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권 23화
제39장 북벌종횡(北伐縱橫) (23)
미친 듯이 말을 달리는 기병이 쏘아 대는 화살은 마치 자연재해와 같았다.
싸울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던 명군은 비처럼 쏟아지는 화살에 제대로 방어도 못 한 채 우수수 쓸려나갔다.
“으아악!”
“어떻게든 막아! 목숨을 걸고 막앗!”
절규하는 지휘관들의 명령에도 병사들은 우왕좌왕했다.
전열(前列).
중열(中列).
후열(後列).
이동 중이라 많이 얇아지긴 하였으나 그래도 전투를 대비해 열을 갖추고 있었던 방어진이 순식간에 산산이 부서졌다.
“끄, 끝이다.”
“도망칠 구석이 없어!”
피와 절규가 전장에 가득했다.
넓은 범위를 포위한 채 몰려드는 기마병들 뒤로 마치 백만대군이 뒤쫓는 듯한 흙먼지가 뿌옇게 일어났다.
그나마 군에서 믿을 만한 장수인 영국공 장보, 병부상서 광야는 이미 자신들의 정예병을 이끌고 분전을 거듭하고 있었으나, 이미 가닥가닥 끊어져 버린 명군의 진형을 바로잡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틀렸어! 우린 틀렸다고!”
모두가 절망에 빠졌다.
그들은 그물에 걸린 물고기와 같았다. 아무리 발버둥 쳐 봐도 어차피 그물에 끌어 올려져 한 끼 식사로 변할 처지다.
그러니 발버둥 치는 것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
쿵.
그때 모든 이들이 땅이 울리는 것을 느꼈다.
“어?”
착각인가?
안 그래도 기마병들 때문에 말발굽 소리로 천하가 진동하는데, 특별히 땅이 더 울릴 리가 없었다.
그런데 황제가 있는 방향에서 기이한 진동이 다시 한 번 터져 나왔다.
“땅이 울린다!”
쿵! 쿵!
그런데 땅이 또 울렸다.
이번엔 우지끈, 둔중한 나무 기둥이 부러지는 것 같은 소리가 났다.
심지어 그 소리는 명군 측에서 나고 있었다.
자연스레 모두의 시선이 뒤로 돌아갔다.
정면에서 오이라트의 기마병이 달려들고, 하늘에선 화살이 쏟아지는 상황에 뒤를 돌아본 것이다.
미쳤다고밖에 할 수 없는 상황.
그런데 그들의 행동에는 그럴 만한 가치가 있었다.
“황금 장수……?”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온통 황금 갑주를 갖춰 입은 장수가 햇빛을 받아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어찌나 빛이 나는지 눈이 부실 정도였다.
황금 장수의 모습을 알아챈 병사들이 너도나도 목소리를 높였다.
“장 공자! 장 공자가 나선 거야!”
“오랑캐의 살수를 막아 낸 분! 그분이 나오셨어!”
엄청난 신위를 보이던 살수를 단신으로 막아 낸 장소호는 명군 병사들의 큰 화두였고, 황제와 왕진이 그에게 황금 갑주를 상으로 내려 장수로 등용하려 한다는 사실은 모르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그 장소호가 나타났다.
물론 그 혼자 수만 명을 쓰러뜨리지는 못할 테지만, 그래도 희망의 끈이 생긴다는 건 좋은 일이다.
무공이 뛰어난 사람이 하나라도 더 있다면 무언가 활로가 생기지 않겠는가?
“어?”
“어엇!”
잠시 희망에 차 있던 병사들이 경악하여 입을 쩍 벌렸다.
그들은 지금 보고 있는 광경을 믿을 수가 없었다.
황금 갑주를 입고, 얼굴엔 초패왕의 얼굴이 그려진 가면까지 쓴 자가 갑자기 막사를 지탱하던 사람 몸통만 한 굵기의 나무 기둥을 뽑아낸 것이다.
쿵!
그가 기둥을 옆에 내던지는 순간 땅이 쿵 울렸다.
그는 자세를 바꿔서 바닥에 놓은 기둥을 양손으로 붙잡았다. 가운데를 발로 툭 걷어차며 당기자 나무 기둥이 우지끈! 큰 소리를 내며 절반으로 부러졌다.
“어어……?”
두 눈으로 직접 보면서도 도저히 믿기지 않는 광경을 보면 사람은 생각이 멈추게 되어 있다.
지금의 광경이 그랬다.
말도 안 된다.
황금 장수는 옆에 차곡차곡 쌓아 둔 나무 기둥을 하나 집어 들고, 갑자기 그걸 돌멩이 던지듯 힘차게 내던졌다.
후와아앙――――!
성을 공략할 때 쓰는 공성병기가 이러할까.
사람 몸통만 한 나무 기둥이 말을 타고 내달리던 오이라트 기병의 무리를 두 동강 냈다.
콰앙!
땅이 깨지고 흙이 튀어 올랐다.
직격을 맞은 자는 한 줌의 육편이 되어 버렸고 뒤따라 움직이던 기마병들은 갑자기 생겨난 장애물에 놀라 이리 튀고 저리 튀는 말 위에서 당황하다 말과 함께 넘어지는 자들까지 속출했다.
“오, 오오오! 오오오오!”
그제야 상황을 파악한 병사들이 경탄의 함성을 내지르기 시작하자, 황금 장수의 손놀림은 더욱 빨라졌다.
후와앙! 후와아앙!
정확히 열 개의 나무 기둥이 황금 장수의 손에 의해 포탄처럼 날아갔고, 그때마다 오이라트 기병의 진형을 부숴 버렸다.
사상자는 많지 않았다.
엄청난 힘으로 기둥을 던지긴 했으나, 워낙 멀리 있었고 정예 기병들의 반응이 빨라서 직격을 맞는 일은 드물었던 것이다.
하지만 한 번이라도 허용하면 한 줌 육편이 되는 건 마찬가지였다.
오이라트의 기병들은 아병살성진을 펼쳐 일제히 흩어져서 공격의 경로를 옆으로 틀었다.
처음으로 공격이 멈추자 병사들이 일제히 환호성을 내질렀다.
“와아아아!”
“저자는 누구인가?”
오이라트의 기병들에게 시의적절한 지휘를 내리며 명군을 유린하던 에센 타이시가 갑자기 전장에서 번쩍거리기 시작하는 한 사람을 발견했다.
“황금은 빛나긴 하지만 화살조차 제대로 막아 줄 수 없을 터. 어째서 저런 갑주를 입은 것이지?”
에센은 흥미로웠다.
오이라트도 황금으로 갑주를 만들 재력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굳이 그런 짓을 하려는 자는 아무도 없다.
화살 하나, 칼 한 번 막아 내기도 힘들 갑주를 대체 뭐하러 입는단 말인가.
저런 건 만든다 해도 단 한 번의 전투로 흠집이 나고 구겨져서 도저히 쓸 만한 물건이 못 될 것이다.
차라리 저런 갑주를 만들 돈으로 화살 수천, 수만 자루를 사는 게 나을 터.
“그런데 눈에 띄긴 하는군.”
온 전장의 이목을 집중시킨 그 황금 장수는 사람만 한 통나무를 번쩍 들어 그걸 창처럼 내던지기 시작했다.
두 눈으로 보면서도 도저히 믿기지 않을 정도의 신력을 타고난 자였다.
쾅쾅거리며 오이라트의 기병들을 기겁하게 만드는 모습을 보자 에센은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핫! 저런 자가 있단 말인가! 과연! 명군에 사람이 많긴 하구나!”
에센은 화가 나고 두려운 게 아니라 오랜만에 보는 광경에 반가움을 느꼈다.
가끔 사람이 아닌 것처럼 뛰어난 천생 신력을 갖고 태어나는 자들은 분명히 존재한다.
대초원에도 그런 자가 있었고, 에센이 아주 어렸던 시절 그는 칸의 곁을 지키는 명장의 호위 무장이 되었다.
“아무리 그래도 위협이 되는 자를 그냥 둘 수는 없지. 저자를 당장 잡…… 음? 뭐 하는 거지?”
좌로, 중로, 우로.
세 개의 군단에 새로운 명령을 내리려던 에센은 황금 장수가 전열의 선두로 걸어 나와 이상한 지시를 내리는 광경을 확인했다.
마치 저쪽으로 대피하라는 듯 황금 장수가 손짓을 하자 병사들이 함성을 내지르며 그 방향으로 일제히 돌진하기 시작했다.
에센의 눈빛이 번뜩였다.
“재밌군. 안 그래도 얼마 없는 호위 병력을 빼다니. 천생 신력이 있으나 군재는 없는 것인가? 아니면 그저 황제 따윈 상관없이 퇴로를 만드는 것만이 목적인가?”
에센은 전령을 불러 삼군 모두에게 지시를 내렸다.
“모든 이에게 전달해라! 공격하면서 모두가 다 같이 외치는 거다!”
그 후에 이어진 에센의 말에 전령이 당혹스러워했으나, 상대는 위대한 타이시였다. 전령은 곧바로 깃발을 든 채 다른 삼군의 지휘관을 향해 달려갔다.
황금 장수는 성큼성큼 나아갔다.
인근에 있던 수천 명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양옆으로 거리를 벌려 길을 만들어 주었다.
초인적인 힘을 보여 준 장수였다.
마치 속세에 내려온 신을 보는 듯 경이로운 시선이 가득했다.
황금 장수는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은 채 전열의 선두로 나아가 손짓을 했다.
“저리로 피하라고?”
황금 장수의 의중을 알아챈 병사들이 큰 혼란에 빠졌다.
하지만 고민도 잠시.
안 그래도 궁지에 몰려 있던 상황에 허락까지 받은 그들이 내릴 선택은 정해져 있는 것과 다름없다.
“도망쳐!”
“에라잇, 이딴 짐이 뭐가 중요해! 살고 봐야지! 다들 뛰어!”
안 그래도 사기가 바닥을 기고 있었는데 더 고민할 게 무엇이겠는가.
심지어 무자비하게 화살을 쏘면서 다시 쳐들어온 오이라트의 기병들은 거친 북방의 억양을 섞어 무섭게 외쳐 댔다.
“갑옷을 벗어라! 무기를 버려라! 저항하지 않는 자는 죽이지 않는다!”
순순히 포기하고 싸우지 않으면 아무도 죽이지 않겠다는 소리였다.
에센 타이시가 지시한 그 말 몇 마디가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자고로 소수로 다수를 쓰러뜨리기 위해선 다수를 적절히 흩어놓아야 하는 법.
오이라트 기병들의 그 말은 시의적절했고, 수천 명이 쏘는 화살보다 더욱 큰 충격으로 명군을 흩어놓았다.
강물을 찾아 진군하느라 길어진 행렬이 뚝뚝 끊어진 데다, 황제가 있는 진영 근처의 지휘부와는 연락이 아예 끊겨 버린 곳도 있었다.
병사들에게는 싸울 여력이 남아 있지 않았다. 그들은 싸우지 않아도 될 이유가 생기자 쌍수 들고 환영하며 곧바로 항복하고 도망쳤다.
“누구 좋으라고 싸워! 다들 도망치자!”
처음 한 명의 이탈이 힘들 뿐.
그 이후에는 모래로 만든 성이 무너지듯 병사 대부분이 갑주를 벗고 무기를 내던졌다.
명군은 그렇게 자신들의 십 분의 일도 안 되는 숫자에 처절하게 제압당해 버렸다.
통탄할 일이었다.
그들이 힘들게 끌고 가던 짐수레 속에는 수많은 무장과 화기들이 있었다.
불을 뿜어 대는 화창(火槍)이 일만 정, 화총(火銃)은 이만 정, 화약을 단 화살인 화전(火箭)이 사십오만 개. 심지어 각 군문이 나눠 갖고 있던 화포는 팔백 문이나 됐다.
그러나 그 모든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결과적으로 명군은 무너졌고, 사용하지도 않은 화기들은 그저 짐 덩이처럼 수레에 실린 채 버려질 뿐이었다.
“이건 말도 안 돼.”
왕진은 멍하니 중얼거렸다.
이럴 수는 없는 거다.
역사서에 남을 만한 대병력을 이끌고 황제가 직접 친정을 왔건만, 어찌 이런 꼴이 되었단 말인가.
“어디서부터 잘못된 거지……?”
웃음이 나온다.
왕진은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자잘한 잘잘못을 따질 여력조차 없다. 도대체 상황이 어쩌다 이렇게 됐는지 이해할 수조차 없으니까.
그저 마지막에 영국공 장보와 병부상서 광야가 무시무시한 눈빛을 보낸 뒤 다급하게 출진하는 모습을 보았을 뿐.
“나는 잘못이 없어. 이건 하늘의 탓이야.”
왕진은 자신의 소매를 더듬었다.
안감에 몰래 덧대어 붙여 놓은 자그마한 책이 여전히 만져졌다.
왕진은 안정을 되찾기 위해 노력했다.
숨을 몰아쉬고, 상황을 최대한 냉정하게 파악하기 위해 머리를 굴렸다.
“괜찮아. 폐하만 무사하면, 폐하만 모시고 떠나면 모든 게 괜찮아져!”
왕진은 주기진의 곁을 지키고 있는 번충에게 날카롭게 소리쳤다.
“호위대장! 폐하를 똑바로 지키도록 해요! 폐하께 작은 생채기 하나라도 낫다간 구족을 멸할 것이야!”
번충은 대답하지 않았다.
주기진의 막사 앞에서 무시무시한 눈빛으로 왕진을 노려볼 뿐이다.
“감히! 대답도 안 하다니!”
왕진은 시간만 있다면 건방진 번충을 당장이라도 치도곤을 내고 싶었으나 지금은 시간이 없었다.
‘나중에 이 일을 후회하게 만들겠어. 감히 사례감 태감이자 황사인 나에게 저리 무례하게 굴다니!’
다행히 절망적이기만 하던 전황에 한 줄기 빛이 돌아오고 있었다.
황금 갑주를 입은 장수가 나타나 무지막지한 신력을 뽐내더니, 위풍당당하게 전열로 나서 지시를 내리기 시작한 것이다.
거기에 큰 용기를 얻었는지, 병사들이 함성을 내지르며 달려나갔다.
“역시! 천무공자! 장 공! 실망시키지 않는군요!”
과연 천무공자라 불릴 만한 대단한 능력이었다.
왕진은 그의 활약이 반가웠으나, 한편으론 그와 함께 병사들이 빠져나가니 크게 불안해졌다.
‘오랑캐들이 폐하와 나를 노리면 어쩌지?’
사십만의 병사가 전멸하는 한이 있어도 살려야 하는 사람이 황제 주기진과 자기 자신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왕진이다.
“돌아와서 우릴 지켜야 합니다. 거기서 지시를 내리지 말고 돌아와요.”
왕진은 품 안에서 연흔전을 꺼내 하늘을 향해 쏘아 올렸다.
피이이이잉―――― 펑!
쏘아진 폭죽이 푸른 하늘에 길게 흔적을 남겼다.
멀리, 황금 갑주를 입은 장수가 힐끗 돌아보는 모습이 보였다.
왕진은 손짓을 했으나 황금 갑주의 고개는 무심하게 돌아섰다.
그리고 성큼성큼 멀어진다.
“왜 돌아오지 않지……?”
약속과 다른 천무공자의 행동에 왕진의 표정이 아연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