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권 20화
제39장 북벌종횡(北伐縱橫) (20)
왕진은 곧바로 전서를 전달받아 펼쳐 보고는 환한 얼굴이 되었다.
“성국공이 상대의 병력을 확인해 보니 숫자가 적어 요아령을 지나 곧바로 급습하겠다고 하네요. 좋은 소식입니다, 폐하.”
왕진이 전서의 내용을 알리자 주기진의 안색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관료들의 얼굴도 마찬가지였다.
절망에 빠져 있다가 한 줄기 희망을 발견한 것처럼 모두가 한마음으로 기뻐했다.
“숫자가 적다고? 아! 오 장군들이 분전하여 줄여 놓은 것인가?”
“역시 영민하십니다, 폐하. 그렇게 생각하는 게 타당하겠지요. 상식적으로 삼만이 육만과 싸웠는데 상처가 없을 리가 없으니까요. 성국공도 그 사실을 알고 미리 정찰해 본 뒤 공격을 해도 좋다고 확신을 가진 듯합니다.”
“참으로 좋은 일이군. 첫 승전보를 들을 수 있겠어.”
연전연패를 당해 기가 죽다 못해 자존감이 땅속으로 파고들어 가던 주기진이 쌍수를 들고 환영했다.
회의장에 있던 관료들의 얼굴에서 화색이 감도는 가운데, 오직 병부상서 광야와 영국공 장보만이 침중한 안색이었다.
“왜 그러나요, 영국공? 또 무슨 문제가 있나요?”
왕진은 차마 노인인 병부상서에게는 말 못 하고 영국공에게 질문했다.
“성국공의 움직임이 조금 급한 듯하여 걱정이 되오. 본래 전쟁이란 빙판 위를 걷는 것과 같소. 적의 숫자가 적어 보이니 기회라고 생각되는 것은 이해가 가지만, 그렇다고 무작정 추적하다가는 매복을 만나 낭패를 당하기 쉽다고 생각하오.”
왕진은 코웃음 쳤다.
“일이 잘 풀려도 걱정이로군요. 그렇게 따지면 이 세상에 확신을 갖고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어요.”
“바로 그것이오. 전쟁은 확신을 가져선 안 되오. 늘 의심하고 또 의심하여야 하는 목숨을 건 싸움이 바로 전쟁이오.”
“이제 보니 영국공은 겁이 아주 많은 분이었군요.”
“그렇소. 나는 겁이 아주 많소. 그 덕분에 온갖 독물과 독충, 보이지 않는 함정이 도사리던 안남의 전쟁에서도 살아 돌아올 수 있었소.”
영국공은 스스로를 겁쟁이라 부르면서도 역전의 장수다운 자부심을 보여 주었다.
왕진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서? 성국공한테 서찰이라도 보낼까요? 함부로 덤비지 말고 겁쟁이처럼 좀 더 주변을 경계하라고요?”
“……조금 더 천천히 적의 움직임을 살피면서 움직이라는 정도로 충분할 것이오.”
그때 주기진이 일어나 영국공 장보를 향해 소리쳤다.
“그건 안 된다. 오랑캐 놈들은 기회가 왔을 때 잡아 죽여야 해!”
“폐하. 최종적인 목표는 저들을 다시 국경 밖으로 쫓아내는 것입니다. 무리를 하여 빈틈을 보여서는 적들에게 좋은 일만 될 것이옵니다.”
“영국공은 나와 최종 목표에 대한 생각이 다르군. 우리 땅에 쳐들어온 오랑캐 놈들은 하나도 남김없이 다 죽여야 한다. 그러려면 성국공처럼 기회가 왔을 때 비호처럼 덮쳐서 물어 죽이는 게 옳을 터.”
영국공은 잠시 입을 벙긋거리며 뭔가를 말하고 싶어 했지만 묵묵히 고개를 숙였다.
“폐하의 말씀에 따르겠나이다.”
누가 봐도 진심으로 하는 말이 아니었다.
숨을 씨근거리는 주기진은 너무 흥분했고, 영국공은 실망한 모습이 눈에 보일 정도다.
왕진은 중재에 나섰다.
“영국공, 그런 걱정도 있다는 건 기억하도록 하죠. 무림 출신의 무인들을 곧바로 보내겠어요. 폐하. 폐하께서는 회의가 너무 길어져 피곤하신 듯합니다. 잠시 쉬시는 게 어떨는지요?”
왕진의 지시에 따라 주변에 있던 환관들이 바쁘게 움직였다.
모용세가와 황보세가 출신의 무인들이 왕진의 명령에 따라 성국공을 돕기 위해 파견되었다.
그 후 이틀간 남은 사십만가량의 병력이 묵묵히 진군하였다.
선부를 지나 거용관으로 향하는 길목.
이제 거용관만 통과하면 북경은 지척에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집으로의 귀환이 다가오고 있었다.
패배하여 도주한 것과 다름없긴 하지만 병사들에게 있어서 승패는 크게 중요치 않았다. 그저 힘든 일이 끝난다는 사실만이 중요할 뿐.
이제 행군은 끝이라며 모두가 설레고 희망에 찬 감정에 물들어 있을 때였다.
“급보! 급보! 길을 열어라!”
미친 듯이 말을 달리는 전령 한 사람이 사십만이라는 기나긴 행렬의 끝에서 선두까지 먼 거리를 단숨에 주파했다.
주기진은 깜짝 놀라 가마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금의위와 호위대가 일사불란하게 움직여 다가오는 전령을 경계했다.
왕진이 놀라서 섭선을 들고 뛰쳐나왔고, 병부상서 광야와 영국공 장보도 급히 자신의 행렬에서 이탈해 황제의 근처로 달려왔다.
“성국공 주용께서 전사하셨습니다! 전멸! 전멸입니다!”
전령은 안색이 하얗고 입술은 파랗게 질려 있었다.
미친 듯이 말을 달린 그의 등 뒤에는 이민족들이 쏜 화살이 세 개나 박혀 있다.
모두가 아연한 얼굴이 되었다.
저런 꼴을 한 전령이 잘못된 보고를 할 리는 없었다.
왕진은 더는 참지 못하고 체면 불구하고 뛰쳐나가 금의위와 호위대가 붙잡고 있는 전령의 어깨를 붙잡았다.
“똑바로 말하세요! 전멸? 전멸이라고! 성국공 주용의 군대가 모두 전멸을 했어요?”
“예, 쿨럭, 전멸…… 전멸입니다.”
전령은 피를 토했다.
화살 세 개 중 두 개는 화살촉이 가슴 앞으로 뚫고 튀어나와 있었다.
회생 불능의 상처였다.
여기까지 달려온 게 기적이었다.
“어찌……. 어찌 전멸을 할 수 있단 말이냐.”
“하북 탁록……. 요아령에 매복이 있었습니다. 무력이 엄청난 장수가 있어서 속수무책으로…….”
“무력이라니. 무림인들이 가지 않았나요? 그들이 막지 못했나요?”
“추풍낙엽…… 그들은 아무런 도움도 안 되었습니다…… 병사들과 똑같이 일격에…….”
전령의 말은 너무나 충격적이었다.
평생을 무공을 익힌 명문 무림 세가 출신의 무인들이 병사들과 별 차이도 없이 쓸려 나갔단다.
대체 그자의 무공은 얼마나 강하단 말인가.
충격을 받은 왕진을 대신해 가까이 다가온 영국공 장보가 전령을 향해 소리쳤다.
“숫자는! 적의 숫자는 얼마인가! 전령이여, 말하라. 너의 이 충의로운 행동은 대대손손 전해질 것이다!”
전령은 눈의 초점이 점점 사라지면서도 끝까지 대답했다.
“적은…… 삼만…… 처음엔 일만인 줄 알고 쫓았는데…… 매복을 보자 처음과 차이가 없다고 성국공께서…… 그랬는데…….”
“처음과 차이가 거의 없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 그럼 그토록 두 번이나 격전을 치러 놓고 저쪽의 피해는 거의 없었다는 뜻이냐?”
영국공 장보는 공포에 질려 기함하며 주춤주춤 물러섰다.
전령은 고개가 모로 꺾이기 전에 비장하게 마지막 전언을 전달했다.
“에센이…… 옵니다…….”
에센이 온다[也先來來]!
그 말에 모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병부상서 광야가 다가와 전령의 등에 꽂힌 화살과 상처를 살폈다.
“왕 태감. 전령은 이 화살을 맞은 지 얼마 안 되었소.”
그 말의 의미를 알아들은 이들의 등에 소름이 돋았다.
“지금 습격하러 오고 있다는 뜻인가요?”
“그렇소. 어서 정찰을 보내고 싸움을 준비해야겠소. 폐하! 명을 내려 주십시오!”
병부상서 광야가 외친 말에 주기진은 멍하니 서 있다가 깜짝 놀라 대답했다.
“벼, 병부상서의 뜻대로 하게.”
“폐하의 명을 따르겠나이다.”
광야는 정중하게 예를 올린 뒤 곧바로 자신들의 부관을 향해 달려갔다.
급박한 분위기가 감돌기 시작했다.
왕진은 자신에게는 의견을 묻지 않는 광야의 행동에 기분이 상했지만 트집을 잡을 틈은 없었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다. 큰일이 났어. 이제 와서 생각해 보니 영국공이 한 말이 맞았던 게 아닌가?’
왕진은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는 듯했다.
‘매복을 조심해야 한다더니. 그 조언을 무시하는 게 아니었어. 큰일이구나. 이대로는 내 실수가 지탄을 받는다. 혼란스러울 때 정신없이 몰아치고 주도적으로 나서야 해.’
왕진은 이 근방의 지도를 머릿속에 떠올린 뒤 지금 가장 먼저 향해야 할 곳을 골랐다.
“영국공! 토목보! 토목보로 가도록 하죠.”
그때까지도 정신적 충격을 해소하지 못하고 굳어 있던 영국공 장보가 당황하며 되물었다.
“토목보는 국경을 오가는 상인들이 잠시 머무르는 정도의 작은 성채일 뿐이오. 그곳은 대군이 머무를 만한 곳이 아니외다.”
“지금 그런 것을 따질 땐가요? 근처에 성채라고 할 만한 게 없는데, 일단은 높은 지대로 올라가 폐하를 지켜야죠!”
“으음.”
“오랑캐들이 몰려오는데, 멍하니 있다가 폐하께서 위험에 처하면 어찌할 겁니까! 정신을 차리세요!”
영국공 장보는 머뭇거렸으나 왕진에게 반론을 제기하진 못했다.
맞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황제의 목숨은 그 어느 것보다 우선하며, 지금 그들에겐 선택지가 없었다.
‘평야에서 싸우면 백전백패일 터. 어떻게든 성채를 쌓고 방어전으로 가야 해.’
왕진은 나름 타당한 계획을 세운 것이었고, 그 점에선 전장에서 잔뼈가 굵은 영국공 장보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사십만에 달하는 대병력이 자그마한 성채인 토목보에 자리를 잡았다.
왕진의 생각은 옳았다.
황제와 지휘부를 가운데에 둔 채 사십만의 병력을 성벽처럼 둥그렇게 모아 단단한 방어진을 형성하자, 오이라트의 괴물 같은 기마병들도 함부로 돌격하지 못하고 지켜보기만 하게 된 것이다.
처음 에센이 도착해서 대치하게 되었을 때는 모두가 크게 긴장했으나, 이제는 함부로 덤벼들지 못하는 그들의 모습에 사기가 다시 올라가기 시작했다.
주기진은 칭찬했고, 왕진은 의기양양하여 병부상서와 영국공을 향해 목소리를 높일 수 있었다.
그런데 그 영광은 오래가지 못했다.
토목보의 큰 문제점이 발견된 것이다.
“물이 없습니다. 병사들 모두 긴 행군에 지쳐 있습니다. 빨리 물을 조달하지 못하면 말라 죽거나 나중엔 싸울 힘도 없어질 것입니다.”
주기진을 비롯한 모든 이들이 절망했다.
물이 없다는 것은 말 그대로 죽을 위기에 처했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제야 모든 이들이 왜 에센이 공격해 오지 않고 그저 주변만 넓게 포위하고 있는지를 알게 되었다.
저들은 사십만의 인원이 모두 말라죽거나 지치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땅을 파세요. 사십만입니다. 사십만의 역사(力士)가 힘을 쓰는데 고작 우물 하나를 못 판단 말입니까!”
왕진은 나날이 신경질적이고 난폭해졌다.
‘읍참마속이라 놀리며 비웃었는데, 내가 산 위에 올라온 마속 꼴이 되었구나!’
주기진은 어느 순간 패배를 받아들인 듯 초탈한 얼굴이 되어 갔고, 왕진의 과오는 정치적으로 가리기엔 나날이 커져 가고 있었다.
하루는 병부상서 광야가 말을 타다가 부상을 당해 절뚝거리면서도 충언을 올렸다.
“폐하만이라도 거용관으로 먼저 모십시다. 안전한 곳에서 군을 다시 지휘하시는 게 좋지 않겠소?”
왕진은 극렬하게 반발했다.
“폐하께서 떠나시면 남은 군사들의 사기는 어찌한단 말인가요? 모두가 버려졌다고 생각할 텐데, 그러면 저 오랑캐들이 쳐들어오지 않겠어요? 어찌 그리 전략을 모르는 소리를 하십니까! 게다가 북경에서 치중 천여대와 병량들을 보내 곧 도착할 것입니다. 우리는 그때까지만 버티면 싸울 수 있어요.”
광야는 침중한 안색으로 거듭 청했다.
“태감, 태감이 폐하를 모시고 함께 가시오. 폐하만 거용관으로 모시자는 것이 아니오. 이곳에 태감만 남겨 놓지 않을 테니 부디 잘 생각해 보시오.”
“병부상서! 나를 감히 어찌 보고!”
자신을 어린아이처럼 어르고 달래려는 광야의 태도에 왕진은 크게 분노했다.
“태감, 군신의 예를 지킵시다. 폐하만이라도 무사해야 하지 않겠소?”
“감히 내 앞에서 군신의 예를 논하다니!”
왕진은 극도로 분노하여 소리쳤다.
“썩은 유학자 따위가 어찌 감히 군대의 일을 말하는가! 두 번 다시 폐하만 모시고 도망치자는 헛소리를 하는 자가 있다면 사형에 처할 것이다!”
왕진이 길길이 날뛰자 그 이후로는 토목보 주둔에 반대하는 이가 아무도 없었다.
사십만에 달하는 인원이 돌아가며 우물을 팠으나, 결국 물은 단 한 방울도 나오지 않았다.
하늘이 명나라를 버렸다.
모두가 패배감에 젖어 있던 그때, 주변을 포위하고 있던 오이라트의 병력이 포위를 느슨하게 풀면서 변화를 보였다.
***
막사에서 쉬고 있는 소호와 대미미에게 일을 하라 부추기는 자는 단 한 사람도 없었다.
만약 싸움이 벌어진다면 육모담을 막을 수 있는 자는 소호밖에 없다는 것을 군문의 모든 이들이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소호는 황제만큼이나 극진한 대우를 받으며 전쟁터 한복판에서 편히 쉬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조용히.
몸에 감고 있던 붕대를 다 풀어내고, 명상에 잠겨 있던 소호는 천천히 눈을 떴다.
그는 북쪽을 바라보았다.
밤하늘을 가르며 떨어져 내리는 유성처럼.
강렬한 하나의 기파가 드디어 토목보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왔구나.”
결전의 때가 왔다.
소호는 박도를 차고 몸을 일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