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풍운객잔 2부-489화 (618/686)

20권 9화

제40장 백호마왕(白虎魔王) (9)

마치 나비의 날갯짓이 거대한 태풍으로 변하듯, 덕승문에서의 승리는 북경의 전장을 완전히 뒤바꿔 놓았다.

동생이 덕승문을 공격한 바로 그 날, 에센은 나머지 병력을 데리고 서직문을 공략하는 중이었는데 안타깝게도 서직문을 지키는 도독 손당은 그리 군재가 뛰어난 자가 아니었다.

그는 온갖 싸움법에 통달한 에센의 상대가 아니었고, 이리 치고 저리 칠 때마다 번번이 휘둘려서 결국 싸움이 시작된 지 얼마 지나기도 전에 에센의 병력에 완전히 포위되었다.

시종일관 일방적으로 농락당한 셈이다. 그러나 다 잡은 사냥감을 손바닥 위에 올려뒀을 때 에센은 동생의 소식을 듣고 말았다.

“그럴 리가 없다!”

우량탕하이와 일만 기마병들의 죽음은 에센에게 큰 충격을 줬다.

붉은 늑대가 없는 지금 그가 군령을 믿고 맡길 만한 용장이 동생인 우량탕하이 말고 또 누가 있겠는가?

에센은 초조함을 참지 못했고 이전보다 훨씬 급해졌다.

자고로 사람은 마음이 급해지면 실수를 하는 법.

서직문의 성벽 위에는 병사들이 포진해 있었는데, 에센은 한순간의 실수로 화포와 화전의 사정거리 안으로 병사들을 움직이고 말았다.

성벽 위의 화포가 불을 뿜는 순간 에센은 인생무상을 느꼈다.

허망한 일이다.

단 한 순간의 실수로 모든 게 무너지는 건 너무나 쉬웠다.

순식간에 쏟아진 포격에 아끼던 병사들이 시신도 찾기 힘들 만큼 뭉개졌고, 뿌옇게 피어오른 먼지 때문에 적들의 모습이 잘 보이지 않는다.

그 상황에서 남북 양쪽에서 명의 지원군까지 나타났다.

숫자는 각각 일만.

그러니 퇴각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다 잡은 것이나 다름없던 손당이 멀쩡히 그를 배웅하는 모습을 보는 순간엔, 에센은 이성을 잃고 칼을 바닥에 집어 던지고 말았다.

다음 날, 에센은 비교적 경계가 덜한 창의문으로 공격했으나 그것 또한 오산이었다.

우겸은 치밀한 전략가였다.

그는 기병의 행동을 방해하기 위해 주변의 나무와 돌을 뜯어와 벽과 장애물을 쌓아 두었고, 곳곳에 은밀히 화기를 배치해 방어에 정성을 쏟았다.

부총병 무흥, 도독 왕경(王敬)이 화전과 신총을 효과적으로 사용해서 잘 싸우고 있었는데, 처음으로 에센에게도 호기가 찾아왔다.

감군의 역할을 맡고 있던 태감 백여 명이 전공이 탐이 났는지 느닷없이 병사들을 이끌고 무모하게 돌격한 것이다.

방어만 해야 할 자들이 직접 공을 세우겠다고 은신처를 버리고 뛰쳐 나왔으니 이보다 더 큰 기회는 없었다.

에센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몰아쳤고, 지휘관인 무흥이 그의 화살에 맞고 쓰러졌다.

에센은 그대로 몰아쳐서 명군 대부분을 인근의 토성으로 몰아붙이는 데 성공했다.

이제 마무리만 지으면 첫 승리를 따낼 수도 있는 상황.

그러나 하늘은 이번에도 에센의 편이 아니었다.

토성 근처에 사는 주민들이 위기에 빠진 명군을 보고 직접 성벽에 올라 오이라트 병사들에게 무거운 돌을 던져 댄 것이다.

아무리 사나운 오이라트 병사들이라도 성벽 위에서 내던지는 돌을 머리에 맞고 살아남을 수 있는 자는 없었다.

지지부진하며 시간을 끄는 사이에 휘황찬란한 황금 갑주를 입은 지원군까지 나타나니, 에센으로서는 더 이상 버틸 힘이 없었다.

그는 분기탱천하여 하늘을 향해 소리쳤다.

“으아아아! 하늘신이시여! 왜 제게 북경을 허락하지 않으십니까?”

에센은 패퇴했고, 그 길로 포로로 사로잡은 정통제 주기진과 함께 후방의 몽골고원까지 도망쳤다.

첩자를 통해 그 사실을 알아낸 우겸은 그 길로 곧장 오이라트의 병사들을 추격해, 일제히 포격을 가해 일만의 피해를 입혔다.

닷새 동안 밤낮없이 지속된 북경의 전투.

크나큰 승리를 얻은 우겸의 소식은, 토목보의 변을 만들어 낸 주기진과 비교되며 명나라 전역으로 순식간에 퍼져 나갔다.

***

“자네, 그거 들었나? 천무련에서 전국 각지에 정무관이라는 걸 세운다는구만?”

“정무관? 그게 뭔데? 무술을 가르쳐 주는 곳인가?”

“맞아. 기초적인 무공을 가르쳐 준다더군. 그것도 소림이나 무당 같은 강호에 유명한 무림 문파들의 기본 무공들을 가르쳐 주는 모양이야. 요새 그 일 때문에 전국이 난리인데 몰랐는가?”

“세상에! 그 말 진짜인가? 소림과 무당의 기본공을 가르쳐 준다고?”

“그렇다니까? 지금 마을이 그거 때문에 벌써부터 난리야. 내 새끼는 무공 배웠으면 좋겠다면서 다들 어디에 가면 되냐고 묻는다니까?”

“거 참, 좋긴 한데 얼떨떨하네. 무공 하나 잘못 익혔다고 죽어라 쫓아가서 근맥까지 끊어 놓는 게 무림인들 아닌가? 그런데 갑자기 왜 이러는 거야? 왜 기본공을 아무한테나 가르쳐? 그래도 돼?”

“신기하지?”

“그래!”

“그게 다 천무공자의 생각이라지 뭔가?”

“응? 아아! 천무련에서 차린다고 했었지? 그분이 직접 추진하는 거야?”

“북경 전투를 겪으면서 그분이 느끼는 바가 많았다더군. 무공을 익히지 못해서 죽는 병사들을 보니 보통 사람들 모두가 무공을 익힐 기회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시나 봐. 모든 이들에게 무공을 가르치는 곳이 있어야 한다면서 이제는 전국에 정무관을 짓겠대.”

“역시 천무공자야! 대단한 사람일세!”

“영웅이지. 영웅이야.”

“그런데 대문파의 기본 무공을 푼다고 하면 그거 무림 문파들이 가만히 있겠어? 자기들 밑천을 빼앗기는 건데?”

“가만히 안 있으면 어쩌려고? 황실에서 천무련을 얼마나 좋아하는데? 그 이야기 못 들었나? 북경 전투가 끝나니까 황실에선 천무공자가 구국의 영웅이라면서 온갖 상을 다 내렸다지 않은가?”

“그렇구만! 그러고 보면 이 일은 천하 만민을 위해 한다는 명분도 있어.”

“그래. 역시 똑똑한 사람들은 하는 일이 뭔가 달라. 빈틈이 없어.”

“천하를 논하는 무공에, 이제는 황실도 인정하는 전공까지 세우다니. 지금 시대에 천무련에 맞서는 건 미친 짓이겠어.”

“각지의 정무관 출신 중에 무공이 출중한 자는 천무련의 무인으로 뽑겠다더군. 그뿐인가? 어린아이 중에 재능이 있는 자가 있다면 무산학관으로 추천도 해 준다네.”

“세상에, 일약 출세할 수도 있겠군. 나도 가만히 있을 수 없겠는걸?”

“우리야 이미 늦었지만 애들은 바꿔야지.”

“나도 알아봐야겠어. 내 몸은 내가 지켜야 하는 법인데, 내 새끼들은 무공 하나라도 익히고 있게 해야지.”

“옳은 말이야. 천무공자 만세일세.”

“만세! 천무공자 만세!”

천무련에서 전국 각지에 정무관을 짓는다는 소식이 천하를 뒤흔들었다.

명분은 모든 사람이 무공을 익힐 수 있게 해 주겠다는 것.

무공과는 연이 멀었던 사람들은 열광하였으나, 모든 일이 그렇듯 정작 당사자 중에는 도저히 웃을 수 없는 사람도 많았다.

소림사 지객당.

묵묵히 염주를 굴리고 있는 지객당주 계현을 중심으로 팔파일방의 명숙들이 모두 모였다.

정파라 자칭할 만한 문파들의 오랜만의 모임이니만큼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흘러야 마땅하겠으나 안타깝게도 지객당의 분위기는 살얼음을 걷는 것처럼 긴장되어 있었다.

사천의 명문 아미파의 장문인.

정허사태(靜虛師太) 때문이었다.

그녀는 세수 백 세에 가까운 나이답게 백발의 머리에 주름진 얼굴을 지니고 있었는데, 얼마 전에 주화입마를 겪은 터라 더욱 위태로운 인상이었다.

볼은 움푹 들어갔고, 눈 밑에도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깡마른 그녀에게 남은 것은 호랑이처럼 번뜩이는 강한 눈빛뿐이다.

‘그래도 한때는 표설천운장의 고수로 천하에 명성이 자자했는데. 몰골이 말이 아니구나.’

‘그리 친했던 멸진사태가 얼마 전에 그렇게 갔으니……. 주화입마가 오는 것도 당연하지. 좀 쉬시면 좋으련만.’

‘아미파의 미래가 어둡구나.’

다들 난감한 얼굴로 딴짓을 하는 것도 당연했다.

쿵!

정허사태는 주름지고 구부정한 손으로 다탁을 강하게 내리쳤다.

“여러분. 언제까지 그리 외면할 것입니까? 이건 우리가 해결해야 할 문제예요. 모른 척한다고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약속대로 천무공자에게 이제는 자리에서 물러나라고 말해야 한단 말입니다.”

정허사태는 안색은 초췌했으나 목소리는 여전히 카랑카랑했다.

“아미타불.”

지객당주 계현이 안타까운 마음을 가득 담아 불호를 읊었다.

“장문인. 장문인의 마음을 왜 모르겠습니까? 하지만 천무공자는 큰일을 잘 해내고 있습니다. 그가 약속한 대로 왕진과 흑시군은 무너졌고, 전쟁에 참가하여 전공을 세워 강호 무림의 명성을 떨쳤습니다. 지금은 약속을 믿고 기다리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계현의 말은 팔파일방 대부분의 의견을 대표한다고 봐도 무방했다.

천무공자는 예전의 무림맹처럼 천무련을 재건하겠다고 약속했고, 실제로 기대 이상의 성과를 보이며 천무련을 거대하게 키워 내고 있었다.

한 번 기세를 타고 하늘로 날아오른 용을 굳이 드잡이질해서 끌어내릴 필요가 어디에 있겠는가?

그 용이 자신들에게 이빨을 드러낸 것도 아닌데 말이다.

그런데 정허사태의 생각은 달랐다.

“쯧쯧, 한심한 사람들 같으니. 이리도 어리석을 줄이야. 나이가 들다 보면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게 되는 때가 있습니다. 여기 계신 팔파일방의 명숙분들, 다들 그런 생각해 본 적 없나요? ‘지나치다.’라고요.”

지객당은 조용했다.

워낙 정허사태가 나이도 많고 배분이 높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이곳에 모인 문파의 명숙들은 다들 강호 무림 어딜 가도 존장의 대우를 해 주는 사람들이었다.

그런 사람들에게 한심하다니.

심지어 어리석다니?

청성의 장문인은 얼굴이 빨개졌고, 종남의 젊은 장문인인 백리해는 분을 눌러 참느라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정허사태의 말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지금의 련주는 황실과 연이 깊다면서요? 심지어 황제를 모시면서 일을 하지만 않을 뿐, 관직도 받았다면서요? 그 관직의 이름이 뭐였죠?”

“아미타불, 백호대장군이지요.”

“그래요. 백호대장군. 황제가 자신의 곁을 지키는 신수(神獸)로 임명했다죠? 황실로 들어오라는 것을 거절해서 그렇지, 궁에서는 이미 대장군에 준하는 사람으로 취급한다던데. 어디 무서워서 반발이라도 하겠나요? 황실의 관료를 련주로 모시는 것과 뭐가 다릅니까?”

“그리 말씀하신다면 많이 다르지요. 장문인, 천무공자는 관직을 거절하려 했는데 황실에서 상을 내릴 때 억지로 이름을 지어 준 것이지 않았습니까?”

“이리 붙이나 저리 붙이나, 결과는 똑같아요. 우리는 황실의 관료를 모시고 있는 것입니다. 관과 무림은 별개이거늘. 이게 왕진이 사사건건 간섭하던 예전과 무엇이 다를까요? 이쯤 했으면 됐어요. 그만 물러나라 하세요.”

“장문인.”

“애초에 우리가 공들여 키운 원강이를 맹주로 올리기로 했었는데, 어디서 뜬금없이 튀어나온 사람이 연맹을 만들어 버렸으니. 그게 말이나 되는 일이었습니까?”

“아미타불.”

계현이 처음 내뱉었던 불호가 정허사태를 안타까워하는 마음을 담은 것이었다면, 지금의 아미타불은 스스로 흥분을 가라앉히기 위한 것이었다.

계현은 침중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장문인. 지금 천무공자에게 자리에서 내려오라 압박을 가한다면 천하의 사람들이 손가락질을 할 것입니다. 기껏 왕진과 흑시군으로부터 강호 무림을 구해 냈더니 은혜도 모르는 놈들이라고. 제 잇속밖에 챙길 줄 모르는 속물들이라며 욕하겠지요. 장문인께선 저희가 그리되길 원하십니까?”

“후훗, 그깟 손가락질을 좀 당하고 욕먹는 게 뭐 대수라고. 더 위험한 건 우리가 감히 손을 댈 수 없을 만큼 천무공자가 커지는 것이에요. 아닙니까?”

“아미타불. 아미타불.”

“솔직해지세요. 다들. 천무공자가 그리 명성을 떨치는데, 원강이는 어찌합니까? 우리의 사형제나 다름없는 그 아이가. 명문 적통의 힘을 모아 기른 미래의 무림맹주가 이 이상 밀리는 꼴을 두고 볼 거예요?”

대답은 없었다.

정허사태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주름진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큰 소리로 웃었다.

“용기 없는 사람들 같으니. 내가 나서지요. 이 늙은이가 욕이란 욕은 다 먹고 모든 일을 하겠어요. 그러니 그대들은 지켜만 보시지요.”

가소롭다는 듯이 웃은 정허사태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떠나버렸다.

무거운 침묵이 깔린 지객당.

서로를 바라보는 무림 명숙들 사이에선 불편한 공기만이 가득했다.

***

“누가 뭘 제안했다고?”

천무련의 련주실에서 비스듬히 누워 있던 소호가 호기심을 느끼고 되물었다.

섭주해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박박박박.

거친 소리가 들린다. 련주실의 구석에 앉은 대미미가 여기저기 상처가 난 황금 갑옷을 천으로 정성 들여 닦고 있었다.

“아미파의 정허사태가 이야기를 꺼냈답니다. 슬슬 소호 형이 자리에서 내려와야 하지 않냐고요.”

“흐음.”

“함부로 행동할 수 없게 만들까요?”

아미파의 장문인을 입 다물게 만들겠다는 섭주해의 말은 농담이 아닐 것이다.

천무련의 입지가 강해질수록 섭주해의 영향력은 더욱 강해지고 있었다.

소호는 고개를 저었다.

“내가 만나 볼게. 그 아미파 장문인이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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