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권 19화
제39장 북벌종횡(北伐縱橫) (19)
“오십만의 병사들이 지나가면 길목에 있는 모든 논밭이 짓밟힐 것이며, 부족한 식량은 울주에서 징발하여 채우려 할 것입니다. 그뿐입니까? 제대로 한 번 싸워 보지도 않고 이렇게 퇴각하면 북방의 오랑캐들이 집요하게 뒤를 쫓을 텐데, 그야말로 오랑캐들을 태감의 고향으로 안내하는 것과 다를 게 있겠습니까? 간언컨대 부디 북경으로 가는 퇴각로를 재고하시옵소서.”
곽경의 충언에 왕진은 망치로 머리를 얻어맞은 듯한 충격에 휩싸였다.
‘이럴 수가. 큰 실수다. 단지 고향에 위세를 떨칠 생각만 하다 보니 큰 실수를 했어.’
곽경의 심리는 뻔했다.
어떻게든 공을 세워 살고자 하는 마음으로 하는 조언일 뿐이다.
다 알지만, 그 안에는 도저히 부정할 수 없는 진실들이 섞여 있었다.
“우리는 오십만이에요. 군기가 확립된 명의 정병이며, 병력의 차이가 이리도 큰데 한낱 오랑캐들이 어찌 함부로 우리를 넘보겠어요?”
왕진이 아무리 반론을 제기해도 공허한 변명에 불과했다.
곽경도 그런 그의 심정을 알기에 조용히 이마를 바닥에 대고 부복한 채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끄응.”
왕진은 결국 항복하고 말았다.
“그대의 말이 옳을지도 몰라요. 다시 한 번 생각해 봐야겠어요. 곽경, 큰 공을 세웠군요. 이 공은 황실로 돌아가서도 잊지 않겠어요.”
“미약하나마 태감의 길에 도움이 되었다면 영광입니다!”
평소대로라면 지나친 아부에 한 마디를 비꼬았을 테지만, 지금의 왕진은 그럴 만한 정신이 없었다.
곽경이 심어 놓은 의심은 독버섯처럼 자꾸만 자라났고, 결국 왕진은 그날이 다 가기 전에 황제와 병부상서를 억지로 설득해 퇴각로를 다른 방향으로 바꿔 버렸다.
오십만이나 되는 대군을 움직이는 일을 이렇게나 쉽게 번복하다니!
당연히 식견이 있는 사람들은 이 일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았으며 황제가 아닌 왕진의 앞에 엎드려 간청했다.
“천자께서 함께 계십니다. 자칫 퇴각이 늦어 큰일이 벌어지면 천하가 위험해지는 것인데, 어찌 대군의 진퇴를 그리 가벼이 결정하십니까?”
관리들 입장에선 목숨을 건 간언이었으나 왕진은 억지를 부리면서까지 의견을 굽히지 않았다.
길이 험하다든가, 오랑캐들이 쫓아오기 쉽다든가 하는 치졸한 이유를 댔다.
“그런 일은 없을 겁니다. 설령 그렇다고 한들 일이 그 지경이 된다면 하늘의 뜻일 테지요!”
반대로 말하면 하늘이 그들을 싫어하지 않는다면 그런 일까진 벌어지지 않을 테니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라는 경고였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왕진의 권위가 워낙 셌던 덕분에 다른 관료들은 크게 반발하지 못하고 일이 진행되었다.
관료들은 불만이 가득하면서도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이런 상황임에도 동창과 흑시군을 이끄는 왕진의 위세는 그 무엇보다도 두려웠다.
결국 오십만의 대군이 울주를 향해 움직이던 방향을 완전히 반대로 틀었다.
이전이 동남쪽으로 향해서 북경으로 가는 방향이었다면, 이제는 북동쪽 선부를 경유해 토목보와 거용관을 통과하는 경로가 된 것이다.
이 세상에 쓸데없고 불필요한 일을 하는데 그걸 좋아할 사람이 어디 있을까.
황제를 따라왔던 고위 관료들은 물론이고, 병사들을 이끄는 무장들, 그리고 말단 병사들까지도 한마음 한뜻으로, 쓸데없는 고집을 부리는 왕진을 욕했다.
그들의 입장에선 도저히 이해하려야 할 수 없는 사람이 왕진이었다.
멀쩡한 퇴각로를 놔두고 굳이 왔던 길을 다시 가는 경로를 잡는 건 도대체 무슨 심보인가?
이럴 거면 애초에 왜 이리로 오자고 했는가?
쓸데없이 번복된 명령 때문에 이틀이란 시간이 의미 없이 소모되었다.
한시가 바쁘게 돌아가는 전장에서 이틀이란 시간이 주는 의미는 그 무엇보다도 컸다.
경로가 길어지자 보급을 위해 가져왔던 병량이 바닥을 드러냈고, 병사들은 굶주리고 지쳐 가기 시작했다. 명군이 진군하는 길 뒤에는 굶주리거나 병들어 죽은 병사들의 시신들이 점점 쌓여 갔다.
오이라트의 정찰병들이 뒤를 쫓기 시작한 건 그때쯤이었다.
이민족 특유의 짐승 가죽을 덧댄 갑주를 입고, 머리 위엔 새의 깃털로 장식을 한 정찰병들이 처음엔 한 명, 그다음엔 두 명, 그 뒤엔 세 명 이상씩 다니면서 점점 수가 늘어났다.
주기진은 사례감 태감 왕진과 병부상서 광야와 상의해 추격해 오는 군을 막아 낼 후위군을 편성했다.
오극충(吳克忠), 오극권(吳克勤).
두 명의 장수가 선택되었다.
두 사람 모두 몽고 출신이라는 공통점이 있었고, 무력이 뛰어났으며 유목민의 특성을 잘 아는 두 사람을 장수로 선택한 것이다.
두 사람은 자신만만했다.
“에센의 군이 삼만에 불과합니다. 저희에게 오만을 주시면 폐하께서 북경으로 돌아가실 때까지 시간을 끌어 보겠습니다.”
오극충이 호언장담하자 주기진은 크게 기뻐하며 군대와 병량을 내주었다.
그렇지만 그다음에 이어지는 그들의 청은 과감히 묵살했다.
“태감을 노리던 살수가 적진에 있을 것입니다. 그를 막을 수 있는 장 무사와 함께 가게 해 주십시오.”
“……안 된다. 그는 짐의 호위대와 함께 짐을 지켜 줘야 한다.”
“그렇다면 일만의 병사를 더 데려가도 되겠습니까?”
“그리 하라.”
주기진과 오극충의 대화는 병사들 사이에서 크게 화제가 되었다.
주기진이 자신의 목숨이 위험할까 봐 천무공자를 내놓지 않는다는 이야기와 함께 그의 가치가 일만의 병사와 맞먹는다는, 사실에 근거한 이야기가 퍼져 나갔다.
오극충, 오극권은 자신만만하게 출정했다.
적의 두 배나 되는 숫자였다.
자신만만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선부를 향해 나아가던 명군 모두는 그의 성공적인 싸움을 기원했다.
그러나 왕진의 말대로 하늘이 뜻일까.
오극충, 오극권이 출정한 지 불과 이틀 만에 비극적인 소식이 들려왔다.
“오극충과 오극권이 죽었다고……?”
전서를 받아 든 왕진의 손이 떨렸다.
일이 크게 잘못 돌아가고 있었다.
삼만의 적을 상대로 어찌 육만의 군대가 하루아침에 크게 패배하고 장수들이 참살당한단 말인가?
‘에센의 군대는 무적인가?’
‘어찌 저리 강할 수가 있지?’
‘이러다간 삼만을 상대로 오십만이 덤벼도 못 이기는 것 아닐까?’
불길한 상상들이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이들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평원을 가득 채우던 그 처참한 모습의 시신들이 지금도 눈에 선했다.
오극충, 오극권의 군대는 어떻게 되었을까.
선봉군보다도 더 처참한 최후를 맞이했을까?
만약 그렇다면 그다음은 자신들의 차례가 아닐까?
고집불통에 오만불손하던 주기진조차 할 말을 잃고 멍하니 용상에 앉아 있던 바로 그때였다.
“아직 아닙니다.”
왕진은 이제 더 이상 손을 떨지 않았다.
처음엔 극심한 공포를 느꼈으나, 그게 어느 정도의 선을 넘으니 오히려 무모할 정도로 담담해졌다.
“오극충, 오극권 장군들은 용맹하게 분전했다고 하였어요. 다만 상대의 힘이 더 강했을 뿐이지요. 성국공 주용(朱勇)과 영순백 설수(薛綬)가 오만의 병력을 이끌고 지원을 나갔습니다. 오랑캐들의 숫자는 한정되어 있으니, 분명 지원을 나간 성국공께서 잘 싸워 주실 것이에요.”
성국공은 황실의 피를 나눠 받은 주씨 귀족이었고, 영순백은 오극충, 오극권과 같이 몽고 출신의 장수였다.
회의에 참가한 모든 이들이 똑같은 생각을 했다.
왕진의 말은 옳다. 오랑캐들도 한계가 있을 텐데 계속해서 싸우면 피해가 누적되지 않겠는가.
그렇지만 그들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극심한 불안감을 떨치지 못했다.
영국공 장보가 그들 모두를 대신해 앞으로 나섰다.
“태감, 안남 정벌을 다녀온 경험이 있는 자로서 한마디 하겠소. 외지 사람들에겐 외지 사람들 특유의 전술이 있는 법이오. 오극충, 오극권 장군은 몽고 출신으로 북원의 전술에 그 누구보다도 정통한 사람이었소. 그런 사람이 제대로 반격 한 번 못 해 보고 그렇게 일방적으로 당하다니.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오. 장군들이 지닌 상식 이상의 무언가가 일어났다고 봐야 하오.”
“상식 이상의 무언가라니요?”
“예를 들면, 얼마 전에 태감을 노렸던 살수처럼 말이오.”
왕진은 여전히 웃는 얼굴이었으나 눈빛만큼은 차갑게 가라앉았다.
영국공 장보는 그런 왕진을 모른 척하며 계속 말을 이었다.
“전장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것은 두 가지요. 하나는 신산귀모의 책사. 또 하나는 대적 불가의 무력. 내가 보기엔 그자의 모습은 그야말로 인중여포가 따로 없었소. 그런 자가 선두에서 칼을 휘두르고 수만의 기마병들이 뒤를 따라온다면? 상상만으로도 끔찍하오. 그자를 막을 만한 무력이 있지 않으면 절대로 이길 수 없다는 소리요. 오 장군 휘하의 부대도 그렇게 당했을 게 틀림없소.”
“그건 추측일 뿐이에요. 그리고 나중에 보고를 들어 보니 그 살수도 화창에 놀라 도망갔다고 하지 않았나요?”
“무예가 뛰어난 장 무사가 앞을 막으니 화창에 대응하지 않고 몸을 뺐을 뿐이지. 그만한 무력을 지닌 자가 화창 몇 개에 놀라 도망쳤다는 것은 무리가 있다고 생각하오.”
“영국공께선 이제 보니 자꾸 우리 명군의 사기를 떨어뜨리는 말만 하시는군요.”
“그런 뜻이 아니오. 내 말은, 지금이라도 그 살수를 막을 수 있는 장 무사를 보내 성국공과 영순백을 돕도록 시켜야 하는 것이 아니냐는 말이오.”
“어불성설(語不成說)!”
대소신료들이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게 하는 발언이었으나 왕진의 반응은 차가웠다.
“영국공의 말씀대로입니다. 살수는 강했죠. 오이라트는 그만한 장수를 지녔습니다. 그런데 그 강한 살수가 만약 폐하를 노리면요? 장 무사를 함부로 보냈다가 성동격서의 묘리로 이곳을 친다면. 고작 금의위와 호위대만으로 그를 막겠다는 건가요? 폐하의 목숨은 그 어떤 것보다도 중요해요!”
황제의 목숨을 운운하는 왕진의 말에 영국공 장보는 신음을 흘렸다.
왕진은 늘 이런 식이다.
자신에 대해 불리한 일은 언제나 황제를 끌어들여 한 몸으로 올라탄다.
“폐하야말로 무가지보(無價之寶)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이 자리에 누가 있겠소? 내 말은 그런 뜻이 아니오. 미리 습격을 대비하고 모든 역량을 집중시키면 아무리 강한 살수라도 막아 낼 수 있을 것이오. 그보다는 지금 당장 전술적으로 필요한 곳에 힘을 집중하자는 소리요.”
“영국공. 너무나 가벼운 발상입니다. 습격을 받았을 때 금의위들은 어땠나요? 호위대는요? 무능했습니다. 스스로 나서서 목숨으로 벽을 쌓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어요. 만약 여기서 대비하여 습격을 막아 낼 수 있다면 성국공의 군대도 대비하여 막아 낼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말은 폐하를 미끼로 삼아 승리해 보겠다는 불충한 이야기밖에 되지를 않아요.”
왕진은 영국공이 반박하지 못하고 신음하는 모습을 보며 자신이 승리했음을 느꼈다.
다만 마음에 걸리는 것은 주기진의 곁을 지키는 금의위와 호위대장 번충의 안색이 심상치 않다는 점이다.
나름 군문의 정예 중의 정예라서 금의위와 황실호위군이 된 사람들인데, 그자들의 자존심이 상처 입은 모양이었다.
‘흥, 능력 없는 자신들의 업보인 거지.’
왕진은 그런 사소한 감정에 신경 쓸 시간이 없다고 생각했다.
“영국공의 지적은 잘 알겠어요. 장 무사는 힘들지만, 무림에서 온 조력자들을 대거 성국공에게 보내 방어에 힘쓰도록 하죠. 어떤가요?”
“옳은…… 결정이라 생각하오.”
충분하진 않지만 그 정도면 지금 상황에선 최선의 대책이었다.
왕진은 어서 이 상황을 끝내기 위해 주기진을 향해 공손히 허리를 굽혔다.
“폐하, 폐하께선 어찌 생각하시는지요?”
멍하니 있던 주기진이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영국공의 걱정은 이해가 되는군. 그렇지만 장 무사는 짐의 곁을 지켜 주는 게 옳은 듯하다.”
“허나 폐하.”
“됐다. 그보다는 어서 북경에 돌아가고 싶구나.”
주기진의 목소리에 담긴 허무감은 많은 감정을 포함하고 있었다.
영국공 장보는 신음하며 물러났다.
모두의 얼굴에 패배감이 깃들었다.
오십만의 대군을 이끌고 황제가 직접 친정을 나왔는데 이렇게 패배만 하고 돌아가는가?
모두가 분노와 절망에 차 있는 바로 그때.
막사 밖에서 한 사람의 전령이 다급하게 서신을 들고 뛰어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