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풍운객잔 2부-493화 (622/686)

20권 13화

제40장 백호마왕(白虎魔王) (13)

세상은 바둑판처럼 흑과 백으로 나뉘어져 있지 않다. 항상 선한 일만 하는 사람만큼이나, 늘 악하기만 한 사람 또한 흔치 않다.

영웅에겐 보이지 않는 비밀이 있을 때가 있다.

악당에게도 그럴 만한 사정이 있을 때가 있다.

살다 보면 자신의 신념과 어긋나는 일을 해야 할 수많은 경우가 생겨난다. 사천성 북부에 자리 잡은 비도방(飛刀幇)이 그러했다.

아미파와 끊임없이 대립해서 사파 아니냐는 소리는 듣지만, 사실 그들은 그렇게 악한 행동은 하지 않는 정사지간(正邪之間)의 문파였다.

먹고살려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비도방 정도의 무공 수준으로, 고고하게 무공이나 가르치면서 살 수 있겠는가?

삼어비검(三漁飛劍) 묘광은 그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절정의 경지에 오른 고수였지만 자신을 따르는 백 명의 부하들을 위해서라도 방주로서의 책임을 다 해야 했다.

인근의 상점들은 비검방 때문에 선택을 강요받았다.

아미파냐 비도방이냐.

아미파는 멀고, 비도방은 가까웠다.

보호비라는 명목하에 수익의 일정 부분을 상납하는 것은 똑같았으나, 비도방은 사천 땅 암흑가와 문제가 생기면 발 벗고 나서서 도와주기도 했다.

아미파의 빈자리를 비도방이 채워 주는 식이다.

그렇게 자리를 확고하게 잡아가던 어느 날 그들에게 날벼락이 떨어졌다.

그냥 아미파를 향해 지나가는 줄 알았던 천무련이 비도방을 찾아온 것이다.

그것도 그 고명한 천무공자까지 대동해서!

“비도방주. 날 도와줬으면 좋겠어요.”

“어, 어떤 도움을 드리면 좋을지……?”

“문파를 넘겨주세요.”

그 말에 “예!” 하고 냉큼 넘긴다면 그는 문파를 이끌 자격이 없는 자다.

주변에 비도방 방도들이 한 수 보여 주라는 듯이 눈을 빛내고 있었다.

묘광은 호기로 충만하여 버럭 소리쳤다.

“아무리 상대가 천무련이라고 한들, 무인으로 태어나 무공 한번 겨뤄 보지 않고 바짓가랑이를 기어갈 수 있겠소? 그건 안 될 말이오!”

“그래요? 그럼 무공 한번 겨뤄 볼래요?”

“좋소! 얘들아! 천무련 손님들을 모셔라!”

순식간에 전의가 흐르고, 비도방 방도들이 손바닥만 한 단검 여러개를 꺼내 들었다.

이곳은 무림 강호다.

말실수 하나로 문파 하나가 몰살당하는 일은 하나하나 언급하기 힘들 정도로 수없이 벌어졌던 일이다.

그런데 천무공자의 뒤를 따라온 학검대는 단 한 사람도 검을 뽑지 않았다.

수십 명의 검사들이 조용히 멈춰 서서 천무공자의 명을 기다리는 모습은, 마치 명령을 기다리는 군병과 같았다.

천무공자는 손을 들어 올려 그들에게 기다리라 명했다.

“제가 직접 할게요.”

금사로 수를 놓은 화려한 비단 무복을 입고 긴 머리를 단정하게 틀어 올려 영웅건을 맨 그는 마치 황족처럼 휘황찬란하다.

모두의 시선이 모여드는 것도 당연했다.

“인사는 필요 없죠? 바로 갑니다?”

천무공자가 환하게 웃으니 세상이 밝아 보이는 듯했다.

뒷짐을 진 채 톡― 하고 발끝으로 땅을 박찼는데, 갑자기 오 장 거리를 격하고 묘광의 코앞까지 불쑥 다가왔다.

“흐억!”

묘광은 그가 쓸 수 있는 최고의 절초.

참해삼룡(斬海三龍)을 펼쳤다.

세 개의 손바닥만 한 단검이 물을 가르듯 일순간에 쫙― 하고 뻗어 나갔다.

다들 물고기 같다면서 삼어(三漁)라 부르지만, 엄연히 자신의 무공은 용이다.

상중하.

세 개의 단전을 모두 노리고 날아드는 단검들은 숙련자가 아니면 막기 힘들 정도로 교묘하게 비틀어져 있었다.

특히나 상단과 하단의 사이.

중단을 노리는 단검은 자세히 보면 반 박자가 느리다.

그래서 얼핏 다른 상하단의 단검을 먼저 막고 중단을 막아도 괜찮을 것처럼 보이는데, 그건 함정이다.

실제로는 중단을 향하는 단검에 걸려 있는 회전력이 폭발해서 상중하의 공격 순서가 뒤바뀌어 버린다.

가장 느릴 것 같아 보였던 중단이 가장 빠르게.

가장 빨라 보였던 하단이 가장 느리게 도착한다.

지금까지 상대한 적들은 그 어떤 강자도, 묘광의 이 교묘한 비도술에 휘말려 제 실력을 다 발휘하지 못한 채 가슴에 단검이 꽂히기 일쑤였다.

따다당!

그런데 천무공자는 그걸 막는다.

참해삼룡 초식이 막판에 단검의 속도를 변화시키는 것을 간파했는가?

아니.

그런 것 같지는 않았다.

천무공자는 그저 단검이 몸에 닿기 직전에 반응했을 뿐이었다.

반사적으로 귓가에서 윙윙거리는 파리를 본능적으로 잡아채듯, 천무공자는 단검이 자기 몸에 닿기 직전에야 움직여서 손바닥으로 단검을 쳐 냈다.

‘정말로 사람인가? 그걸 그냥 맨손으로, 반사적으로 쳐 내?’

눈 깜빡할 새에 십 장 거리를 관통하는 고속의 비도.

회전력을 가미해 완급을 주었는데도, 그걸 그냥 반사 신경만으로 생채기 하나 없이 파훼하다니.

‘모든 것을 꺼내어 쏟아붓자.’

묘광은 옷자락 안쪽에 가득 꿰어 둔 단검들을 모조리 뽑아서 내던졌다.

일수일룡(一手一龍).

도천이룡(渡天二龍).

참해삼룡(斬海三龍).

비도방의 상징인 비도술을 최선을 다해 뽐냈으나, 묘광의 기량으론 결국 천무공자에게 생채기 하나도 남기지 못하고 말았다.

“허억. 허억.”

짧은 시간,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부은 묘광의 입술이 퍼렇게 질렸다.

안색은 창백했고 손끝은 파르르 떨렸다.

주변이 조용했다.

천무공자를 따라온 천무련의 학검대는 물론이고, 묘광을 응원하던 비도방의 방도들도 충격을 받아 굳어 있었다.

묘광이 비도를 열 개 이상 던졌을 때 모두가 알아챈 것이다.

천무공자가 봐주고 있음을.

묘광이 무공을 다 펼칠 때까지 가만히 공격을 받아 주던 천무공자가 바닥에 여기저기 박혀 있는 단검 세 개를 뽑아 들었다.

“아까 처음에 선보였던 초식이 가장 절초네요. 이름이 뭐죠?”

“참해……삼룡이오.”

“참해삼룡. 바다를 가르는 세 마리의 용이라. 좋은 이름이네요.”

천무공자는 빙긋 웃더니 양다리의 보폭을 넓게 벌린 뒤 오른손엔 단도 두 개, 왼손에는 단도 한 개를 들고 양손을 가만히 늘어뜨렸다.

그러다 번쩍.

“……!”

파라락―.

잔상이 남을 정도로 빠르게 양손을 휘두른 천무공자의 손끝에서 세 개의 단도가 구불구불한 나선을 그리면서 뻗어 나갔다.

하늘이 거대한 바다라면, 지금 천무공자의 손끝에서 뻗어 나간 것은 그야말로 세 마리의 용이다.

모든 힘을 소진한 채 멍하니 서 있던 묘광의 몸이 덜컥 흔들렸다.

오른쪽 어깨, 좌측 옆구리, 오른쪽 허벅지 옆을 세 마리의 용이 스치고 지나갔다.

촤아악―.

옷은 갈라졌으나 생채기는 남지 않은 점에서 천무공자의 섬세한 무공 운영을 엿볼 수 있었다.

용이 지나간 뒤엔 폭풍 벼락이 뒤따르는 건 당연한 일.

후우웅―.

뒤따라 불어온 바람이 묘광의 몸을 흔들었다.

묘광은 휘청거렸다.

몸보다는 마음의 충격이 더 컸다.

그가 일평생 단련해 온 비도술은 무엇이었나.

천무공자가 한 번 보고 따라 한 비도술은 완벽하지 않은가?

‘단검 세 개에 다 회전을 걸다니. 나선을 만드는 회(回)자결을 넣은 것인가? 어찌 그런? 이거야말로 용이다. 내가 그동안 물고기 소리를 들은 것도 당연했구나.’

평소엔 세상이 자신을 몰라준다고 불평하던 묘광이었으나, 천무공자가 시전한 비도술을 보니 마음이 바뀌었다.

묘광은 허탈한 심정으로 양손을 늘어뜨렸다.

“천무삼보야말로 강호의 보물이라더니. 그게 정말이라는 것을 이제야 알겠소. 대단하시구려. 손속에 사정을 두고 살려 줘서 고맙소.”

그는 승복하는 마음을 담아 정중하게 포권을 취했다.

천무공자는 가만히 묘광을 지켜보다가 빙긋 웃었다.

“마음에 드네요.”

“어떤 것이……?”

“당신이요.”

묘광은 당황해서 눈만 데굴데굴 굴렸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삼어비검 묘광이라는 사람이 마음에 듭니다. 묘 방주. 천무련에 들어오지 않을래요?”

“……!”

묘광은 그 찰나의 순간 수백, 수천 번의 고민을 했다.

특히 멍하니 보면서 혼란스러워하는 비도방의 방도들이 가장 마음에 걸렸다.

묘광은 입술을 잘근잘근 씹다가 거절을 표하려던 순간이었다.

“말씀은 감사하나, 저에겐 저를 믿고 따르는 방도들이…….”

“제가 최근에 정무관이라는 곳을 만들려 하고 있어요. 묘 방주는 혹시 들은 적이 있어요?”

묘광은 얼떨떨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 예. 누구나 무공을 익힐 수 있게 팔파일방의 기본 공을 가르치는 무관을 만드신다고 들었습니다. 사람들이 열광하고 있다던데…….”

“맞아요. 그 정무관 일호 지점을 여기 아미파 근처에 만들까 하는데, 묘 방주가 맡아 줄래요?”

“예에?”

뜬금 없는 제안도 이런 제안이 없다.

정사지간의 작은 문파 방주에게 갑자기 촌부들을 가르치는 정무관을 맡아 보라니.

그 순간 묘광의 머릿속에 온갖 생각들이 다 드는 것도 당연했다.

‘함정인가? 혹시 이름만 떠넘겨 놓고 희생시키려고? 아냐, 설마, 그럴 사람은 아닌 것 같은데. 왜 갑자기? 왜 나에게?’

마음의 충격은 몸의 충격도 주는 법.

묘광의 손발이 부들부들 떨렸다.

덥지도 않은데 그의 이마에서 식은땀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그리 어렵게 생각할 것 없어요. 그냥 묘 방주를 만나 보니 마음에 들어서 하는 말이니까요. 그리고 너무 좋은 제안 같아요? 아닌데. 이거 어려운 제안인데.”

“정무관을 운영하는 게 어려운 제안입니까?”

“네. 비도방의 관습을 완전히 다 버리고 새로 뜯어고쳐야 하니까요. 앞으로 묘 방주와 원래 비도방의 방도였던 사람들은 암흑가 쪽의 사업은 다 접습니다. 주변 상인들을 쥐어짜서 보호비를 받는 것도 그만둬요.”

“예? 그럼 수입이 다 끊기는 건데 저희는 뭘 먹고 살아야 합니까?”

“천무련에서 보내는 돈으로 정무관을 운영하고 먹고살면 됩니다. 이제 정파인지 사파인지 모르는 문파의 무서운 무인이 아니라, 지역에서 사랑과 존경을 받는 무공 사부가 되는 거예요.”

“존경받는 무공 사부……?”

“네. 괜찮아 보이지 않아요? 서원의 훈장님 같은 거죠. 동네 사람들이 엄청나게 좋아할걸요?”

묘광은 지지리도 가난한 나무꾼 집안의 막내였던 어린 시절을 떠올렸다.

그때의 서원 훈장님은 어떤 사람이었던가?

마을 사람들 모두의 존경을 받는 사람이 훈장이었다.

글을 대신 읽어 주고, 아이들에게 글공부도 가르쳐 주고.

시장에 나오면 상인들이 돈을 안 받거나, 하나라도 더 챙겨 주려고 아우성이고.

절기가 올 때마다 고맙다면서 선물을 한 짐씩 싸서 들고 오는 게 훈장이다.

‘그런 훈장 역할을 내가 한다고? 으음, 지금 어딜 가서 자랑할 수 없는 비도방의 무인보다는 훨씬 나은 것 같긴 한데.’

묘광은 생각할수록 그럴듯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촌부일수록 글보다는 무공에 대한 목마름이 더 컸다.

무공을 익히면 일도 더 잘할 수 있고, 스스로 몸을 지킬 수 있으면 도적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니 말이다.

그러니 그 사람들에게 정무관의 무공 사부가 얼마나 고마운 존재가 되겠는가?

“그런데 제가 팔파일방의 기본 공을 가르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건 제가 직접 전수할 거예요. 묘 방주와 방도들에게도요. 앞으로 정무관의 무공 사범들이 될 사람들이니 당연한 일이죠.”

“천무공자께서 직접 말입니까……!”

“네. 팔파일방 전부는 아니고, 어차피 서로 협의가 된 기본 공만 가르칠 거니 종류가 많지 않아요. 그걸 제가 적당히 다듬어서 가르칠게요. 그리고.”

천무공자는 이미 반쯤 넘어온 거나 마찬가지인 묘광에게 마지막 쐐기를 박아 넣었다.

“참해삼룡. 제대로 완성시키고 싶지 않아요? 제가 가르쳐 줄 수 있는데?”

천무공자가 환하게 웃는다.

입을 쩍하고 벌린 묘광이 답할 말은 이미 정해져 있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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