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권 12화
제40장 백호마왕(白虎魔王) (12)
“청성은 왜 반대한대?”
“무공 유출을 감당하기엔 문파의 힘이 너무 부족하대요. 아직 회복이 덜 되었다나요?”
소호는 헛웃음을 흘렸다.
약해도 약하지 않은 척.
세면 더 센 척을 하는 게 무림이다.
그런데 이런 결정적인 순간에 약한 척이라니, 어떻게든 좋게 거절하려고 변명을 하는 걸로 봐야 할까?
“왕진 때문에 문파가 반으로 쪼개졌던 것 때문에? 그게 언제 적 일인데 아직도 그걸 핑계로 대는 거야? 기본 공 몇 개 공개하는 거에 그게 핑계가 돼?”
“그러게 말입니다. 그냥 핑계 대는 거겠죠. 그래도 실제로 청성은 그때 약해진 전력을 회복하지 못하기도 했고요.”
“어휴, 그렇게 힘들면 백검회에 도와달라고 하라지, 왜?”
“흐음, 명안이네요.”
한때 무림을 떠들썩하게 했던 백검회가 청성과 화산, 그 두 문파의 무공을 사용한다는 건 암묵적으로 모두가 아는 사실이었다.
왕진과 관계가 있으면 무조건 죽이고, 수틀리면 스스로 몸에 불을 지르던 자들이 청성과 연관이 있다니.
무림 공적인 왕진을 적대시하니까 아무도 뭐라 하진 않았지만, 사실 무림의 법도 대로라면 백검회의 원한은 사문인 청성과 화산에도 따졌어야 마땅하다.
“아쉽게도 백검회는 조서인 때문에 산산조각 나서요. 도와달라고 해도 도와줄 형편은 안 될 걸요?”
“아! 그렇네. 낙일지협. 맞다. 그때 청계가 죽었다 그랬지?”
“정확히는 ‘죽은 채 발견’됐죠. 녹림수로맹에서 절대로 누가 죽였는지 밝히지를 않아서요.”
“정황상 서인이의 업적으로 사람들이 판단하고 있고?”
“네.”
매우 흥미로운 이야기였으나 지금의 주제와는 맞지 않는다.
소호는 다시 청성파 이야기로 주의를 돌렸다.
“청성파뿐일까? 주해 생각은 어때? 우리 천무련 내부에서 정무관 설립에 얼마나 반대할까?”
“솔직히 말하자면, 팔파일방은 세 곳을 빼고는 전부 반대할 것 같아요.”
“소림, 무당은 그렇다 치고. 나머지 한 곳은 어디야?”
“개방이요.”
개방의 십만방도설!
가장 많은 이들에게 무공을 가르치기로 유명한 곳이 개방이지 않던가.
“개방 백의개들이 익히는 기본 공은 애초에 아무나 가르쳐 주는 걸 목표로 만든 무공이래요. 정무관에서 가르친다고 해도 별로 반대를 하지 않을 겁니다.”
“그렇겠네. 개방을 생각 못했어.”
소호는 문득 가만히 있을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허사태가 선전포고를 한 셈이야. 이거 진심으로 싸워야 하는 거겠지?”
“아미파를 완전히 배재시킬까요?”
“또 그런다. 안 그럴 거 알면서. 사적으로 짓밟으면 반발만 생길 것 같아. 이건 내 방식대로 풀어 볼게.”
섭주해는 잔잔한 미소를 지으며 소호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물었다.
“세가 회합을 주최할까요?”
“어? 어떻게 알았어!”
“저, 천무련 총군사 섭주해입니다.”
섭주해가 도도하게 턱을 세웠다.
소호는 큰 소리로 웃었다.
“역시 주해네. 속일 수가 없어. 세가 회합 주최하고, 일단은 천무련 무사들을 한 번 모아 줘. 연회. 그래, 승전 연회 한 번 하자. 북경전투 끝나고 돌아와서 연회 한 번도 안 했잖아?”
정허사태와 그런 대화를 나눈 뒤에 곧바로 청성이 변심?
연관이 없을 리가 없다.
소호는 걸어온 싸움은 피하지 않는 사람이다.
깐깐하고 고지식한 구무림의 상징과도 같은 사람에게 이젠 시대가 바뀌었음을 똑똑히 보여 줘야 하지 않겠는가?
‘한번 해 보죠. 정허사태.’
소호는 호승심을 이글이글 불태우며 벌떡 일어났다.
***
천무련의 무인들은 원래 크게 두 개의 대(隊)로 인원이 나뉘어 있었다.
하나는 비학문 출신으로 소호가 개량한 비학검을 익힌 검수가 이백 명이며, 그들은 학검대(鶴劍隊)라고 불렸다.
고검(孤劍) 양명기를 대주로 삼은 이백 명은 그동안 겉으로는 잘 드러나지 않는 온갖 실전에 투입되어 싸워 왔다.
자그마한 문파와의 마찰, 천무련의 일을 방해하는 자들에게 선보이는 무력 시위. 그 모든 것들을 대부분 학검대가 처리한다.
그들은 냉철하고 실전적이며, 그러면서 소호의 지도를 받아 나날이 강해지고 있었다.
그리고 다른 하나의 대(隊)는 낭인 출신의 음검(音劍) 이남성이 이끄는 청죽대(靑竹隊)였다.
꼿꼿한 청죽을 상징으로 삼는 부대답게 그들은 천무공자 한 사람을 향한 충성심이 강했으며, 소호의 친위대적인 성격이 강했다.
주로 맡는 임무는 소호의 호위나 강호에 ‘마두’라고 불리는 자들이 나타났을 때 당당히 푸른 대나무가 수놓인 무복을 입고 나타나 그를 사로잡거나 처리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강호에서의 명성은 청죽대가 더 높다.
최근에 안휘에서 날뛰던 청의검마(靑衣劍魔)를 음검 이남성 대주가 단신으로 무릎 꿇리고 사로잡은 일은 특히나 화제였다.
낭인이었던 시절에는 그다지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던 이남성이 언제 이렇게 강해졌는가?
천무련에 소속되고 나서 갑자기 절정의 고수가 되었으니 대체 어떻게 그렇게 되었는지 궁금해하는 것도 당연했다.
학검대와 청죽대.
천무련의 두 개의 기둥이라고 해야 마땅하다.
그런데 소호가 이번에 북경 전투에 참전하고, 그사이에 무상(武上) 패원강이 천무련을 운영하면서 꽤 큰 지각 변동이 벌어지고 있었다.
“소형제, 문파의 특성에 따라 새로운 부대를 몇 개 만들었소.”
“그래요? 어떤 부대에요?”
“청죽을 보고 떠올랐소. 사군자(四君子)로 나누면 어떨까 싶더군. 적매(赤梅), 황국(黃菊), 녹난(綠蘭). 이렇게 세 개의 부대로 특성에 따라 나누어 보았소.”
“오오?”
소호는 흥미로워졌다.
패원강은 사실 그동안은 천무련의 객(客)처럼 굴고 있었다.
그저 무상이라는 직위 하나 받아 놓고 혼자만의 무공을 참오할 뿐.
위기 상황이 아니라면 그다지 련의 일에 개입할 마음이 없어 보이던 게 패원강이다.
그런데 패원강이 직접 나서서 조직을 개편해 보았단다.
흥미가 안 생길 수가 없었다.
“어떤 특성인데요?”
“간단하오. 출신 문파에 따라 나눠 보았소. 적매는 도가문파, 황국은 불가문파, 녹난은 강호의 세가 출신이오.”
“흐음?”
소호는 팔파일방 중에 생각나는 것들을 손가락에 하나하나 꼽아 보았다.
“그럼 적매에는 무당과 곤륜이고, 황국은 소림과 아미, 녹난에는 남궁이나 제갈 같은 세가 출신들을 받는 거예요?”
“바로 그렇소. 화산파가 건재했다면 좀 더 힘을 실어 줬을 텐데, 그에 대한 존중의 뜻으로 적매라고 붙여 보았소.”
“화산파는 부흥할 거예요. 무공도 되찾았고 인재도 다시 유입되고 있으니까요.”
“매화신검께는 어렸을 때 많은 가르침을 받았었소. 소형제가 화산파를 돕고 있다니 기쁜 마음이오.”
“당연히 해야 할 일이죠.”
소호가 화산파를 돕는 것은 육모담에 대한 은원을 포함해서 복잡한 사정이 얽혀 있지만, 패원강이 보기엔 그저 고마운 선행으로 보이는 듯했다.
‘그나저나 출신 문파에 따라 부대를 나눈다……?’
소호는 섭주해처럼 사고의 깊이가 깊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그 이야기를 듣자마자 예상되는 여러 가지 문제들이 떠올랐다.
“우리 천무련에 원래 있던 무인들이나 작은 문파 출신들과 갈등이 생기지 않을까요?”
“벽을 나누는 것처럼 느낄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라면 나도 생각했었소. 그래서 같은 팔파일방 출신이라도 사문의 특성에 따라 세 개로 쪼개 놓은 것이오.”
“아! 팔파일방끼리 못 뭉치게 하려고요?”
“바로 그렇소.”
패원강은 씁쓸하게 웃었다.
“팔파일방 출신의 자부심. 나도 그분들의 무공을 이은 입장이니 너무나 잘 알고 있소. 소형제처럼 걸출한 인물이 팔파일방이 아닌 곳에서도 나올 수 있겠지만, 그건……. 솔직히 말하자면, 소형제 같은 경우는 천에 하나, 만에 하나의 일 아니오?”
“낭인이나 사파 쪽에서도 종종 인재들은 많이 나오던데요?”
“그게 너무나 특이한 경우인 것이오. 평균적인 능력으로 따지자면 솔직히 팔파일방 출신이 훨씬 많은 것은 사실이오. 그러니 이유가 있는 자부심이라고 할 수 있지.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 사문의 고된 수련과 시험을 거쳐 무림 출두를 허락받았으니 그런 마음이 드는 것도 이해가 되지 않소?”
“으음.”
소호는 부정할 수 없었다.
팔파일방은 수백 년이 넘게 다듬은 무공을, 각 문파의 고수들이 특별히 선별한 인재에게 전해 왔다.
무림인 전체의 수준이 삼이라고 친다면, 팔파일방의 수준은 대부분 육을 넘는다.
가끔 중소 문파나 사마외도에서 튀어나오는 구의 능력을 지닌 초인이 특이할 뿐, 팔파일방은 꾸준히 육 이상의 능력을 지닌 무인을 길러 내는 집단이었다.
“소형제, 아마 하나로 합치게 된다면 분명 문제가 더 커질 것이오. 팔파일방 출신들이 대장 노릇을 하려고 하고, 그게 곧 계급이 되어 버리겠지. 팔파일방 출신은 천무련에 오자마자 조장급이 된다. 이런 암묵적인 규율이 생기지 않겠소?”
“하긴, 그렇긴 하겠네요.”
“그런데 아예 따로 모아 버리면 이야기가 달라진다고 생각하오. 무당파의 신진 고수가 천무련에 와도 적매조의 일개 조원이고, 중소 문파에서 들어온 능력 있는 무인도 청죽조의 일개 조원이 되는 것이오. 그게 더 공평하지 않겠소?”
옳고 그름을 떠나서 패원강이 꽤 많은 고민을 하고 만들었다는 사실은 잘 알 수 있었다.
소호는 패원강의 첫 제안을 거절할 마음이 들지 않았다.
‘부족한 점은 차차 고쳐 나가면 되겠지. 지금 당장 급한 일은 그게 아니니까.’
소호는 빙긋 웃었다.
“좋아요. 그렇게 해 보죠. 아! 대신 한 가지 조건만 지켰으면 좋겠어요. 정예만 뽑을 것.”
“음? 그건 무슨 말이오?”
“부대의 이름은 정했어요?”
“적매, 황국, 녹난, 청죽…….”
“아뇨, 그 사군자를 다 묶을 부대의 이름이요.”
“아!”
패원강은 거기까진 생각해 보지 않은 듯했다.
“마(魔)를 쫓는[追] 부대. 추마대(追魔隊) 어때요?”
“추마대? 마를 쫓아가서 잡는다?”
“네. 강호를 혼란케 하는 마인들을 잡는 부대니까 정예여야죠. 새로 만드는 조에는 철저히 실력으로 가려진 정예만 뽑아 봐요. 출신이나 특성상 나눠 놓더라도, 아무도 찍소리도 하지 못하게. 어차피 인원을 제한적으로 뽑으면 중소 문파 출신들은 경쟁이 더 치열할 거예요.”
“호오.”
패원강은 소호의 속뜻까지 한 번에 알아들을 만큼 총명한 사람이었다.
“중소 문파 출신 숫자가 많으니 들어오는 경쟁이 더 치열할 거란 소리로군. 그만큼 더 실력이 좋은 친구들이 들어올 것이고.”
“바로 그거예요. 그럼 지금 팔파일방 출신들과 실력이 맞춰질 거예요. 만약 그래도 부족하면 련에서 좀 도와주고요.”
“좋은 생각이오!”
패원강은 싱글벙글했다.
자신의 작은 생각이 현실화되는 것이 즐거운 모습이다.
소호는 그런 패원강을 가만히 지켜보다가 툭 던지듯 자연스레 물었다.
“무상. 예전에 내가 정무관을 짓겠다고 했잖아요? 알고 있죠?”
“으음, 물론 알고 있소.”
“그거 말인데, 처음엔 사람 많은 대도시에 하나씩만 지을 생각이었는데, 생각이 바뀌었어요.”
“음? 그게 무슨 말이오? 반응을 보면서 차츰차츰 늘려가겠다고 하지 않았소? 정허사태가 워낙 반대가 심해서 조심스럽게 진행하는 것 아니었소?”
‘역시 무상한테도 다녀갔구나.’
백 살이 다 되어 가는 사람이 참으로 부지런했다.
소호는 웃는 얼굴로 손가락을 하나 들어 올렸다.
“천 개.”
“……!”
“이 세상 모든 아이가 정무관에 가고 싶게. 그리고 그 정무관 출신들은 모두 천무련에 들어오는 걸 선망하게. 그렇게 만들고 말 겁니다.”
소호가 뿜어내는 뜨거운 기백에 패원강은 깜짝 놀라 주춤 물러서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