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풍운객잔 2부-486화 (615/686)

20권 6화

제40장 백호마왕(白虎魔王) (6)

에센.

그 이름은 이제 공포의 상징이 되고 말았다.

몽고. 북원의 통치하에 고통받던 한족들이 주원장이라는 걸출한 인물 덕에 독립한 게 고작 육십 년 전의 일이었다.

바꿔 말하자면 북방 이민족들에게 지배당하던 게 고작 할아버지 세대였단 말이다.

그러니 이제 와서 어느 누가 다시 지배당하고 싶겠는가.

에센이 오십만 대군을 쳐부수고, 거기에 북경으로까지 진군한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모두가 겁에 질리는 건 당연한 결과였다.

온 천하에 또다시 나라가 무너지는 게 아닌가 하는 불안감이 감돌았다.

병부상서 우겸은 그럴수록 더욱 의연하고 강직한 모습을 보였다.

“적의 병력을 소상히 고하라!”

온몸에 흙먼지를 묻힌 정찰병이 무릎을 꿇고 보고했다.

“고북구에 이만! 거용관에는 오만! 그리고 자형관에는 시, 십오만, 십오만에 달하는 대군이 향하고 있습니다!”

보고를 하기 전에 몇 번이나 연습했을 텐데도 전령이 말을 더듬었다.

“자형관에만 십오만? 그럼 다 합치면 이십만이 넘질 않은가!”

“허어.”

“토목보 때보다 적의 병력이 더 늘어난 것인가?”

“오이라트에서 원군을 보냈나 보군.”

무청백 석형과 범광(范廣), 무흥(武興)과 같은 장수들이 함께 보고를 듣고 있다가 표정이 굳어졌다.

특히 석형은 옥에 갇혀 있다가 우겸 덕분에 목숨을 구하고 다시 복직된 장수였다.

그는 이 전장에서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는 사람인데도 당장이라도 도망치고 싶은 것처럼 안색이 창백해져 있었다.

“고작 삼만 명으로 오십만을 이긴 자들인데, 그런 자들의 숫자가 이십만이나 된다니……!”

석형의 중얼거림을 모두가 들었다.

다들 말을 안 할 뿐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숫자상으로만 따져도 말이 안 된다.

오이라트의 에센군은 삼만 명으로 오십만을 이긴 자들이다.

그런 자들이 이십만이라면 단순한 계산으로도 이쪽은 이백만쯤은 있어야 상대가 된다는 말이다.

“장수들은 말을 아끼도록 하라.”

병부상서 우겸의 호령에 장수들은 찔끔하여 입을 다물었다.

장수들의 사기는 곧 병사들의 사기로 직결되기도 한다.

우겸은 장수들이 이런 생각을 갖고 있으니 병사들은 얼마나 참담한 심정일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다.

‘적이 십오만이나 된다니. 그렇다면 자형관은 돌파되겠구나. 승부는 북경의 성벽에서 봐야 한다. 그곳의 승부가 명운을 가를 것이다.’

오이라트 기병들의 발을 묶으면서 최대한 화기의 파괴력을 살릴 수 있는 건 공성전뿐이었다.

“좌부도어사. 토목보의 화기들은 다 회수하였소?”

좌부도어사 양선(楊善)이 대답하였다.

“예. 다행히 오이라트 군은 화기가 짐만 된다고 생각했는지 모조리 버리고 떠났습니다.”

“천만다행이로군.”

우겸의 목소리가 한결 가벼워졌다.

“토목보에서 노획한 화기의 숫자가 얼마요?”

“화창(火槍)이 일만 정, 신총(火銃) 이만 정, 화전(火箭)이 사십오만 개, 화포가 팔백 문입니다!”

“엄청나군.”

누가 들어도 엄청난 숫자의 화기였다.

장수들의 얼굴에서도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이민족은 이민족이군.”

“화기의 가치를 몰랐단 말인가? 그 귀한 것들을 다 버리고 갔다니.”

“인생사 새옹지마라더니. 친정군이 화기를 거의 쓰지 못했던 것이 오히려 득이 된 모양입니다. 자신들에게 화기를 쏘는 모습을 못 봤으니, 여기저기 옮겨 다녀야 하는 이민족들 입장에선 그저 무용지물인 짐 덩이라 생각했겠지요.”

“그 덕에 우린 화기가 모자랄 일은 없겠군.”

“저 정도면 전쟁을 몇 번이나 치러도 되겠습니다.”

우겸은 장수들이 한껏 기뻐하도록 가만히 놔두었다.

그는 지금 명군에 필요한 것이야말로 승리할 수 있다는 희망임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화기는 충분한데, 화약은 어떤가? 이부상서께서 연락은 없으셨는가?”

“이부상서께서도 연락을 주셨습니다. 통주(通州)에 북경 수비대에서 일 년간 쓸 군량과 화약이 준비되어 있으니 곧바로 보내 준다고 하셨습니다. 며칠 내로 당도할 것입니다.”

“좋다!”

말 그대로 국가의 모든 힘을 결집해서 모아 낸 전력이었다.

네 개의 바퀴를 끼워 마차를 조립하듯.

조각조각 모인 힘들이 하나로 합쳐져 커다란 전력으로 바뀌고 있었다.

이제는 앞으로 나아갈 일만 남았다.

우겸은 울컥 치미는 호연지기에 휩싸여 벌떡 일어섰다.

“준비는 다 되었다. 우린 싸우고, 이겨서, 북경을 지켜낼 것이다.”

으르렁거리는 듯한 우겸의 기세에 장수들이 모두 압도되어 조용히 전의를 다졌다.

며칠 후.

우겸은 전군이 모두 북경을 빠져나오자 선두에서 외쳤다.

“성문을 닫아라!”

북경의 내성을 둘러싼 외벽에는 각 방향마다 아홉 개의 문이 존재했다.

덕승문(德勝門).

안정문(安定門).

동직문(同直門).

조양문(朝陽門).

서직문(西直門).

부성문(阜成門).

정양문(正陽門).

숭문문(崇文門).

선무문(宣武門).

서쪽 창의문(彰義門)을 제외한 총 아홉 개의 관문 중의 하나라도 격파된다면 이는 북경의 패배나 다름없었다.

우겸은 일부러 병력 대부분을 이끌고 성벽 앞에 포진했다.

그는 정렬해 있는 이십만의 대군을 둘러보았다.

각 부대의 복색과 무장은 가지각색이지만 나라를 지키겠다는 결의만큼은 같은 자들이었다.

“불과 몇 달 만에 훈련된 군치고는 훌륭하도다.”

주변의 장수들이 모두 뿌듯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십만의 병력 중 절반 이상이 급히 징발된 병사이며, 특히 비조군으로 포함된 강호인들은 제각각 싸우는 법밖에 모르는 자들이었다.

그런 자들에게 진형을 갖춰 움직이는 방식을 한두 달 만에 가르치는 일은 절대로 쉬운 일이 아니었다.

각자가 뛰어날수록 개성이 강한 법이지 않던가. 모두가 자존심을 버리고 한마음 한뜻으로 움직이게 만들 수 있었던 건 저들 중 한 사람의 도움이 컸다.

‘황금 장수.’

우겸은 장소호가 선두로 있는 비조군을 특히나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새로 즉위한 그의 황제, 주기옥과의 대화를 떠올렸다.

“병부상서. 그대가 역적의 죄를 뒤집어쓸 각오로 나를 황제로 만들었음을 잘 알고 있소.”

“아닙니다. 마땅히 해야 할 일이었습니다. 폐하.”

“그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는 게 제일 어려운 일 아니오? 나는 언변이 뛰어나지 못하니 본론부터 말하겠소. 병부상서에게는 큰 전쟁에 앞두고 해 주고 싶은 말이 있어서 자리를 만들었소.”

“무엇이든 하명하십시오. 폐하.”

“화기와 화포를 중심으로 전략을 짜는 게 좋겠소. 기마술로는 오이라트를 이기기가 쉽지 않을 것이오. 그들을 짐승이라 생각하고 덫을 놓고 사냥하시오. 신기영(神機營)이 도움이 될 테니 모두 데려가도 좋소.”

신기영은 황실 직속으로 화포와 화기를 개발하고 사용하는 것에 능통한 특수부대였다.

우겸은 감탄했다.

‘화기에 조예가 깊으신 줄은 알고 있었다만, 전략에도 소양이 있으셨단 말인가?’

우겸은 주기옥이 천무련의 대장간에 있던 시절에 몇 번이나 만나 본 적이 있었다.

황족이 직접 풀무질을 하고 망치를 두드리던 그 광경을 어찌 잊을 수 있으랴.

“명심하겠습니다. 폐하.”

“화기의 적은 기마병이 아니오. 날씨지. 날씨가 점점 서늘해지고 있소. 만약 비라도 오면 화약을 쓰기 어려워 큰 낭패를 볼 테니 늘 지붕이 있는 곳에 화약을 보관하고 천기를 살펴 전투를 치르시오.”

“지붕이 있는 곳을 찾아 화약을 보관하겠습니다. 명심하겠습니다. 폐하.”

“병부상서는 나라의 기둥이오. 나는 그대가 목숨을 잃지 않았으면 좋겠소. 그래서 말인데, 무예가 뛰어나 수만의 병사들에게 둘러싸이더라도 무사히 빠져나올 수 있는 사람이 한 명 있는데, 혹시 누군지 아시오?”

“천무련주를 말씀하시는지요.”

“그렇소. 그를 늘 곁에 두시오. 병부상서는 목숨을 버릴 각오로 싸운다 하였지만, 그대를 잃으면 이 나라는 끝일 거란 생각이 드는군. 무사히 돌아오시오.”

“폐하……!”

넘치는 배려와 애정에 우겸은 목이 메는 것을 느꼈다.

환관 왕진의 품 안에서 소꿉놀이나 하던 주기진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었다.

‘이분이다. 이분을 위해선 죽을 수 있다.’

우겸은 그 순간 무슨 일이 있어도 북경을 지키겠노라 다시 한 번 다짐하였다.

“천무련주.”

“병부상서. 뭐라고 하셨습니까?”

“아니, 아니다.”

우겸은 비조군에서 가장 눈에 띄는 황금 장수로부터 눈을 떼고, 전군을 향해 외쳤다.

“나 우겸이 전쟁의 가장 선두에 설 것이다!”

조용히 시립해 있던 병사들의 시선이 우겸에게 쏟아졌다.

십만이 넘는 인원의 시선을 받으며 우겸은 전력을 다해 소리쳤다.

“가장 선두에 서는 자로서 말하겠다. 선봉이 후위보다 물러선다면 후위가 선봉을 참하라! 사졸들이 장수의 명을 듣지 않고 도망친다면 참하라! 장수된 자가 사졸들을 돌보지 않고 도망친다면 그 또한 참하라!”

장수들과 병사들의 눈이 동그래지는 것이 보인다.

파격적인 이야기였을 것이다.

신분 고하를 막론하고 도망치는 자는 무조건 죽이라는 명령이지 않은가.

우겸은 손가락으로 단단하게 닫힌 성문을 가리켰다.

“성문은 닫혔다!”

우겸 본인이 스스로 선두에 선 상황이다.

그는 이번엔 자기 자신을 가리켰다.

“여기가 끝이다. 도망칠 곳은 없다!

충격을 받은 듯한 병사들에게 우겸은 진심을 담아 소리쳤다.

“명심하라. 목숨을 걸고 싸운다면 우리는 승리한다! 우리에게 물러선다는 선택지는 없다. 만약 누군가가 비겁하게 도망친다면 그게 누구든 당당히 목을 베도 좋다! 약속하겠다! 모두가 한마음으로 싸운다면, 우리는 이 자리에서 승리하여 다시 만날 것이다!”

우겸의 뜨거운 마음이 서서히 사람들에게 전달되었고, 모두가 우겸의 열정과 충성심에 전염되었다.

“오오오오!”

“퇴각은 없다아!”

악을 지르는 병사들을 보며 흡족해진 우겸이 힘차게 외쳤다.

“출격!”

총 인원 이십만.

우겸을 따르는 병사들이 각 관문으로 나뉘어 모든 방위를 방어하기 시작했다.

***

“생각보다 단단하군.”

“그래 봤자 거북이 등껍질이 조금 더 두꺼울 뿐이오.”

“그런 것치고는 어제 그 등껍질에 많이 깔려 죽었던데.”

에센의 지적은 날카로웠다.

북경을 침공한 첫날.

십오만이란 대군으로 자형관을 파죽지세로 통과한 오이라트의 주력군은 북경을 포위하기에 앞서 창의문의 북쪽에서 선봉군끼리 첫 번째 교전을 벌였다.

탁 트인 평원에서의 전투였으나, 우첨도어사 왕횡의 지휘를 받는 명군은 놀랍게도 오이라트와 싸우면서 조금도 밀리지 않고 오히려 우세를 점했다.

미친 듯이 말을 달려 화살을 쏠 거리를 좁히더니 느닷없이 불꽃을 내뿜는 화살을 쏘아 댄 것이었다.

화살뿐만 아니라 화약으로 인한 불벼락을 맞은 오이라트의 전사들은 비명을 지르면서 불에 타서 쓰러졌다.

그 수가 수백 명.

화가 많이 난 에센이 직접 피해와 혼란을 수습하며 우겸을 비롯한 수뇌부를 끌어내 보려 했으나, 우겸과 수뇌부는 그의 도발에 말려들지 않고 침묵을 지켰다.

오이라트의 패배다.

교전이 끝나고 서로 물러나자 결국 오이라트의 피해가 더 컸다.

“형님, 내게 맡겨 주시오.”

“우량탕하이.”

에센은 자신의 동생 우량탕하이가 섬뜩하게 눈을 빛내는 모습을 보고 듬직해졌다.

육척거한.

듬직한 체구의 우량탕하이는 대초원 대전사의 사사를 받은 전사 출신이었다.

그는 타고난 신체 조건 말고도 날 때부터 뛰어난 능력이 하나 있었는데, 그게 바로 하늘의 날씨를 알아채는 감각이었다.

“내일은 비가 올 것 같소.”

씩 웃는 우량탕하이의 얼굴은 자신만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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