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풍운객잔 2부-476화 (605/686)

19권 22화

제39장 북벌종횡(北伐縱橫) (22)

다시 만난 육모담은 지난번보다 인상이 훨씬 날카로워졌다.

몸이 더 마른 듯 볼이 움푹 들어갔고 눈빛 또한 우묵하게 깊어져서 마치 잔뜩 날이 선 검 한 자루가 사람의 형상으로 서 있는 것과 같았다.

천무공자와 오매검마.

백설지를 계기로 원수가 된 두 사람은 서로를 보며 오묘한 감정을 느꼈다. 혼란과 격변의 토목보에서 결국엔 다시 만났으니 이젠 정말로 목숨을 건 격전을 벌일 수밖에 없게 되었다.

‘사람의 인연이란 참으로 알 수 없는 것이구나.’

소호는 그간 지난 싸움을 되돌아보며 참오(參伍)하였다.

무공이란 상대를 알아가는 것과 같다.

상대방의 행동 하나하나를 분석하고, 그에 대한 대응책, 상대가 할 법한 행동을 상상하다 보면 어느새 상대방의 내면까지 알아가게 되는 것이다.

그러다 이렇게 날이 선 육모담을 보니 더욱 오묘한 감정이 생긴다.

소호는 문득 떠오르는 생각이 있어서 뜬금없는 이야기를 꺼냈다.

“연화봉에는 다시 매화꽃이 피기 시작했어요.”

육모담의 눈빛이 흔들렸다.

“무슨 뜻이오?”

“차가운 겨울을 견디느라 앙상해졌던 매화나무에 꽃이 다시 폈습니다. 당신이 전해 준 무공들이 다시 본산으로 돌아갔고, 새로 화산 문하로 들어온 제자들이 그 무공들을 열심히 익히고 있어요.”

“그랬……군.”

“하늘의 안배는 참 신기합니다. 그토록 고난을 겪었는데도 섬서 검악의 기상은 죽지 않았더라고요. 역시 검문의 역사가 오래된 곳은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싶어요.”

도저히 듣고 있기가 힘든지 육모담이 시선을 바닥으로 떨구었다.

“특히 이번에 들어온 이대 제자들 중에 위태천이라는 어린 친구가 대단해요. 매화검을 하루 만에 다 외우더라고요. 제가 볼 때 다음번에 화산제일검이 나온다면 그 친구일 것 같아요. 다만 무공을 보고 배울 사부가 부족해서 좀 힘들어하지만요.”

소호가 전략적인 목적으로 화산파 이야기를 꺼낸 건 아니었다.

지칠 대로 지친.

마치 죽을 자리를 찾아가는 승냥이처럼 강퍅해진 모습을 보니 절로 화산파의 모습이 떠올랐을 뿐이다.

“그런가.”

육모담은 복잡한 안색으로 남방(南方)을 멀리 바라보았다.

큰 싸움을 앞둔 토목보의 하늘은 두 사람의 마음과 달리 구름 한 점 없이 화창했다.

“천무공자. 나를 꼭 막아야 하겠소?”

“오히려 제가 제안하죠. 떠나세요. 화산파로 돌아가요. 그럼 막지 않겠습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육모담은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불구대천의 원수를 앞에 두고 사나이가 어찌 칼을 거두겠는가.”

“그 불구대천의 원수는 죽었어요.”

소호의 담백한 말이 육모담을 혼란에 빠뜨렸다.

“그건 또 무슨 소리인가? 그대는 오늘 이해 못할 말들만 잔뜩 하는군.”

“왕진은 죽었습니다. 지금 왕진 자리에 있는 사람은 가짜예요.”

“……이제 보니 나를 놀리는 모양이군. 세 치 혀로 나를 물러나게 할 셈이오?”

육모담은 화가 난 듯 목소리에 힘이 실렸다.

소호는 탄식했다.

“안 믿으시네요.”

“복수의 허망함을 막으려는 천무공자의 마음만 받겠소. 화산파에 대한 이야기도……. 반갑군. 복수를 위해 모든 걸 버렸다 생각했는데, 이런 나라도 아직 사문에 대한 애정은 남아 있었던 모양이야. 하지만 내가 말 몇 마디 때문에 복수를 포기할 거라 생각했다면 그건 오산이오.”

한 번 비틀린 오해가 이상한 방향으로 견고하게 굳어지고 있었다.

소호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런 게 아닌데. 지금 왕진은 진짜 가짜라니까요?”

“설령 그렇다 해도, 왕진 자리에 있는 자를 죽여야겠소. 그래야 내 복수가 끝나오. 그게 법도에 맞는 일이야.”

육모담은 이제 흔들리지 않았다.

꼿꼿한 자세, 담담한 말투에서 그의 확고한 생각이 엿보였다.

“어차피 이번 습격을 막지 못해서 왕진이 죽는다 해도요?”

“……천무공자.”

소호의 말에서 묘한 맥락을 읽어 낸 육모담이 크게 놀라 눈을 부릅떴다.

“설마 습격이 있다는 걸 알고도 이곳에 온 것이오? 황제와 왕진을 지키지 않고?”

소호는 아무런 대답도 해 주지 않았다.

때마침 토목보에 주둔해 있던 병사들이 큰 움직임을 보였다.

사십만의 대병력이 급격히 짐을 싸서 이동하는 모습은 거대한 용이 깨어나 구불구불 몸을 움직이는 것과 같았다.

천하가 진동한다.

두 사람이 발을 딛고 서 있는 대지가 웅웅 떨리고 있었다.

“역시.”

소호는 나직하게 웃으며 그보다 더 중요한 이야기를 꺼냈다.

“설지 선배는 저한테 잘해 줬어요. 저랑 혼인하고 싶다는 말도 했었죠. 그런 말을 들은 건 처음이었어요.”

꿈틀.

육모담의 미간이 좁아졌다.

“오매검마 육모담. 당신은 저의 원수입니다. 그런데 또 한편으로는 이해가 돼요. 백검회를 떠나기 전에 왕진의 신수가 될 만한 자는 하나라도 줄여 놓고 싶었겠죠. 설지 선배한테 원한이 있던 건 아니잖아요? 그저 묵묵히 임무를 수행했겠죠. 설지 선배는 운이 안 좋았어요. 왜 하필 그때 움직였을까요?”

“당황스럽군. 원수를 이해한단 말인가?”

오지랖도 그런 오지랖이 없다.

소호는 씁쓸하게 웃었다.

“그게 동생들이 매번 저를 혼내는 이유죠. 왕진도 나쁜 건 머리로 알지만 어느 정도 이해했으니까요.”

“나로서는 이해할 수 없군.”

“그렇다고 화가 나지 않은 건 아닙니다. 저도 감정이 있어요. 못마땅해요. 설지 선배의 원수를 갚아 주고 싶습니다. 그런데 또 한편으로는, 육모담이라는 걸출한 인물이 위기에 처한 화산파를 다시 부흥시키고, 제가 이끄는 천무련에 도움을 주는 게 더 이득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드네요.”

“차갑군. 아니, 그릇이 크다고 해야 하나?”

“그런가요?”

소호는 환하게 웃었다.

허리에 차고 있는 박도의 손잡이를 살짝 앞으로 기울였다. 다리는 어깨너비로 벌리고 어깨는 긴장을 풀고 늘어뜨린다.

천무련의 련주.

천무공자 장소호는 이제 언제든 칼을 뽑을 수 있는 모든 준비를 끝냈다.

“마지막으로 물을게요. 화산파로 돌아갈래요? 아니면 굳이 가짜 왕진을 죽이기 위해 저와 싸울래요?”

“물을 것도 없소.”

육모담은 제자리에 고목처럼 버티고 서서 협봉검을 겨누었다.

“내 오늘 그대를 쓰러뜨리고 왕진을 베서 화산의 원수를 갚으리라.”

“그 결정을 후회하게 될 겁니다.”

육합구소신공의 장중한 내력이 피를 갈구하는 매화꽃을 화려하게 만개시켰다.

그에 대항하듯 은은하게 퍼져 나가는 황금빛 후광.

전륜의 법광을 두른 소호가 내리친 일격에 모든 혈매화가 천하와 함께 갈라졌다.

***

사십만 병사들을 모조리 말려 죽일 것만 같았던 토목보의 전황은, 황제에게로 전달된 오이라트의 친서 한 통으로 변화하였다.

서찰에는 오이라트의 영웅인 에센이 자신이 왜 명의 국경을 넘었으며 자신들은 북방의 대국으로서 어떤 대우를 원하는가에 대한 내용이 장황하게 적혀 있었다.

친선의 말미에 적힌, 자신들은 이제 충분한 힘을 보였으니 앞으로 국경에서 열릴 마시(馬市)에서 적절한 대우를 기대한다는 말에 회의장에서 모든 대소신료와 함께 친서를 읽던 황제가 탄성을 내질렀다.

“강화를 원하는 것이로군!”

친서의 내용은 그들 기준에선 오랑캐치고 무척이나 건방졌으나, 어쨌거나 싸움을 멈추고 강화하자는 청이나 다름없었다.

안 그래도 극심한 목마름에 고통받던 이들에겐 울고 싶은데 뺨 때려 주는 것과 마찬가지인지라, 논의할 필요도 없이 순식간에 모두의 의견이 일치했다.

퇴각.

오이라트가 강화의 의사를 표방했으니, 어서 강으로 가서 목을 축이고 북경으로 돌아가자는 의견이 대다수를 이루었다.

심지어 오이라트는 그 친서를 끝으로 병력을 썰물 빠지듯 빼내서 그들에게 길을 열어 주기까지 했다.

정찰병으로 보낸 기병들도 인근 십 리 안에 병력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확인해 주었다.

“태감, 역시 그들도 사십만을 이끄는 짐과 정면으로 싸우기엔 겁이 났나 보군.”

“당연한 일입니다, 폐하. 숫자가 이리도 차이 나는데, 아무리 날고 기는 오랑캐들이라 한들 어찌 함부로 싸움을 걸겠습니까? 이 모든 것은 폐하의 은덕이옵니다.”

사람이 절박해지면 편협한 시야를 갖게 되는 법.

왕진의 말을 맹목적으로 믿은 이들은 토목보에서 상황을 지켜보지 않고 모든 병력을 서둘러 강물 쪽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식수를 구해 올 수 있도록 건장한 자들만 선별하였는데, 목이 마른 이들이 너도나도 강으로 가겠다고 나서서 오히려 문제가 될 정도였다.

하지만 그들은 알지 못했다.

오이라트는 완전히 퇴각한 것이 아니었다. 명군이 보기엔 완전히 퇴각한 것처럼 사라졌으나 사실 오이라트의 전사들은 북방 대초원을 바라보던 그 뛰어난 시력으로 멀리서 명군을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다.

사십만이라는 거대한 숫자가 강물을 향해 다급하게 움직이다 보니 전열 자체가 한 마리의 뱀처럼 길게 늘어졌다.

바로 그 순간 에센의 명령이 떨어졌다.

“모조리 쓸어버려라!”

오이라트의 전사들은 한번 움직이기 시작하자 전광석화처럼 내달렸다.

오이라트의 병력이 움직이는 모습은 마치 떼를 지어 움직이는 갈까마귀와 같았다.

아병살성진(鴉兵撒星陳).

갈까마귀처럼 모여들었다가 별처럼 흩어지는 전술이라 하여 중원에서 부르는 이름이었다.

그들은 모두 좌로, 중로, 우로 세 개의 군으로 뭉쳐 유기적으로 움직였으며, 각 군의 장수들이 깃발을 흔드는 신호에 맞춰 자유롭게 움직였다.

갈까마귀 떼처럼 몰려와 상대를 쪼아 대다, 또 한편으론 밤하늘에 산산이 부서지는 유성우처럼 흩어지기를 반복했다.

“포위하여 화살을 쏴라!”

하늘이 새카맣게 변한다.

갈까마귀 떼처럼 주변을 포위한 오이라트의 기병들이 하늘이 까맣게 보일 만큼 많은 화살을 일제히 쏘았다.

피슈슈슈슈슉―!

“방패! 방패를 들어라!”

“진형을 유지하라!”

전쟁 경험이 풍부한 장수들 몇 명이 나서서 소리를 질러 보았지만 통제되는 병력은 극소수였다.

영국공 장보, 병부상서 광야가 크게 놀라 직접 뛰쳐나갔다. 그들이 이끄는 정예 병사 오천 정도만이 제 뜻대로 움직여 줄 뿐.

나머지 병사의 대부분은 굶주리고 목이 마른 데다 기습을 당해 사기까지 떨어지니 큰 혼란에 빠져 버렸다.

특히 강을 향해 이미 상당히 진군해 있던 절반 이상의 병력의 당혹감은 이루 말할 수도 없었다.

오이라트의 기병은 숫자로는 명군에 비해 십 분의 일밖에 안 된다.

그렇다 해도 어찌할 수 없었다.

이미 강물을 향해 움직여서 진형이 길게 늘어져 버린 명군으로서는 압도적인 수적 우위를 전혀 활용할 수 없었다.

“으아아악!”

“습격이다! 화살이 쏟아진다!”

오이라트의 기병들은 절대로 적진을 향해 돌진하지 않았다.

길게 늘어져서 얇아진 방어진 주변을 빙빙 돌면서 달리는 기마 위에서 화살을 쏴 댈 뿐이다.

그저 화살만 쏠 뿐인데도 제대로 방어진을 형성하지 못한 명의 병사들은 허수아비처럼 화살을 맞고 픽픽 쓰러져 버렸다.

“이 오랑캐 놈들! 가만두지 않겠다!”

영국공 장보가 용맹무쌍하게 자신의 친위대를 이끌고 곧바로 반격에 나섰다.

오천의 기마를 이끌고 삼각형 모양의 어린진(魚鱗陳)을 갖춰 돌격한 영국공이 오이라트의 군세 중 한 무리를 향해 달려들었으나, 그 순간 오이라트 측의 지휘관이 매의 울음소리 같은 기묘한 호각을 불었다.

삐이이이익―――.

“저놈들이?”

제일 가까운 곳에서 화살을 쏘던 기병들이 일제히 흩어져 병력을 물린다.

심지어 기마술도 뛰어나 장보가 돌진을 하는 속도보다 그들이 재빨리 물러나는 속도가 더 빨랐다.

“저들이 왜 물러나지?”

영국공 장보는 알 수 없었다. 오이라트의 기마병은 총 다섯 개의 진을 갖춰 움직이며, 그중 앞의 두 줄은 중기마병, 뒤의 세 줄은 경기마병이다.

경기마병들이 일제히 활을 세운다.

달리는 말 위에서 쏘는 화살이 놀랍도록 정확하게 영국공 장보의 정예군을 향해 쏟아졌다.

“방패를 들어라!”

히히힝―!

정예병사들은 방패를 들어 화살을 막았으나, 그래도 방패로 가려지지 않는 다리와 기마의 몸에 화살이 꽂히는 것까지는 막을 수 없었다.

순식간에 수십 단위의 피해가 발생했다.

영국공 장보는 이를 악물고 돌진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쉽지 않겠구나……!”

그의 탄식과 함께, 영국공 장보가 나오지 않은 반대쪽 전선에서 비명과 괴성이 터져 나왔다.

장보는 이를 갈며 다시 황제의 곁을 지키기 위해 병사들을 후퇴시켰다.

***

“장 공! 장 공!”

사례감의 환관 한 명이 소호와 대미미가 사용하는 막사로 다급하게 뛰어들었다.

그는 안색이 창백했고 호흡이 흐트러져 있었다.

그는 조용히 침상에 앉아 있던 대미미를 발견하고는 그녀에게 다급하게 물었다.

“장 공을 보지 못했습니까? 급한 일입니다! 오랑캐들이 쳐들어왔어요!”

혼란에 빠진 환관은 대미미가 고개를 젓자 우왕좌왕하다가 소리를 질렀다.

“어디 있는지 알면 빨리 돌아와 달라 전해 주세요! 왕진 합하께서, 아니, 폐하께서 위험합니다!”

할 말을 다 전한 환관이 도로 막사에서 나가려다가 갑자기 뻣뻣하게 굳었다.

피슈슈슈슉―!

황제의 지척에 마련된 막사에까지 화살이 닿기 시작한 것이다.

환관은 벌에 쏘인 것처럼 몸을 몇 번 경련하다가 바닥으로 픽 쓰러졌다.

그의 가슴에는 화살 한 발이 비스듬히 상체를 파고들어 있었다.

“아…….”

대미미는 난감한 얼굴로 고민하다가 고개를 돌렸다.

막사의 한편.

번쩍거리는 황금 갑주가 주인 없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