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풍운객잔 2부-482화 (611/686)

20권 2화

제40장 백호마왕(白虎魔王) (2)

“나는 선종 선덕장황제(宣宗 宣德章皇帝)와 선묘현비 오씨(宣廟賢妃 吳氏)의 아들, 주기옥이라 하오.”

선덕제 주첨기와 현비 오씨의 아들이란 뜻이며, 현 황제인 정통제 주기진의 아우이니 황실의 적통을 이은 정명한 왕이었다.

주기옥은 황태자나 왕만 입을 수 있는 대홍색 곤포를 입었는데, 가슴에 금사로 수놓인 용의 발톱은 황제와 똑같은 다섯 개였다.

황실은 의복의 색깔이나 문양이 큰 의미를 지니는 곳이었다.

당당하게 자신을 황족이자 왕이라 표현하는 그의 복색에 모든 관료가 크게 당황했다.

차분하고 기품 있게 걸어오는 주기옥의 좌우에는 금의위의 장수 공보하와 휘황찬란한 황금 갑옷을 입은 의문의 청년이 함께하고 있었다.

‘왕진이 데리고 다닌다던 그 장수인가?’

‘얼굴이 다른 것 같은데?’

척—.

쿵!

주기옥이 등장하자 회의장을 지키던 호위대의 병사들과 금의위들이 일제히 자세를 바로 하며 발을 구르고 가슴을 펴서 그에게 경의를 표했다.

화려하기 짝이 없는 등장이었다.

문무백관들이 모두 모인 회의장에 무거운 침묵이 감돌았다.

“허.”

“으음.”

침묵 속에 탄식과 당황이 가득했다.

이게 어찌된 일인가.

다음 황위에 오를 수 있는 제 일 순위의 인물이 갑자기 저승세계에서 살아 돌아온 것이다.

당황하는 대소신료들 사이에서 나이가 지긋한 노인이 가장 먼저 앞으로 나와 주기옥에게 공손히 인사를 올렸다.

“노신 이부상서 왕직, 성왕 전하를 뵙사옵니다!”

이부상서 왕직.

병부상서 광야와 영국공 장보를 비롯한 고관들이 모조리 죽어 버린 지금, 황실에 남은 관료 중에 가장 높은 직위를 지닌 이가 이부상서 왕직이었다.

‘이부상서가 절을 올리다니?’

‘병부시랑이 소개하고 이부상서가 절을 올린다?

‘아차! 어쩐지 갑자기 성왕이 나타났다 싶더니, 이거 윗선에선 이미 이야기가 된 것이었구나,’

‘줄을 잘 서야 한다. 지금부터 자칫 잘못하면 그 즉시 황천길이야.’

관료들의 눈치 싸움이 치열해졌다.

황위가 계승되는 과정에서는 그 어떤 때보다 큰 피바람이 부는 법이었다.

왕직이 절을 올리자, 그보다 직위가 낮은 관료들은 감히 태만하지 못하고 자연스레 뒤이어 절을 올렸다.

“소신, 성왕 전하를 뵙사옵니다!”

“뵙사옵니다!”

문무백관의 회의실 안이 순식간에 성왕에 대해 충성을 증명하는 장처럼 변해 버렸다.

성왕 주기옥은 앞다투어 인사하는 신하들의 인사를 당연하다는 듯이 받았다. 그가 회의장을 가로질러 용상의 앞에 서자 마치 황제가 서 있는 듯한 위엄이 흘러나왔다.

“대국의 황제가 나라를 비우고 사라졌으니, 내가 아우로서 감국(監國)의 역할을 맡도록 하겠소. 불만이 있거나 이견이 있는 자가 있다면 지금 말하시오.”

감국이란 나라를 살핀다는 뜻이며, 황제가 자리를 비울 시 황제의 자리를 대행하는 직위를 뜻했다.

‘황태자가 엄연히 계시거늘.’

‘이건 위험하다. 그런데 황태자를 거론하기엔 아직 너무 어리구나.’

정통제 주기진의 아들은 아직 두 돌도 지나지 않은 갓난아기였다.

정통제의 충신이었던 서유정과 환관 조길상이 크게 놀라 주변을 두리번거렸으나 선뜻 나서는 자가 아무도 없었다.

이번에도 관료 중 가장 직위가 높은 이부상서 왕직이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침묵하는 탓이다.

이민족에게 포로로 잡힌 정통제 주기진이냐.

아니면 혜성처럼 등장한 성왕 주기옥이냐.

어느 쪽 줄을 타야 하는지 너무나 명백한 상황에서 먼저 나서는 자가 없는 건 당연했다.

“아무도 나서는 자가 없으니 이견은 없다고 생각하겠소. 그럼 지금의 사태를 파악하는 것부터 합시다. 병부시랑, 정통제께서 이민족에게 잡혀간 상황에 대해 자세히 알아야겠소. 누구의 이야기를 들으면 좋겠소?”

주기옥은 일사천리로 이야기를 진행시켰다.

물 흐르듯 이어지는 일 처리에 회의장의 관료들이 아연실색하며 안색이 창백해졌다.

“병부시랑 우겸이 전하께 말씀을 올리겠나이다. 오이라트가 장성을 넘었을 무렵 대동을 수비하던 선봉군의 장수 중에 단기필마로 도망쳐 목숨을 부지하고 옥에 갇힌 이가 있으니 그의 이야기를 들어 보는 게 어떨런지요?”

“선봉군의 장수가 혼자 살겠다고 도망쳤단 말이오?”

“예. 그렇사옵니다.”

“선봉군의 사령관이 누구였소?”

“감군을 한 자는 환관 곽경이고, 군을 책임진 자는 서렬후 송영과 무진백 주면이었나이다.”

“그들은 어찌되었소?”

“모두 전사하였습니다.”

회의장의 분위기가 싸늘해졌다.

패군지장이라는 점도 못마땅한데, 그중에서도 혼자 살겠다고 도망친 비겁자라는 사실이 마음에 들 리가 없었다.

“알겠소. 이야기를 들어 봅시다.”

“예, 전하. 여봐라. 죄인 석형을 들라 하라!”

기다렸다는 듯이 밖으로 나간 호위대 병사 두 사람이 머리를 풀어헤친 죄인을 데리고 왔다.

“참장 석형. 감국이신 성왕 주기옥 전하께 당시의 상황을 낱낱이 고하라!”

우겸의 추상같은 목소리에 석형은 머리를 조아리며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

“전하! 오이라트의 병사들은 귀신처럼 강했나이다. 말을 타고 달리는 속도는 바람과 같고, 그들이 말 위에서 쏘는 화살이 명군 궁병이 멈춰 서서 쏘는 화살보다 사정거리가 길어 도저히 대응할 방법이 없었사옵니다. 그 와중에 곽경 태감의 지휘는 너무나 기이하여 전멸을 면치 못하였으니, 그걸 피해 도망친 신에게도 벌을 내려 주시옵소서!”

쿵.

땅에 이마를 박는 석형에게서 처절한 마음이 느껴졌다.

주기옥이 턱을 쓰다듬으며 고민하는 사이, 환관 조길상이 석형의 말에 반기를 들었다.

“곽경 태감은 사례감 태감이신 왕진 태감께서 직접 천거한 인재였다! 최후의 싸움에서도 목숨을 태우며 분전한 분을, 고인이라는 이유로 모함하여 깎아내리는 것이 옳은 처사인가!”

“그대는 누구지?”

“십이문 사사 팔국 중 병장국의 태감인 조길상이라 하옵니다.”

조길상은 본래 왕진의 심복으로 차기 사례감 태감이나 다름없는 자였다.

병장국이란 황실에서 쓰는 병기와 화기를 통솔하는 부서이며 위험한 자리이기에 사례감 태감이 가장 신뢰하는 자가 맡는 자리인 것이다.

주기옥은 들어 본 적이 있다는 듯 뒷짐을 진 채 가만히 조길상을 바라봤다.

“그렇군. 그대였군.”

말투는 의미심장했고 눈빛은 서늘했다.

조길상은 한기가 들어 서둘러 고개를 숙였다.

“자네는 왕진 태감의 인사를 믿는군. 잘 알겠으니 내가 패군지장의 말을 계속 들을 수 있도록 기다려 주겠나?”

말투는 정중하나 짜증 섞인 눈빛이 그에게 더는 나서지 말라 경고하고 있었다.

“예, 전하. 그리하겠나이다.”

조길상은 대경하여 허리를 굽히며 뒤로 물러났다.

조길상은 물론이고 지켜보던 대소신료들의 등줄기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뭔가 다르다.’

‘정통제 때는 환관들의 첨언이 자유로웠는데……!’

왕진의 꼭두각시나 다름없었던 주기진은 왕진은 물론이고 그가 믿는 환관들이 회의 중간에 어떤 조언이든 할 수 있도록 자유롭게 풀어두는 사람이었다.

물론 마음에 안 들어 하거나 짜증을 부리는 경우도 있었지만, 그럴 때면 늘 어린애처럼 듣기 싫다고 소리치거나 행패를 부리곤 했다.

그런데 성왕 주기옥은 전혀 달랐다.

‘성왕은 점잖은 자다. 참고 인내할 줄을 알아.’

‘위험하군. 정중하게 대하지만 마치 맹수와 같다. 지금은 풀숲에 몸을 숨기고 있을 뿐이야.’

주기옥은 신하를 대하는 태도만으로도 많은 의미를 전달하고 있었다.

주기옥은 참장 석형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대는 궁병의 사거리를 말했다. 나는 여기 들어오기 전에 군수 물자를 정리해 둔 장계를 보았다. 화포(火砲)가 팔백 문, 화전(火箭)은 사십사만 개에 이르더군. 그 정도면 전쟁을 다섯 번은 치를 수 있는 양이다. 북방 이민족의 활 솜씨는 사거리가 길고 위력적이긴 하나 우리에겐 화포와 화전이 충분하지 않던가? 전략적으로 운용하여 포격을 가했다면 사거리는 몰라도 그 위력만큼은 이민족 궁사들을 압도했을 터. 어째서 그걸 사용하지 못했지?”

“그게…….”

석형이 당황한 듯 더듬거렸다.

정통제가 늘 그러했듯 두루뭉술하게 전쟁의 과오만 물을 줄 알았는데, 그가 미리 장계까지 뒤져서 자세한 내용으로 파고들 줄은 몰랐다.

“화포는……. 미리 설치하여 상대를 끌어들여야 했는데 상대의 추격이 너무 빨라 시간이 부족했고, 화전은 많았으나 안전을 위해 병사들에게 화기를 사용하는 법을 가르치지 않아서……. 막상 싸울 때는 사용하지 못했나이다. 그리고 선봉군은 출격할 때 시간이 부족하여 화약 대부분을 본진에 두고 급히 진군했던지라…….”

주기옥은 탄식했다.

“화포와 화기를 위주로 전략을 짰어야 하거늘. 다들 정신이 없어 마음이 급했군.”

“전하의 혜안이 옳으신 줄로 압니다.”

“그래도 문제점이 무엇인지 알고는 있었나 보군.”

주기옥이 힐끔 병부시랑 우겸을 보자 우겸이 읍소하며 말했다.

“죄인 석형은 전세가 기울었을 때 싸움에서 도망쳐 오긴 했으나, 군재가 뛰어나 앞으로 북경을 지키는 싸움에 필요한 인재입니다.”

“그러한가.”

몰살당한 오십만 친정군에 유능했던 무장들이 다 포함되어 있었던 탓에 지금 명 조정에는 군재를 지닌 이가 너무나 부족했다.

주기옥은 곧바로 결론을 내렸다.

“감국으로서의 첫 명이다. 석형의 죄를 감면하겠다. 단, 이는 앞으로 있을 오이라트와의 싸움에서 최선을 다하라는 뜻이며 또 한 번 선봉군에서처럼 실망스러운 모습을 보인다면 엄벌을 내려 명의 기강을 세울 것이다. 알겠는가?”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당장 목에 베여 죽을 줄 알았던 석형은 크게 감격하여 피가 나도록 이마를 땅에 쿵쿵 찧어 절을 올렸다.

마치 장마 후의 거친 물살처럼 회의장의 분위기가 주기옥의 행동 하나하나에 정신없이 휘말리고 있었다.

사태를 따라가기 힘들었던 대소신료 중 서유정이 급히 나서서 물었다.

“전하! 신 서유정 한 말씀 올리겠나이다. 혹시 북경을 지키실 의중이십니까? 아니 되옵니다. 오십만의 대군을 몰살시킨 자들입니다. 남경으로 천도하여 국력을 하나로 모아 대비하지 않는다면 저들을 막아 내기 힘들 것이옵니다.”

“그대는 그리 생각하는가?”

조길상에게 경고할 때와 똑같이 정중한 말투, 하지만 서늘한 눈빛이 서유정을 찔끔하게 했다.

“병부시랑은 어떻게 생각하지?”

“수도는 나라의 근본인데, 근본을 버리고 어찌 살 수 있겠습니까? 북송이 어찌 망했는지 모르는 자만이 이런 상황에서 남경으로의 천도를 주장할 것이옵니다.”

우겸의 발언은 서유정에게 있어서는 면전에 침을 뱉는 것만큼이나 치욕스러운 일갈이었다.

서유정의 안색이 단박에 창백해졌다.

“전하! 신 병부시랑 우겸, 한 말씀 올리겠나이다. 오이라트의 병력은 적습니다. 제대로 된 군략을 취해 ‘화기’를 사용하며 온 힘을 다해 성을 지킨다면 능히 북경을 지켜낼 수 있나이다. 만약 오이라트가 북경을 갖는다면 기세가 올라 걷잡을 수 없는 일이 될 테니, 북경은 무슨 일이 있더라도 지켜야 할 것입니다!”

“병부시랑.”

“예, 전하!”

“나라의 운명이 걸린 일이다. 그대의 목을 걸겠는가?”

공기가 서늘해졌다.

농담이 아니라, 주기옥은 그가 실수라도 하면 당장이라도 참할 것처럼 서늘한 살기를 띠었다.

우우웅—.

‘어찌 이런 기세가?’

‘성왕은 혹시 무예도 익힌 것인가?’

황금 갑옷을 입은 장수가 주기옥의 등 뒤에 살며시 손을 대고 내력을 불어넣어 주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심지어 그 황금 장수가 당당히 패용하고 있던 칼에 손을 얹자 당장이라도 처형이 벌어질 것처럼 위험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우겸은 그 자리에서 몸을 던지듯 무릎을 꿇고 목을 빼며 결연하게 외쳤다.

“병부시랑이라는 자가 나라를 지키지 못하고 수도를 잃는다면 어찌 살아 있기를 바라겠나이까. 신 우겸, 맡겨만 주신다면 목숨을 다해 이 땅을 지키겠나이다!”

충심 가득한 우겸의 일갈이 회의장 신료들의 마음을 울렸다.

우겸은 사람이 너무 깐깐하여 말이 통하지 않는 자이나, 천성이 청렴하고 충심이 강한 무인이었다.

“이부상서는 어찌 생각하시오?”

주기옥의 질문은 회의장에 있는 대소신료들의 체면을 세워 준 것과 같았다.

이부상서 왕직이 극도의 공경을 보이며 마치 황제를 대하듯 읍소했다.

“우겸은 충심이 깊은 사람이니 그의 뜻대로 하는 것이 옳을 줄 아옵니다.”

“그러한가.”

주기옥은 소리쳤다.

“좋다!”

주기옥이 위엄 있게 손을 내젓자 관료들이 급히 허리를 숙였다.

“병부시랑 우겸에게 북경을 지키는 모든 권한을 위임하겠다. 오이라트가 더는 명을 넘볼 수 없도록 온 힘을 다하라!”

“존명!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끓어오른 충심으로 목이 터져라 외치는 우겸을 시작으로 모든 대소신료가 허리를 굽혔다.

북경을 지키고자 하는 나라의 명운이 결정되는 순간이었다.

***

회의장을 벗어나 침소로 향하는 길, 오로지 성왕 주기옥과 황금 갑주를 입은 호위 무장만이 남았을 때, 호위 무장이 주기옥을 향해 말했다.

“수고했어.”

웃음기 가득한 목소리에 주기옥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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