그날의 기억이 지금도 생생했다. 아니, 단 한 순간도 잊은 적이 없다는 말이 더욱 정확했다. 상처가 반복되면 굳은살이 되지만 아픈 기억에는 굳은살이 생기지 않았다.
매일 고통스러웠다. 치가 떨리고 입에선 피 맛이 났다.
혼란의 시기.
화산의 큰 어른이자 모두의 존경을 받던 매화신검께서 사흉이라 불리는 짐승들에게 물어뜯기기 전에 그에게 명했다.
살아남으라고.
대화산파의 매화꽃을 여기서 끝내지 말라고 말이다.
하나 육모담은 살아남는 것만으로는 도저히 만족할 수가 없었다.
용서할 수 없었다.
성인군자도 아닌데 어찌 사문의 원수를 용서할까.
무림 강호를 혼란케 한 강호의 흉적. 왕진.
청산에 땔감이 있는 한 복수는 언제고 할 수 있다고 했던가?
흔히들 와신상담의 고사를 말하지만 육모담은 도저히 그렇게까지 참을 자신이 없었다.
그는 자연스레 백검회라는 곳에 합류했다. 청성파의 파문 제자들은 그와 똑같이 복수심에 불타는 자들이었다.
화산과 청성.
흑시군이 등장하기 이전이었다면 도저히 함께할 수 없을 명문 검가 두 곳이 자신의 무공을 아낌없이 내놓고 인재들을 끌어들였다.
백검회에 들어오는 자들은 모두가 똑같았다. 가족이나 친지 중의 한 사람이 흑시군에게 희생당한 사람이다.
흑시군은 전 무림에 해악을 끼치고 있었기에, 괴롭고 고통스러운 피해자들을 찾는 것은 조금도 어렵지 않았다.
그런데 일 년, 이 년 시간이 지나면서 백검회의 몸집은 불어났으나 결과적으론 아무것도 해내지 못했다.
백검회는 지리멸렬하고 있었다. 작은 성취는 있었으나 늘 제대로 된 복수는 하지 못한 채 흑시군과 관련된 자잘한 폭력만 휘둘렀다.
무림 강호에서조차 그들을 경원시했다.
당연한 일이다.
그들은 복수귀니까.
죽을 위기에 처하면 온몸을 백린탄으로 불사르면서도 복수를 부르짖는 괴물들이니까.
육모담은 그렇다 해도 좋았다.
왕진만 죽일 수 있다면.
그의 사문을 몰락시킨 그 간악한 환관의 머리를 깨부술 수만 있다면 그는 복수귀가 아니라 야차, 아귀 뭐든 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런데 가장 중요한 복수의 길이 너무나 요원했다.
왕진의 권세는 나날이 강해졌고, 그가 이끄는 흑시군은 무림 강호에 자신들만의 영역을 설정할 정도로 위치가 공고해졌다.
사흉은 강했다. 육모담은 자신의 힘이 부족함을 깨닫고 절망했다.
그때쯤 깨달았다.
백검회는 복수가 아니라, ‘복수를 하고 있다.’는 사실에만 매몰되어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정말로 복수를 할 수 있는지는 중요치 않았다.
원한을 가진 자들끼리 모여 복수를 하고 있다고 믿는 것만으로도 충분했으니까.
그러다 마주쳤다.
뜨거웠던 과거의 잔영.
세상을 경동시킨 자, 장기린.
그는 모종의 이유로 왕진을 죽이고자 했고, 황실을 향해 진격해 수십, 수백의 사상자를 만들어 냈다.
사흉들 따위는 수수처럼 베어 넘겼다.
무림 강호를 반으로 쪼개며 가로지르는 그의 질주는 그야말로 하늘에서 내리치는 천둥과 같지 않던가.
그런데 살았다.
누가?
왕진이.
장기린이 어떤 자인지 알고 있는 육모담은 그날 큰 충격을 받았다.
사형 선고를 받은 듯한 기분이었다.
호랑이가 못 잡는 사냥감을 들개가 잡을 수 있을까?
장기린이 못 죽였다면, 그는 죽었다 깨어나도 왕진을 죽일 수 없었다.
그때부터 다른 길을 찾았다.
백검회는 청광에게 넘겨주고 그는 왕진을 죽일 만한 다른 ‘나라’를 찾아 국경을 넘었다.
북방의 이민족과 함께 하는 시간은 생각보다 길었고, 큰 경험이 되었다.
중원 따위는 좁은 세상이었다.
물자가 풍족한 대국이라는 것이 꼭 그 나라가 가장 뛰어나다는 뜻은 아니다.
동쪽으론 중원과, 서쪽으론 비단길 너머 서역까지 닿아 있는 그들은 생각보다 더 많은 문화와 싸움법을 지니고 있었다.
육모담은 성장했다.
집혼기를 가지고도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던 오매검마는 이젠 없다.
절정의 경지를 아득히 초월한 자.
대초원에서 끊임없이 자신을 단련한 진정한 전사, 붉은 늑대는 이제 황실의 병사들 따위는 수천, 수만이 있더라도 두렵지 않았다.
“비켜라.”
그의 말을 들을 자는 없다.
당연하게도 선두에 있던 호위대 병사들이 사납게 창을 찔러 왔다.
화아아악―――.
허물을 벗듯 뿜어내는 기도가 하늘을 찌른다.
툭.
육모담이 발끝으로 땅을 박차는 순간 그의 몸이 은밀하면서도 가볍게 미끄러지듯 앞으로 나아갔다.
암향표.
길을 걷다가 매화향이 나고 있었음을 한참을 지나치고 나서야 알아채는 경우가 있다. 무심코 지나치기 쉽지만 그 향기는 오랫동안 여운을 남긴다.
육모담의 신법이 그랬다. 주변과 어우러지면서도 너무나도 빨랐다.
신법이 눈에 띄게 뛰어나 보이지는 않지만 지나고 나면 안다. 육모담의 신법이 얼마나 치명적이었는지를 말이다.
육모담의 몸은 병사들이 찌르는 창과 창의 사이를 교묘하게 파고들었다.
병사들의 눈에는 육모담이 얼음 위를 미끄러지듯 움직여 한순간 시야에서 사라진 것처럼 느껴졌을 것이다.
애초에 말이 안 되는 싸움이다.
초절정의 벽을 넘은 고수.
육모담이 보기에 호위대의 병사들은 무거운 물속에 몸을 담그고 움직이는 것처럼 느릿느릿한 자들이었다.
푸푹―.
두 개의 파열음.
두 병사의 목에 구멍이 뚫리며 핏물이 길게 뿜어졌다.
“크악!”
병사의 비명이 미처 터져 나오기도 전에 육모담의 몸은 이미 황제의 가마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일 선의 호위대는 허무하리만큼 가볍게 뚫렸다.
하나 이 선의 호위대는 다르다.
무더운 날씨, 불쾌하기 짝이 없는 악취 속에서도 두꺼운 갑옷을 입고 귀와 목 같은 급소들을 철저히 가리고 있는 정예 중갑병이다.
강호 무림의 협사들이 어째서 흑시군에게 무력하게 쓸려 나갔던가?
바로 저것.
일류 이상의 검기를 뿜지 않으면 상처조차 못 입히는 바로 저 군용 갑옷들 때문이다.
중갑병은 커다란 언월도를 내리칠 것처럼 들어 올렸다.
그 옆에도, 그 뒤에도.
중갑을 입은 병사들이 마치 겹겹이 쌓은 장벽처럼 그를 가로막는다.
“훗, 그깟 갑옷.”
예전이었다면 막혔으리라.
화산파 시절의 오매검협이라면 여기서 어떻게든 저 갑옷들을 뚫어 보겠다고 매화검과 오행매화검을 펼치며 한참의 시간을 소모했을 것이다.
스릉―.
육모담은 달리던 기세를 멈추지 않은 채 협봉검 끝을 하늘을 향해 꼿꼿이 세웠다가 밀어치듯 수평으로 휘둘렀다.
푸화악――!
천류신화검법(天流神火劍法).
번뜩이는 검강이 중갑병의 두꺼운 갑주를 가르고 가슴을 길게 갈라 버렸다.
육모담은 충격으로 비틀거리는 중갑병의 무릎을 밟으며 몸을 띄웠다.
타타탁!
무릎, 어깨, 투구.
휘청이며 쓰러지는 중갑병의 몸을 순식간에 세 번이나 디딤돌로 쓴 육모담은 하늘을 향해 새처럼 훨훨 날아올랐다.
그 높이가 무려 삼 장.
황당무계한 심정으로 멍하니 올려다보는 병사들이 좌우로 쏜살같이 지나간다.
육모담은 그림 같은 경신술로 순식간에 황제의 가마에 도달했다.
“무슨 소란이냐!”
극심한 구토로 안색이 창백해진 주기진이 신경질적으로 얼굴을 내밀다가 그런 육모담과 눈이 마주쳤다.
시간이 느려진 듯한 순간.
육모담은 분명히 보았다.
오만한 황제는 이민족 전사의 복장을 한 그를 보며 불쾌한 것처럼 눈살을 찌푸렸다.
그리고 그 황제의 바로 곁에 저주하고 또 저주하는 만악의 적, 왕진이 있다.
그는 육모담을 알아볼까?
아닌 듯했다.
육모담을 보는 시선에는 놀라움보다는 생경함과 경멸이 담겨 있었다.
육모담은 검을 꽉 움켜쥐었다.
벨 것이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반드시 죽일 것이다.
황제 또한 책임이 있다.
왕진이 흑시군을 이용해 강호 무림을 유린한 건 황제의 책임도 있지 않은가.
그러나 육모담에게 자유롭게 허락된 시간은 황제의 가마 앞에 도착하는 것에서 끝이 났다.
비호처럼 달려든 금의위들.
흑색의 무복에 황실의 용 문양을 가슴에 새긴 황실 최고의 고수들이 순식간에 황제의 가마 주변을 그야말로 성벽을 쌓듯 물리적으로 막아 버린 것이다.
한 걸음이면 다가갈 수 있었던 황제의 가마가 이제는 매우 멀어졌다.
“비켜라.”
처음과 똑같은 말이지만, 여전히 듣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육모담은 자세를 낮추고 왼손바닥으로 자신의 검날을 거칠게 쓰다듬었다.
휘릭―.
검끝을 꼿꼿이 세우면서 주변의 자연기를 크게 들이마신다.
머릿속에 떠올리는 것은 화산파 최후의 싸움에서 보았던 매화검신의 모습이다.
화산파 무학의 화신 같던 그 모습.
자신이 한 그루의 매화나무가 된 것처럼 사방으로 매화 꽃잎을 흩뿌리던 정기(正氣) 가득한 검법들을 어찌 잊을까.
‘검신이시여. 저는 이미 화산을 떠났으나 당신을 늘 흠모합니다. 그런데 애석합니다. 제 검에서는 더 이상 매화향이 나질 않습니다.’
육모담은 자신이 광명정대한 화산 후기지수의 길에서 멀어졌음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이제 그는 고고한 매화향을 뿌리지 못한다.
하지만 하나를 잃으면 하나를 얻는 것이 세상의 이치인지라.
육모담은 뜻하지 않게 다른 쪽의 성취를 얻었다.
피.
당장이라도 끈적한 피가 발밑을 적실 것처럼 섬뜩한 혈향이 그의 검에서는 진하게 흘러나왔다.
혈매화검법(血梅花劍法).
육모담이 북방의 이민족들과 함께 싸우며 탄생시킨 지극히 실전적이고, 사나운 기상의 검법이 모습을 드러냈다.
매화노방(梅花路傍), 매화접무(梅花蝶舞), 매화토염(梅花吐艶).
이십사수매화검법을 시작하는 초반부 삼 초식이 육모담의 손끝에서 늑대의 이빨처럼 사납게 상대를 물어뜯었다.
파라라락―.
금의위의 금호검(金護劍)도 충분히 훌륭한 검술이었지만 상대가 너무 나빴다.
금의위들이 웅장한 합격술을 펼치기도 전에 육모담의 검은 그들의 요혈들을 휩쓸었다.
염천, 선기, 잔중.
목젖에서 명치로 이어지는 중심부의 요혈들이 일거에 꿰뚫렸다.
“크흡!”
“컥!”
“크르륵.”
금의위 세 사람이 피를 토하며 비척비척 뒤로 물러났다.
깜짝 놀라 더욱 경계하는 그들을 향해 육모담의 검이 춤을 췄다.
압도적인 무형기.
흩날리는 검끝이 금의위들의 요혈에 혈매화를 그렸다.
피슉―.
푸화악!
쩡!
단 일 수도 막지 못하는 자들은 풀처럼 베여 나가고, 그나마 절정에 다다른 조장급의 금의위들은 자신의 검날에 쏟아지는 혈매화의 가공할 내력에 치를 떨며 코피를 흘렸다.
피가 튀고 비명이 터져 나오는 전장의 한가운데서 육모담은 하늘의 뜻을 느꼈다.
푸르른 하늘 위 뜨거운 태양이 그에게 말한다.
저 넓은 하늘 아래, 수십만이 모여 있는 이 전장에서 자신을 막을 수 있는 자는 없다.
‘무쌍귀. 장 공, 이런 기분이었구려.’
육합구소신공(六合九韶神功)의 내력이 유장하게 흐르며 육모담의 검강을 더욱 길고 단단하게 만들었다.
푸화악!
물 흐르듯 뿜어내는 혈매화검법이 금의위들을 파죽지세로 쓰러뜨리자 그때까지만 해도 태연하던 왕진의 얼굴이 다급해졌다.
“가마를 물려라! 무엇하느냐! 살수다! 폐하를 지켜라!”
급작스러운 사태에 대응하지 못하던 자들이 그제야 심각성을 깨닫고 육모담 한 사람을 잡기 위해 몰려들었다.
화살과 화기를 지닌 호위대들이 주변을 포위했으나 발사를 할 수 없었다.
육모담은 금의위들과 한곳에 엉켜 있었다.
황제와 왕진도 지척이다.
육모담이 스스로 물러나기 전까지는 오로지 차가운 병기로만 저자를 사로잡아야 했다.
그 순간, 육모담이 자신이 쓰러뜨린 금의위의 검을 정면으로 던졌다.
쒜에엑―!
화살처럼 쏘아진 검이 황제의 가마를 매고 있던 가마꾼 한 사람의 등을 꿰뚫었다.
“끄아악!”
휘청, 가마가 옆으로 넘어질 뻔했으나 나머지 가마꾼들이 초인적인 힘으로 버텨 냈다.
쓰러지진 않았으나 그거면 됐다.
도망치지 못하는 것만으로도 목적을 다한 셈이다.
육모담은 금의위 최고수로 보이던 자를 삼 초식 만에 베어 내고 곧바로 황제의 가마를 향해 뛰어올랐다.
파라락―.
쏘아지는 몸.
경악한 황제가 겁에 질려 양손을 들어 얼굴을 가리는 모습이 보인다.
육모담은 무심하게 시선을 옮겼다.
그의 우선적인 목표는 왕진.
저 분칠한 얼굴의 미간에 검을 꽂아 주리라.
그런데 육모담이 검에 힘을 주는 그 순간, 황제의 가마 뒤에서 미친 듯이 달려와 일거에 가마를 뛰어넘는 자가 있었다.
‘저자는!’
새하얀 비단 장포에 금사로 화려한 문양을 새긴 청년이다.
비조처럼 날아올라 박도를 검처럼 찔러오는데 그 검로에서 화산의 향기가 났다.
‘천무공자!’
천무공자 장소호.
몇 년의 세월이 흘러 서로 달라진 모습으로 만난 두 사람이 허공에서 서로의 무기를 교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