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권 1화
제40장 백호마왕(白虎魔王) (1)
부운화는 지쳐 있었다.
황실에 부는 피바람은 천하를 논할 만한 무공과 학식을 지닌 그조차 정신적으로 피폐해지게 만들었다.
매일 이어지는 실망.
나날이 커지는 허탈함.
그가 광록훈 광록대부의 직위를 파직당하고 자금성에서 나오는 길이 오히려 홀가분했던 이유다.
‘나라가 잘못되었구나. 정통제 주기진은 나라를 이끌 그릇이 아니다.’
기분파라서 사람의 목숨을 가볍게 보는 면은 주기진이 지닌 온갖 성격들 중에 그나마 가장 나은 편에 속했다.
종묘와 사직.
나라를 이끄는 업무가 얼마나 위중한지 모르고 향락에 빠져 왕진의 품 안에서 노는 꼴이라니.
‘나라를 위해서 나는 간신이 될 것인가, 아니면 역신이 될 것인가? 나는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가?’
부운화는 탄식했다.
황제에게 제대로 간언하려면 간신이 되어야 하고, 황제를 고치려면 역모였다.
사실 사태의 원흉인 왕진을 죽이는 건 그리 어렵지 않다.
애초에 가짜 왕진을 세워 놓은 게 그와 금의위 위장 공보하니까.
그렇게 생사여탈권을 그들에게 빼앗겼음에도 스스로가 진짜 왕진인 것처럼 포악을 부리는 그자가 제정신이 아닐 뿐이다.
‘가짜 왕진을 죽인다고 황제가 바뀌진 않겠지. 그놈은 어쩌면 그 점까지 예상하고 이런 일을 벌인 건가? 왕진에게 나쁜 건 다 배웠군.’
광기 어린 행동으로 상대방을 옭아매는 건 왕진의 특기였는데, 얼굴과 행동뿐만 아니라 생각까지도 똑같았다.
가짜 왕진. 선은 황제를 자기가 없으면 물 한 잔도 제대로 못 떠먹는 반푼이로 만들었다.
이제 와서 자칫 왕진을 섣불리 죽이면 황제를 자극시키기만 해서 오히려 더 걷잡을 수 없는 일이 되어 버릴지도 몰랐다.
왕진은 주기진을 망친 주범이지만, 또 한편으론 미친 망아지 같은 황제를 제어할 수 있는 유일한 고삐인 것이다.
‘답답하군. 대형처럼 은거나 해 볼까?’
그렇다고 도망쳐 버리면 나라를 구할 자가 누가 있을 것인가.
그는 결정을 내려야 했고, 칠주야간 잠도 제대로 못 자고 고민하던 부운화는 의외의 장소에서 답을 발견했다.
“당신 뭐야? 왜 여기서 얼쩡거려?”
첫인상은 좋지 않았다.
건방지기 이를 데 없다.
말투는 날이 서 있었고, 자신만만한 눈빛으론 상대를 하찮게 보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런데 이상했다.
그렇게 건방지고 까칠한 청년의 주변이라면 아무도 없는 게 당연한 일일 텐데, 대장간 주변에는 꼬마 아이들 수십 명이 몰려와 왁자지껄하게 놀고 있었다.
“야! 그거 그렇게 가지고 노는 거 아니라니까! 하여간 둔하긴. 이렇게 두 번 반을 돌려 감아야 한다고 몇 번을 말해?”
“형이 해 줘!”
“인생은 혼자 살아가는 거야. 맨날 밥도 입에 떠먹여 줘야 먹을래? 장난감 정도는 니들이 알아서 해야지. 잘 봐! 너네도!”
청년은 투덜투덜 불만스럽게 꼬마들을 윽박지르면서도, 정작 신기한 장난감들을 어떻게 가지고 노는지 가르쳐 주는 모습이 부잣집 유모처럼 능숙했다.
하루 이틀 이런 일을 해 온 게 아니라는 건 너무나 명백했다.
“허어.”
부운화는 그 청년에게서 소호의 흔적을 발견했다.
자기 사람에게 다정하고, 늘 골목대장처럼 아이들을 재밌게 만들어 주는 모습에서 소호의 향기를 느낀다.
그 청년의 원래 신분을 아는 부운화로서는 신기하다 못해 충격적인 모습이었다.
“아이들을 좋아하시오?”
“아니. 싫어. 시끄러워 죽겠어. 만들고 싶은 물건이 산더미 같은데 이것들 때문에 작업 진전이 안 되네.”
청년은 아쉬운 듯이 대장간 모루 위에 놓인 망치를 힐끔거리다가 괜히 부운화를 향해 버럭 소리쳤다.
“그런데 왜 대답을 안 해? 당신 못 보던 사람인데 왜 얼쩡거리냐고?”
부운화는 그를 의심스럽게 째려보는 주기옥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잔잔하게 웃어주었다.
“난 은자촌과 인연이 있는 사람이오.”
“뭐? 그랬어? ……요?”
천무련의 대장간 청년.
주기옥이 당황하며 어깨를 움츠렸다. 눈빛이 흔들리는 모습을 보니 보통 당황한 게 아니었다.
은자촌.
그곳은 주기옥에게도 가벼운 의미가 아니었던 탓이다.
“소호를 만나러 왔다가 돌아가는 길이오. 그대는 광 어르신과 인연이 있었다고 들었는데.”
“어, 저기. 소호 형도 알아요?”
“소호는 내 조카라오. 난 둘째 삼촌이고.”
“아……!”
눈을 끔뻑거리던 주기옥이 부운화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다가 탄성을 내질렀다.
“그러고 보니 본 것 같기도 하네! ……요!”
“그럴 거요. 은자촌에는 종종 들렀으니까.”
부운화는 자신을 어찌 대해야 할지 난감해하는 주기옥에게 웃는 얼굴로 질문을 던졌다.
“답답하진 않으시오? 천무련 안에서 늘상 망치질만 하는데?”
“그럴 리가. 여긴 천국이 따로 없는데?”
“하핫. 그렇소? 광 어르신과 똑같군. 그분께서도 그런 말을 하셨었지. 펄펄 끓는 쇳물 앞에서 땀을 흘리고 있노라면 온갖 잡념들이 사라진다고. 그러니 모루 앞이야말로 천국이라고 하셨다오.”
“그 영감이라면 그런 말을 할 법하지.”
주기옥이 처음으로 씩 웃었다.
부운화도 마주 웃어 주었다.
소호를 보고 배운 골목대장의 자질에 일흉대기 광사로에게 장인 정신을 배운 황족이라.
특이한 사람이 아닐 수 없다.
“나한테 볼일이 있어요? 그게 아니면 난 만들어야 할 게 있는데.”
“그렇군. 방해하지 않겠소. 그냥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중이니 신경 쓰지 마시오.”
“그래요?”
주기옥은 말은 그렇게 해 놓고 계속해서 부운화가 신경 쓰이는지 힐끔거렸다.
부운화는 너털웃음을 지었다.
“저 아이들이 그대를 왜 좋아하는지 잘 알겠소.”
“귀찮기만 한데 뭘.”
“장난감이 특이하군. 매번 이렇게 새로운 것을 만들어 주시오?”
“애들은 아무 걱정 없이 자라야 하는 법이니까. 그냥 가끔 손이 움직일 때마다 몇 개 만들어 줬을 뿐이에요. 저런 걸 갖고 놀면 시간이 금방 가거든요. 내가 할 수 있는걸 하는 거죠.”
“친절한 사람이구려.”
“친절하다기보단. 한이 많아서 그래요. 크고 보니 그런 생각이 들어요. 어릴 때는 저렇게 아무 생각 없이 놀았어야 하는데 싶어서.”
툭 던지듯 내뱉는 말이 솔직했다.
자기는 어릴 때 저런 걸 갖고 싶어 했다면서 아이들의 반응을 살피는 모습에서도 진심이 느껴졌다.
쿵.
부운화는 심장이 떨어지는 듯한 소리를 분명히 들었다.
녹슬어 고장이 났던 기관 장치가 다시 움직임을 시작하는 것과 같다.
피가 빨리 돌고 머릿속에서 번개가 쳤다.
‘이 사람이구나. 황실의 피를 타고났음에도 이리도 인간적이라니. 이 사람이 황제의 자리에 앉았다면 어땠을까.’
하늘의 뜻.
천명을 느끼는 건 착각이 아니었으리라.
부운화가 한번 마음을 먹자 나머지는 일사천리였다.
망치질만 하던 대장장이 청년에게 병부시랑 우겸과 만나게 해 주고, 온갖 교양과 황제로서 알아야 할 것들을 교육했다.
육모담에게 복수하고 싶어 하는 소호와는 마침 이해가 맞아떨어졌다.
부운화는 소호와 자주 대화를 나누며 계획을 다듬었다.
그들의 계획은 간단했다.
전쟁은 반드시 난다.
그 결과가 어찌 되든 그건 관료들과 장수들의 역량에 맡긴다.
소호가 할 일은 왕진의 신뢰를 쌓은 뒤 가장 중요한 순간에 사라지는 것이다.
그거면 충분했다.
소호가 곁에 없는 것만으로도 부운화가 준비한 살수가 정통제 주기진과 환관 왕진을 척살할 시간이 생겨날 테니까.
그런데 전황은 이상하게 흘러갔다.
대패.
주기진은 상상 이상으로 무능했고, 왕진은 상상 이상으로 권위적이었다.
그렇게 정통 십사 년.
훗날 토목의 변이라 불리는 역사적 대사건이 완성되었다.
***
“형?”
소호는 크게 당황해서 어찌할 바를 모르는 주기옥을 향해 웃어 주었다.
―진정해.
짧은 전음이 주기옥에게 전해졌다. 가만히 서로를 마주하고 있으니 주기옥이 점차 차분하게 냉정을 되찾아가는 게 보였다.
“전쟁은 졌고, 황제는 이민족에게 포로로 잡혔습니다. 천자의 자리가 비어 있다면 천하가 혼란에 빠질 것입니다.”
“황제가, 아니, 폐하가 잡혔다고?”
“예.”
“오십만의 대군을 끌고 갔는데 졌어?”
“그렇습니다.”
주기옥은 옛날의 그 철부지 어린아이가 아니었다.
상황을 파악하고 그에게 주어진 운명이 그를 이곳에서 밀어내고 있음을 깨달았다.
“이곳은 끝이구나.”
“언제든 올 수 있을 것입니다.”
“대장장이로서는 아니지?”
소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주기옥은 씁쓸하게 웃으며 시리도록 푸른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망치질을 더 하고 싶었는데. 내 핏줄은 왜 나를 가만히 두지 않지?”
한탄과 원망이라기보단 공허함이 가득했다.
“영웅의 핏줄이니까요. 주어진 힘과 재능을 세상을 위해 쓰는 데 주저해선 안 됩니다.”
나도 그랬듯이, 라는 말은 굳이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주기옥은 영악하리만큼 총명한 청년이었다.
소호의 맥락에 담긴 말을 알아듣고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였다.
“소호 형. 언젠가 이런 날이 올 거라고는 생각했어. 근데 그때는 나라를 다스리는 게 아니라, 날 죽이거나 귀양을 보내겠다는 칙서일 줄 알았지. 그렇게 생각하면 지금이 훨씬 나아.”
사방에 몰려든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두 사람을 지켜보고 있었다.
심각한 분위기 때문에 감히 가까이 오지는 못했으나, 그들 모두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천무련주가 무릎을 꿇어야 할 사람이라니!
특히, 그간 장난감을 만들어 주던 형이 뭔가 대단한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은 아이들이 눈이 휘둥그레져 있었다.
“가자, 형. 난 준비됐어.”
“성왕 전하를 모시겠습니다.”
황제의 자리가 공석이 되었으니, 용좌에 앉을 사람은 황실의 직계이자 황제의 동생인 주기옥뿐이었다.
소호는 간단한 짐을 챙겨 나온 주기옥과 함께 나갔고, 주변에 있던 사람들은 마치 썰물이 빠지듯 멀찍이 떨어져서 그들과 거리를 벌렸다.
상황을 멍하니 지켜보던 조서인과 추룡, 팽자연과 문주희가 합류했고, 그들은 천무련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공보하와 금의위들의 호위를 받으며 북경 자금성으로 향했다.
정통 십사 년 팔월.
충격적인 소식이 중원 전역에 전해졌다.
이민족의 침입에 맞서 싸우기 위해 나섰던 정통제 주기진과 수많은 고위관료. 그리고 오십만이라는 대병력이 대패하고 대부분이 죽었다는 소식이었다.
황제는 이민족들에게 포로로 잡혔다고 했다.
나라가 멀쩡한데 황제가 잡힌다는 것은 중원 역사상 유래가 없는 일.
더군다나 북원의 침략으로 나라를 빼앗긴 지 불과 몇 세대도 지나기 전이었다.
그때의 공포가 되살아난 사람들은 큰 혼란에 빠졌고, 북경 조정에선 지금 당장이라도 남경으로 천도하고 몸을 피해 세력을 정비해야 한다는 의견이 대두되었다.
그때 한 사람이 나섰다.
병부시랑 우겸.
본래부터 오이라트를 경계해야 한다고 늘 주장해 오던 고지식한 무장은 겁에 질린 관료들에게 함부로 천도했다가 멸망한 송나라의 전철을 밟을 것이냐 일갈하고는 한 사람을 소개했다.
정통제 주기진의 동생.
황실에서 사라져 모두가 죽은 줄로만 알았던 성왕 주기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