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권 5화
제40장 백호마왕(白虎魔王) (5)
“짐은 유일무이한 이 나라의 황제이다! 선황의 피를 이어받은 짐이 황위를 넘기지 않았는데 어찌 상황이 된단 말이냐!”
그간 에센에게는 입도 벙긋 못하고 기가 죽어 있던 주기진이 발작적으로 화를 냈다.
적국 이민족에게 포로로 잡힌다는 비참한 상황에 놓인 그에게 유일하게 남아 있던 것이 황제라는 이름값이다.
그게 없는 주기진이라?
단언컨대 주기진은 그런 자신을 단 한 번도 상상해 본 적이 없었다.
황제가 아닌 그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에센 타이시에게도, 그리고 자기 자신에게도 말이다.
“지금은 경태의 시대다!”
“경태제께서 즉위하셨으니, 지금 그곳엔 황제가 없다!”
“돌아가라! 우리는 문을 열지 않겠다!”
성벽에 늘어선 병사들이 같은 말을 반복해서 외쳤다.
비틀.
주기진은 안색이 창백해진 채 말에서 떨어질 뻔하였다.
쿵쿵 울리는 육중한 말발굽 소리가 점점 다가온다. 주기진을 저승으로 끌고 가는 괴물이 다가오는 것만 같았다.
에센 타이시.
오이라트의 괴물이 주기진의 곁으로 다가오더니 포탄이 터지는 것처럼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크하핫! 명에도 사내가 있기는 했구나. 잡힌 황제를 버린다? 그만한 결단력을 내릴 만한 자가 남아 있었다니!”
입으로는 웃고 있으나 주기진을 노려보는 눈에는 불길이 활활 타오르는 듯했다.
주기진은 지레 겁먹고 다급히 변명했다.
“거짓말이다! 황태자는 이제 겨우 한두 살의 어린아이다. 황제로 즉위했을 리가 없어! 정명한 황제의 핏줄은 오직 짐뿐이다! 그래. 그렇지. 저자들이 그저 문을 열고 재물이 빼앗기기 싫어서 저러는 것이야!”
에센은 코웃음 쳤다.
그는 황금 씨족만 칸이 될 수 있는 혈족 사회에 큰 환멸을 느끼는 자였다.
명나라 황제가 핏줄을 운운하는 이야기 따위는 아무런 감흥도 주지 못했다.
“어리석구나. 핏줄 따위가 뭐라고. 두 살짜리 갓난아이를 황제에 올렸든, 아니면 너도 모르는 형제를 찾아 올렸든, 그건 중요치 않다. 중요한 건 나라에서 너를 버렸다는 사실이다.”
주기진은 큰 충격을 받았다.
너도 모르는 형제라는 말에 과거의 누군가가 떠올랐다.
“설마?”
설마 아닐 것이다.
주기진은 큰 불안감을 이기지 못하고 작게 중얼거렸다.
에센은 별일 아니라는 듯 손을 저었다.
“괜찮다. 저들이 네가 황제가 아니라고 주장한다면 북경으로 가서 너를 용상에 앉히면 되는 일.”
꿀꺽.
주기진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이게 무슨 일인가.
한 치 앞을 모르는 게 사람의 일이라더니. 그를 이리저리 끌고 다니던 이민족 군대가 이제는 주기진을 다시 황제로 만들어 줄 유일한 희망이 되다니.
‘이 멍청한 놈들. 대체 무슨 짓을 하는 게야? 당장 돈이든 땅이든 뭐든 주고 짐을 구해야 할 것이 아니냐? 그런데 엄한 놈을 황위에 올리고 짐을 버려?’
격렬한 분노의 사로잡힌 주기진이 손이 하얗게 질릴 정도로 고삐를 꽉 잡았다.
“그 환관을 데려와라!”
에센이 소리치자 그의 부관 두 사람이 항복한 명나라 사람 중 가장 직급이 높았던 환관을 데리고 왔다.
환관 희영(喜寧)은 이십사아문 중 도지감(都知監)의 태감이었던 자로 황제가 출행할 때 도로를 정비하고 경계하는 임무를 수행하는 자였다.
오이라트가 사십만의 대군을 모조리 죽인 것은 아니었다.
싸우는 과정에서 삼십만은 죽거나 도망쳤고, 항복한 십만 가까이 되는 병사들은 포로로 붙잡아 북부로 보내 버렸다.
개중에 쓸모 있어 보여 기용한 사람이 환관 희영이었다.
“네가 황제가 움직이는 도로를 정비하고 관리했다지?”
“예, 예. 그렇사옵니다.”
희영은 주기진의 눈치를 잠시 본 뒤 에센을 향해 극공의 예를 올렸다.
“그렇다면 말해 봐라. 우리가 북경을 점령하러 간다고 할 때, 가장 주의해야 할 장소는 어디인가?”
말 그대로 국가의 기밀이자 적군이 알아서는 안 될 정보가 태감 희영의 입에서 전달되었다.
“명의 입장에서 가장 경계를 엄중히 하는 곳은 자형관이고, 뚫리면 사방을 경계해야 하는 곳은 거용관이며, 당장은 중요치 않으나 북경이 포위될 경우 위험한 곳은 고북구(古北口)입니다.”
환관 희영은 과연 이십사아문의 태감이 될 만한 인재였다.
근방의 지형을 세세하게 다 알고 있는 것처럼 중요한 사항들이 줄줄이 흘러나왔다.
에센은 그의 책사와 부관들에게 고북구, 거용관, 자형관의 지형을 확인하라 명령을 내렸다.
“확인해 보고 네 말이 옳다면 상을 내릴 것이다.”
에센은 감격하는 희영의 어깨를 두드리며 호탕하게 웃었다.
반면에 북경 공략이 현실이 될 기미가 보이자 주기진은 복잡한 심경이 되었다.
“에센 공, 정말로. 북경을 공격할 것인가?”
“물론이다. 이대로 돌아갈 수야 있겠는가. 너는 걱정할 것 없다. 나라끼리는 전쟁을 하지만, 사람 대 사람으로서. 너와는 친구로 지낼 수도 있는 것 아니겠는가.”
“친구라고……?”
“그렇다. 어차피 이렇게 되었으니 후방으로 보내 주도록 하지. 그곳에 오이라트에서 가장 몸이 따뜻하고 아름다운 여자들도 붙여 주겠다. 푹 쉬면서 우리가 함께 이룩할 위대한 일들을 상상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에센은 그가 권하는 일들을 상대가 당장 해야 할 것처럼 느끼게 하는 재주가 있었다.
상대가 어떤 말을 해야 들뜨는지 잘 알고 있는 자다.
주기진은 모른 척 고개를 돌렸다.
“여자들이라니? 짐은 궁에 정비와 비빈들이 있다. 함부로 여인을 안는 건 법도에 어긋난다.”
“뭐라고? 올해 들은 말 중 가장 웃기는 농담이군. 사내로 태어나 잘 먹고, 잘 자고, 아이를 많이 낳아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 아닌가?”
“짐의 삶은 그리 단순하지 않다.”
“웃기는 소리! 사람은 누구나 단순해!”
에센이 버럭 소리치자 주기진은 입을 꾹 다물었다.
에센은 마치 화약 주머니 근처에 피어오른 커다란 모닥불과 같다.
불똥이 하나라도 잘못 튀면 거대한 폭발을 일으키는 위험한 자다.
함부로 상대하는 건 상책이 아니었다.
“명나라의 황제여. 너는 굶어 본 적이 있나?”
“그런 적은 없다. 황궁엔 먹을 것이 늘 풍부했다.”
“그렇겠지. 난 있다. 우린 멀리 나갈 때는 양젖을 가지고 다니지만, 그래도 음식이 부족해서 며칠을 굶어야 하는 상황도 생긴다. 그럴 때면 어떻게 되는 줄 아나? 눈이 돌아가서 내 친구인 말을 잡아먹고 싶어진다.”
에센은 미안하다는 듯 자신이 타고 있던 말목을 손으로 톡톡 두드려 주었다.
히히힝—.
말이 운다.
순박한 눈망울을 지닌 근육질의 강인한 동물이다.
“…….”
“너는 아닐 거라고? 흥, 사람은 다 단순하다. 배고프면 먹고, 자고 싶으면 자는 존재란 말이지.”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이제 생각해 봐라. 네 몸에는 피 대신 금이 흐르지 않는다. 혹시 밥을 먹고 잠을 자지 않는가? 법도에 어긋나는 다른 여인을 안고, 밖에서 자식을 낳으면 하늘에서 벼락이라도 떨어진다던가?”
“……그건 아니다.”
“그렇다면 뭐가 문제인가. 혹시 오이라트의 여인은 더러워서 안지 못하겠던가?”
‘위험하다.’
주기진은 에센에게서 살기를 느꼈다.
진심이든, 아니면 지금 주기진의 기를 꺾어 놓겠다는 마음이든.
주기진은 여기서 에센에게 배짱을 부릴 상황은 아니었다.
“그렇지 않다. 내가 너무 법도에 얽매였나 보군.”
“좋다. 좋아. 이해가 빠르니 좋군. 후방으로 가서 쉬도록 해라 명나라의 황제여. 그대와 그대의 자식들을 위해서라도 나는 북경을 되찾고야 말겠다.”
씩 웃는 에센의 얼굴은 마치 야수와 같았다.
‘뭐? 자식이라고?’
탐욕스럽고 열망이 가득하다.
주기진은 섬뜩함을 느꼈다.
‘여인을 안고, 아이를 낳게 할 셈이군. 황족의 피를 갖고 싶은 것인가?’
어쩌면 당장은 아니더라도, 언젠가 명나라의 황권을 빼앗을 명분을 갖추려는 것일지도 몰랐다.
자신을 혈통 있는 종마 취급하는 에센의 속내를 보자 자신의 처지를 새삼 지각한 주기진이었다.
그는 우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명나라가 그를 버렸듯, 하늘도 그를 시험에 들게 하고 있었다.
‘황궁 밖은 참으로 어렵구나.’
평생을 철부지처럼 살아온 주기진에게 큰 역경이 닥쳐오고 있었다.
***
우겸이 병부상서의 자리에 오르고 나서 가장 먼저 한 일은 북경의 방어군을 정비하는 일이었다.
그는 전국 각지에서 모을 수 있는 병력이란 병력은 모조리 끌어모았다.
사실 정통제가 오십만이라는 병력을 끌어모을 때까지만 해도 나라의 모든 힘을 끌어오는 듯했는데, 이번에는 그걸 넘어서 나라의 근간을 지탱하는 병력까지 모조리 북경으로 밀어 올리고 있었다.
보다 못한 우첨도어사 왕횡(王竑)이 걱정하며 말했다.
“병부상서, 이렇게 모든 병력을 빼 버리면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날지도 모릅니다. 안 그래도 등무칠이라는 자가 복건 쪽에서 소작농들을 철폐하라면서 난을 일으키지 않았습니까? 이야기를 들어 보니 난을 일으킨 자들의 숫자가 수만이라 합니다.”
“보고는 들었소.”
“그런데도 빼실 것입니까?”
“그렇소. 등무칠이라는 자가 난을 일으키긴 했으나 그는 군주가 될 자질이 없는 자요. 세를 내지 않겠다 버티다가 병사를 때려죽이는 바람에 난을 일으킨 자가 무슨 큰일을 도모하겠소? 잠시 놔둔다 해도 그저 자기들끼리 진을 치고서 세금이나 안 내게 해 달라며 떼를 쓸 뿐이니 걱정 안 해도 될 것이오.”
“으음.”
“우첨도어사, 지금 등무칠의 난을 평정하러 출진한 자가 누구요?”
“영양후 진무입니다.”
“다 불러모으시오. 지금은 나라의 운명이 걸려 있소. 오이라트를 막지 못하면 명조는 여기서 끝이 날 수도 있단 말이오.”
“알겠습니다. 그럼 영양후와 근왕병들도 모조리 집결하고, 혹시 산동과 남방 연안의 병력도 빼야 합니까?”
“왜구들을 잡는 병력 말이오?”
“예.”
“다 부르시오. 속전속결로 오이라트를 막아 내고 다시 돌려보내도록 하겠소.”
“알겠습니다. 후우, 이거 정말 위험한 일이군요. 심장이 떨려서 못 살겠습니다.”
“나도 마찬가지요. 그렇게 모두 끌어모으면 숫자가 얼마나 되겠소?”
“당장 모이는 것은 십만, 산동과 남방의 대 왜구 군과 군량을 운송하는 운량군까지 끌어모으면 이십만은 될 것입니다.”
“좋군. 그 정도면 싸워 볼 만하오.”
우겸은 조정의 모든 힘을 사용해 북경, 남경, 하남에 있는 비조군(備操軍)까지 모두 끌어모았다. 비조군이라 함은 정규군, 즉 늘 녹봉을 받는 군인들이 아닌 상비군을 뜻하며, 이들 중에는 흔히 강호 무림이라 불리는 무림인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관과 무림이 따로라고 하지만, 그렇다 해도 다 명나라에 가족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천무련은 나라의 위기를 그냥 두고 보지 않고 도울 것입니다.”
천무련의 주인.
천무공자 장소호가 당당하게 선언하며 깃발을 들어 올리자 상상 이상으로 많은 이들이 나라를 지키겠다며 분연히 떨쳐 일어났다.
협사란 무엇인가.
민초들 몇 명을 구하겠다고 산적을 소탕하는 이도 협사지만, 나라를 구하기 위해 떨쳐 일어나는 이들 또한 협사였다.
전국 각지에서 힘을 보태겠다고 모여든 강호인들이 무려 일만에 달했다.
팔파일방, 그리고 오대세가라 불리는 세가에서도 주력 부대의 절반 가까이를 출전시켰다.
이민족이 북경을 침공하는 유래 없는 사건.
그리고 강호인들이 대대적으로 전쟁에 참여하는 일 또한 유래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모든 준비가 끝나 갈 무렵, 결국 북경을 향해 거대한 기마군단이 진군을 시작했다.
“에센이 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