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권 14화
제40장 백호마왕(白虎魔王) (14)
이미 사천에 뿌리를 박고 있던 비도방을 흡수하고 나니 나머지 일들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섭주해가 문상(文上)이자 총군사로 있는 천무련은 내정이 뛰어났다.
돈, 물류, 사람.
소호가 기대한 것 이상으로 풍부한 지원이 사천 땅으로 물밀 듯이 밀려들었다.
정무관을 만드는 데 필요한 게 무엇인지 파악하고, 필요한 자재들을 보내는 속도가 매우 빨랐다.
소호가 비도방주였던 묘광과 그 휘하의 일백 방도들을 거세게 몰아붙이며 훈련하는 사이, 불과 석 달도 되기 전에 정무관의 건물이 다 지어졌다. 그 후로 일백 개의 정무관이 더 지어질 준비가 끝났다.
“약속하세요. 앞으로는 천무련에 소속된 무인이자, 무공 사범으로서 최선을 다하겠다고. 만약에 부정을 저지르거나 무공 사범으로서의 업무를 게을리한다면……. 천무련에서 무서운 사람이 찾아갈 겁니다.”
소호는 웃고 있었지만 묘광을 비롯한 비도방 출신 사범들은 웃지 못했다.
지난 삼 개월간 지도를 받으면서 소호의 무서움을 알게 된 탓이다.
“반드시 그리 하겠습니다.”
“자. 그럼 첫 번째 제자들부터 받아 보도록 하죠.”
제자를 받는 것은 묘광과 사범들인데 정작 소호가 더 신이 난 것 같았다.
정무관이 만들어진다는 게 소문이 났을 때부터 이미 입관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줄을 서 있었기 때문에 제자를 받는다는 공고를 낼 필요는 없었다.
처음 정무관이 문을 여는 날 이미 수백 명이 몰렸고, 그들은 새로 만들어진 커다란 장원에서 사범들과 함께 수련을 시작했다.
정무관(正武館).
올바른 무를 기르는 곳.
무림 전역에 퍼져 나갈 큰 역사의 시작이었다.
***
사천에 고수가 누가 있냐고 묻는다면 누구나 여덟 글자로 대답하던 시절이 있었다.
아미파불 당가사문.
(峨嵋破佛, 唐家死門).
아미에 파불이 있고, 당가에는 사문이 있으니 그 둘이야말로 사천의 최고수다.
아미파에는 파불신니라는, 무림에서 열 손가락 안에 꼽히는 명인(名人)과 멸진사태라는 고수도 있어 그 누구도 아미파를 우습게 보지 못하던 시절이다.
세월은 빠르다.
화무십일홍이라고 했던가.
꽃처럼 화려했던 영화는 순식간에 져 버렸다.
사천에서 최고의 고수가 누구냐 묻는다면 이젠 그 누구도 아미파를 언급하지 않는다.
어쩔 수 없는 일이고 아미파로서는 받아들여야 하는 현실이다.
하지만 오늘 벌어진 일은 아미파의 일대 제자, 금정사태를 크게 동요시켰다.
“아미타불 관세음보살.”
아미파의 차기 장문인이라고 공공연히 일컬어지는 금정사태는 당황스러운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그래서 저희가 직접 나서길 바란다는 것입니까?”
감청색 비단 장삼을 입은 비대한 몸집의 중년 사내가 슬쩍 헛기침을 하면서 미리 준비한 목곽을 내밀었다.
“크흠! 약소하지만, 저희 금가상회가 아미파에 성의를 좀 보이고 싶어서 준비했습니다. 허헛! 요즘 강호가 혼란하다고 하던데, 아미파도 많이 바쁘시지요?”
싹싹하게 말하면서 슬쩍 목함을 살짝 여는데, 그 안에 꽉 차 있는 금화가 빛을 받아 반짝거렸다.
“이건, 인사치고는 과하군요.”
“아이고, 아닙니다. 사실 예전에 인사를 했어야 하는데 늦은 감이 있지요. 그런 마음을 다 담아 봤습니다.”
넉살 좋게 껄껄 웃는 금가상회의 회주는 세파에 닳고 닳은 인물이었으나 금정사태도 만만한 사람은 아니다.
그녀는 눈이 번쩍 뜨일 만한 금화를 앞에 두고도 냉랭했다.
“금가상회가 사천 땅에서 두각을 나타낸 게 벌써 이십 년 전이니 인사가 늦긴 했지요.”
“커험험!”
“말씀하신 대로 아미파는 바쁩니다. 그러니 저도 솔직하게 묻지요. 비도방이 해체했군요. 그래서요? 사천에 어두운 부분이 있다는 건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곳은 언제나 주인이 바뀌는 곳 아니던가요? 저희에게 인사를 하실 필요가 있습니까?”
“그게, 이번에는 그리 간단하지가 않습니다.”
“이유가 뭐죠?”
“원래 암흑가를 지배하던 흑도문파가 해체한다는 건 수뇌부부터 주요 인물들이 싹 다 물갈이가 된다는 걸 의미합니다. 여기까진 금정사태께서도 이해하시지요?”
“……계속하시지요.”
“그런데 이번엔 그자들이 갑자기 해체했는데 이 땅에서 사라지진 않은 겁니다. 게다가 천무련에서 만든다는 정무관이라는 곳에 들어가 버렸어요. 자기들이 관리하던 사업체는 그냥 땅바닥에 내던지고! 이게 말이나 되는 일이겠습니까?”
금가상회의 회주는 생각만으로도 화가 나는 듯 숨을 씩씩거렸다.
“천무련은 정명한 정파의 연합이니 기회가 왔을 때 옳은 길을 간 것이겠지요. 그게 문제가 됩니까?”
정무관을 만드는 건 마음에 안 들지만, 천무련은 아미파가 한 발을 걸치고 있는 정파의 연합체다.
금정사태는 자신이 비도방의 방주라도 똑같은 선택을 하겠다는 생각이 드니 뭐가 문제인지 알 수가 없었다.
금가상회의 회주는 자신의 두툼한 턱살을 만지작거리면서 난감해하더니 천천히 다시 설명했다.
“금정사태. 뒷산에 들개무리가 있다고 생각해 보시지요. 수백 마리의 거대한 개 떼예요. 근데 다행히도 뒷산의 들개들에게 먹이도 주고, 적당히 채찍질도 하면서 사고를 안 치게 막고 있던 개장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개장수가 이젠 다른 일을 하겠다고 가 버린 겁니다.”
“다른 개장수를 찾으면 그뿐인 일이 아닙니까?”
“찾아야죠. 예, 맞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새로운 개장수가 오더라도 원래는 천천히 들개랑 친해지고 넘겨받아야 하는 건데, 이렇게 가 버리면 들개들은 새로 온 개장수를 따르지 않습니다. 그리고 자기들끼리 물어뜯고 싸우면서 개장수가 되겠다고 호기를 부릴 것입니다.”
“……!”
일부 말이 안 되는 듯하긴 해도, 금정사태는 의미를 다 이해할 수 있었다.
“자기들끼리 싸우느라 혼란에 빠진다는 거군요.”
“예, 그래서 개장수는 반드시 필요한 것이고, 그……. 멸진사태께서 계실 때도 개장수를 가만히 두었던 것이지요.”
그 누구보다도 흑도를 발작적으로 싫어하던 사람이 멸진사태다.
그런 그녀도 사천에 있는 흑도를 완전히 뿌리 뽑을 수는 없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세상을 살다 보면 바퀴벌레도 나오고 곱등이도 나온다.
이 세상을 다 불태우지 않는 이상 그늘진 구석에서 사는 벌레들을 어찌 다 치울까.
그래서 비도방은 가만히 두었었다.
비도방이 정사지간의 문파라서 그나마 사천의 흑도들을 통솔하기엔 믿을 만한 문파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으음.”
금정사태는 가만히 손끝으로 목함을 만져 보았다.
장문인인 정허사태도 그렇고, 지금은 작고한 멸진사태도 그렇고.
어릴 때는 왜 그녀들이 항상 목에 걸고 다니는 염주를 만지작거리는지 몰랐었는데, 이제야 알겠다.
거파를 운용하다 보면 이렇게나 번잡한 일이 많으니, 백팔염주를 굴리면서 번뇌를 잡지 않고 어떻게 배길까.
‘이미 세상에 더러운 것이 있는 것은 어찌할 수는 없지만, 더러운 것과 맞닿을 필요야 있겠는가?’
아미파는 고고해야 한다.
수렁에 발을 들이밀면 발목에 진흙이 묻는 법이다. 금정사태는 아미파에 진흙을 묻히기 싫었다.
“가지고 돌아가십시오.”
“금정사태!”
비대한 몸집의 금가회주가 양손으로 목함을 덥석 잡았다.
세상에서 가장 눈치 빠른 사람 중의 하나가 상인이다.
그는 절박하게 금정사태를 붙잡았다.
“이대로 돌아가면 흑도들이 난리가 납니다. 우리 상회의 피해는 둘째치더라도 그 일로 사고라도 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아무것도 모르는 민초들이 누구를 원망하겠습니까?”
“뭐라고요?”
“아미파. 아미파입니다. 사천 아미산의 복호사. 다들 이 근처에 사는 사람들이 누구를 의지하고 누구를 원망하겠습니까? 당연히 아미파가 사람들을 돕지 않는다고 원망하겠지요.”
금가회주는 슬쩍 눈치를 살피면서 첨언을 얹었다.
“만약 끝내 거절하신다면 저도 정말, 정말 그러고 싶지는 않지만, 방법이 없는지라…… 당문에라도 부탁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허어.”
금정사태의 눈이 번뜩였다.
“사천에서 온갖 도박장을 운영한다더니 과연 대범하긴 한 모양입니다. 아미와 당문을 저울질하는 겁니까? 당신이요?”
고작 도박장이나 운영하는 쓰레기 같은 흑상(黑商)이. 팔파일방 중의 하나인 대아미파를 재는 꼴이라니.
아미파 일대 제자.
절정고수의 노기가 쏟아지자 금가회주는 엄살을 떨면서 양손을 휘저었다.
“아이고, 저도 어쩔 수 없습니다.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몇 놈씩 모여서 숨죽이고 살던 파락호들이 날뛰면 저는 장사를 못할 것이고, 그리하면 어차피 죽는 건 매한가지입니다.”
납작 엎드리는 금가회주를 무작정 벌할 수는 없는 게 금정사태의 약점이었다.
그녀는 무시무시한 기세를 뿜어내서 금가회주를 벌벌 떨게 만들다가, 결국은 한숨을 쉬면서 기운을 갈무리했다.
“금화는……. 일단은 보관하겠습니다. 저희가 방도를 찾아보겠습니다.”
“역시! 저희 금가상회가 믿을 수 있는 건 아미파뿐이라 생각했습니다!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자주 인사를 드리러 찾아뵙겠습니다!”
호들갑을 떨면서 온갖 아첨을 하는 금가회주를 앞에 두고 금정사태의 표정은 차갑게 가라앉아만 갔다.
‘생각해 보니 모든 게 천무련주 때문이 아닌가? 골치 아픈 일이 생기고 말았구나.’
금정사태는 이 일을 장문인에게는 또 어떻게 보고해야 할지. 눈앞이 캄캄해지는 듯했다.
***
천무련이 세운 정무관에 대한 소문이 무림에 파다했다.
객잔에서 두 명 이상이 모이면 모두가 정무관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최초의 정무관은 사천 아미산 인근이라고 했다.
그곳을 정무관의 본관이라 불렀는데, 처음엔 수백 명으로 시작한 제자들이 지금은 천 명이 넘었다.
대부분이 촌부 출신인 만큼 배움도 짧고 무공의 재능도 가지각색이었으나, 그래도 열심히 하겠다는 마음 하나는 모두가 동일해서 그중에 뛰어난 자들이 하나둘 나오기 시작했다.
가르치는 무공은 승천무(昇天舞)라고 했다.
천무공자가 소림의 무공을 포함한 하남 무림 무공들을 총집합하여 만든 무공을 승천무(昇天武)라고 하는데, 춤[舞]이라는 한자가 붙었듯이 정무관에서 가르치는 승천무는 그중에 가장 기본적인 단련 동작들을 골라낸 것이었다.
태극권 같기도 했고, 육합권 같기도 했다.
덩실덩실 부드럽게 움직이다가도 한순간 절도 있게 손발을 쭉쭉 뻗어내는 승천무는 시골 촌부도 열흘간 따라 하면 기본 동작을 다 외울 수 있을 만큼 간단했다.
그런데 간단한 동작에 비해 그 효과가 탁월하여 신체를 양생하고 자연스레 근골을 가다듬는 데 큰 효능을 보였다.
사람들이 열광하는 것도 당연했다.
정무관에서는 승천무를 익힌 지 일 년이 넘고, 성취가 일정 이상이 되면 그때부터는 소림이나 무당의 기본 공도 가르치겠다고 선언했다.
정무관의 인기가 점점 가열 차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본관을 시작으로 사천에만 열 개, 일 년 후에는 스무 개의 정무관이 생기기 시작하더니, 갑자기 하남, 하북을 가리지 않고 온갖 지역에서 우후죽순처럼 생겨나기 시작했다.
천무련에서는 학검대와 청죽대를 파견했고, 그때마다 정사지간의 문파가 무릎을 꿇고 들어와 정무관의 관주와 무공 사범이 되는 과정이 반복되었다.
정무관의 강호 침략.
팔파일방에서는 정무관을 그리 평가하기 시작했다.
“자네 그거 들었나? 아미파는 끝까지 정무관에 무공을 주지 않겠다고 했다는군.”
“그렇게 안 봤는데 인심이 고약한 비구니들이군. 촌부들이 고작 기본 공 하나 익히는 게 그리도 배가 아프다던가? 무슨 대단한 절공을 내놓으라 하는 것도 아닌데 뭘 그래 유세를 부리는 거야?”
“그러게 말일세.”
“소림이랑 무당도 무공을 내놓는데, 아미파가 유세를 부리다니. 쯧쯧.”
“그게 알고 보니 천무련 안에서 파벌 싸움을 하는 모양이야. 아, 글쎄, 아미파가 관부에 상소까지 올렸다지 뭔가? 천무련에서 정무관이라는 곳을 무절제하게 만들어서 강호를 혼란시키고 있다고 말이야.”
“뭐야? 그런 괘씸한! 그래서? 설마 관부가 이때다 싶어서 정무관을 줄이겠다던가?”
“자네 유난히 예민하군. 정무관에 아이라도 보냈는가?”
“당연히 보냈지! 첫째, 둘째가 가서 배우고 있고 셋째도 보내 달라고 매일 울고불고 난리야.”
“흐흣, 그렇겠지. 아무튼 결과는 아주 고소했네. 관부에서 아미파를 오히려 꾸짖었다는군. 민초들을 보살피고 좋은 일을 하려는 사람을 방해하지 말라고 말이야.”
“흐하핫! 그거 올해 들은 이야기 중에 가장 고소하구만! 그러고 보니 지금의 황제 폐하와도 각별한 사이라면서? 백호대장군이란 칭호까지 받은 천무공자한테 어딜 감히 덤벼?”
“그러게 말일세. 참 웃기는 자들이야. 아미파 비구니들도 지금쯤 쪽팔려서 죽을라고 할 걸세.”
촌부들의 대화가 곧 민심이었다.
사람들의 반응은 뜨거웠고, 천무련과 천무공자에 대한 민초들의 지지는 하늘을 찔렀다.
“대단하네요.”
한 해가 지나 더욱 성숙해진 조서인이 객잔의 한구석에서 촌부들의 대화를 가만히 듣고 있다가 감탄했다.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할까. 늘 감탄이 나와요.”
“대단하기는 개뿔.”
옆에서 대낮부터 오량액을 마시고 있던 추룡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걔 그러다가 큰일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