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권 10화
제40장 백호마왕(白虎魔王) (10)
“말이 통할지 의문이네요. 그런 사람은 한번 마음을 정하면 절대로 흔들리지 않는 법입니다. 좋게 말하면 충성심과 의리가 깊고, 나쁘게 말하면 고집불통이에요.”
섭주해의 목소리는 냉랭했다.
“지난번에 아미파랑 만났을 때 멸진사태가 왜 그렇게 답답했는지 몰랐는데, 이제 보니 장문인을 닮았나 봐.”
“종두득두(種豆得豆: 콩 심은 데 콩난다)라고 하니 당연한 일이죠.”
“강남종귤강북위지(江南種橘江北爲枳: 강남의 귤을 강북에 심으면 탱자가 된다)라는 말도 있던데?”
소호가 너스레를 떨자 처음으로 섭주해가 웃었다.
“옮겨 심을 귤만도 못한 사람이니 그 말은 틀렸습니다. 그냥 콩이에요.”
“콩? 아니, 그건 너무한 거 아냐?”
소호는 배꼽이 빠져라 웃었다.
갑옷을 닦던 대미미가 왜 그리 웃냐고 물어볼 정도였다.
“괜찮아. 천무련에서 나를 적대하는 사람들은 귀중하잖아? 일단은 만나 보고 싶어서 그래.”
“……거절할 것 같긴 한데, 그럼 일단은 자리를 한번 만들어 볼게요.”
소호는 몰랐다.
섭주해의 그 짧은 침묵과 서늘한 웃음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며칠 후, 자리가 마련되었다고 해서 찾아간 천무련의 객당에서 소호는 분기탱천하여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른 정허사태를 만날 수 있었다.
“난 이번 일로 크게 실망했습니다, 천무련주.”
“예?”
“제 나이가 좀 있으면 백 살이 다 되어 갑니다. 제대로 움직이기도 힘든 노인을 이렇게 꼭 불러야 했습니까?”
소호는 당황스러워서 눈을 깜빡거렸다.
얼굴만 주름졌다뿐이지 평생 무공을 단련해서 허리도 꼿꼿한 노인이 그런 말을 하니 당혹스러울 뿐이다.
“제가 다 이유가 있어 거절을 한 것인데 그걸 빌미로 앞으로 아미파 제자들의 천무련 입성을 막겠다니. 이 무슨 해괴한 횡포란 말입니까?”
붉으락푸르락 한 얼굴을 보니 정허사태는 오늘 이 일을 단단히 따지고 돌아가겠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주해야! 야, 인마!’
소호는 너털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아무래도 섭주해는 거절하는 정허사태를 이 자리로 불러내기 위해 협박도 불사한 모양이었다.
웃으면 안 된다.
그랬다간 이 깐깐하고 유별난 노인과 정말로 추하게 드잡이질을 하게 될지도 몰랐다.
“콩…….”
“콩?”
“아니, 아미파의 장문인께서 마음이 단단히 상하셨군요? 오늘 저를 만나 주지 않는다면 아미파의 사람들을 천무련에 입성시키지 않겠다고 들으셨어요?”
“그러더군요! 련주는 몰랐던 겁니까?”
“으음.”
“중간에 어떤 자가 장난질을 쳤나 보군요. 말해 보세요! 누군지 알아내서 내가 직접 따져 봐야겠습니다!”
정허사태는 숨을 씩씩거리며 험악한 기색이었다.
소호는 빙긋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제가 지시한 건 아니지만, 그 사람이 딱히 틀리지는 않았네요.”
순간 정적이 흘렀다.
정허사태의 주름진 얼굴이 한 순간에 팍 일그러졌다.
“련주, 무슨 뜻으로 그런 말을 하셨습니까?”
“천무련의 맹우 중에 련주를 노골적으로 싫어하는 데다, 만나자는 청도 거절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맹우가 아닌 거겠죠?”
“……우리 아미파를 두고 하는 말입니까?”
“네.”
정허사태가 소호에 대해 어떻게 알고 있는지는 몰라도, 소호는 바보가 아니며 아미파를 두려워하는 겁쟁이는 더더욱 아니었다.
요망한 왕진과 겨루면서 온갖 술수를 직접 겪어 본 소호가 정허사태가 부리는 투정에 넘어갈 성싶은가?
환하게 웃는 소호의 얼굴은 정허사태에게 섬뜩함을 주기에 충분했다.
“놀랍소. 놀라워.”
정허사태는 혀를 내둘렀다.
“세상은 그동안 련주의 본모습을 모르고 있었나 보오.”
정허사태는 신음하듯 말했다.
“저를요? 네. 많이 모르죠.”
소호는 정허사태의 눈을 피하지 않았다.
“모두에게 친절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적이 되어 싸우는 걸 망설이지 않는구려. 그 둘을 모두 충족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건만. 그 배짱, 그 강단, 놀랍습니다. 하지만 련주도 어리긴 어린 모양입니다.”
“왜 그렇게 생각하셨어요?”
“차라리 뒤에서 칼을 휘두르지 그랬소? 이 늙은이가 한 말이 기분 나빴습니까? 그래서 발끈해서 이러는 거예요? 이러다 아미파랑 척을 지면요? 그땐 어찌하시려고요?”
늙은 생강이 맵다는 강호의 격언은 이래서 나온 것이다.
정허사태는 멸진사태처럼 고집스럽고 깐깐한 노인이지만, 소호의 도발에 단번에 넘어가지 않고 오랜 연륜과 경험으로 처세를 할 줄 알았다.
소호는 손을 내저었다.
“장문인. 제가 장문인께 나이와 경험으로 뭐라 말씀드릴 처지는 아니지만, 저는 지금까지 몇 년간 천무련을 이끌면서 느낀 게 있어요.”
“그게 무엇입니까?”
“제 편이 아닌 사람들을 제 편으로 만드는 건 한계가 있더라고요. 물론 시간과 정성을 들이면 가능은 하겠으나, 그렇게까지 할 이유가 있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정허사태는 자신이 목에 걸고 있던 백팔염주를 만지작거렸다.
“그 말은 아미파는 그렇게까지 정성을 들여서 회유할 필요가 없다. 그렇게 받아들이면 되겠습니까?”
“글쎄요. 그 정도는 아니고. 그 사이에서 고민하고 있다고만 해 둘게요.”
아미파 입장에선 모욕을 당했다며 펄펄 뛸 만한 이야기를 부정하지 않는다.
정허사태는 이젠 놀라움을 넘어서서 웃음을 터뜨렸다.
“흘흘, 오만합니다. 오만해요. 련주는 정말로 아미파가 련을 박차고 나가는 꼴을 보고 싶은 겁니까?”
“못 나가시잖아요?”
소호는 고개를 갸웃했다. 진심으로 상대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사천 무림은 이미 포화상태죠? 청성파는 절반으로 쪼개져서 힘이 약해졌고, 사천당문은 유일하게 흑시군에게서 큰 피해를 보지 않은 곳이고. 아미파도 주력이라 할 수 있는 고수들을 많이 잃었다고 들었어요.”
“……그래서요?”
“너무 어리석은 결정이잖아요? 청성과 사천당문은 이미 천무련과 함께하겠다고 약조를 한 상태인데, 정말로 아미파만 사천 무림에서 고립되시려고요? 사천당문이 아미파를 적극적으로 밀어내지 않을까요?”
정허사태의 눈이 가늘어졌다.
“련주, 지금 협박을 하시는 겁니까?”
“아미파가 나가도 좋냐는 협박은 장문인께서 먼저 하신 것 같은데요? 전 그냥 사실만 말했어요.”
“흘흘.”
정허사태는 혀를 차듯 웃으면서 소호를 노려보았다.
“제가 아끼던 파불신니가 그랬듯이. 얼마 전에는 멸진이 그러했듯. 아미파는 싸워야 할 때 물러서는 문파가 아닙니다. 만약 그리 보았다면 련주는 아미파를 단단히 잘못 보았어요.”
“네. 아미파의 무승들이 사나운 것이야 유명하죠. 싸워야 할 때 싸울 줄 아는 곳이잖아요? 솔직히 말하자면 그래서 저는 처음엔 아미파를 꽤 좋아했어요.”
정허사태의 주름진 눈가가 꿈틀 움직였다.
서로 살벌하게 신경전을 벌이다가 갑자기 칭찬을 하다니.
무슨 속내인지 의심스러워진 것이다.
“그런 거 있잖아요? 능력이 부족한데도 물러서지 않고 싸우는 것. 목숨을 걸고 끝까지 끈기 있게 도전하는, 그런 걸 저는 굉장히 좋아하거든요.”
소호는 부족한 말재주를 채우기 위해 손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최대한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 노력했다.
“왕진과 흑시군을 상대로 아미파가 그러더라고요. 정말 대단하다 생각했죠. 그런데 얼마 전에 멸진사태를 보고 생각이 바뀌었어요.”
“어째서요?”
“으음, 그냥 좀 실망했다고만 해 둘게요.”
사천당문을 희생양으로 내몰던 냉혈한 같은 모습, 명성을 떨치기 위해 어떠한 짓이든 하려던 그 집착 가득한 얼굴.
말하자면 끝도 없지만, 이미 죽어 버린 멸진사태를 능멸하는 이야기를 하면 아미파와는 정말로 돌이킬 수 없는 사이가 되어 버린다.
“으으음.”
다행히 정허사태도 사천당가로부터 그때의 과오를 전해 들은 것이 있는지 그 이상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소호는 침묵에 잠겨 고민하는 정허사태를 향해 부드럽게 말했다.
“장문인. 우리 소모적인 감정싸움은 하지 말아요. 솔직하게 서로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해야 일이 해결되지 않을까요?”
아미타불.
정허사태는 조용히 불호를 외웠다.
그녀는 온갖 감정이 일렁이는 눈빛으로 소호를 쏘아봤다.
“솔직한 이야기라니. 본 파를 소중히 여기지 않는 련주와 말입니까?”
“에이, 어차피 소중히 여겨질 생각도 없었잖아요? 저보고 빨리 자리에서 내려오라고 하실 분이 그러시면 납득이 안 되는데요?”
방긋 웃는 소호의 모습에서 무언가를 느낀 것일까.
정허사태는 처음으로 자신의 염주에서 손을 뗐다.
“련주, 내 한 가지 묻겠습니다.”
“말씀하세요.”
“련주는 우리 팔파일방의 명숙들이 그 자리에서 내려오라면 내려올 겁니까?”
“제가 할 일만 끝내면요.”
“흘흘, 그럴 줄 알았습니다. 그게 언제입니까? 해야 할 일은 무엇이고요? 설마 평생 걸릴 일은 아닐 테지요?”
비웃는 정허사태를 향해 소호는 자신만만하게 이야기했다.
“무림 일통.”
흡.
정허사태의 호흡이 멈췄다.
백 세의 나이에 가까운 그녀가 한참 동안이나 석상처럼 굳어 있는 모습은 기괴하기까지 했다.
일각이 여삼추 같은 시간이 지난 후.
그제야 마음을 진정시킨 정허사태가 날카로운 시선으로 소호를 노려보았다.
“련주, 제정신입니까? 백 년에 가깝게 살아오고 있지만 그런 말을 들은 것은 처음입니다.”
“어? 정말요? 장문인 시대에도 대단한 무인들은 있었잖아요? 장삼풍 같은 진인도 그런 말은 안 하셨어요?”
“그야 당연한 것 아닙니까? 장 진인은 그런 허황된 꿈을 이야기하지 않았어요!”
“허황된 꿈이라뇨. 충분히 가능한 일인데.”
“련주. 진심으로 하는 말이라면 그만두고 정신 차리도록 하세요.”
놀랍게도 이 순간 소호를 가장 싫어하는 사람이 조언을 하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무림 일통이라니. 그게 진심이라면 더 문제입니다. 평생을 걸려도 못 이룰 텐데, 지금 우리와의 약속을 지키지 않겠다는 말 아닙니까?”
“그게 아니에요. 앞으로 일 년. 그 안에 무림 일통을 할 수 있을지 없을지 결정이 나니 그 안에 결론이 날 거예요.”
소호는 정허사태의 다탁에 놓인 찻물을 살짝 다탁 위에 뿌렸다.
그리고 찻물을 이용해서 다탁 위로 찻물로 된 그림을 그렸다.
중원이라 불리는 지도.
그 동서남북과 각 주의 경계선을 실제와 비슷하게 그려 냈다.
“북서쪽 신강에선 마교가. 남쪽 안남 인근에선 칠성태극교가. 사천의 서쪽에선 혈신교가 창궐하고 있어요. 당장 눈에 띄진 않아도 무서운 세력이죠. 게다가 북경 북쪽엔 적양문이라는 신흥 사파 세력도 있어요. 딱 봐도 혼란스럽죠?”
소호는 찻물로 그려 낸 지도 위에 손가락으로 콕콕 찍어 점을 네 개 만들었다.
“아미타불, 그렇군요.”
“저들을 가만히 두면 큰 혼란이 일어날 거예요. 저는 그 전에 가능한 많은 문파의 힘을 천무련으로 모아서 대비하려는 것이고요.”
“으음.”
정허사태는 고민하다가 되물었다.
“그럼 내년에는 그 자리에서 물러날 거란 말입니까?”
“그럴 확률이 높겠죠?”
“애초에 권력은 부모 자식 간에도 나누는 게 아니라고 했습니다. 련주가 나중에라도 욕심이 생기지 않는다는 법이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 무상과는 이미 약속한 부분이에요. 장문인, 생각해 보세요. 패원강이라는 사람이 내가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가만히 있을 사람 같던가요?”
패원강은 꼿꼿하고 자존심이 강한 무인 중의 무인이었다.
정허사태는 묵묵히 고개를 저었다.
“그 아이는 가만히 있을 성격이 아니지요.”
“그래요. 그런 거예요.”
“그럼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더 묻겠습니다. 련주, 전국 각지에 정무관이라는 걸 정말로 지을 겁니까? 팔파일방의 핵심 묘리가 들어간 기본 공을 가르치면서요?”
정허사태의 눈이 위험하게 빛났다.
지금의 이 질문이야말로 지금 팔파일방 사이에서 가장 중요하고 심각한 사안이었다.
하지만 이미 마음을 굳힌 소호다.
소호는 단호하게 답했다.
“네. 무슨 일이 있어도 각지에 정무관을 지을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