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풍운객잔 2부-470화 (599/686)

19권 16화

제39장 북벌종횡(北伐縱橫) (16)

‘이건?’

육모담은 천무공자의 강맹한 도법에서 익숙한 느낌을 받았다.

거칠고 과감하며 실전적인 초식에서 대초원의 기상을 느낀 것이다.

무림인들이 남권북퇴를 어찌 구분하던가?

만류귀종이라는 말이 있다. 모든 분야가 그렇듯 무공도 경지가 높아져 핵심만 남기면 다 비슷해진다는 소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림인들이 검술 초식 하나, 칼을 위에서 아래로 내려치는 동작 하나만 봐도 사문의 내력까지 줄줄 읊을 수 있는 것에는 다 이유가 있는 법이다.

오랜 역사에서 배어 나오는 특유의 무형기, 무기를 잡은 파지법, 각 문파마다 특색이 있는 발동작과 몸의 자세가 모두 합쳐지면 무인이라면 누구나 사문을 짐작할 수 있게 된다.

천무공자는 칼과 몸을 비스듬하게 비틀면서 왼발을 엄지발가락 끝까지 세워 뒤로 쭉 뻗고 있었다.

무공의 종류가 모래알만큼 많다는 중원에서도 그만큼 극단적으로 발을 뒤로 뻗는 자세는 흔치 않다.

적어도 육모담이 아는 한도 내에서는 오직 한 곳뿐.

말 위에서 밥을 먹고 잠도 자는 유목민들이 안장에 발을 걸고 칼을 내리치는 마상도법의 흔적이다.

쩌어어어엉!

막강한 참격에 육모담의 협봉검이 당장이라도 부러질 듯 휘청거렸다.

그는 검을 비스듬히 비틀어 공격을 흘려내는 것과 동시에 왼손으로 내공을 끌어모아 장타로 되돌려주었다.

터엉!

팡!

낙영장법(落英掌法)이 애꿎은 허공을 격하고 터뜨렸다. 천무공자는 이미 칼을 내려쳤음에도 칼 손잡이를 올려 쳐서 장법을 막아 내는 임기응변을 선보였다.

‘과연.’

장타를 막아 낼 거라곤 이미 예측했었다. 육모담은 곧바로 다음 동작에 착수했다.

지이잉―.

검이 떨렸다.

육모담은 우측으로 한 발 크게 내디디며 회전력을 살려 상대방의 인중을 찔렀다.

까앙!

검 면으로 공격을 막은 천무공자가 칼날을 뒤집으며 비스듬히 또 한 번 참격을 날려왔다.

상대의 눈이 번뜩인다.

자신만만한, 시험하듯 도발적인 표정은 덤이다.

뒤로 물러나 피하려던 육모담은 불길함을 느끼고 암향표 신법을 사용해 옆으로 피했다.

아니나 다를까.

푸확―!

갑자기 칼 위로 날카로운 기운이 길게 솟구쳐 마치 여의봉처럼 공격의 범위가 늘어났다.

콰드드드―.

아무것도 없었던 바닥에 긴 금이 생겼다.

“흠.”

뒤로 피했다면 방심하다가 가슴이 갈라졌을 공격이다.

‘역시, 카라코룸에서 마주쳤던 대전사의 무예와 닮아 있다.’

직접 검을 마주하자 육모담은 천무공자가 북방의 무공을 익혔음을 더욱 확신했다.

흥미로운 일이다.

일평생 중원 땅에 살며 무산학관에서 무예를 익힌 그가 대체 언제 북방 유목민의 무예를 익힐 기회가 있었을까.

하지만 말로 나눌 이야기는 아니다.

무인은 검으로 대화할 뿐.

육모담은 검끝을 하늘로 향했다.

갑자기 기수식을 취하듯 양손으로 협봉검을 잡는 그의 모습에 천무공자가 움찔하며 의심스러운 눈빛을 보낸다.

우우우웅―.

육모담은 장중하고 화려하게 검을 뻗어 냈다.

천수관음상처럼.

제자리에서 양손으로 커다란 호를 그려 낸 뒤, 온몸의 탄력을 살려 검을 폭발적으로 휘둘렀다.

파바바바바밧!

매화만리향(梅花萬里香)!

이십사수매화검법 중 최고의 절초가 육모담의 손에서 화려하게 꽃을 피웠다.

장성한 매화나무에서 한순간에 매화꽃이 활짝 피듯.

허공에 그려 낸 혈매화가 천지사방을 뒤덮었다.

고오오오―――.

검 한 자루로 그려낸 신기(神技)였다.

육모담은 조금도 자제하지 않았다. 육합구소신공의 내공을 극한까지 끌어 올렸다.

붉은색 검강.

섬세한 검 놀림으로 완성해 낸 혈매화가, 지금 이 순간 온 세상에 흐드러지게 폈다.

“흐읍!”

처음으로 천무공자가 다급하게 움직였다.

뒤로 펄쩍 뛰어 물러나는 동작과 자세에서 일위도강, 소림의 느낌이 났다.

육모담은 감탄했다.

공격을 할 때는 북원의 무공을 쓰고 몸을 뺄 때는 또 소림의 무공을 사용하는가.

‘무공의 저변이 넓은 것은 놀랍다만, 내 공격은 얄팍한 기술만으로는 피할 수 없을 것이다. 피한다? 그게 너의 실수다. 천무공자.’

육모담의 눈에서 혈광이 뿜어졌다.

막강한 힘.

장중하게 집약된 초절정 무림고수의 능력이 온 세상에 혈매화의 혈향을 흩뿌렸다.

파라라락―.

천무공자가 칼을 휘둘러 혈매화 몇 송이를 떨궈 내지만 역부족일 것이다.

기이잉―.

푸화아아악!

하늘을 할퀴고 땅을 뒤집은 힘이 천무공자의 전신을 물어뜯었다.

터지고, 깨지고, 폭발했다.

사방을 포위하고 있던 금의위와 황실호위대가 입을 쩍 벌리며 경악하는 모습이 보였다.

뿌연 흙먼지가 가라앉자 무려 삼 장이 넘는 거리를 뒤로 물러난 천무공자가 거북이처럼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넓적한 칼날 뒤로 숨은 듯한 자세다.

천무공자는 산발이 된 머리로 숨을 거칠게 몰아쉬었다. 귀족처럼 화려했던 비단 장포가 넝마처럼 갈가리 찢겨 내의가 보인다.

“그걸 버텼나? 대단하군. 과연 천무공자야.”

처참한 모습이지만 육모담은 도리어 감탄했다.

내심 천무공자가 아무리 뛰어나도 혈매화검법의 절초를 버텨 낼 거라곤 생각지 못했었기 때문이다.

천무공자는 자존심이 상한 듯했다. 미간을 좁히며 자신의 모습을 흘깃 살피더니 거칠게 검을 아래로 털었다.

후웅―.

파르르 떨리는 박도를 고민하듯 내려다보다가, 그는 갑자기 박도를 칼집에 다시 꽂아 넣어 버렸다.

“무기로는 안 되겠네요.”

그러면서 취하는 동작은 태극권 같기도 하고, 소림오권 같기도 한 기묘한 기수식이었다.

앞으로 내민 양손의 각도가 오묘했다.

그게 하남 무림을 떠돌면서 온갖 무공을 집대성한 승천무(昇天武)의 기수식이라는 사실을 육모담은 모른다.

그저 묘하게 섞인 무공 같다는 생각만 할 뿐.

갑작스레 권사가 된 천무공자의 모습에 의아함을 느끼면서도, 처음 싸움이 시작할 때 느꼈던 것처럼 ‘아! 천무공자였지.’라는 것으로 납득해 버렸다.

“맨손으로는 이길 수 있을 것 같은가?”

“세상에 불가능한 싸움은 없으니까요.”

칼을 들었을 때보다 자세를 낮추고 자신만만하게 바라보는 천무공자에게서는, 수많은 역경을 직접 이겨 낸 자 특유의 자신감이 느껴졌다.

“과연.”

알고는 있었다.

강호 무림에서 희대의 천재라 불리는 청년.

오랜 세월의 단련을 무색하게 만드는 재능이 있기에 그 정도 명성을 떨쳤을 터.

“그대의 재능인가, 나의 집념인가? 흥미롭지만, 때가 좋지 않구나.”

중년의 나이.

스스로의 무공을 완성하여 한 명의 종사(宗師)가 된 육모담에게 이런 대결은 즐거운 일이지만, 말 그대로 때가 좋지 않았다.

육모담은 살기를 피워 올렸다.

황제 주기진과 환관 왕진은 지금 이 순간에도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더 이상은 안 된다. 여기서 끝낸다.’

육모담의 신형이 미끄러지듯 앞으로 쏘아졌다.

파아아아앗!

병사들이 이동하면서 생기는 흙먼지가 격한 기세로 흩어졌다.

광풍을 일으키며 전방을 꿰뚫은 자가 바로 육모담이다.

땅을 박차고 내뻗는 검 한 자루가 마치 화살처럼 날아가 천무공자의 심장을 향해 쏘아졌다.

터어엉!

손바닥을 편 반장으로 검날을 밀어내는 방어 동작이 감탄이 나올 지경이다.

태극의 묘리.

무당파에서 자주 사용하는 이화접목의 한 수다.

검을 밀어내는 것과 동시에 제자리에서 살짝 뛰어오른 천무공자가 갑자기 유연한 몸을 뽐내며 한쪽 다리를 하늘을 향해 높이 차올렸다.

육모담은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향해 발을 차는 모습에 잠시 당황했으나, 곧바로 방어를 위해 몸을 움직여야만 했다.

쒜에엑―.

하늘을 향해 차올렸던 천무공자의 오른발이 마치 벼락처럼 떨어져 내렸다.

강맹한 각법.

일격에 사람의 목을 꺾고 쇄골을 부러뜨릴 만한 힘이 실려 있다.

하남 무림 맹자방의 강뢰각(降雷脚)이다.

어찌나 강한지 각법을 끊어 찼는데도 그 여파로 바닥에서 흙먼지가 확― 일어났다.

시야가 뿌옇게 흐려지는 바로 그 순간, 천무공자는 잠시도 멈추지 않고 폭풍처럼 각법을 쏟아냈다.

‘빠르다.’

파라라락―.

팡! 파팡!

옷자락이 터져 나가는 바람 소리가 귀가 아플 지경이다.

천무공자는 잠시도 양다리를 모두 땅에 붙여 놓지 않았다.

미칠 듯이 각법을 쏟아내는데, 무시하고 검을 뻗자니 그 전에 얻어맞고 자세가 흐트러질 만큼 그 안에 담긴 힘이 강맹하기 짝이 없다.

뻐억!

결국 피하거나 검으로 쳐 내지 못한 발차기에 정강이를 세게 걷어차이고 말았다.

아찔하면서 눈앞에 별이 번쩍였다.

부러지지 않은 게 다행일 정도로 고통이 심했다. 방심해서 허용하긴 했으나 온몸에 융통무애하게 진기가 흐르고 있지 않았다면 이 일격으로 승패가 뒤집혔을지도 모를 일이다.

‘공격이 절묘하게 빠르다.’

천무공자의 모든 동작은 물 흐르듯 자연스러웠다.

날렵하게 땅을 스쳐 지나가며 휘둘러 차고, 꺾어 차고, 발을 올렸다 내리찍으며 각법의 높은 성취를 뽐냈다.

검으로 찌르면 훌쩍 뒤로 물러났다가, 검을 회수하는 시점에 맞춰서 펄쩍 뛰어 다시 ‘검의 공간’ 안으로 들어오는 신법이 절묘했다.

‘몸 쓰는 것 하나는 기가 막히는군.’

이미 일가를 이룬 무인이 보기에도 천무공자가 몸을 쓰는 모습은 탄성이 나오는데, 보통 사람들이 보면 어떨까.

손가락 하나만 땅을 짚어도 펄쩍펄쩍 뛰는 그는 사람이 아닌 서유기의 돌원숭이 같아 보일 지경이다.

‘이래서 박도를 집어넣었군. 혈매화검법의 약점을 파고들었어. 가지를 뻗어 꽃을 피우기 전에 잘라내겠다는 건가?’

천무공자의 의도는 명확했다.

화려한 무공을 제대로 펼치기 전에 미리 싹을 자르겠다는 것이 아닌가.

그 짧은 틈을 파고들려 하다니.

절대로 쉬운 일이 아니지만, 상대는 천무공자다.

그 어려운 일을 우습게 해낸다.

“크아아앗!”

육모담은 쏟아지는 각법을 방어하다가 버럭 함성을 질렀다.

“나는! 붉은 늑대다!”

화아악―.

육모담은 전신에서 혈광을 뿜어냈다.

천무공자가 강하다?

그도 마찬가지다.

화산 무공과 실전 무학을 합친 자.

머릿속으로 매화검신을 떠올리며 그가 평생을 익혀 온 검악(劍岳) 화산의 무공들을 모두 끌어낸다.

파바바바밧!

폭죽이 터져 나오듯 뻗어내는 좌수는 매화산수(梅花散手).

상대의 몸에 손이 닿는 순간 꽃봉오리에서 씨가 터지듯 화려하게 상대의 관절과 혈도를 짚어 가는 수공(手功)은 산화무영수(散花無影手)였다.

쳐 내고, 밀어내고, 찍어 후려친다.

오히려 적극적으로 달라붙어 박투(搏鬪)하며 밀어내자, 이젠 천무공자가 각법을 제때 쓰지 못하고 밀리기 시작했다.

터엉!

각법이 멈췄다.

천무공자의 무공이 또 한 번 일변했다. 계란을 하나씩 손에 움켜쥔 듯 살짝 움켜쥔 주먹으로 뻗어 내는 정권은 복룡권(伏龍拳)이다.

후우웅―.

육모담은 오행매화보(五行梅花步)를 펼쳐 상대의 옆으로 돌아갔다.

아직 박투의 영역.

왼손을 크게 휘둘러 태을미리장(太乙迷離掌) 절초를 뻗어내자 천무공자의 복룡권과 마주쳐 화포가 터지듯 쾅! 하고 공기가 터져 나갔다.

내공은 박빙.

그러나 정면으로 부딪치면 조금이지만 육모담이 더 강하다.

천무공자가 움찔하는 틈을 놓치지 않고 뒤로 반보를 빼낸 육모담이 다시 검을 사용했다.

검이 뒤집힌다.

구궁반천에 삼릉검.

전혀 다른 무공에서 자연스레 화산무학의 기본인 매화검이 뻗어 나가는 순간.

상대인 천무공자마저 감탄하며 탄성을 토해 냈다.

‘나는 강하다.’

육모담은 느꼈다.

자신은 지금 화산 무학의 화신이다.

숨 쉬는 것, 몸을 움직이는 것.

사소한 움직임 하나에도 화산 무학의 정수가 담겨 있지 않은 게 없었다.

온갖 무공의 좋은 점만 뽑아서 집대성한 천무공자의 승천무는 결국 광대한 화산 무학에 다 대응하지 못하고 파탄을 일으켰다.

몰아치는 검격 속에서 승부는 한순간에 나뉘었다.

검향지경(劍香之境)에 다다른 혈매화가 결국 천무공자의 가슴에 한 송이 꽃을 피워 낸 것이다.

푸욱!

가슴의 옷자락이 조각조각 찢어져 바람에 흩날린다.

검 끝에 꿰뚫린 천무공자가 이를 악물고 맨손으로 검을 잡았다.

더 파고들지 못하게 막으려는 듯했다.

‘여기서 끝낸다.’

진각을 밟으며 한층 더 검을 뻗는다.

터엉!

몸이 튕겨 나갈 정도의 힘인데, 천무공자는 검이 몸을 더 파고들지 못하도록 양손으로 검날을 잡고 끝끝내 버텨 냈다.

파라락―.

그 순간.

마치 칼날을 잘 벼린 박도처럼, 짧고 강렬하게 깎아 찬 오른발 각법이 육모담의 옆구리로 파고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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