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권 17화
제39장 북벌종횡(北伐縱橫) (17)
뻐억!
가죽 북이 터지는 듯한 소리가 났다.
이미 혈매화를 찌르는 데 전력을 다한 상황.
방어할 정신이 있었을 리 없고, 설령 있다고 해도 막을 수도 없었다.
천무공자의 양손은 피투성이다.
검을 찌르는 순간, 그 찌르는 검을 양손으로 붙잡고 반동 삼아 차는 각법을 어찌 막을까.
으적― 하는 소리와 함께 좌측 갈비뼈가 부러진 듯한 통증이 왔다.
맞은 건 좌측 옆구리인데 입고 있던 갑주 중에는 오른쪽 어깨가 콰직! 하고 부서져 터져 나갔다.
좌측 옆구리에서 시작된 각법의 타격이 심장과 폐를 관통하며 오른쪽 어깨로 빠져나간 것이다.
상체가 기우뚱하며 비틀렸다.
육모담은 머릿속에 번개가 치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
‘이깟 고통.’
십 수년간 벼르고 벼른 복수심에 비할 게 있을까.
육모담은 이를 악물고 전신의 근육을 수축시켰다. 승모근이 불룩 튀어나오더니 온몸의 근육이 한꺼번에 훅― 부풀었다.
우두두둑―.
어긋났던 뼈들이 다시 제자리로 맞물린다.
팔꿈치가 회전하고, 손목이 뒤집어졌다.
파르르 떨리는 협봉검이 천무공자의 피부 위에서 춤을 췄다. 마치 하나의 작품을 그려 내듯 섬세하게 매화꽃을 피웠다.
“큭.”
천무공자는 가슴에 새겨진 매화 그림을 손으로 움켜쥐고 비틀비틀 뒤로 물러났다.
고통스러운 얼굴이다.
아직 전의는 사라지지 않았으나, 처음의 기세에 비해 한풀 죽은 듯 보였다.
반면에 육모담은 물러나지 않았다.
갈비뼈가 부러지고 내장이 진탕되었음에도 오히려 한 발 더 앞으로 나아갔다.
육모담의 집념.
복수를 향한 불꽃이 천무공자를 압도했다.
“끝이다.”
양손으로 협봉검을 잡고 편안한 자연체로 버티고 선다.
차분하게 휘두르는 검술.
혈매화검법.
매화만리향!
파바바바밧――!
붉은색 혈매화가 다시 한 번 천지사방을 뒤덮는다.
천무공자는 양손을 모으며 묘한 말을 읊조렸다.
“용생(龍生).”
사흉 도철.
마녀 백설지.
두 사람에 이어 세 번째로 이어받은 집혼기의 공능이 천무공자의 손가락을 용의 발톱처럼 날카롭고 단단하게 만들어 주었다.
기묘한 무공.
신비한 모습.
천무공자는 마치 부처가 속세에 내려온 듯 은은한 전륜법광에 휩싸였다.
‘역근경을 팔 성 이상 사용했구나.’
육모담은 바로 알아보았다. 한때 같은 구파일방의 무인이었기에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다.
천무공자는 양손을 용조수처럼 구부려 십이금룡수(十二擒龍手)를 뻗어 냈다.
사방에서 피어오르는 매화꽃을 닥치는 대로 잡아 뜯는 짐승 같은 모습이다.
사납고 용맹하지만 그뿐.
끝없이 자라나고 상생하는 매화꽃이 결국 천무공자의 전신을 뒤덮었다.
푸화악―!
터엉!
결국 견디지 못한 천무공자가 뒤로 튕겨 나갔다.
전신에 생채기가 나서 피가 흐르는 모습이 너덜너덜했다.
까드드드드―.
천무공자는 자세를 낮춰 충격을 흩어냈다.
그의 양손을 따라서 땅바닥에 긴 고랑이 팬다.
그는 땅을 박차며 방향을 바꾸고, 또 한 번 퍽! 하고 땅을 박차서 방향을 수정했다.
속도가 너무 빨라 땅이 터져서 흙먼지가 터지는 것만 보였다.
잔상만 남도록 움직인 천무공자가 펄쩍 뛰어올라 용의 발톱을 내리쳤다.
까가강!
검으로 손을 쳐 내는 순간, 천무공자가 덥석 검날을 잡았다.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올려차는 모습이 아까의 기억을 상기시켰다.
‘위험하다.’
우르릉―!
벼락처럼 내리찍는 강뢰각 일초를 육모담은 미끄러지듯 옆으로 일보 이동하며 검으로 비껴 냈다.
아까와 같은 초식이지만 훨씬 강맹하다.
쾅!
흙먼지가 일어나는 정도가 아니라, 바닥이 움푹 패며 사방으로 돌멩이를 튕겨냈다.
“흠!”
육모담은 갑주를 입은 상태다.
자잘한 돌멩이들은 무시한 채 전진하며 천무공자의 복부 옷자락을 덥석 움켜쥐었다.
“……!”
천무공자는 깜짝 놀란 듯 몸을 비틀었다.
타격이나 검격이 아니라 옷을 붙잡는 동작에 놀랐을 것이다.
일반적이지 않은 싸움법이지만 오이라트족과 함께 전장을 누비던 육모담에겐 그리 특별한 일이 아니다.
육모담은 옷을 잡고 옆으로 확 끌어당겨 상대의 중심을 비틀었다.
당연한 일이지만 천무공자는 곧바로 반대쪽으로 몸을 비틀어 중심을 고정하고자 했다.
거기에 틈이 있다.
텅!
육모담은 옷을 손에서 놓았다.
오래 잡고 있을 수는 없다.
손가락 하나로 혈도만 제압해도 치명상을 입을 수 있는 무공의 세계에서 굳이 옷자락을 붙잡고 아등바등 씨름하는 건 좋은 방법이 아니다.
대신 손바닥을 펼쳐 태을미리장 일초식으로 천무공자의 몸을 뒤로 밀어냈다.
텅!
장력을 이기지 못하고 뒤로 몸이 뜨는 천무공자.
육모담은 검신일체, 스스로 한 자루의 검이 되어 상대방을 향해 화살처럼 쏘아졌다.
쒜에에엑―!
까드드득!
용생강기로 날카로운 첨격을 막아 냈으나 그 여파를 이기지 못한 천무공자가 뒤로 튕겨 나갔다.
텅! 터텅!
물수제비처럼 바닥을 세 번이나 튕긴 후에야 천무공자는 힘을 흩어낼 수 있었다.
안색이 하얗게 질린 모습을 보면 내상을 입었음에 분명했다.
‘으음.’
육모담 또한 멀쩡하진 못했다.
과연 천무공자는 천무공자였다.
육모담이 무리한 공격을 펼치는 사이 천무공자가 걷어찬 각법에 어깨와 옆구리를 또 한 번 격타당한 것이다.
안 그래도 부러진 갈비뼈가 통증을 호소했다.
팔을 이리저리 움직일 때마다 온몸이 저릿저릿했다.
“쿨럭!”
천무공자가 내상을 참지 못하고 몇 번이나 기침을 토해 냈다.
입으로 손을 가려서 보이지는 않지만 아마 피도 토했을 것이다.
그런데 육모담에겐 천무공자만이 문제가 아니었다.
천무공자와 거리가 삼 장 이상 멀어지는 순간, 주변을 포위한 채 호시탐탐 빈틈을 노리던 황실 호위대가 일제히 활시위를 놓은 것이다.
피슈슈슈슉―!
순식간에 하늘이 검어지는 느낌이었다.
무림의 궁사들처럼 한 발 한 발이 치명적이지는 않지만, 날아오는 화살이 수백 단위다 보니 피할 곳이 마땅치가 않다.
채채챙!
육모담은 매화검을 펼쳐 화살을 방어하면서 뒤로 물러났다.
대부분은 쳐 냈고, 일부는 양팔에 차고 있는 갑주로 살짝 비틀어 비스듬히 비껴 냈다.
두두두두―.
그런데 거리가 멀어지자 날아오는 것은 화살뿐이 아니었다.
이미 전열을 정비한 황실 호위대에는 다양한 무기들이 준비되어 있었다.
특히 무서운 무기가 있었는데, 날카로운 창끝에 화약을 잔뜩 담은 대나무 통을 묶은 화창(火槍)이었다.
황실 호위대의 정예 병사들이 득달같이 달려들어 육모담을 향해 화창을 찔러 왔다.
퍼퍼퍼펑!
폭연을 뿜으며 창날 방향으로 불을 뿜어 대는 화창은 아무리 무림 고수라도 맨몸으로 맞을 성질의 공격이 아니었다.
육모담은 물러났다.
넓은 범위로 불을 뿜어 대는 화창을 뚫고 공격을 하려면 할 수야 있겠지만, 그렇게까지 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아아.”
육모담은 길을 떠난 황제와 왕진이 어느새 지평선 가까이 물러났음을 깨달았다.
천무공자는 안색이 좀 창백하긴 해도 여전히 건재하다.
북원의 무공에 기묘한 각법을 쓰는 박투술도 우습게 볼 것이 아니다.
육모담은 지속적으로 날아오는 화살을 쳐 내고 화창을 피하면서 그를 노려보았다.
“천무공자. 그대가 결국 내 복수를 막는구나. 두고 보거라. 오늘 나를 막은 것이 너희에게 더 큰 재앙이 되어 돌아올 것이다.”
육모담은 이를 갈았다.
이제 천하에 적이 없어, 드디어 복수할 수 있을 것이라 믿었거늘.
기습은 실패했고 이제는 물러나야 할 때임을 깨달았다.
천무공자는 지지 않고 소리쳤다.
“저도 다음에 보면 그녀의 복수를 할 것입니다!”
“흥.”
천무공자의 무공은 인정하지만, 아직까지도 여인 한 명의 복수를 운운하는 모습은 그저 어린아이의 치기로밖에 느껴지지 않았다.
이미 두 사람의 싸움은 복수라는 개념을 넘어섰다.
천명(天命)이다.
다음번에 만난다면 둘 중 한 사람은 목숨을 잃게 되리라.
육모담은 싸늘하게 비웃으며 몸을 날렸다.
극성의 암향표를 사용하는 육모담을 막을 수 있는 병사는 없었다.
화살이 몇 번 날아왔지만 그뿐.
순식간에 협곡 너머로 사라지며 육모담은 다짐했다.
‘호위군이 방해다. 에센과 함께 저 호위군 모두를 없애야겠군.’
천무공자는 오늘 자신을 막은 것을 후회하게 될 것이다.
다음번에 돌아올 땐 대군과 함께 찾아오리라.
복수심에 불타는 육모담은 땅을 박차는 다리에 더욱더 힘을 주었다.
***
온몸에 붕대를 칭칭 감은 소호는 뻣뻣한 자세로 탁자에 차려진 음식들을 먹고 있었다.
전쟁터. 그것도 야전에서 만들어 주는 요리가 맛있어 봐야 얼마냐 맛있겠냐만, 그래도 오늘 황제가 내려 준 음식은 달랐다.
황실에서 일하는 대령숙수들이 해 준 밥이라 그런지 음식의 수준이 무척 뛰어났다.
“맛있네. 딱 하나만 빼고. 이거 닭이 너무 질기네. 원래 노계인가?”
소호는 아무리 씹어도 도대체 크기가 줄어들지를 않는 커다란 닭 다리를 질겅질겅 씹었다.
“그래? 난 괜찮은데.”
나란히 앉아서 함께 식사를 하고 있던 대미미는 아무렇지도 않게 노계를 씹어서 먹고 있었다.
오물오물, 별로 크게 씹지도 않는데 가볍게 넘어간다. 노계의 살점들이 빠른 속도로 사라지고 있었다.
소호는 고민했다.
내공을 써서 씹어야 할까?
“그, 그래? 나한텐 좀 질겨.”
“그럼 내가 잘게 찢어 줄까?”
대미미는 쇠심줄 같은 노계의 살점을 손가락 끝으로 종이 찢듯 쭉쭉 찢어 주었다.
소면처럼 얇게 찢어진 살점들이 그릇 위에 쭉 늘어섰다.
소호는 그것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하나 집어서 입에 넣어 보았다.
“음.”
조금 낫긴 하지만 여전히 질기다.
“오라버니, 붕대가 당기지는 않아? 괜찮아?”
“괜찮아. 딱 좋아. 고마워, 미미야.”
육모담을 막아 내고 돌아온 소호는 그야말로 금의환향이란 말이 가장 잘 어울릴 정도의 환대를 받았다.
곧바로 황제와의 알현이 잡혔으며, 고위 관료들이 있는 자리에서 그에게 관직을 주고 호위대장으로 삼겠다는 말을 거절하느라 진땀을 뺐다.
황제를 진찰하는 어의가 금창약을 발라 주고 직접 상처를 처치해 주었으나 소호가 붕대만큼은 한사코 거절했다.
의원들이 붕대를 감아 주면 그건 활동을 위한 것이 아니라 요양을 위한 게 되어 버린다.
뻔했다.
상처가 덧나지 않도록 관절을 쓸 수 없을 만큼 천으로 칭칭 감아 줄 것이다.
그런 점에선 무산학관에서 ‘무공을 쓸 수 있도록 붕대 감는 법’을 배운 대미미가 훨씬 낫다.
유일한 단점이라면 대미미가 큰 상처를 보고 당황하여 손에 들고 있던 붕대를 종이처럼 찢어 버렸다는 점뿐이다.
“으음, 그런데 오라버니. 그 사람 정말 강해졌더라. 오라버니가 고전할 만해.”
대미미는 뒤에서 지켜보다 몇 번이나 앞으로 나설 뻔했다고 고백했다.
소호는 반 각째 씹고 있는 노계를 우물거리며 어깨를 으쓱했다.
“설지 선배를 쓰러뜨린 사람이니까. 사실 강하지 않으면 오히려 화가 났을 것 같아.”
“설지 선배…… 그렇네. 그 선배를 쓰러뜨릴 정도면 강하겠지. 그런데 앞으로는 어떻게 할 거야? 그 사람한테 복수할 거야?”
“응. 복수를 해야지.”
소호는 빙긋 웃으며 말했고, 대미미는 그런 소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대미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흔한 조언이나 참견도 하지 않는다.
솔직히 말하자면 소호에겐 복수 말고도 그를 막아야 할 이유가 있었지만, 대미미는 그런 의문점을 단 한 번도 묻지 않았다.
“오라버니가 그렇다면 그런 거라 믿어.”
“믿어 줘서 고마워.”
어떠한 이유도 없이 믿어 주는 사람은 소중한 법이다.
소호는 진심으로 감사를 표했다.
“아까 들었는데 황제가 퇴각한대. 오이라트를 막을 병력을 따로 편성하고, 황제 본인과 본대는 대동을 거쳐서 북경으로 돌아가겠다더라.”
그 말에 대미미는 노계를 오물오물 씹다가 무심하게 말했다.
“황제는 겁쟁이네. 그럼 여기까진 왜 온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