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풍운객잔 2부-472화 (601/686)

19권 18화

제39장 북벌종횡(北伐縱橫) (18)

소호는 웃음을 터뜨렸다.

평소에 조용한 무산 철공주는 이렇게 거침없이 말할 때가 종종 있다.

“역시 미미야. 그래도 조심해야 해.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데.”

“조심? 싸워 보지도 않고 겁먹고 도망치는 거잖아? 옳은 말을 하는데 눈치 보는 건 비겁한 거라고 했어.”

“하핫!”

소호는 대미미가 여인만 아니었으면 외치고 싶었다.

‘사나이다! 사나이야!’

웬만한 사내들보다도 더 멋진 이 호걸을 어찌하면 좋을까.

왜 하오문에서 기녀들이 숭배하며 그녀를 좋아하는지 알 것 같았다.

“그래, 맞아. 할 말은 하고 살아야지. 근데 황제가 원래 그랬던 사람이니까. 그리 놀랍지는 않아.”

“원래 그런 사람이었구나?”

“응. 안 그래도 여기 오기 전에 주해가 이런 상황을 예측했었어.”

“주해가?”

“오십만이나 되는 대병력과 황실의 요인들을 끌고 가지만 실질적으로 이룰 수 있는 건 없을 거라고. 그저 보여 주기일 뿐이라고 하더라. 이제 보니 모든 게 주해의 예측대로야. 보급이 부족해서 병사들이 제대로 못 챙겨 먹는 것도 그렇고. 벌써 힘들어서 병들고 지친 병사들도 많아.”

소호는 그런 생각을 하니 새삼 지금 눈앞에 있는 늙은 닭고기가 소중해졌다.

“주해가 그랬어? 그러고 보니 출발할 때 주해가 함께 못 오는 걸 아쉬워했었어.”

“그랬지. 그런데 주해는 어쩔 수 없이 천무련에 남아야 했어. 솔직히 천무련에는 나보다 주해가 더 필요하니까. 게다가 나중에 일이 잘못되면……. 우리 둘이면 훨씬 쉽게 움직일 수 있고.”

씩 웃는 소호를 물끄러미 보다가 대미미가 불쑥 말했다.

“그건 아냐. 오라버니가 가장 중요해.”

“응?”

“천무련에서 가장 필요한 건 오라버니야. 오라버니가 없으면 아무리 주해가 능력이 있어도 아무 일도 안 돼.”

너무 단호해서 반박의 여지조차 없는 말투였다.

소호는 환하게 웃었다.

“고마워. 그렇게 생각해 줘서.”

“진짠데.”

대미미는 시선을 피했다.

살짝 붉어진 얼굴로 쑥스러워하며 말을 돌렸다.

“그런데 오라버니. 저 황금 갑옷은 입을 거야?”

대미미는 황제가 소호에게 내려 준 이 커다란 막사와, 그 막사의 한구석에 처음부터 놓여 있었던 번쩍거리는 황금 갑주를 가리켰다.

갑주는 크고 화려했다.

실질적으로 방어력이 얼마나 뛰어날지는 알 수 없지만 번쩍거리는 금박을 덕지덕지 붙여 놓아서 전장 어디에서든 한눈에 알아볼 수 있을 만큼 눈에 띄었다.

기능보다는 화려한 외양에 집중한 갑옷이다.

심지어 투구도 금색이고, 얼굴에 쓰는 사천왕상처럼 무서운 가면도 있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통 금색으로 빛나며 오로지 눈만 내놓는 갑옷이다.

소호는 벌레를 씹은 듯한 표정이 되고 말았다.

“저걸? 으음, 안 입어. 저런 걸 어떻게 입어?”

“왜? 멋진데?”

“그, 그래?”

“응. 그리고 황제가 입어 달라면서 준 거잖아? 오라버니가 황금 장수였으면 좋겠다고.”

대미미는 의외로 황제의 제안에 호의적이었다.

반짝거리는 눈빛에서 기대가 엿보였다.

‘아! 그러고 보니 미미는 어릴 때부터 화려한 옷을 좋아했지.’

대미미는 꼬마 소녀였던 시절 늘 분홍빛 비단옷만 입다가, 최근에는 외조부를 따라 하는지 붉은색 장포를 멋들어지게 어깨에 걸치고 다녔다.

소호는 곰곰이 생각을 거듭한 뒤에 여전히 고개를 저었다.

“화려하긴 한데, 내가 보기엔 불편하기도 하고, 눈에 띄기도 하고. 부담스럽네.”

“그래? 오라버니 평소 모습이랑 크게 다르지 않은걸?”

“응?”

대미미는 황금 갑주를 입은 소호가 기대가 된다는 듯 눈을 반짝이기까지 했다.

소호는 화들짝 놀라서 씹던 고기를 꿀꺽 삼켰다.

“내 평소 모습이랑 별로 다르지도 않다고? 저게?”

“응. 오라버니, 지금 입고 있는 그 장포도 황금 문양이잖아?”

소호는 자신도 모르게 지금 그가 입고 있는 옷을 내려다보았다.

육모담과 싸우면서 갈기갈기 찢어진 옷은 버렸다. 다행히 여분을 챙겨 온 게 있어서 새로 갈아입은 게 지금의 옷이다.

“그래도 이건 금사로 수를 놓은 정도인데. 저건 그냥 ‘금’이잖아?”

“내가 보기엔 비슷한걸? 어차피 눈에 띄어.”

“……그랬구나.”

소호는 탄식했다.

얼마 전에 무상 패원강이 대단하다며 칭찬했던 것이 떠오르는 건 왜일까.

‘천무공자라는 이름이 아무렇지도 않게 느껴지면 비범한 거라더니. 그런 의미였구나.’

이제야 그의 말을 진심으로 이해한다.

하지만 소호의 비범함도 한계가 있는 모양이었다.

소호는 금색 갑옷까지 입을 마음의 준비는 되지 않았다.

“응. 내가 보기엔 오라버니랑 잘 어울릴 것 같아! 입자! 입는 거야!”

근 몇 년 만에 이렇게 강하게 주장하는 미미는 처음 봤지만, 소호는 차마 황금 갑주를 입겠다는 말은 할 수 없었다.

“저런 걸 입고 나가면 적군한테 표적밖에 안 될 거야. 내가 궁사라도 번쩍번쩍한 놈부터 쏠 거라고.”

소호가 거절하자 대미미는 크게 아쉬워했다.

그녀는 오라버니가 화려한 갑옷을 입고 멋지게 싸우는 걸 보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아련한 눈빛으로 황금 갑옷을 바라본다.

“……미미는, 그렇게 내가 입었으면 좋겠어?”

“응.”

“생각해 볼게. 내일부터 쉬지 않고 움직일 거라고 하니까 일단은 좀 쉬어 두자, 미미야.”

“응. 알았어.”

식사를 정리하고 자신의 침상으로 향하는 동안 대미미는 황금 갑주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그녀의 눈빛이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

정통제 주기진의 스승.

환관 왕진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선은 아무도 볼 수 없는 자신의 천막에 도착하자마자 쓰러지듯 주저앉았다.

“허억. 허억.”

호흡이 가빴다.

안 그래도 분칠을 해서 하얀 얼굴이 더욱 하얗게 질렸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자그마한 청동 화로에서 끓고 있는 찻물을 찻잔에 따라 입술에 댔다.

뜨거운 찻물의 온기를 느끼자 조금이나마 머리가 돌아갔다.

“시신……. 평원을 가득 채운 시신이라니……. 천무공자가 없었다면 큰일 날 뻔했어. 어찌 그런 무서운 자가 있단 말인가. 그렇게나 강한 자가 날 노리고 있다니…….”

선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금의위들이 수수처럼 베여 나가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호위대장…… 천무공자가 호위대장이 되면 좋겠다 싶었는데. 번충의 분위기가 험악했지.”

본래 황실의 호위대장이었던 번충 입장에서는 입맛이 쓴 이야기였을 것이다.

모욕감을 느꼈을지도 모르고.

그렇지만 솔직히 그는 천무공자가 호위대장 직을 맡아 줬으면 했다.

오이라트의 살수를 보니 너무나 두려웠다.

금의위들은 더 이상 믿을 수 없다는 생각만 자꾸 들었다.

“갑주를 줬으니……. 그만한 황금을 주었으니 마음을 읽었겠지.”

오늘은 너무나 많은 일이 벌어졌다.

시신이 두려운 건 아니다.

황실은 언제나 사소한 실수 한 번에 피바람이 부는 곳.

대전 바로 앞에서 목이 잘리고, 황제 주기진이 직접 궁녀를 죽기 직전까지 때리기도 하는 일이 벌어지는 곳이 황실이었다.

그런데 이번에 본 건 그런 소소한 것들과는 전혀 달랐다.

오이라트의 에센은 분명 그들에게 ‘과시’하고 있었다.

우린 이 정도 살육은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자들이라고. 너희가 십만이든 오십만이든, 어차피 다 이렇게 죽일 수 있다는 엄포로 느껴졌다.

“괜찮다. 괜찮아. 나는 왕진이다. 나는 왕진. 황실의 실세이자 황제의 스승인 왕진이다.”

선은 주문을 외듯 중얼거렸다.

그가 소맷자락을 만지작거리자 넓은 소매 안감에 천을 덧대 붙여 둔 ‘왕가지선’이란 책이 만져졌다.

왕진이 그를 향해 남겨준 유언과도 같은 책이다.

항상 몸에 지니고 다니는 이 책은 폭풍 속에 떠다니는 돛단배의 유일한 닻과 같았다.

한참을 덜덜 떨던 선은 그제야 흥분을 가라앉히고 냉정을 되찾았다.

여전히 손끝이 떨리긴 하지만 자신이 위대한 환관 왕진이라 생각하니 더 이상 죽음이 두렵지는 않았다.

“폐하께서 그러셨지. 돌아가자고. 이쯤 하면 오랑캐들도 명군의 규모를 알고 되돌아가지 않겠냐고.”

만 단위의 처참한 시신을 목격한 효과는 굉장했다.

천둥벌거숭이처럼 세상 무서운 걸 모르던 황제 주기진이 겁에 질리게 만들었으니까.

“별일 없을 거야. 이젠 돌아갈 거니까. 나라면…… 나라면 어떻게 했을까. 아니, 어떻게 해야 할까.”

왕진은 그 후 병부상서 광야와 영국공 장보가 상의해서 결정한 퇴각로를 곰곰이 따져 보았다.

대동에서 울주로 내려가서 그대로 동쪽의 북경으로 들어가는 퇴각로였다.

길이 크게 닦여 있지 않아 조금 험한 게 흠이지만, 지금 그들의 위치를 생각할 때 가장 합리적이고 빠른 길이었다.

게다가 울주를 통과하는 것에 장점은 또 하나가 있었다.

“울주는 그분의 고향. 아니, 나의 고향. 커다란 장원도 있고, 먹을 것도 풍부한 곳이니 폐하를 나의 장원으로 모셔야겠다. 울주 사람이라면 누구나 고향의 자랑거리인 왕진이 돌아왔다면서 쌍수를 들고 환영할 거야. 이참에 내가 이런 대군의 주역이라는 걸 알리고, 내 위세도 떨치고.”

생각을 하면 할수록 잘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난 고향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걸 제일 좋아했었지.”

분명 모든 것이 잘 풀릴 것이다. 그에게는 천무공자도 있고, 아직 오십만이라는 대군도 있었다. 선은 그렇게 믿어 의심치 않았다.

북경으로 돌아가는 길에 자신의 고향에서 위세를 떨치려던 왕진의 마음이 바뀐 것은 오십만의 대군이 진군을 시작한 지 고작 하루가 되었을 때였다.

선봉군을 이끌고 대패하여 황제의 진노를 산 환관 곽경이 뜻밖의 조언을 했던 것이다.

“태감! 울주를 거쳐 퇴각하셔서는 안 됩니다! 부디 재고해 주십시오!”

양손이 묶인 채 옥에 갇혀 이송되던 곽경이 바닥에 이마를 박으면서 진언을 올렸다.

그 목소리가 간절하면서도 절박해서 선은 곽경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일단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옥에 갇혀 있는 주제에 소식도 빠르군요. 큰 죄를 지어 그 안에 들어갔으면서도 진언을 올리다니. 패장(敗將)이 뭘 그리 당당한가요?”

“태감! 제가 비록 한순간의 실수로 큰 실수를 하였으나 오랜 기간 태감을 보필해 오지 않았습니까? 태감께선 늘 제 식견을 믿어 주셨지요!”

선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말은 사실이다.

그가 진정 무능하기만 한 자였다면 애초에 선봉군의 수장이라는 과분한 직책을 주지도 않았을 것이다.

“언사를 조심하도록 하세요. 그대가 내가 마속만큼 아끼던 자라 할지라도 황실의 기강과 사직을 위해서라면 읍참 하는 것에 추호도 망설임이 없을 것이에요.”

읍참마속(泣斬馬謖).

제갈량이 울면서도 아끼던 마속을 처형하던 마음으로 곽경을 버려 버리겠다는 이야기였다.

곽경은 당연하다는 듯 이마를 수레 바닥에 쿵쿵 박으며 말을 이었다.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태감, 잠시 주변을 물려 주시지 않겠습니까?”

“거창하군요. 감당할 수 있나요?”

“물론입니다. 태감! 저는 오직 태감과 황실의 안녕만을 바랄 뿐이옵니다!”

선은 수레를 지키던 병사들에게 손짓해 넓은 공간을 만들어 냈다.

“이럴 만한 가치가 있는 이야기여야 할 거예요.”

“태감, 거두절미하고 말씀드리겠습니다. 태감께서는 혹시 그동안 고향 울주를 미워하셨습니까?”

“그게 무슨 소리죠? 내가 고향을 미워할 리가 있나요?”

“그렇다면 어찌 울주로 퇴각로를 잡으셨습니까?”

곽경은 절절한 목소리로 간언했다.

“오십만의 대군입니다. 폐하와 고관들이야 잘 모르는 이도 있겠지만, 말단 병사들에게는 배급이 충분치 않습니다. 그들이 굶고 병들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저희는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울주를 통과하게 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지겠습니까?”

왕진은 숨이 멎는 것만 같았다.

곽경의 말은 그가 생각지도 못했던 맹점을 찌르고 있었다.

‘내가 큰 실수를 했구나.’

왕진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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