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풍운객잔 2부-478화 (607/686)

19권 24화

제39장 북벌종횡(北伐縱橫) (24)

“야, 이 천하의 역적놈아!”

천둥 같은 외침이 터져 나왔다.

왕진이 깜짝 놀라 돌아보니 황실 호위대장 번충이 밤송이처럼 숭숭 돋아난 수염 위로 흉신악살처럼 일그러진 표정을 짓고 있었다.

번충이 숨을 씩씩 몰아쉬며 성큼성큼 다가왔다.

왕진은 기가 차서 되물었다.

“감히! 지금 그 말을 본 공공에게 한 말인가요?”

“그래! 너한테 한 말이다. 이 역적놈아! 병사들이 다 도망치는데 이젠 어쩔 거냐! 도대체 그 교활한 대가리 속에 무슨 생각을 하고 있냔 말이야!”

번충은 광기에 휩싸여 있었다. 그는 허리에 차고 있는 철퇴 주변에서 손을 꿈지럭거렸다.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이지?’

사람이 너무 화가 나면 오히려 머릿속이 차가워질 때가 있었다.

왕진은 번충이 미쳤는가 싶었다.

그가 지금 내뱉은 망언만 따지더라도 그는 번충을 열 번도 넘게 사형시킬 수 있는 사람이다.

번충의 처자식, 가문, 사돈에 팔촌까지 모조리 처참히 죽일 수 있고, 어차피 그런 일은 처음도 아니었다.

왕진이 이자를 어떻게 혼을 내줄까 고민하는 사이 그를 따르는 환관들이 번충의 앞을 막아섰다.

“무례하다! 어딜 함부로 입을 놀리느냐! 이분은 사례감의 태감이시다! 황제 폐하의 스승이신 이 나라의 기둥이시란 말이다!”

본래 한 번 실패한 자일수록 더욱 윗사람에게 잘 보이기 위해 노력하는 법.

왕진에게 극적으로 사면된 환관 곽경이 한발 먼저 왕진의 앞을 지키며 번충에게 주제를 알라고 소리쳤다.

“개소리!”

그 순간 번충이 번개처럼 철퇴를 뽑아 곽경의 머리를 내리쳤다.

콰직!

머리가 수박처럼 깨지고 끈적한 피가 터져 나갔다. 곽경은 믿을 수 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은 채 맥없이 쓰러졌다.

번충은 절굿공이처럼 굵은 팔뚝을 꿈틀거렸다. 그가 짐승처럼 이를 드러내며 섬뜩하게 외쳤다.

“패장 죄인이 어딜 감히 함부로 입을 놀리느냐! 네놈에게 묻지 않았어!”

번충은 칵― 하고 침을 모아 곽경의 시신에 뱉기까지 했다.

상황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깨달은 주변의 환관들이 새 떼처럼 빽빽거렸다.

“감히!”

“호위대장이 미쳤구나! 금의위! 금의위!”

“살인이다! 하극상이다!”

사방이 온통 시끄러운 가운데 왕진은 머릿속이 멍해졌다.

그는 자신의 새하얀 손등에 튄 곽경의 피를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곳으로 뛰어드는 자는 아무도 없다.

고요했다.

오이라트의 습격으로 사방이 소란스러운데도 불구하고, 왕진과 그의 주변만큼은 태풍의 눈처럼 고요하다.

“하하핫.”

아무도 없을 리가 없다.

어떠한 일이 벌어지더라도 황제의 곁에는 늘 금의위가 있는 법이었다.

황제의 막사가 바로 열 걸음도 떨어져 있지 않은 지척에 있다.

예전 같았다면 번충이 곽경을 내리치기는커녕, 내리칠 것처럼 철퇴를 들기만 해도 사방에서 화살이 날아들고 금의위들이 검을 휘둘렀을 것이다.

황제는 늘 왕진을 자신처럼 대하라고 입버릇처럼 말했으니까. 금의위가 왕진을 지키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이런 소란에도 달려 나오지 않다니?

‘이미 이야기가 된 것이구나.’

왕진은 그 짧은 찰나에 모든 상황을 파악했다.

‘이 졸렬한 인간들 같으니. 그랬구나. 그랬어. 천무공자랑 비교를 몇 번 했다고 원한을 가진 게야.’

쓸모없는 호위대장과 금의위에 대해 쓴소리를 좀 했다고 이런 짓을 벌이다니.

“이유가 뭐죠? 지난번에 쓴소리를 좀 해서 생긴 원한인가요?”

“크하하핫! 쓴소리? 그런 건 신경도 쓰지 않는다. 네놈은 네가 저지른 죄가 보이지 않는단 말이냐! 보아라! 네놈이 토목보에 진을 치고 뭉그적거리는 바람에 저렇게나 많은 목숨이 죽어 가고 있다!”

“그게 왜 내 탓이죠? 난 잘못 결정한 것이 없어요! 전황이 바뀔 때마다 시의에 맞는 결정을 했지요. 이 모든 것은 대소신료들과의 상의 끝에 내린…….”

“폐하의 결정이라고?”

번충이 비웃었다.

“왕진아. 왕진아. 네 어찌 이리 우둔하느냐. 저길 봐라. 영락제 때부터 전장을 다니던 영국공께서 포위를 당해 처참히 쓰러지셨다. 저긴 또 어떤가? 수염이 허옇게 센 병부상서가 다리를 절뚝거리면서 지휘를 하는데도 병사들이 워낙 부족하니 속절없이 쓰러지는구나! 혹시 저 처참한 전황이 모두 폐하의 결정인 것인가? 그런 것이냐?”

번충은 도저히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네놈 때문이다. 네놈이 이 나라의 명운을 끊었다. 내가 멍청했다. 한시라도 빨리 이럴 것을! 하늘이여, 왜 이런 역적 놈에게 힘을 주셨나이까!”

낄낄거리며 웃는 번충은 즐거워서 웃는 것이 아니었다.

비참함.

절망.

기울어진 국운에 절망하며 허망함에 웃고 있었다.

“네놈은 머리가 좋지 않으냐? 그 좋은 머리로 예상해 보거라. 내가 지금 어쩔 것 같으냐?”

“하하.”

왕진은 덜덜 떨리는 손으로 자신의 소매를 더듬거렸다.

왕가지선(王家之善).

선을 왕씨가문에 받아 준 진짜 왕진의 유품을 만지자 언제나 그랬듯 마음이 차분해졌다.

‘나는 왕진이다. 천상천하유아독존이신 폐하를 움직이는 명 제국의 일인지하 만인지상!’

천천히 떨림이 멎으며 왕진의 분위기가 변했다.

왕진을 따라 하던 가짜는 이제 없다.

왕진.

천하를 혼란케 한 역사에 남을 간신이자, 곳간이 모자랄 정도로 나라의 부를 빼돌린 수완가는 어떤 상황에서도 떨지 않는다.

왕진은 기품 있게 웃었다.

“지금 나를 죽인다고 갑자기 대단한 충신이 될 것 같아? 꿈 깨. 네 말대로 내가 천하의 역적이었다면 진작에 날 죽였어야지. 넌 어차피 내 위세에 눌려 꼬리나 흔들던 개였어.”

신랄한 말에 번충의 입꼬리가 부들부들 떨렸다.

“차라리 장 공의 발끝에도 못 쫓아가는 무공 때문에 쓴소리 들은 게 기분이 나빠서라고 솔직하게 말하면 이해나 되지. 천하창생? 나라의 국운을 기울게 한 역적? 하하핫!”

촤르륵―.

왕진은 섭선을 펼쳤다.

새카만 섭선 위, 교태를 담은 눈이 반달처럼 휘어졌다.

“죽일 테면 죽이세요. 하지만 나라를 위하는 척 위선은 떨지 말아 줘요. 역겨우니까.”

일평생 황제를 곁에서 모셔 온 번충이 이를 악물었다.

툭. 툭.

번충의 눈에서 핏줄이 터져서 새빨갛게 변했다.

환관들이 벌벌 떨면서도 앞으로 달려오지만 늦는다. 마침내 번충이 들어 올린 철퇴가 머리 위에서 벼락처럼 떨어졌다.

***

촤아아악―!

소호는 칼끝의 자유를 느꼈다.

창천랑 텐챠이로부터 전해진 북원의 도법.

소호가 ‘천랑도법(天狼刀法)’이라 부르는 이 도법은 이전까지는 반쪽짜리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소호는 이제야 그의 도법이 제자리를 찾았음을 느꼈다.

칼끝의 자유로움.

지평선 끝까지 뻗어 있는 대초원에서 거대한 늑대 한 마리가 마음껏 달리는 듯한 자유로움이 지금 소호의 칼끝에 머무르고 있었다.

선연하게 뻗어오던 혈매화가 한 자루 박도에 갈기갈기 찢겨 흩날린다.

화아악――.

초절정의 경지를 넘은 고수 두 사람이 부딪치자 일순간에 공기가 터져 나가는 듯한 역장이 만들어졌다.

우우우우웅―――.

쩌어엉!

육모담의 검이 뒤로 튕겨 나갔다.

그의 표정이 일순간에 몇 번이나 변했다. 공력을 더 쏟아붓는지 협봉검으로 그려 내는 혈매화가 색이 더 진해진 것처럼 강렬한 빛을 뿜어냈다.

소호는 일격을 내리치자마자 이번에는 바닥에서 끌어 올리는 듯한 참격을 아래에서 위로 날렸다.

기이이이잉―――――.

박도의 칼날 위로 선명하게 유형화된 빛무리가 육모담을 향해 짓쳐들었다.

쩌저정!

수십 개의 꽃잎이 빛무리에 달라붙어 박도의 투로를 옆으로 비틀었다.

막강한 힘.

한 번이라도 실수하면 단번에 목숨이 날아가 버릴 만한 필살초를 서로 교환하는 중이다.

콰드드득!

육모담이 옆으로 비껴 낸 소호의 천랑도법 절초가 애꿎은 땅에 처박혀서 커다란 폭발을 일으켰다.

육모담 또한 가만히 있지 않았다.

공격을 비껴 내자마자 암향표로 다가와 천류신화검법의 막강한 절초로 소호의 머리를 쪼갤 듯이 뻗어 온다.

꽈과광!

소호와 육모담.

두 사람이 공격을 주고받을 때마다 허허벌판이었던 땅바닥에 두 사람의 족적이 선명하게 새겨졌다.

박살 나서 가루가 되어 버린 흙먼지가 뿌옇게 일어났다가, 막강한 기파에 밀려 사방으로 흩어지길 반복했다.

터엉!

육모담의 몸이 휘청거렸다.

조금씩 소호가 밀어붙이고 있었다.

점점 차이가 벌어진다.

육모담의 가장 큰 실수는 첫 만남 때 소호를 쓰러뜨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천무삼보.

소호의 뛰어난 안력은 첫 번째 싸움에서 육모담의 무공을 모조리 파악했고, 깊게 참오한 끝에 무공의 대부분을 파훼했다.

이미 화산파 무공의 핵심을 다른 누구도 아닌 육모담 덕분에 알고 있었던 소호다.

실전의 경험을 거치자 화산 무공의 핵심을 파악하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비슷한 수준의 무공과 실력을 지녔다면, 그다음엔 그 무공의 응용력과 내공에서 승부가 나는 법.

쿠웅!

소호는 강하게 진각을 내디디며 천하를 둘로 쪼갤 듯 아래로 내리쳤다.

혈매화 수십 개가 달라붙었으나 이번엔 꿈쩍도 하지 않는다.

쩌정!

결국 소호의 공격을 옆으로 흘려내지 못한 육모담이 협봉검 검날로 공격을 정면으로 막아 냈다.

끼이이잉―.

협봉검 좁은 검날이 당장이라도 부러질 듯 휘어졌다.

울컥. 입가에서 피가 흐를 정도로 내상을 입은 육모담이 눈을 부릅뜬다.

치솟는 살기.

육모담이 검을 비스듬히 꺾으며 검날을 뒤집는 순간, 새빨간 혈매화가 소호의 머리 양쪽을 노리고 날카롭게 뻗어 나왔다.

까가강!

소호가 박도를 눕혀 무난히 막아 내자 이번엔 평소와 달리 커다란 매화 한 송이가 가슴을 노렸다.

평소의 혈매화가 손가락 두 개 정도의 크기였다면, 이번엔 성인남성이 손바닥 두 개를 쫙 펼친 것처럼 커다란 매화 송이였다.

푸화아악!

소호가 흐름을 파악하고 재빨리 박도로 내리쳐서 매화를 가르자, 갈가리 찢긴 매화 송이가 꿈틀거리더니 갑자기 수십 송이의 매화로 불어났다.

검의 움직임으로 따지자면 환검(幻劍).

중요한 핵심 검로가 뚝 끊겼는데, 사방에 흩어진 작은 검로들을 되살려 치명적인 공격으로 이어지는 흐름이다.

‘힘을 변화로 막겠다?’

고전적이지만 가장 효과적인 방법.

중요한 건 큰 매화 송이로 상대를 현혹한 뒤에 끊임없는 공격의 흐름으로 넘어간 것이 너무나 자연스러웠다는 점이다.

눈뜨고 코베이는 심정이랄까.

순식간에 무공의 선기를 빼앗겨 버렸다.

사람은 냉정하지만 검끝은 화려하다. 육모담의 검술에는 온갖 초식이 담겨 있었다.

기본 검공인 매화검에, 둔중하게 기본을 지키며 중심을 수호하는 건 무림인이라면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육합검(六合劍)이다.

머리 위로 치솟았다가 오행의 묘리를 담아 떨어져 내리는 매화 송이는 오행매화검(五行梅花劍).

커다란 세 개의 호선을 그리면서 사방을 옭아매는 검로는 매화삼릉검(梅花三凌劍)이었다.

툭 건드리면 화산의 검술이 종류별로 튀어나오는 느낌이다. 단 하나의 절기도 끝까지 익히기 위해서는 오랜 세월이 필요하다던데 이렇게나 많은 화산의 절기들을 대체 어떻게 다 배운 것일까.

소호는 감탄하며 입을 열었다.

“과연, 화산제일검!”

감탄을 담아 한 말이었으나, 육모담은 그 말이 기분이 나쁜 듯했다.

어쩌면 화산에 대한 씻을 수 없는 죄책감이었으리라.

미간을 좁힌 채 휘두르는 검의 움직임에 감정이 실린다.

감정이 실리니 검끝이 거칠어지고, 힘이 더 들어가니 정교했던 흐름에 빈틈이 생긴다.

터엉!

소호는 그 빈틈을 놓치지 않고 깎아 차는 짧은 단타각으로 육모담의 종아리를 걷어찼다.

뻐억!

뼈가 부러졌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굉음이 터지고, 곧이어 훌쩍 몸을 띄운 소호가 한 발을 하늘 높이 올려 찼다.

승천무(昇天武).

강뢰각(降雷脚).

번쩍.

내리찍는 각법이 육모담의 어깨를 스쳤다.

찌이이익―.

스쳤을 뿐인데 두터운 가죽 갑주가 찢기고 마찰로 인한 강한 열로 연기가 피어오른다.

휘청이는 육모담의 앞에서, 소호는 내리찍은 각법의 힘을 살려 곧바로 진각을 밟았다.

쿠우웅!

흔들리는 땅.

회전하는 허리.

전륜법광을 뿜어낸 소호가 천랑도법, 천하를 가르는 일격으로 육모담의 가슴을 갈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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