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권 26화
제39장 북벌종횡(北伐縱橫) (26)
소호는 미미와 만나기로 미리 약속했던 장소에 의외로 많은 인원이 모여 있다는 사실을 알고 깜짝 놀라 급히 다가갔다.
설마 포로로 잡히기라도 한 건가 싶어 당황했으나 다행히도 그건 기우에 불과했다.
휘황찬란하게 빛나는 갑옷이 반갑게 손을 붕붕 흔드는 모습을 보니 긴장이 탁 풀렸다.
“어어? 장 공자?”
“아닛! 왜 거기서? 그럼 이분은 누구야?”
“힘이 엄청나던데! 장 공자가 아니라곤 전혀 생각 못 했어!”
오히려 대미미 곁에서 주변을 경계하던 사내들이 깜짝 놀라서 자신들이 따르던 황금 갑옷과 소호를 번갈아 응시했다.
‘미미가 사람들을 구했구나.’
“하핫.”
소호는 그제야 상황을 깨닫고 헛웃음을 흘렸다.
“황금 갑옷을 입은 사람은 저의 절친한 친우입니다. 다들 무사하셨군요. 다행입니다.”
소호가 따뜻하게 말하자 사내들은 안심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셨군요. 장 공자의 친구분 덕분에 저희가 살아남았습니다.”
“감사합니다. 장 공자.”
감사의 뜻을 표하는 수백 명을 향해 소호는 손을 내저었다.
“제 공이 아닙니다. 스스로 포위망을 뚫어낸 제 친구의 공인데 제가 인사를 받을 수는 없어요.”
“그렇다면 친구분께 감사의 인사를 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덕분에 저희가 목숨을 건졌습니다!”
“감사합니다!”
이번엔 수백 명이 무릎을 꿇고 대미미를 향해 절을 올렸다.
대미미는 잠시 당황하다가 가면과 투구를 벗었다.
“헙!”
“여, 여자……?”
“아니야! 아까 그 힘 못 봤나? 장 공자의 친구분답게 아름다운 공자님인가 보군!”
“과연! 과연!”
투구를 쓰고 격하게 움직이느라 긴 머리가 치렁치렁하게 풀려 버린 대미미는 누가 봐도 여자로 보일 만한 미모를 자랑했다.
땀에 젖어서 그런지 피부가 매끈했다. 부드러운 콧대와 동그란 눈망울이 예쁘다.
키가 크고 커다란 황금 갑옷을 입고 있어서 사람들이 혼란스러워할 뿐, 몸의 윤곽까지 드러났다면 누구나 알아챌 만한 출중한 외모였다.
“다들…… 고생하셨습니다…….”
대미미는 쑥스러워서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사람들의 감사 인사를 받아 주었다.
사람들은 그 겸손함에 더욱 감탄하며 큰 소리로 외쳤다.
“이 은혜는 잊지 않겠습니다!”
“부디 은공의 성함을 알려 주십시오!”
대미미는 얼굴만 빨갛게 달아오른 채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기녀들한테는 그렇게 당차고 대장부 같더니?’
소호는 쑥스러워하는 대미미가 귀엽다고 생각하며 대신 대답해 주었다.
“여러분. 대세를 따라 몸을 피했다고는 하나, 그래도 저희가 한 일이……. 그리 어디서든 떠들 수 있는 일은 아닙니다. 그건 알고 계시죠?”
한참 감상적으로 달아올라 있었던 사내들이 찔끔하여 서로를 보았다.
그들은 먼지투성이인 데다 갑주도 벗고 병기도 내다 버린 비참한 모습이었다.
몇몇은 속옷도 없이 웃통까지 벗어 던졌다.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 치는 것을 누가 뭐라 할 수 있으랴.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싸우지도 않고 오이라트 전사들의 말을 따라 도망친 것이니 자랑할 만한 일이 아닌 건 분명했다.
“저야 어차피 이름이 많이 알려졌다지만 제 친구까지 얽히게 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저희는 여러분이 쓸데없이 목숨을 버리지 않은 것만으로 충분히 보답을 받았으니, 이쯤에서 서로 인사를 하고 각자의 길을 가는 게 어떨런지요?”
소호의 말에 틀린 점이 없었기에 모든 이들이 침중한 얼굴로 수긍했다.
“장 공자의 말이 참으로 옳소.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은공에게 폐를 끼칠 뻔했구려. 혹시 우리 중 누군가가 잡히거나 이야기가 새어 나갈지도 모르는데, 괜히 이름을 알고 있다가 불게 되면 은공께 죄를 짓는 일이지. 안 그런가, 자네들?”
“옳소!”
“우린 절대로 은공의 이름을 다른 데 이야기해선 안 되오!”
그들은 모르는 게 약이라는 사실에 모두가 동의했다.
“장 공자, 그리고 장 공자의 친구분께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이 구명지은은 죽는 날까지 잊지 않겠습니다.”
그들은 천무련과 천무공자가 잘 되길 기원하겠다고 말한 뒤 뿔뿔이 흩어져 떠나갔다.
오이라트의 침공을 받긴 해도 이곳은 명나라 섬서 땅이었다. 어딜 가든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이다.
“미미야. 그 갑옷 잘 어울리네.”
“그래?”
“응. 천하대장군 같아.”
대미미는 쑥스러워하면서 기분이 좋은 듯 배시시 웃었다.
여러모로 평범한 여성들과는 다른 취향이지만, 소호는 대미미의 그런 점이 특이하고 귀엽게 느껴졌다.
그녀는 미리 준비해 둔 짐 마차에 갑옷을 벗으면서도 크게 아쉬워했다.
소호는 도대체 왜 황금 갑옷을 그리 좋아하는지 모르겠다며 소리를 내어 웃었다.
두 사람은 눈에 띄지 않는 옷으로 갈아입은 채 계획대로 움직였고, 원래 주기진과 왕진이 계획하고 있던 퇴각로대로 거용관을 통해 북경으로 향했다.
두 사람이 반가운 얼굴을 만난 것은 그로부터 하루가 채 지나기 전이었다.
오이라트의 추적병을 경계하였으나, 북경 방면에서 손님이 오는 게 먼저였다.
“서인이?”
소호는 멀리 보이는 무리에서 익숙한 얼굴을 발견하고는 크게 기뻐했다.
“서인아! 조서인!”
소호는 말 안장 위로 펄쩍 뛰어올라 꼿꼿이 선 채 양손을 붕붕 흔들었다.
말을 타고 오던 일단의 무리가 소호를 발견하고는 깜짝 놀라 급히 다가왔다.
“소호야!”
소호는 가장 먼저 다가온 조서인을 말에서 뛰어내려 격렬하게 끌어안았다.
“반가워! 진짜 반가워!”
“어어……?”
조서인은 당황해했지만, 이내 반갑게 맞아 주었다.
“어, 저기, 소호야. 오늘은 기분이 좋아 보이네?”
“오늘은? 아아! 지난번엔 좀 이상했지? 이해해 줘. 그땐 내가 바쁘고 정신이 없었어.”
“그래?”
조서인이 혼란스러운 듯 눈빛이 흔들린다. 그는 걱정스럽게 소호의 어깨와 허벅지를 가리켰다.
“다친 것 같은데? 괜찮아?”
“아무렇지도 않아. 근데 어떻게 알았어? 옷으로 가려 뒀는데.”
“움직임이 약간 어색해서 알았어. 금창약이 혹시 없어? 내가 줄까?”
“아냐, 아냐. 괜찮아. 치료는 다 했어.”
무산학관 출신들이 가지고 있는 철 요대에서 금창약을 꺼내 주려는 조서인에게 소호는 거절의 뜻을 밝혔다.
‘무공이 늘었네.’
상처를 붕대로 감고 그 위에 겉옷까지 입었는데도 상처를 알아보다니.
조서인의 무공 경지가 높아졌음을 절로 알 수 있었다.
“으음.”
절로 가슴이 뛴다.
이 친구는 대체 얼마나 강해진 것일까?
시험해 보고 싶다는 욕구가 강하게 올라왔다.
‘아냐, 지금은 그럴 때가 아냐. 한시가 급하잖아.’
조서인은 다행이라면서 그들이 지나온 방향을 손으로 가리켰다.
동북쪽.
나지막한 언덕 너머로 이어진 대로 쪽이었다.
“이리로 오다가 웃통을 벗은 사람들을 마주쳤어. 혹시 천무공자를 아냐고 물으니까 절대로 모른다고 손을 막 내젓는데 수상하더라.”
“아, 그래서 이리로 와 본 거야?”
“응. 왠지 그 사람들이 온 방향에 있을 것 같아서.”
소호는 헛웃음을 흘렸다.
도망친 병사들이 의리를 지키는 것 같긴 한데, 아무래도 거짓말엔 그리 소질이 없는 것 같았다.
‘시간이 더 없겠어.’
소호는 마음이 급했지만 그래도 조서인의 뒤에 있는 사람들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인사를 나누려는데 강렬한 기파를 지닌 무인이 한 명 있었다.
“뒤에 계신 분들은……, 어? 혹시?”
남자 한 명에 여자 둘.
그중에 소호의 시선을 사로잡은 사람은 이국적인 배자 옷을 입고 산적처럼 양팔을 어깨까지 훌렁 드러낸 건장한 사내였다.
그가 얼굴을 가리고 있던 삿갓을 들어 올리자 코를 가르는 깊은 흉터가 드러났다.
소호는 진심으로 깜짝 놀랐다.
그 얼굴, 그 상처.
잊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추룡 삼촌?”
“오랜만이구나. 조카야.”
어색한 표정의 사내가 머리를 긁적이며 씩 웃는다.
그 모습은 어린 시절 은자촌에 놀러와 추묵환과 드잡이질을 하던 옛날과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조카……?”
“세상에.”
한편 조서인과 함께 온 여인들은 그 사실을 몰랐는지 경악하는 눈치였다.
소호는 추룡을 멍하니 보다가 소리쳤다.
“아니, 서역에서 언제 왔어요? 연락을 주시지! 그럼 찾아갔을 텐데요.”
“그게 말이지. 좀 바빴거든.”
“서역 여행은 어땠어요? 재밌었어요?”
“재밌었지. 일이 많았다.”
추룡은 어째선지 소호가 친근하게 물을 때마다 쑥스러워하는 건지 난감해하는 건지 모르게 시선을 피했다.
“삼촌, 왠지 예전과는 다르네요. 내가 너무 커서 그런가?”
“그래. 네가 너무 달라진 탓이야.”
“어차피 똑같아요. 몸 좀 크고 바빠진 것밖에 없어요.”
소호는 햇살처럼 환하게 웃음 지었다.
추룡은 그 웃음을 똑바로 쳐다보지 않고 비스듬히 먼 곳을 바라봤다.
“그래. 천무련이라는 곳을 만들었다면서?”
“네. 안 그래도 어서 거기로 돌아가야 해요.”
“전쟁은 끝난 거냐?”
“……네.”
씁쓸하게 답한 소호에게서 뭔가를 느꼈는지, 조서인이 나서서 여인들을 소개시켜 주었다.
“여기 소저는 우리를 하북에서부터 안내해 준 하북팽가의 팽자연 소저. 험한 길인데도 여기까지 찾아올 수 있게 직접 안내를 해 주셨어.”
“천무공자의 위명은 익히 들었어요. 팽자연입니다.”
소호는 포권을 취하는 팽자연을 똑같이 포권으로 받아 주었다.
“장소호입니다.”
“……이쪽은, 알지? 주희. 금룡상회의 일로 우리와 함께 왔어.”
문주희는 무산학관 시절과 그리 달라지지 않은 듯 보였다.
그때와 마찬가지로 귀밑까지 오는 단발머리에 깐깐해 보이는 얼굴은 여전하다. 다만 무거운 분위기를 두르고 있으니 예전보단 성숙해 보였다.
그녀는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면서 뭔가를 망설이고 있었다.
‘금룡상회의 일이라?’
소호는 그녀를 보면서 그 ‘금룡상회의 일’이라는 것이 뭔지 떠올려보았다.
“아아.”
소호는 가만히 문주희를 응시하다가 고개를 갸웃했다.
“오랜만이네. 그런데 금룡상회 일이라면 그거지?”
“어?”
“섬서에서 종남파와 결탁해서 나한테 살수를 보냈던 건데. 주희 네가 나랑 이야기할 게 더 있을지 모르겠는데?”
“허?”
조서인이 크게 놀라 이상한 소리를 냈다.
종남파와 금룡상회가 연합해서 살수를 보냈었다니.
생각보다 엄청난 이야기가 튀어나온 것이다.
추룡은 눈살을 찌푸렸고, 팽자연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침중한 얼굴이 되었다.
“그런 일이 있었어……?”
조서인이 당황하며 문주희를 쳐다본다. 문주희는 안색이 하얗게 질려 갔다.
“그건……. 그게 상회의 뜻은 아니었어…….”
문주희의 손이 파르르 떨렸다.
조서인은 그녀의 그런 모습을 모두 보았지만 선뜻 나서서 도와줄 수 없었다.
당연한 일이다.
만약 소호의 주장이 사실이라면 문주희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해야 마땅했다.
소호를 죽이려고 살수를 보냈던 금룡상회에서 이번엔 아버지를 살려 달라 부탁하러 왔다니.
“휴우.”
소호는 안절부절못하는 조서인을 보며 한숨이 나왔다. 문주희를 도와주고 싶은데 돕지 못해서 안타까워하는 조서인을 보니 답답했다.
‘내가 누구 때문에 화가 났었는데?’
조서인을 이용해 소호와 합의하려는 금룡상회의 처사가 괘씸해서 화가 났던 건데, 이제 보니 정작 조서인은 속도 없이 문주희를 돕고 싶은 눈치였다.
“소호야.”
문주희는 말에서 뛰어내리더니 갑자기 무릎을 꿇었다. 그러고는 이마를 땅에 박을 정도로 공손히 절을 올렸다.
모두가 깜짝 놀랐다.
고개 숙인 그녀의 뒷덜미가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도와줘. 제발. 아버지가 동창에 잡혀가셨어. 상회는 어찌 되어도 좋아. 돈도 따지지 않을 거야. 아버지가 무사하실 수 있다면 난 어떤 일이든 할게. 제발 부탁해. 아버지를 살려 줘.”
주작방의 여장부 문주희.
대쪽 같던 그녀가 가족을 위해 모든 것을 굽히는 순간이다.
소호는 가만히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추룡, 조서인, 팽자연.
그리고 대미미.
네 사람의 시선이 자신에게 쏠리는 것이 느껴졌다.
소호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녀는 뭔가 큰 착각을 하고 있었다.
“내가 그 일을 해결할 필요는 없어.”
“……사과라면 내가 할게! 뭐든! 네 마음이 풀릴 때까지 어떤 일이든……!”
소호는 점점 격해지는 문주희의 말을 가로막았다.
“아니, 그게 아냐. 그럴 필요가 없어. 금룡상회 회주를 잡아갔던 왕진은 죽었을 테니까.”
“……뭐라고?”
또다시 충격적인 이야기다.
멍하니 고개를 드는 문주희의 이마가 빨갛게 멍이 들어 있었다.
소호는 그저 말없이 웃으면서 조서인에게 손을 내밀었다.
“서인아. 여기까지 온 건 내게 줄 게 있는 거지?”
“어? 어어.”
속을 꿰뚫어 보는 듯한 소호의 통찰력에 놀라면서 조서인은 품 안의 서찰을 건네주었다.
놀라운 신위를 보였던 부운화가 소호에게 전해 달라던 서찰이었다.
소호는 그걸 펴 보았고, 그 어떤 때보다 환한 미소를 지었다.
“잘됐네. 이제부터 주희의 아버지 문제는 물론이고, 다른 모든 일을 해결할 사람을 만나러 갈 건데. 같이 갈래?”
소호는 급작스러운 상황에 따라가지 못한 채 멍하니 있는 사람들을 쭉 둘러보고 조심스레 물었다.
“물론 하루를 꼬박 말을 달려야 하긴 해. 삼촌. 함께 갈래요? 천무련으로 갈 건데.”
대미미가 기다렸다는 듯 소호의 말고삐를 잡아서 소호에게 건네주었다.
소호는 홀린 듯 고개를 끄덕이는 모두와 함께 천무련으로 향했다.
정통 십사 년. 팔월.
오십만 대군을 이끌고 몸소 북벌에 나선 정통제 주기진이 적에게 사로잡혔다는 소식이 아직 중원 전역에 퍼지기 전.
하루를 꼬박 말을 달린 천무공자가 천무련에 도착했다.
그는 그를 반기는 천무련 사람들의 인사에 그저 손만 흔든 채 급히 말을 달려 안채로 향했다.
심상치 않아 보이는 그의 모습에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대체 무슨 일인가.
나라를 들썩이게 한 큰 전쟁에 참가해 북벌을 종횡하는 줄 알았던 천무련주가 대체 왜 이리 다급하게 돌아왔는가.
사람들의 놀라움은 자그마한 대장간 앞에 도착한 천무련주가 놀라서 뛰쳐나온 젊은 대장장이에게 한쪽 무릎을 꿇을 때 절정에 올랐다.
“성왕 전하. 황실에 가셔야 할 때가 왔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