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권 15화
제39장 북벌종횡(北伐縱橫) (15)
까드드드드―.
협봉검과 박도가 비스듬히 지나가며 칼날로 서로를 긁었다.
똑같은 초식.
매화노방이라는 이십사수 매화검법의 일 초를 동시에 사용했기 때문이다.
군더더기 없는 자세.
허공에서도 중심을 흐트러뜨리지 않으면서 내뻗는 검초는 감탄이 나올 정도로 매끄러웠다.
‘화산의 무공을 제대로 익혔군.’
평소라면 탄성을 내뱉었을 것이다.
화산파의 유서 깊은 무공이 천무공자라는 재인의 손에서 완벽하게 재현되는 모습은 진심 어린 감탄을 자아냈다.
소호에게 화산 무공을 전수한 게 육모담이지 않던가.
혹시 자신이 잘못되면 화산의 후대에게 전해 달라는 의도였는데, 그 결실이 생각보다 더욱 큰 열매로 맺어져 있었다.
화산파의 검공을 보여 주고 비급을 던져 준 게 불과 몇 년 되지도 않았는데, 어찌 이리 높은 성취를 이뤘는지 이해가 안 갈 정도다.
‘하긴 그러니 천무공자이겠지.’
천무공자라는 이름 하나로 모든 것이 이해되는 사내가 바로 장소호다.
육모담은 허공에서 두 번의 검초를 더 뻗어 냈다.
매개이도(梅開利導), 매화낙섬(梅花落暹).
이십사수매화검법의 중반부로 나아가는 열쇠 같은 초식이다.
매화나무가 가지를 뻗듯 상대의 공간에 검끝을 두는 초식이 매개이도.
그 안에서 한껏 웅크렸던 매화가 꽃비가 되어 내리게 만드는 것이 매화낙섬이었다.
‘이걸 똑같이 할 수 있을까? 천무공자. 순순히 비켜라.’
육모담은 소호에게 엄포를 놓은 셈이다.
화산무공의 정수라고 할 수 있는 화려하고 섬세한 검놀림을 따라올 수 없다면 당장 물러나라는 경고였다.
화산파의 무공은 매화검으로 펼칠 것을 가정하여 만들어졌으며, 그것을 검이 아닌 다른 무기로 사용하면 큰 제약이 생긴다.
박도를 쓰는 천무공자가 자신만큼이나 섬세하게 매화낙섬을 펼칠 수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찰나의 찰나를 쪼개는 듯한 순간.
육모담의 눈앞에 있는 희대의 천재는 그가 매개이도와 매화낙섬을 펼친다는 사실을 알아챘고, 박도로 그 무공을 똑같이 따라 했다.
똑같은 자세, 동일한 투로로 검끝과 도끝이 또 한 번 교차했다.
육모담은 기가 찼다.
후발제인의 묘리인가?
뒤늦게 출발해도 앞선 것을 제압할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하는 행위라면 이건 무모한 짓이다.
심지어 똑같이 화산 무공으로 싸우다니!
육모담의 검끝이 마치 나비의 날갯짓처럼 요동쳤다.
살기 넘치는 검술.
혈매화검법으로 변화된 것이다.
검끝이 반 치 아래로, 요동치는 검날이 반의반 치만큼만 비스듬히 기울어도 검술의 형태는 전혀 딴판이 되어 버린다.
그것이 고수의 세계.
들어가는 힘의 강약과 검끝의 작은 변화만으로도 승패가 전혀 달라질 수 있을 만큼 심오한 것이 고수의 무공이다.
매화는 피범벅의 섬뜩한 꽃잎으로 변했고, 늑대처럼 사나운 검끝은 상대의 전신을 난자할 듯 쏟아졌다.
그 순간 천무공자의 움직임도 변했다. 후발제인을 위해서는 속도를 높여도 모자랄 판국에, 오히려 속도의 완급을 반 호흡 늦춰 버린 것이다.
육모담이 첫 번째 일격을 마칠 때쯤 그제야 천무공자의 일격이 뻗어 나왔다.
까앙!
그런데 그게, 혈매화를 받아 냈다.
‘부적합한 무기의 단점을 장점으로 활용한다? 넓은 칼날을 방패처럼 써서?’
가장 절묘한 것은 그러면서도 매화검 초식의 흐름을 훼손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까가가가강―!
허공에서 터져 나오는 수십 번의 쇳소리를 뒤로한 채 육모담은 결국 반보를 뒤로 물러나며 다시 땅에 내려앉고 말았다.
천무공자가 황제가 타고 있는 가마의 바로 앞에 사뿐히 내려서는 모습이 보였다.
평소에 늘 짓던 환한 웃음이 아닌, 무표정한 얼굴이다.
황제는 여전히 기함하며 놀란 모습이고, 왕진은 붉으락푸르락하며 육모담을 노려봤다.
‘무쌍의 심정을 느꼈거늘. 그걸 천무공자가 막아서는가?’
조조가 애써 사로잡은 아두를 조자룡이 구해 갔듯이, 어쩌면 천의(天意)란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거의 손안에 들어왔던 왕진의 목숨이 모래알처럼 빠져나간다.
어째서 이렇게 되는가.
탄식.
분노.
육모담은 검을 강하게 움켜잡았다.
두두두두―.
금의위들이 몰려왔다. 순식간에 수십 개의 검이 일제히 육모담의 목을 겨누었다.
주변엔 수십만의 병사, 지척에는 금의위들의 살기 어린 검날이 겨누고 있다.
그럼에도 육모담은 금의위의 검 따위는 쳐다보지도 않은 채 천무공자에게 물었다.
“천무공자. 왜 나를 막는가?”
“당연한…….”
무언가를 대답하려던 천무공자가 헛숨을 삼키며 입을 꾹 다물었다.
나풀거리며 흘러내리는 건 천무공자의 상징과도 같던 황금 문양의 영웅건이다.
혈매화 한 송이가 그의 머리를 맞췄던 것!
단정했던 긴 머리가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렸다.
바람에 흔들리는 자신의 머리카락을 보며 천무공자는 충격을 받은 모습이었다.
모든 것을 예측하던 무인이기에, 예측을 벗어난 상처는 더더욱 충격일 수밖에 없다.
“비켜라.”
이걸로 세 번째.
육모담은 똑같은 말을 반복했으나 이번엔 처음으로 듣는 사람이 있었다.
천무공자의 눈빛이 흔들린다.
“영웅건 다음은 목이다.”
“하하하핫!”
천무공자는 낭랑한 웃음을 터뜨렸다.
“못 본 새 더 강해졌네요.”
“난 왕진을 죽이고 싶을 뿐이다. 넌 나를 막을 이유가 없다.”
왕진을 노린다는 말에 주변의 분위기가 일변했다.
황제가 아니라 왕진이 목표라면 그들의 심정이 다를 수밖에 없다.
황제를 위해서라면 기쁜 마음으로 목숨을 바쳐 막겠으나, 왕진을 위해서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금의위들 중에 고참으로 보이는 이가 수하들의 동요를 만류했다.
“오랑캐 살수의 말을 어찌 믿는가. 어차피 폐하의 어전을 어지럽힌 죄인이다. 동요하지 말라!”
수군거리는 소리가 잦아들었다.
옳은 말이었다.
그가 황제를 노리건 왕진을 노리건, 그들에게 육모담은 어차피 금의위 동료들을 죽인 천하의 대역죄인이었다.
살기가 충천하고 육모담을 겨눈 검들이 점점 더 가까이 다가왔다.
가마 위에 주저앉았던 황제.
주기진 또한 그쯤 되니 공포에 질렸던 마음을 가다듬을 수 있었다.
목표가 자신이 아니었다는 사실에 한시름을 놓은 것이다.
그런데 공포를 내려놓자 분노가 치밀어올랐다.
평원을 뒤덮은 시신에 놀라 구토를 하고, 돌아가려는 찰나에 목숨까지 위협받은 상황이다.
그는 분기탱천하여 소리 높여 외쳤다.
“무도한 자다! 불경한 자야! 감히! 짐 앞에서 검을 휘두르다니! 사지를 찢어 죽여야 할 것이다!”
주기진은 고개를 홱 돌려 사나운 시선으로 왕진을 바라보았다.
“태감! 아는 자인가?”
“……북방의 이민족 중에 제가 아는 이는 없나이다, 폐하.”
“그렇다면 누군가가 사주한 것인가 보군.”
왕진.
아니, 왕진의 역할을 하는 선의 내심은 복잡했다.
얼굴을 전혀 모르는 자가 그를 죽이겠다며 길길이 날뛰고 있는데 그 원인을 알 수가 없었다.
“저자를 당장 붙잡아라!”
“폐하. 저자는 대단한 무공의 고수이며 그에 걸맞은 고수를 내보내지 않는다면 큰 피해를 입을 듯하옵니다. 지금 앞으로 나선 장소호라는 자를 믿어 보시면 어떨런지요?”
“장소호?”
“무림 강호에선 천무공자라고도 불리는 자입니다. 젊은 나이임에도 대단한 무공을 익혔지요.”
“태감이 말했던 그 무림 강호에서 부른 자들 중 한 명인 것이군.”
“예. 폐하. 역시 영민하십니다. 그들 중 한 사람이지요.”
“그렇다면 좋다. 맡기겠다.”
“예. 그리고 폐하, 하찮은 살수 한 사람 때문에 대국의 계획이 지체되어서야 안 될 일입니다. 계획대로 물러나시는 게 옳을 줄 압니다. 악취가 아직도 진동합니다. 살수가 찾아온 것을 보니 오랑캐들이 언제 쫓아와도 이상하지 않을 듯하니 어서 선부 쪽으로 향하시어 제대로 된 진지에서 쉬시는 게 어떨런지요.”
주변에 있던 고관들도 왕진의 의견에 동의하며 주기진에게 물러나자며 청을 올렸다.
이 불쾌한 공기 속에 한 시라도 더 오래 있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으음.”
주기진은 평원에서의 광경을 떠올리며 다시 한 번 안색이 창백해졌으나, 여전히 육모담을 사납게 노려보았다.
“태감을 노린다고 공공연히 외치며 감히 금의위를 죽이고 짐을 위협했다. 짐은 저자를 찢어 죽이는 모습을 보아야 하겠다.”
“하찮은 자에게 마음을 쓰지 마시옵소서. 시신을 가져오도록 하겠습니다.”
왕진이 마치 어린아이를 달래듯 황제를 달래며 퇴각을 종용했다.
결국 주기진의 허락이 떨어지자 가마꾼이 새로 보충되고, 가마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육모담은 소리쳤다.
“왕진! 어디를 가는가! 내가 두려운가! 아무리 도망쳐도 내 두 눈과 내 검은 너를 쫓을 것이다! 너는 도망치지 못해!”
막연한 저주가 아니라 확신을 담은 선언이었다.
왕진은 섬뜩했으나, 머릿속이 복잡하여 이마를 짚었다.
막강한 오이라트.
몰살당한 선봉군.
그것만으로도 머리가 아플 지경인데 자신을 죽이겠다는 살수까지 나타난 상황이다.
촤르륵―.
왕진은 흑색 섭선을 펼쳐 얼굴을 반쯤 가리면서 명령을 내렸다.
“반드시 죽이세요! 저자를 다시는 보고 싶지 않습니다!”
황실의 호위대장 번충이 불쾌한 얼굴로 수하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육모담의 주변을 포위한 포위망이 더욱 두꺼워졌다.
황제의 가마가 움직이자 다시 오십만의 대병력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천무공자는 쓴웃음을 지었다.
이 한편의 촌극과도 같은 상황에서, 두 사람에게 진정으로 위협이 되는 것은 오직 서로뿐임을 그도 아는 것이다.
천무공자가 육모담을 향해 한 걸음을 다가왔다.
“틀렸습니다. 저는 당신을 막을 이유가 있어요.”
“어째서?”
“당신이 국경을 넘기 전에 죽인 한 여인에 대한 복수입니다.”
“뭐라고?”
육모담은 처음으로 당황했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이야기라 머릿속으로 화제를 따라잡기 힘들었던 탓이다.
“그랬나. 마녀. 그래. 그녀의 지인이었군.”
“제게 소중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가. 원래 소중한 건 잃고 나서야 깨닫는 법이지.”
젊다.
육모담은 천무공자를 보며 그렇게 생각했다.
천부의 무재.
천무련이라는 거대한 집단의 우두머리.
그러면 무얼 하는가.
그 어떤 천재도 세월이 주는 현명함까지 거저 얻지는 못한다.
소중한 여인을 잃은 슬픔에 대해 농락당했다고 생각했는지, 천무공자는 그의 말 한마디에 눈이 활활 불타면서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그대와의 계산은 오늘만 아니라면 그 어떤 때에 하더라도 가능하다. 마지막으로 말하지. 비켜라. 나는 왕진을 죽여야 한다.”
천무공자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렇게 둘 수 없습니다.”
“끝까지 막을 건가?”
“그게 복수니까. 원하는 것을 할 수 없게 하는 것도 복수고. 그렇게 둬선 안 될 이유도 있으니.”
“그렇군.”
“저도 마지막으로 말하겠습니다. 당신의 복수는 늦었습니다. 이젠 의미가 없습니다.”
“주제넘은 참견이군.”
더 이상의 대화는 필요 없다.
육모담이 살짝 턱을 끌어당기는 순간, 이상기류를 눈치챈 천무공자는 목소리를 높여 외쳤다.
“금의위! 물러나세요! 위험합니다!”
스릉―.
천무공자의 경고보다는 육모담의 검이 빨랐다.
순식간에 사방을 점하는 검끝.
매화구변(梅花九變)에 이은 매화만개(梅花滿開)가 육모담을 경계하던 금의위들을 몰아쳤다.
푸슈슈슉―.
직접 몸에 새겨 넣는 매화 꽃잎에서 핏물이 솟구친다.
잔혹하기 이를 데 없는 혈매화검법이 금의위들의 눈과 목, 경동맥을 꿰뚫고 치명상을 입혔다.
“크흡!”
“커허헉!”
일 수에 다섯 명이 무너지고, 뒤에 있던 십여 명이 심상치 않은 상처를 입은 채 뒤로 주춤주춤 물러났다.
빙글 돌아 다시 섰음에도 미동조차 없이 중심이 꼿꼿한 것은 화산의 무공 신행백변의 묘리다.
비정하다?
세상이 원래 그렇다.
애매한 도덕적 선 따위는 애초에 넘은 사람이 육모담이다.
그의 평범한 협봉검 검 끝에 섬뜩하리만치 강렬한 검기가 함께했다.
“내 앞을 막는 자. 다 죽이리라.”
짐승의 가죽을 갑옷에 덧대고, 이민족의 복장을 한 화산의 복수자.
육모담의 혈매화가 금의위들을 수수처럼 베어 넘기며 나아간다.
드넓은 천하.
이곳 섬서에서 그를 막을 자는 천무공자 한 사람뿐이다.
그의 정면으로 천무공자가 다가왔다. 찢어진 영웅건을 버리며 자신의 자만도 함께 버린 모양이었다.
천무공자는 이젠 화산의 무공을 쓰지 않았다.
칼끝을 하늘을 향해 겨눈 상단세.
천지를 가를 듯 수직으로 떨어져 내린 일격이 육모담의 혈매화와 강맹하게 부딪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