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풍운객잔 2부-491화 (620/686)

20권 11화

제40장 백호마왕(白虎魔王) (11)

“도대체 왜요?”

정허사태는 진심으로 이해할 수가 없어서 되물었다.

“기본 공은 문파의 근간입니다. 얼핏 보기엔 단순하고 간략하지만, 그 안에는 문파의 절정 무공을 길러 낼 토대가 되는 힘이 있습니다. 바꿔 말하자면 그걸 공개하면 적들도 문파의 근간을 파헤칠 수 있게 된단 말입니다. 그걸 왜 굳이 모든 사람에게 가르치려 합니까?”

정허사태의 말은 거대 문파의 무인들이 모두 똑같이 하는 생각이었다.

무공을 배워 악인이 된다면 어찌할 것인가?

가공할 적이 문파의 약점을 알게 된다면?

그 악적이 만약 아미파의 무공을 쓰기라도 한다면 그땐 누구의 책임인가?

그렇기에 모든 문파에서 무공은 비인부전(非人不傳).

사람 됨됨이가 갖춰지지 않은 자에게는 절대로 가르치지 않는 것이 원칙이었다.

“장문인처럼 생각하는 분들이 많으니까 지금의 무림은 한계가 있어요.”

“뭐라고요?”

“팔파일방끼리 서로 무공을 선보이는 일이 얼마나 될까요? 친선비무? 오 년에 한 번쯤 열리는 무림맹의 비무 대회? 그런 걸로는 부족해요.”

“아아, 혹시 실전에 대한 이야기입니까? 피를 보고 목숨을 건 싸움을 해야 진정한 무인이 된다는? 흘흘, 그런 이야기는 백 년 전에도 나왔고, 지금도 나오고 있습니다. 특별할 것이 없어요.”

“아뇨, 그런 이야기가 아니에요. 제가 무산학관에서 무공을 익히면서 가장 크게 이질감을 느꼈던 부분이 뭔지 아세요?”

“글쎼요. 그렇게 여러 종류의 무공을 한꺼번에 익히는 방식에 대해선 이 노인네가 짐작할 수가 없습니다.”

무산학관의 방식을 이해할 수도 없고, 이해할 생각도 없는 정허사태는 부정적인 분위기였다.

속으로는 그런 방식을 깔보고 있을 테지만, 그나마 티를 내지 않는 건 상대가 그래도 천무련의 련주이기 때문이다.

당연한 반응이다.

팔파일방의 노고수들은 다 그런 반응일 것이다.

한 우물만 파는 장인처럼, 한 문파의 무공만 깊게 파면 언젠가는 절대 고수가 된다는 신념을 갖고 살았으니.

이제 와서 그런 생각이 고친다고 고쳐지겠는가?

“지금의 정파는 각 문파의 장단점이 너무 뚜렷해요. 심지어 같은 계열이라면 단점도 비슷하더라고요. 한 가지 예를 들어 볼게요. 아미파에서는 무산학관에 소양검(少陽劍)과 금정검(金頂劍)을 알려 주셨죠?”

“그렇소.”

“소양검의 둘째 초식 약점이랑 금정검의 첫 번째 초식 약점이 같더라고요. 초식을 펼칠 때 우측 하단, 아래에서 위로 솟구치는 단파각에 무조건 파훼돼요.”

“……!”

“무산학관 학생들끼리 이리저리 대련해 보면서 무공을 분석하다 보니 찾은 약점이에요.”

또다시, 정허사태가 말을 잃고 호흡을 멈췄다.

표설천운장 한 길만 파다 보니 검공엔 조금 소홀했다지만, 그렇다 한들 그녀가 아미파의 기본 검공을 모를 리가 없었다.

소양검과 금정검.

그녀가 마지막으로 펼쳐 본 게 언제였을까.

오십 년이 넘었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그녀는 백 세가 다 되어 가도록 일평생 아미파의 무공만 파고든 무인이었다.

소양검의 둘째 초식과 금정검의 첫 번째 초식은 듣자마자 머릿속에 그 투로가 생생하게 떠올랐다.

그러자 알게 되었다.

초식을 펼칠 때 찰나에 드러나는 작은 틈.

우측 하단에서 차올리는 단파각이 초식을 완전히 무너뜨린다.

‘틀린 말이 아니구나. 우측 하단 단파각이 적절한 시점에 나오면 막을 수 없다.’

아마 나중에 검공을 익힌 제자들도 알아챘을지 모른다.

그래도 공론화가 되지 않은 것은 기본 검공이기에 어느 정도의 빈틈이 있는 건 당연하다 여기며 가볍게 넘어갔기 때문일 것이다.

“련주, 바로 그런 점이, 정무관이 세워지면 안 되는 이유입니다.”

정허사태는 쇳소리가 나도록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정파의 무인들이 자신들의 무공이 그렇게 파훼되는 것을 감수하면서 무공을 내놓아야겠습니까? 그건 너무 큰 희생을 강요하는 것입니다.”

“아니죠.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무공을 내놓아야죠.”

“어째서요?”

“제가 우측 하단 단파각에 파훼된다고 했죠? 그런데 소양검이든, 금정검이든 검끝을 삼 푼 내리고, 오른쪽 발을 일 할가량 깊게 내디디면 오히려 단파각이 파훼돼요. 각법을 쓰면 허벅지가 먼저 베여서 각법을 끝까지 펼칠 수 없게 되죠.”

“……!”

“그것도 무산학관의 학생들끼리 서로 비무하면서 승패를 반복하다보니 찾아낸 거예요. 이걸 뭐라고 부를까요? 무공의 ‘발전’이라고 불러야 마땅하지 않을까요?”

아미타불.

정허사태는 부지불식 간에 불호를 내뱉었다.

아미파의 무공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이미 약점이 파악되었고, 또 그에 대한 해법까지 발견되었다고 한다.

큰 충격이다.

우물 안의 개구리가 넓은 바다의 광활한 지평선을 본다면 이런 기분일까.

‘안 되지.’

정허사태는 잠시 흔들리는 듯했으나 그래도 끝까지 마음을 다잡고 인정하지 않았다.

“그런 것. 정파끼리의 비무에서도 찾아내고 고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요? 그런데 왜 지금까지 수십 년 동안 발견되지 않았을까요?”

“소양검과 금정검은 그저 기본 검공일 뿐입니다. 그래서 알고도 가벼이 넘어간 것이겠지요.”

그랬다.

그래야만 했다.

정허사태는 아미파가 우물 안의 개구리가 되는 꼴을 두고 볼 수 없었다.

“맞아요. 제 생각에도 그래요. 비무 대회에서는 서로 최고의 절기와 절공 위주로, 그것도 성취를 보여 주는 데 급급해서 화려하게 펼치니까요. 그러다 보니 기본 공은 소외되어서 약점이 묻힌 거예요. 기본 공의 약점은 절기의 약점도 될 수 있는 건데 그대로 이어져 온 거죠. 안 그래요?”

“…….”

“장문인?”

“으음, 정무관을 세우면 그게 바뀐다는 겁니까?”

“그럼요! 그 기본 공을 익힌 자들이 수천, 수만 명이 될 텐데요. 당연히 약점이 발견될 거고, 그 이후엔 당연히 보완되어서 발전될 거라고요. 고작 수백 명이 공부하던 것을 이제 수천, 수만 명이 공부하는데 어떻게 발전이 없겠어요?”

들뜬 소호와 달리 정허사태의 눈빛은 점점 차가워지기만 했다.

“궤변입니다. 인상적인 이야기긴 하지만 일부의, 작은 사례에 불과하지 않습니까? 보완되기는커녕 약점만 드러난 채 아미파의 해만 될 수도 있습니다.”

“장문인, 시대가 바뀌고 있어요. 저변을 넓혀야 합니다. 무공을 익힌 자가 많아진다는 건 지금 무공을 독점하고 있는 거파의 지위가 흔들린다는 게 아니에요. 오히려 그 반대죠. 조금이나마 아미의 무공을 익힌 자는 본산인 아미파를 존경하며 우러러 보지 않을까요?”

정허사태가 주름진 손으로 자신의 턱을 쓰다듬었다.

“속가 제자로 받으라는 겁니까?”

“그럴 필요는 없어요. 세상에 부처의 뜻을 따르는 불자는 많지만 그들이 모두 법명을 받은 자는 아니잖아요? 그럼에도 부처를 모두 우러르고 따라 하고 싶어 하죠?”

“즉, 아미가 부처가 되어라?”

“네.”

정허사태는 웃었다.

천무공자는 사람의 마음을 뺏는 재주가 있었다.

혹하는 마음이 든다.

만약 그녀가 이십 년만 젊었더라면 이 젊고 열정이 넘치는 혁명가의 손을 들어 줬으리라.

‘내가 살면 얼마나 더 살 수 있으랴. 욕심을 부릴 것 없다. 헛된 일이구나. 그동안 보아 온 강호는 얼마나 비정했던가? 약점을 서로 보완하고 감싸 주는 세상이었다면 이렇게 각박했을 리가 없거늘. 아직 어린 자의 치기 어린 소리에 불과하다.’

정허사태는 헛웃음을 지으며 다시 손안의 염주를 굴리기 시작했다.

드르륵― 드르륵―.

굴러가는 염주 소리가 그녀의 마음을 차분하게 식혀 주었다.

“련주, 정무관에서 정파의 무공으로 키운 인재는 어찌 됩니까? 선별하여 천무련의 무인이 되겠지요?”

“네. 그럴 생각이에요.”

“역시, 안 되겠습니다.”

소호는 정허사태의 얼굴에서 더 이상 논쟁이 불가능한 단호함을 느꼈다.

“아아.”

씁쓸했다.

이야기를 다 들으면 이해해 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이건 강호 무림이 발전하는 길이에요. 정파 무림이 확고하게 중심을 차지하고 무림을 일통할 유일한 방법이고요.”

“흘흘, 저는 동의할 수가 없습니다. 저뿐만이 아니라 팔파일방의 나이 많은 사람들은 다 알 것입니다. 어째서 무공을 함부로 공개하면 안 되는 것인지. 비인부전으로 됨됨이가 좋은 사람에게만 무공을 가르쳐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말입니다.”

“으음.”

“힘을 가진다는 건, 그걸 감당할 수 있는 사람에게만 허락된 축복과 같은 것입니다. 그 외의 사람들에게는 힘이 오히려 저주가 되지요.”

두 사람의 생각은 너무나 달랐고, 그들은 서로를 이해할 수 없었다.

소호는 두 사람 사이에 거대한 만리장성이 세워져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련주, 감정은 제쳐 두고 속을 터놓고 이야기하자고 하셨지요? 그러니 솔직히 말하겠습니다. 이 늙은이는 앞으로 련주의 행동을 사사건건 방해하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정무관을 짓는 게 싫어서요?”

“흘흘, 련주, 그러니 자리에서 어서 내려오세요.”

“천무련은 제 돈을 들여서 제 이름으로 지은 거예요. 할 수 있는 데까지는 하고 갈 거예요.”

소호는 부루퉁하게 답했다.

정허사태가 혀를 차면서 지적했다.

“그것 보세요. 그게 자리에 대한 욕심이라는 겁니다. 련주, 자리에 오래 안 앉고 내려오겠다는 건 처음에 팔파일방의 지원을 받을 때 스스로 내건 조건 아니었습니까?”

“맞아요. 그러니까 그 안에 할 수 있는 건 다 하겠다는 거죠.”

“좋습니다. 그럼 이 늙은이와 아미파도 최선을 다할 수밖에요.”

“장문인.”

소호는 마지막으로 가장 궁금했던 것을 물었다.

“팔파일방 출신이 왜 그리 중요해요?”

“……우리의 전통을, 역사를 믿는 것입니다. 정파의 명맥은 허투루 이어져 내려온 것이 아닙니다.”

“그렇군요.”

소호가 아미파를 꼭 붙잡아야 할 이유를 찾지 못했듯, 아미파는 소호를 ‘정파인’으로서 련주로 모실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무쌍귀 장기린의 아들.

왕진이 세운 무산학관 출신의 무인.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둘의 길은 다르다.

결국 소호와 정허사태는 서로 간의 의견을 좁히지 못한 채 만남을 끝냈다.

***

“정허사태는 어땠어요?”

소호는 섭주해에게 서로 간의 대화를 솔직하게 털어놓고 나서 평했다.

“늙은 콩이 너무 단단해.”

“하하핫!”

섭주해는 드물게 큰 소리로 웃었다.

“협박은 왜 한 거야? 그거 때문에 정허사태가 얼굴이 새빨개져서 앉아 있더라.”

“괘씸해서요. 고생하면서 천무련의 기틀을 세운 게 누군데, 아무리 형이 스스로 물러나겠다고 약속했다고 해도 뻔뻔하게 구는 모습이 참아 주기가 어려워요.”

“만약 정허사태가 날 안 만난다 했으면 정말로 아미파를 출입 금지시키려고 했어?”

“예.”

섭주해는 그걸로 끝나겠냐면서 서늘한 표정을 지었다.

“아예 사천 땅에서도 고립되게 만들어야죠. 명맥만 겨우 이어 가게요.”

“무섭네. 무서워. 우리 주해가 왜 이렇게 무서워진 거야?”

“저는 원래 이랬어요. 형.”

소호는 빙긋 웃으면서도 씁쓸하게 말했다.

“정허사태는 뭐랄까. 무림 강호의 오래된 관습? 전통? 그런 것의 화신 같았어. 그래서 그 사람이 밉다기보단, 그냥 그러려니 하게 돼.”

“전통을 지키면서 백 년이나 살다 보면 그렇게 되는 거겠죠.”

“우리도 그렇게 될까?”

“글쎄요. 아버님들을 보면 그렇지 않을 것 같기도 한데.”

섭주해는 조심스럽게 진지한 이야기를 꺼냈다.

“형은 정허사태가 밉지는 않다고 하지만……. 저는 모르겠어요. 아까 소식이 들어왔거든요.”

“어떤 소식?”

“청성도 정무관 설립을 반대하겠대요.”

소호는 머리를 긁적이며 한숨을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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