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풍운객잔 2부-487화 (616/686)

20권 7화

제40장 백호마왕(白虎魔王) (7)

에센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파란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았고, 선선히 부는 바람은 물기 없이 건조하다.

그럼에도 우량탕하이는 비가 온다 말한다.

보통 사람이라면 믿기 힘든 이야기였으나, 에센은 그 말을 의심하지 않았다.

우량탕하이에게는 예전부터 날씨를 알아맞히는 신묘한 직감이 있었다.

“그래. 비가 오면 그 불이 나는 화살은 쏘지 못하겠군.”

“형님, 그놈들은 그깟 도구의 힘으로 선봉대를 좀 괴롭혔을 뿐이오. 비가 오면 무용지물이지. 반면에 우리 전사들은 비가 와도 잘 싸울 수 있소.”

“그렇지. 우리 전사들은 빗속에서 더 잘 싸우지.”

“바로 그거요. 빗속에서도 늘 말을 달렸으니까.”

씩 웃는 우량탕하이의 모습은 듬직했다.

그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을 만큼 용맹해서 지금까지 수많은 전공을 세웠다.

오극충, 오극권.

몽고 출신이었던 명의 장수들도 우량탕하이 한 사람을 막아 내지 못하고 파도에 휩쓸리듯 쓰러졌었다.

“좋다! 네 뜻대로 싸워 봐라.”

“알겠소. 그런데 형님. 붉은 늑대는 싸울 수 없는 거요?”

“아마 싸우기 힘들 것 같다. 상세가 심각하여 후방으로 보냈다. 살 수 없을지도 모르겠어.”

“흥, 잘됐군. 이참에 내가 붉은 늑대보다 더 강하다는 것을 증명하겠소.”

“그래. 내 동생이라면 능히 그럴 수 있을 것이다.”

“지켜만 보시오!”

우량탕하이는 에센이 건네주는 군령을 받으며 호탕하게 웃었다.

***

선봉군의 승전보를 들은 바로 그다음 날, 명군의 지휘부는 하늘을 새카맣게 뒤덮은 먹구름에서 장대비가 쏟아지는 모습을 보며 서로 걱정스러운 눈빛을 교환했다.

“큰일이군.”

“화약에 불이 잘 안 붙겠는데.”

“선봉군처럼 기마병이 화전을 쓰는 작전은 쓰지 못할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병사 배치를 바꿔야 하겠군.”

전략적 회의를 거듭하던 장수들이 서서히 목소리를 낮췄다.

우겸이 뚫어져라 지도를 응시하며 골똘히 생각에 잠긴 모습이 심상치 않아 보였던 탓이다.

“민가에 남아 있던 주민들은 어찌 되었나? 모두 피신시켰나?”

북경 내부에서 살아갈 여유가 없는 사람들은 대부분 북경의 성벽 밖에 민가를 짓고 농사를 지어 생활하고 있었다.

부유한 자들은 성내에 살고, 가난한 자들은 성밖에 사는 건 예로부터 이어져 온 이치다.

무청백 석형이 대답했다.

“덕승문 밖의 민가를 말씀하시는 거라면 모두 성내로 피신시켰습니다.”

“잘됐군. 그럼 거리낄 것이 없겠어.”

“예?”

“군의 배치는 이렇게 하도록 하지.”

우겸의 제안을 들은 장수들은 처음에는 눈살을 찌푸린 채 의구심을 표했으나, 이야기를 들을수록 우겸의 말에 설득되어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우겸은 그때까지 묵묵히 뒤에서 침묵을 지키고 있는 한 청년의 의사를 물었다.

“장 공. 그대는 어찌 생각하나?”

막사 안에 있던 모든 이들의 시선이 황금 갑주를 입은 청년에게로 몰렸다.

소호는 잠시 당황하다가 대답했다.

“저는 병부상서께서 말씀하신 의견이 좋은 전략이라 생각합니다. 여기 계신 무장분들께서 저보다 더 식견이 높으시니 이미 옳은 지적을 많이 해 주셨고요.”

소호는 굳이 나설 마음이 없었기에 겸손한 태도를 유지했다.

막사 안의 장수들도 소호의 의견에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우겸이 그에게 바라는 의견은 그런 전략적인 부분이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그는 고개를 저은 뒤 재차 물었다.

“그런 의미가 아닐세. 걸출하게 무예가 뛰어난 자로서, 자네가 에센의 무장이라면 어찌할 것 같나? 내가 말한 전략대로 움직이겠는가?”

“아……!”

소호는 감탄했다.

‘육모담을 염두에 두고 있구나. 하긴 강한 사람은 또 있을 수 있으니 조심해서 나쁠 건 없겠어.’

우겸이 원하는 바를 알았으니 소호는 곰곰이 생각을 되짚어본 뒤 한 가지 문제점을 찾았다.

“여기 이 지점. 제가 이 상황까지 몰린다면, 이미 전투가 걷잡을 수 없는 상황이라면, 그리고 제 무력에 자신이 있다면……. 아마, 도박을 할 것 같습니다.”

“도박이라면?”

소호는 대답 대신 지그시 우겸을 바라보았다.

우겸은 단번에 알아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마지막 힘을 다해 내 목을 노린다는 소리군.”

“병부상서께서 선두에 계시지 않는다면 걱정할 필요 없을 것 같은데요.”

“부(不)!”

우겸의 대답은 단호했다.

주변의 장수들도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씁쓸하게 웃었다.

“출진할 때 내가 전군에 선언하는 말을 듣지 못했는가?”

“들었죠. 도망치는 자는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참하라는.”

“그렇게 말한 자가 뒤에서 몸을 사린다면 어떤 병사들이 목숨을 걸고 싸우겠는가.”

지극히 옳은 말이지만 또 한편으론 부하들의 속이 썩어 들어가는 결정이기도 했다.

‘올곧은 자는 참으로 피곤하구나.’

소호는 머리를 긁적이다가 난감한 듯 웃었다.

“알겠습니다. 그럼 병부상서 곁에 있죠, 뭐.”

한 나라의 상서를 향한 것치고는 지나치게 가벼운 말투였으나 그걸 트집 잡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우겸 또한 그저 묵묵히 감사의 뜻을 표했다.

“고맙군. 부탁하지.”

“네.”

두 사람의 짧은 문답과 함께 명나라의 군대는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투구를 쓰지 않으면 눈을 뜨고 있기도 힘든 폭우 속에서 군의 진형이 결정되고, 각자 아홉 개의 관문을 지키기 위해 장수들이 흩어졌다.

해가 떴을 텐데도 장대비 때문에 밤처럼 느껴지는 어두운 오전.

뛰어난 시력으로 주변을 정찰하던 오이라트는 우겸이 있는 덕승문을 향해 일만의 기병을 돌진시켰다.

***

“기병이 얼쩡거린다고? 우릴 도발하는 것처럼?”

에센의 동생.

우량탕하이는 감히 기마 민족인 오이라트의 전사들에게 말을 타고 도발하는 명나라의 머저리들을 용서할 수 없었다.

그는 에센이 그에게 허락한 일만의 기병을 데리고 질풍처럼 내달릴 준비를 끝냈다.

그런데 돌진 명령을 내리기 직전에 상대의 진형이 이상하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크하핫! 복병을 숨겼나 보군. 고작 그것을 계략이라고 쓰는 것이냐?”

하늘에 구멍이 뚫린 것처럼 쏟아져 내리는 장대비 속에서도 우량탕하이의 호탕한 웃음소리는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졌다.

명군의 진형은 교묘하게 상리를 벗어났다.

덕승문을 지키는 병력이 지나치게 성벽 쪽으로 붙어서 물러나 있는 상태다.

좌측에는 민가 수천 채가 모여 있는 집락촌이 있었는데, 비가 오고 어두워서 그럴 수도 있겠으나 사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이 텅 비어 있었다.

“우릴 도발해서 민가 쪽으로 끌어들일 생각이군. 기병의 장점을 살릴 수 없는 마을 안에서 복병으로 기습을 가한 뒤 본대로 포위할 생각이야.”

우량탕하이는 이가 드러나도록 웃었다.

“단순하군. 황제가 붙잡히고도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나?”

그렇다면 오이라트의 기병이 얼마나 빠른지 보여 줘서 정신을 차리게 만들어 줄 것이다.

민가에서 복병으로 공격한다?

우습다.

그들은 우량탕하이의 말꼬리조차 보지 못하리라.

“도발당해 뒤쫓는 척을 하다가 마을에는 들어가지 않고 곧바로 본대를 친다. 크게 원을 그리면서 화살만 퍼부어 준 뒤에 다시 돌아오는 거다. 알겠나?”

“옛!”

북방 기마 민족의 기마 궁술은 천하제일이다.

우량탕하이는 그 점을 이번 기회에 적들에게 똑똑히 각인시키겠다 다짐하며 곧바로 말 위에 올라탔다.

“추격하라아—!”

“우오오오!”

육 척 거구. 우량탕하이를 선두로 하여 일만의 기마병들이 미친 듯이 말을 달리는 모습은 장관이었다.

쏟아붓는 것 같았던 장대비가 그들의 몸을 적시지 못한 채 튕겨 나가는 것처럼 보일 지경.

근처에서 깔짝거리면서 그들을 도발하던 명나라 기병들이 혼비백산하여 꽁지가 휘날리게 도망쳤다.

두두두두두두———.

덕승문 인근은 순식간에 수만의 기마가 움직이는 거대한 진동에 휩싸였다.

피슈슈슉—.

“으아악!”

선두의 명나라 기마병 중 몇 명이 화살을 맞고 낙마해 형체도 알 수 없게 말발굽에 짓이겨졌다.

우량탕하이는 명의 기마병들이 일제히 민가 쪽으로 향하는 모습을 보면서 가소롭다는 듯이 웃었다.

“그럴 줄 알았지. 우린 쫓지 않는다! 바로 본대로 향한다!”

히히히힝—!

거세게 방향을 전환하자 말들이 크게 울부짖었다.

오이라트의 기마병들은 신묘한 기마술로 부드럽게 방향을 꺾어 곧바로 병부상서 우겸이 있을 덕승문을 향해 질주했다.

민가에 숨어 있던 복병들은 당황할 것이다.

기껏 유인해 온 오이라트의 기마병들이 민가 쪽으로 쫓아오질 않았으니 말이다.

덕승문 인근의 본대도 당황했는지 창을 들어 올리고 새삼 진형을 가다듬으면서 난리를 쳤다.

“장전!”

우량탕하이가 손을 들어 올리는 순간 뒤따르는 일만의 기마병들이 일제히 각궁을 꺼내 화살을 장전했다.

달리면서 화살을 쏘고, 그대로 크게 원을 그리며 거리를 두고 빠져나간다.

‘속 터지겠지. 함정을 파 뒀는데 오히려 화살에 두들겨 맞기만 할 테니. 그게 기마 궁수의 힘이다!’

저들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

화살을 쏟아붓고 유유히 떠나는 오이라트 기마병보다 빠른 자들은 그 누구도 없으니 말이다.

그런데 그 순간, 장대비 사이로 살짝 비친 햇살 한 줄기가 좌측의 어두컴컴한 민가 쪽을 비췄다.

“음?”

활을 쏘라 명령을 내리려던 우량탕하이가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목숨이 경각에 달린 순간, 사람은 가끔 초인적인 지각 능력을 발휘한다.

시간이 멈춘 듯했다.

어두컴컴한 민가 쪽.

목재로 얼기설기 엮은 허름한 지붕 아래, 동그랗고 길쭉한 쇳덩이들이 그들을 향해 놓여 있었다.

“흡!”

섬뜩했다.

얼핏 본 것만 해도 수백 문.

마치 거대한 용의 이빨처럼, 수백 문의 화포들이 오이라트의 기마병들을 향해 입을 벌리고 있었다.

우량탕하이는 그 순간 머릿속에서 번개가 치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이런 미친놈들이. 화포를 민가의 지붕 아래에 설치했구나!’

상상조차 못 했던 일.

당연히 성벽 위에 설치해 뒀을 줄 알았던 화포를 저런 허술하고, 불만 지르면 모조리 타 버릴 것 같은 낡은 민가에 넣어 뒀을 줄이야.

저렇게 지붕이 있는 곳이라면 화약이 물에 젖을 염려도 없다.

건물 안에서 화포를 쏘는 것이니 불을 붙여 화포를 쏘는 것에도 문제가 없다.

‘만약 내가 유인책을 따라서 저리로 공격했으면 어찌하려고? 자폭이라도 할 셈이었나? 아니면 내가 복병이 있는 줄 알고 경로를 틀 거라고 이미 예상했단 말인가?’

숨 쉴 틈도 없이 옭아매는 거미줄처럼 치밀한 전략이 느껴졌다.

병부상서 우겸의 지략이 만들어 낸 고도의 함정이다.

우량탕하이는 그 순간 절망을 느꼈다.

“피해라아아앗!”

그의 절규는 빗속에서 허무하게 흩어졌다. 우량탕하이가 황급히 고삐를 잡아당겨 경로를 꺾었으나, 그건 이제나저제나 활시위를 놓을 때만 기다리던 오이라트 기마병들에게는 날벼락과 같았을 뿐, 쉽게 대응하지 못했다.

민가 쪽에서 불빛이 번쩍였다.

황실 직속 화포 부대 신기영이 운용하는 팔백 문의 화포가 일제히 불을 뿜었다.

퍼퍼퍼퍼펑!

장대비가 흩어졌다.

뻥 뚫리는 공기.

한때는 사람과 말이었던 조각들이 뒤집히는 땅거죽과 함께 사방으로 흩어졌다.

“으아아아악!”

비참한 비명 소리가 장대비를 꿰뚫고 터져 나갔다.

콰드드득!

우직!

콰아앙!

전력으로 질주하던 인마 일체가 터져 나가는 광경은 호쾌하면서도 잔인했다.

핏물이 바닥을 적셨다.

팔백 문의 화포가 일제히 가한 포격은 어마어마한 결과를 남겼다.

일만의 기마병이 이젠 절반도 남지 않은 듯 보였다.

단 한 번의 포격으로 끝인가?

아니다.

그럴 리가 없었다.

민가에서 또 한 번 불빛이 번뜩이는 순간, 오이라트 기마병들은 모두 전의를 상실했다.

“이놈드으을!”

용맹을 잃지 않은 사람은 우량탕하이와 그의 직속 전사 십여 명뿐이었다.

총 열한 명의 기마병은 오히려 더 속도를 미칠 듯이 높여서 아예 덕승문 쪽 본대를 향해 질주했다.

그들이 질주하자 포격에서 살아남은 기마병들도 그제야 제정신을 차리고 뒤따라 합류했다.

크게 놀라 경계하는 명나라의 병사들을 보며 우량탕하이는 더욱 전의를 불태웠다.

“저곳이다! 우겸! 나는 우겸의 목을 베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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