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권 21화
제39장 북벌종횡(北伐縱橫) (21)
팔월 중순.
하늘에서 내리쬐는 햇볕은 지옥의 불벼락 같았고, 지글지글 끓는 듯한 땅에서는 한 치 앞이 잘 안 보일 정도로 아지랑이가 피어올랐다.
소호는 군대와 전술에 대해서는 기본적인 것밖에 모르지만, 그래도 왕진의 처소로 향하는 도중에 보이는 명군의 상태는 너무나 알기 쉬웠다.
엄정한 군기 따위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지친 얼굴.
한계에 도달한 모습으로 모두가 주저앉듯 쓰러져 있었기 때문이다.
‘엉망이다. 뭐부터 지적해야 할지 모르겠어.’
밥을 한 끼만 못 먹어도 힘이 빠지는 게 사람일진대, 심지어 혀에 물방울을 하나 떨어뜨리는 정도의 물밖에 못 마신 병사들이 싸움이 나면 어찌 싸울 수 있겠는가.
병사들은 삼삼오오 모여 힘없이 앉아 있을 뿐이었다. 그들에게 전의(戰意)란 없었다. 얼굴에 윤기가 흐르지 않았고 입술은 가뭄이 든 논처럼 쩍쩍 갈라져서 피가 흐를 지경이었다.
명군의 복색을 갖춰 입은 그들에게선 ‘절망’이라는 냄새가 났다.
모든 이들이 똑같은 냄새를 풍기며 주변의 막사나 성벽 근처의 그늘에 멍하니 모여 있는 모습은 마치 도살장에 끌려가기 직전의 소와 같았다.
아무런 희망도 없고, 삶에 대한 의지도 없다.
싸움에서 사기가 얼마나 중요한 일인데, 어찌 이리도 암울하단 말인가.
‘화창(火槍), 화전(火箭), 신총(神銃), 화포(火砲). 천지를 뒤집을 만한 무기들은 저렇게 많은데도 고작 물이 없어 이 지경이구나.’
일흉대기 광사로와 주기옥의 곁에서 곁눈질로 배운 소호조차 알 수 있을 만큼 위협적인 화기들이 주변의 짐수레에 아무렇게나 쌓여 방치되고 있었다.
기밀을 기한답시고 병사들에게 화기 사용법을 가르쳐 주지 않은 대가다.
물론, 사용법을 안다고 해도 지금은 저걸 들고 싸울 마음조차 없을 테지만 말이다.
“사례감 태감을 만나러 왔습니다.”
왕진의 막사를 지키던 병사 두 사람은 소호를 확인하자 힘없는 얼굴로 묵묵히 길을 비켜 주었다.
“뭐야! 또 누구야!”
인기척이 비치는 것만으로도 신경질적으로 버럭 소리쳤던 왕진이 소호의 얼굴을 보자 안색을 급격히 바꿨다.
“장 공!”
왕진은 두 팔 벌려 환영하며 서둘러 소호에게 자리를 권했다.
구국의 영웅이자 살수로부터 그의 목숨을 지켜 줄 구명줄이다.
소호는 물끄러미 그런 왕진을 바라보았다.
보면 볼수록 초췌한 모습이었다.
항상 단정하게 기름을 발라 넘기던 머리는 엉망이 되어 여기저기 잔머리가 삐져나와 있었고, 화려한 관복은 주름투성이로 구겨졌다.
강박적으로 외모를 가꾸고 다듬던 그가 이런 모습이라니. 얼마나 궁지에 몰려 있는지 충분히 상상할 수 있었다.
항상 하얗고 매끈하게 분칠을 하던 얼굴은 더 이상 없다. 마지막으로 얼굴에 분칠을 한 게 대체 언제인지 모를 정도로 피부 곳곳의 화장이 쩍쩍 갈라져서 건조한 피부가 드러나 있었다.
눈가는 주름졌고, 눈은 빨갛게 충혈되었다.
절간에서 오래 방치된 그림처럼 나무 결을 따라 갈라지고 빛이 바랜 탱화 같은 얼굴이다.
“장 공이 와 주니 기쁘군요. 어쩐 일로 왔나요?”
그런 모습으로도 깔깔거리며 교태를 부리며 웃는 모습은 농담으로라도 좋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피곤해 보이네.”
“그래요? 최근에 외모에 신경 쓸 시간은 없으니까요. 내가 이 자리에서 하루에 읽어야 하는 첩보만 수백 개예요. 대단하죠? 이 자리가 그렇게 어려운 자리랍니다.”
실제로 왕진은 조금 전까지도 서찰들을 읽고 있었는지 침상 옆에 온통 긴급으로 날아온 서류와 죽간들이 쌓여 있었다.
소호는 왕진이 권하는 자리에 앉지 않았다.
주변에 널브러진 서류들을 쭉 눈으로 훑은 뒤, 막사의 한쪽 벽면을 차지하고 있는 커다란 군사용 지도를 보았다.
토목보.
거용관과 북경으로부터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자그마한 성채가 크게 과장되어 그려져 있었다.
“궁금한 게 있어.”
소호는 툭 던지듯 물었다.
“장 공의 질문이라면 대답해 드려야죠. 말씀하세요.”
“언제까지 할 거야?”
“……무슨 말이죠?”
“왕진 행세. 언제까지 하고 싶어?”
갈라진 화장 사이로 가늘고 긴 눈매가 파르르 떨렸다.
왕진은 잔뜩 당황한 목소리였다.
“코앞에 병사들이 있어요.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겁니까, 지금?”
왕진은 주변을 살폈다.
“네가 원래 누구인지. 기억은 하고 있어?”
“……난 왕진입니다. 황제의 스승, 명 황실의 실세. 사례감의 태감. 이상한 말을 하는군요. 날씨가 너무 더우니 천무공자가 더위라도 먹은 건가요?”
“그래?”
소호는 지도에서 눈을 떼고 왕진을 돌아보았다.
그는 막사의 입구 쪽을 힐끗거리며 독한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소호의 이야기를 병사들이 듣기라도 했을까 봐 걱정하는 모양이었다.
이해는 된다.
소호가 말한 이야기는 듣는 사람에 따라서 큰 ‘오해’를 살 수 있으니 말이다.
왕진의 얼굴은 섬뜩했다. 눈꼬리가 치솟았고 아랫입술을 질겅질겅 씹으면서 손을 꼼지락거린다. 보기만 해도 그의 초조한 불안감이 전염되는 듯했다.
신경질적이고 강박적이다.
저 의심을 넘지 못하고 그동안 얼마나 많은 이들이 처형을 당했을까.
“걱정하지 마. 병사들은 못 들었어. 지금은 목이 말라 죽겠다면서 왕진을 욕하고 있네.”
무공을 익힌 무인이 병사들의 잡담 소리를 엿듣는 것 정도는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다.
왕진은 그 말을 듣고 웃어야 할지 화를 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 오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요? 그럼 벌을 줘야겠네요.”
“무엇 때문에?”
“감히 세상 무서운 줄도 모르고 사례감 태감을 욕했으니까요.”
소호는 소리 내어 웃었다.
“그래? 그렇구나. 넌 왕진이 확실하네.”
“당연한 이야기를 하는군요. 난 왕진입니다.”
“그래. 괜한 이야기를 한 것 같아. 그거 알아? 난 우리가 출정하기 전에 나눴던 약속은 다 지켰어.”
소호는 지도 위에 손가락을 뻗어 토목보 너머, 북경에서 남경으로 이어지는 운송로를 쭉 따라갔다.
“내가 장강수로맹의 협조를 얻어 냈고, 전쟁에 필요한 모든 물자를 아무런 피해 없이 실어 왔어. 물, 병량, 무기, 갑옷. 지금 밖에 쓰레기처럼 쌓여 있는 화기들도 대부분 내 덕분에 운송했잖아? 그렇지?”
“그랬죠. 훌륭한 일 처리였어요. 그리고 그 대가로 황실에선 천무련의 공적을 높이 사고, 무림 강호 종주로서의 위치를 인정한다는 서찰을 보냈고요.”
왕진은 그거면 계산이 끝난 거 아니냐고. 왜 굳이 자신의 공치사를 하는 거냐고 묻는 듯한 눈빛을 보냈다.
굳이 소호가 쓰레기처럼 쌓여 있다고 표현한 화기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다. 명군의 앞날은 여전히 어두웠다.
“아! 혹시 살수의 손아귀에서 나를 구해 줬던 일을 보상받고 싶은 건가요? 그거라면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본인을 구한 사람에게 상을 내리지 않을 것 같아요? 말도 안 되는 소리. 북경으로 돌아가자마자 본인은 나라에서 가장 큰 상을 장 공과 천무련에 내려 줄 것이에요. 세상 모두가 깜짝 놀랄 만한 선물을요.”
왕진은 여인처럼 호호 웃으며 박수까지 쳤다.
“그래. 대단하네. 고마워.”
“별말씀을요. 그런데 그 이야기를 하러 여기까지 왔나요?”
“아니. 원래는 다른 이야기를 나누려 했었는데, 지금 보니 의미가 없는 것 같아.”
왕진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지쳐서 무뎌진 그의 판단력으로는 소호의 말이 무슨 의미인지 전혀 파악할 수가 없었다.
소호는 그저 조용히 웃고만 있었다.
“의문이 해소가 되었나요?”
“완전히.”
“그렇군요. 그럼 됐네요. 이걸 봐주세요.”
왕진은 미리 준비해 뒀었는지 침상 머리맡에 있는 나무 상자에서 손바닥만 한 연흔전을 꺼내 보여 주었다.
“이건 비밀인데 오이라트에서 강화를 맺자는 서찰이 왔어요. 저들도 막상 사십만이 진을 치고 있는 자들과 싸우고 싶지는 않겠죠. 이제 곧 북경에서 보급 부대도 올 테니까요. 저들의 포위망이 풀리는 순간 우리는 거용관으로 퇴각을 할 거예요. 그때 혹시 위험해져서 내가 이 연흔전을 하늘에 쏜다면, 그때 폐하와 저를 구해 주세요.”
“…….”
“장 공? 왜 말이 없는 거죠?”
“그래? 저들이 이제 와서 강화를 하겠다 말한다고? 그걸 믿어?”
“믿어요. 그리고 설령 믿지 않는다 해도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하나뿐이죠. 말라 죽기 직전인데 못할 게 뭐가 있나요.”
왕진은 웃음을 터뜨렸는데 신경질적인 짜증이 묻어났다.
“강화를 받아들일 수밖에요. 그건 우리에게도 좋아요. 거용관으로 퇴각할 명분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이제야 그게 생긴 거예요.”
“병부상서랑 영국공도 퇴각을 진언했다면서? 명분은 그걸로도 충분하잖아? 그때 퇴각하면 안 되었던 거야?”
“그들에게 공을 줘선 안 되죠. 적에게 공을 주지 않는 것은 정치의 기본이에요.”
이 지경이 되어서도 같은 명의 장수를 상대로 정치 싸움을 계속하다니.
이젠 감탄이 나온다.
“……만약 저들이 기습을 한다면 피해가 클 거야.”
“폐하와 저만 살아남는다면 어떻게든 되는 법입니다. 난 우선 폐하를 이 지옥 같은 곳에서 빼내서 북경으로 모셔야겠어요.”
왕진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그래? 사십만의 병사들을 다 잃더라도?”
“아무리 많은 병사도 폐하의 가치에 비할 수는 없지요.”
나라의 국력을 좀 먹는 해충이 자기 자신을 충신이라 생각하는 것만큼 역겨운 일이 또 있을까?
소호는 예전의 ‘선’을 떠올렸다.
호북 유씨 가문 출신의 젊은 청년.
왕진과 똑같은 모습으로 화장을 하고, 그의 말투, 그의 습관을 모조리 베껴서 연기하는 그는 신묘한 능력을 지닌 묘한 사내였다.
사실 그를 처음 만났을 때 소호는 선을 피해자라 생각했었다.
여우처럼 영리하지만 사악하지는 않은 자. 겉으론 왕진을 따라 해도 속으론 당황해서 어쩔 줄 모르던 여린 청년.
그런데 이젠 아니다.
‘이제 선은 없다. 내 눈앞에는 왕진뿐이 안 보여.’
소호는 마음을 완전히 비웠다.
사십만의 희생을 당연하다는 듯이 말하는 사내다. 매일 자신을 왕진이라 세뇌하다 보니 정말로 뼛속까지 왕진이 되어 버리기라도 한 모양이다.
한숨이 나왔다.
이젠 그 어떤 대화도 필요치 않았다.
지금 눈앞에 있는 자는 왕진을 연기하던 선이 아니라, 본래의 사례감 태감 못지않게 악업을 쌓은 왕진 그 자체니까.
“왕진.”
“네?”
“네게 그 자리를 물려받으라 말하던 사람들은 모두 네 손으로 쫓아냈잖아. 이제 아무도 거기에 앉아 있으라고 강요하는 사람은 없어. 알겠어? 네가 거기에 있는 것은 순전히 네 선택이야.”
왕진은 혼란스러운 얼굴이었다.
선이라는 청년에게 왕진을 대신하라 명령했던 부운화와 공보하를 즉시 머릿속에서 떠올리지 못하는 게 분명했다.
소호는 그의 대답을 듣지 않고 그대로 막사를 빠져나왔다.
앞을 지키고 있던 병사 두 사람은 소호의 기척을 느끼자, 지금껏 잡담을 단 한 번도 한 적 없다는 듯 각 잡힌 자세로 군기가 확립된 모습을 보여 주었다.
소호는 말없이 두 사람의 어깨를 툭툭 두드려 주고 지나쳤다.
“그래. 네 선택이다. 네가 그 자리에 있는 것도, 업보를 쌓은 것도.”
아마도 지금 이게 그와의 마지막 인연일 것이다.
천명을 느낀다.
저들과의 인연은 여기까지.
소호는 선이라는 청년에게 마음속에서 작별을 고했다.
***
토목보의 방어진을 향해 묵묵히 다가오던 거대한 존재감이 제자리에 우뚝 멈춰섰다.
소호가 움직였기 때문이다.
십 리가 넘게 떨어져 있지만 소호도, 그리고 소호의 ‘상대’도 모두 서로의 위치를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
소호는 박도 한 자루를 든 채 조용히 토목보의 성채를 빠져나갔다. 진영 밖으로 완전히 빠져나가자 거대한 존재감이 토목보가 아니라 그의 뒤를 쫓았다.
“천무공자.”
소호는 익숙한 목소리에 걸음을 멈췄다.
드디어 다시 만났다.
상대와 자신, 둘 중 하나는 이곳에서 죽어야 한다.
“육모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