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권 3화
제40장 백호마왕(白虎魔王) (3)
“내가 왜 이 짓을 하고 있는 거야?”
말 그대로 어깨에 나라를 짊어진 사람의 한탄이었다.
소호는 결국 소리 내어 웃고 말았다.
“회의장에서는 그렇게 잘해 놓고 이제 와서 그걸 물어?”
“난 얼마 전까지만 해도 불피우고 망치질만 하면 됐다고.”
“그래. 이젠 나라를 그 모루 위에 올려놓고 망치질하면 되는 거야. 네 마음에 들게 예쁘게 다듬어 봐.”
“망치가 너무 무거워.”
주기옥이 엄살을 부리며 팔을 휘휘 휘저었다.
“아까 그 사람들 봤어? 딱 봐도 좋은 옷 입고 눈빛이 번뜩이는 게 보통 인간들이 아니잖아? 실수하면 벌 떼처럼 몰려와서 물어뜯을 거라니까?”
“문관이든 무관이든 다들 나라에서 내로라하는 걸물들인데 당연히 대단하겠지.”
“그 사람들을 내가 이끌어야 되는 게 말이 돼? 망치질이나 하던 내가?”
소호는 힘내라는 뜻으로 주기옥의 등을 툭툭 두드려 주었다.
“이제야 사람들을 이끄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알게 됐어?”
주기옥은 어이가 없다는 듯이 소호를 바라보았다.
“천하를 다스려야 할 사람한테 지금 조그마한 강호의 단체 하나를 갖고 있다고 잘난 척하는 거야?”
“우리 천무련은 그리 작지 않아. 게다가 이제 나 아니면 누가 너한테 잘난 척하겠어?”
“……그건 그렇네. 그래서 천무련의 련주님께선 사람을 이끄는 어려움에 대해 조언해 주고 싶은 거라도 있나?”
“있지.”
“뭔데?”
“사람을 믿지 마.”
항상 환하게 웃는 인상과 전혀 안 어울리는 조언이었다.
주기옥도 내심 놀라 되물었다.
“의외의 조언이네. 그동안 도대체 형한테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으음, 많은 일이 있었어.”
“사람을 믿지 말라고? 능력을 믿지 말라는 거야? 아니면 배신할 수 있으니 속을 믿지 말라는 거야?”
“둘 다. 사람들은 생각보다 나약하고, 상황이 나빠지면 배신도 쉽게 해. 윗사람이 되려면 그걸 잘 조절해야 하더라.”
주기옥은 잠시 말문이 막혀 입만 벙긋거렸다.
“충격인데. 만인에게 사랑받는 천무공자님께서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니.”
“사람들은 누군가를 사랑하는 만큼 욕도 많이 해. 나를 싫어하고 미워하는 사람은 나를 좋아해 주는 사람만큼이나 많더라.”
담담하게 말하고는 있지만 경험에서 우러나오지 않으면 말할 수 없는 이야기였다.
“……놀라움의 연속인걸?”
주기옥은 그 어느 때보다 한숨을 더 길게 푹 내쉬었다.
“형 때문에 사람을 이끄는 일이 더 어려워졌잖아.”
“세상에 쉬운 일은 없어, 기옥아.”
소호는 어린 시절 은자촌을 몰래 빠져나와 전갈 꼬치를 사 먹던 그 시절과 똑같았다.
여전히 투덜거리는 주기옥을 웃으면서 이끌어 주는 유일한 ‘형’이다.
“잘해 봐. 너는 잘할 거야.”
“젠장.”
“하나 더 말해 줄까?”
“뭔데?”
“조직이 잘 돌아가려면 보상을 충분히 해줘야 해. 상대를 인정해주고 보상을 확실히 해 준다. 그것만 잘해도 아무런 문제가 없더라.”
“많이 퍼주라고?”
“아니. 그래선 안 되지. 인심을 함부로 쓰는 게 아니라, 한 번 쓸 때는 모두가 깜짝 놀랄 만큼 인상적으로 보여 줘야 해.”
“……애들 장난감이랑 똑같네.”
“천무련에서 네가 나눠 주던 거 말이지? 맞아. 평소에 밥 먹듯이 주는 게 아니고, 한 번 줄 때 애들이 깜짝 놀랄 물건으로 주곤 했잖아?”
“대충 알겠어. 보상을 충분히 해라, 그러면서 사람을 믿지는 않아야 한다?”
말없이 씩 웃는 소호의 얼굴이 곧 대답이었다.
“어렵다. 어려워. 내가 왜 이런 걸 신경 써야 해? 이 모든 게 그놈 탓이야.”
주기옥은 허공에 주먹질을 했다.
“주기진, 이 멍청한 인간 같으니! 어린 시절에 앵무새를 맨손으로 죽일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는데. 그렇게 인내심이 없는 놈이니 커 봤자 무슨 일을 해내겠어? 이 멍청한 놈아. 대체 왜 오십만이나 끌고 가서 적한테 사로잡힌 거야? 이 무능한 놈!”
주기옥의 목소리가 너무 커서 황실의 복도를 쩌렁쩌렁하게 울릴 정도였다.
복도 끝에서 주기옥을 향해 다가오던 금의위 두 사람이 깜짝 놀라면서 못 들은 척 몸을 돌린다.
“하핫.”
소호는 웃음을 참기 힘들었다.
주기옥은 모르지만 저 두 사람은 지금 식은땀을 흘리면서 호흡이 거칠어진 상태다.
왜 아니겠는가.
황제를 욕하면 역모죄로 잡혀가서 삼족을 멸하는 세상이거늘.
대놓고 황제의 이름까지 논하면서 욕을 하는데 욕을 하는 사람이 황제의 동생이자 다음 대 황제가 될 확률이 높은 사람이다.
잡아서 문초하자니 정작 기분 나빠하며 벌을 내릴 황제는 적에게 인질로 잡혀갔다.
듣고도 무시하기엔 발언의 수위가 세서 명백한 역모죄다.
그러니 들어도 못 들은 척, 알아도 모르는 척하는 수밖에 더 있겠는가.
“너도 참. 너 그렇게 조심 안 하다간 황제 생활 오래 못 한다?”
“흥, 누가 오래 한대? 두고 봐. 한 몇 년만 뼈 빠지게 일해서 나라를 정상으로 되돌려 놓고 나면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져서 다시 망치질이나 하면서 살 테니까.”
“은자촌에 다시 오려고?”
“그것도 좋지.”
주기옥은 한참을 투덜거린 뒤에야 냉정을 되찾았다.
“형, 궁금한 게 있어.”
“어떤 게 궁금한데?”
“형은 직접 오이라트의 병사들도 봤었잖아?”
“봤지.”
“북경은 함락될 것 같아?”
아까 대화의 연장선이었다.
우겸의 호언장담은 믿어도 되는가?
사람을 믿지 않아야 한다면 그것도 의심해야 하는가?
“충!”
때마침 양쪽 벽에 딱 달라붙어 식은땀을 흘리고 있던 금의위들이 절도 있게 인사를 했다.
소호와 주기옥은 말없이 두 사람 사이를 지나갔다.
“오이라트의 병사들은 강해. 기마술과 궁술이 대단하더라. 그래도 내 생각엔 막을 수 있을 것 같아.”
“그래? 어째서? 오십만으로도 못 막은 병사들을 일, 이만 명의 수비대로 막을 수 있을까?”
“공성전은 야전과는 전혀 다르니까. 게다가 이쪽엔 화기에 정통한 성왕 전하도 있고.”
아마 역대 모든 황제를 통틀어 가장 화기에 정통한 사람을 고르라면 소호는 주기옥을 고를 것이다.
자기 손으로 망치를 두드려 화기를 만들어 낼 수 있는 황제가 어디에 있을까.
“으음.”
주기옥은 머리를 긁적였다.
“형은, 언제까지 있을 거야?”
“오이라트로부터 북경을 무사히 지켜낼 때까지는 있을 거야.”
“명나라를 무사히 지킬 경우, 나는 형한테 뭘 해 주면 돼?”
보상을 충분히 하라.
소호의 조언을 벌써 써먹는 주기옥이다.
소호는 흡족하여 환하게 웃었다.
“황실이 천무련을 인정하고 지원해 주면 돼. 그리고 이건 그것과는 다르게 부탁하고 싶은 게 하나 있는데.”
“뭔데?”
“옥에서 한 사람만 꺼내 줘.”
의아해하며 미간을 좁히는 주기옥에게 소호는 차분하게 설명을 시작했다.
***
“황족이랑 호형호제하는 사이였다니. 저는 천무공자와 관련해선 어떤 일도 놀라지 않을 자신이 있었는데, 그 생각이 너무 쉽게 무너졌어요.”
자금성 인근의 북난(北蘭)객잔 최상층에서 조용히 차를 마시던 팽자연이 순수한 감탄을 담아 말했다.
함께 동석하고 있던 조서인, 추룡, 대미미, 문주희는 각자의 상념에 잠긴 채 차만 홀짝거렸다.
“천무련의 대장간에 숨겨 두고 있던 놈이 황족이었단 말이지? 난놈은 난놈일세. 그럼 설마 전쟁이 벌어질 때부터 판을 짜 놓았던 건가? 아니면 혹시 모를 일을 대비해 데리고 있었던 건가? 둘째 형님이 연관되어 있었으니 범상한 일은 아닌 것 같은데.”
모두에게 하는 말 같았으나 추룡의 시선은 대미미에게 향해 있었다.
동그란 눈은 순하고 귀엽지만, 또 한편으론 큰 키에 붉은색 비단 장포를 어깨에 걸치고 있는 모습이 강렬했다.
심지어 말이 그리 많은 편이 아닌지라 팽자연은 대미미와 아직까지도 대화를 그리 나누지 못한 상태다.
모두의 시선이 대미미에게 쏠렸으나 그녀는 자신에게 묻는 말인 줄 알아채지 못하고 조용히 차만 홀짝거렸다.
“미미야.”
“응?”
결국 추룡이 직접 호명해서 질문을 던졌다.
“어찌 생각하냐, 너는?”
“어떤걸요?”
“천무련 대장간에서 소호가 데리고 나간 애 말이야. 서로 형, 동생 하던데.”
“기옥이?”
“걔 이름이 기옥이야?”
“응. 어릴 때부터 은자촌에서 함께 지냈어요.”
번쩍.
팽자연과 문주희가 놀라서 두 눈을 번쩍 뜬다.
추룡도 흥미로워하며 자신의 턱을 쓰다듬었다.
“은자촌에서 함께 지냈어? 언제부터?”
“삼촌이 서역으로 떠나고 얼마 안 있다가? 십 년 조금 안 된 것 같아.”
“그랬군. 그럼 애초에 인연이 있었네.”
“광 할아버지랑 같이 대장간에서 지냈어요. 까칠하지만 속은 약한 애야.”
“그래? 광 영감이라. 그건 또 의외네. 그런 애를 잡혀간 황제 대신해서 세운다?”
추룡이 납득하며 곰곰이 생각에 잠길 때쯤 문주희가 다급한 얼굴로 물어왔다.
“미미야, 소호가 그 애…… 그, 황족이랑 많이 친해? 부탁 같은 것도 할 수 있을까?”
“…….”
대미미가 아무런 대답도 안 하고 물끄러미 바라보자 문주희가 위축되어 어깨를 움츠렸다.
문주희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그녀는 눈에 띄게 위축되고 침울해져 있었다. 그녀의 상황상 어쩔 수 없는 일이긴 했으나, 그녀 때문에 모두의 분위기가 자꾸만 어두워지는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계속 위축되어 있는 것은 그녀답지 않은 일이었다.
문주희는 상인.
끝내 이득을 볼 수 있다면 어떠한 치욕도 감내하는 대상인의 핏줄이다.
문주희는 입술을 질끈 깨물면서 재차 물었다.
“대답해 줘. 황실에 잡혀간 아버지가 나올 수 있을까?”
“문 소저. 이기적이네요.”
팽자연이 참지 못하고 한마디 했다.
“금룡상회에서 천무공자에게 살수를 보냈었다면서요? 그런데도 구해 달라는 말을 어떻게 할 수 있는 거죠?”
“……그 일은 우리 상회 본점의 의도는 아니었어요.”
“그래서 우리한테 부탁할 때는 끝내 이야기 안 하고 숨겼어요? 결국 우리가 천무공자에게 직접 듣고서야 문 소저가 왜 그리 부탁을 어려워 했는지 알 수 있게? 솔직히 우리가 얼마나 황당했는 줄 알아요?”
팽자연의 말투는 칼날처럼 날카로웠다. 참고 참던 감정이 터져 나왔다.
문주희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내가 그 일을 미리 알았었다면, 살수를 부른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나는 분명 막았을 거예요.”
“그래요?”
“네.”
“섬서 분점에서 ‘자율적으로’ 결정할 만한 지침이 있었겠죠. 그게 변명이 안 된다는 건 솔직히 우리 모두 알고 있잖아요?”
금룡상회의 공격적인 장사 방식이 문제를 일으킨 적은 한두 번이 아니었다.
북경.
그리고 하북을 아우르는 명가인 팽가의 여식으로서 그녀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사실이다.
문주희의 눈빛이 일렁거렸다.
그녀 역시도 한계에 도달해 있는 상황이었다. 감정을 참고 절제하기엔 너무나 힘든 상황이다.
“그래요? 나도 다 알아요. 하지만 결국 금룡상회가 무너지고 아버지가 잡혀간 것에는 소호의 입김도 있었다고 추측되고 있어요. 그러니 저는 소호에게 부탁할 수밖에 없다고요.”
“바로 그 점이에요.”
“뭐가요?”
“내가 문 소저를 보면서 마음에 안 드는 부분. 왜 원망을 하면서 부탁을 해요? 공격을 했고, 반격을 받았으면 다시 공격해서 싸워야죠. 그게 아니면 아예 패배를 인정하고 승복한 채 자비를 구하던가요.”
“……나는 자비를 구하고 있어요.”
“무릎을 꿇고 부탁했죠. 우리 모두 봤어요. 그런데 지금은 또 불안감을 어찌하지 못하고 대 소저를 채근하고 있어요.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그게 옳은 것 같아요?”
“불안해서 그래요.”
문주희는 비명처럼 소리쳤다.
“믿을 수가 없어요. 황제가 될 사람을 찾았으면 뭘 해요. 그렇다고 아버지가 살아 돌아올 수 있다는 보장은 없어요!”
순식간에 모든 걸 잃어버린 그녀였다.
애초에 소호를 만나기 위해 북방으로 갔던 여정이 그녀가 가진 인내심의 한계점이었다.
드르륵—.
조서인이 의자를 밀며 일어났다.
그리고 강인하고, 곧은 눈빛으로 팽자연을 한 번 응시한 뒤, 문주희를 바라봤다.
“소호는 믿을 수 있는 친구입니다. 생각이 다르거나 실수를 할 수는 있지만, 그래도 소호는 약속했다면 지킬 겁니다. 주희야. 힘들 때일수록 사람을 믿어야 해.”
이를 악문 문주희의 눈빛이 그렁그렁하게 일그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