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풍운객잔 2부-495화 (624/686)

20권 15화

제40장 백호마왕(白虎魔王) (15)

“네?”

조서인은 곰곰이 생각해 봤지만 추룡의 말뜻을 이해하기 힘들었다.

“세상이 온통 천무련과 천무공자를 칭찬하는데, 그게 큰일 날 일이라고요?”

납득할 수 없는 이야기다.

조서인은 자신의 어린 시절을 자연스레 떠올렸다.

“저는 무공을 익히고 싶은 사람이 얼마나 간절한지……. 그 마음을 너무나 잘 압니다. 그래서 소호가 한 일이 대단해 보여요.”

어린 시절, 가진 것도 없으면서 오로지 가문에 대한 자부심만 남아 있던 주정뱅이 아버지 때문에 얼마나 고통스러웠던가?

창을 휘두르느라 손바닥이 너덜너덜한 건 기본이다.

신발을 사는 족족 한 달도 못 버티고 찢어지기 일쑤여서 나중엔 맨발로 수련해야 했다.

지칠 대로 지쳐 탈진하는 바람에 연무장에서 잠든 것도 한두 번이 아니다.

조서인은 오로지 끈기와 근성만으로 여기까지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바보도 그런 바보가 없다.

구결도 뚝뚝 끊어지고 불완전해서 단전도 제대로 양생하지 못하는 무공을 뭐가 좋다고 그리도 처절하게 반복했는지.

그때 조서인이 얼마나 ‘제대로 된 무공’에 목말랐는지는 그 누구도 모른다.

그런데 정무관이라는 곳이 생긴다?

몸을 양생할 수 있는 거대 문파의 기본 공을 가르쳐 준다고?

그게 어떻게 나쁜 일이겠는가!

어린 시절의 조서인처럼 무공에 목마른 아이들에게는 얼마나 큰 희망이 되겠냐는 말이다.

“조카야, 아직 멀었구나. 내 말은 그런 뜻이 아니야. 핵심은 무공에 대한 게 아니라고.”

“그럼 어떤 게 핵심인지요?”

“넌 저 윗사람들이 말이야. 저어― 위의 높은 자리에 앉으면 얼마나 속이 좁아지는지 모르지?”

“속이 좁아집니까……?”

“말도 안 되게 속이 좁아진다? 밥 먹다가 반찬 하나 안 주면 삐져서 젓가락을 내려놓는 어린아이가 따로 없다니까? 마당을 걷다가 벌레를 발견하면 이미 곳간 안에 벌레가 다 퍼져 있다고 생각할 사람들이야. 호들갑을 엄청 떠는 인간들이라고.”

조서인은 눈을 끔뻑거렸다.

“높은 자리에 있는, 그러니까 고관대작 같은 사람들이 소심해서 쉽게 삐진다고요……?”

“그래.”

조서인이 알아듣지 못하고 눈을 끔뻑거리니 추룡이 답답한 듯 한숨을 내쉬었다.

추룡의 말을 유일하게 알아들은 사람은 하북팽가에서 제왕학에 대해 조금이나마 배운 팽자연뿐이었다.

“아! 그런 뜻이셨군요?”

그녀는 탄성을 내지르더니 조서인의 소맷자락을 살며시 잡아당겼다.

“자연 누이는 이해했어요?”

“서인 오라버니. 윗사람은 의심이 많거든요. 특히 자기가 능력이 부족하다 여기는 윗사람은 신하들을 질투하고 경계하기가 쉬워요.추 대인께서는 천무공자가 너무 주목받는 상황을 걱정하시는 것 같아요.”

“아아, 그럼 소호를 고관대작들이 질투하고 경계한다는 소리군요? 능력이 있고 눈에 띄어서?”

“네, 그런 말씀인 것 같아요. 제 생각이 맞나요?”

추룡은 심드렁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잘 들어 봐.”

그는 오량액이 찰랑하는 술잔을 가만히 들여다보면서 말했다.

“안 그래도 천무공자라는 놈은 관(官)이랑 다른 길을 걷는 무림 강호의 사람인데, 그런 놈이 전쟁에서 공을 세워서 전쟁 영웅이 되었네? 그러니 윗놈들이 보기엔 얼마나 꼴 보기 싫겠냐? 저놈은 무슨 생각을 할까? 저러다가 황실까지 좌지우지하는 건 아닐까? 내 자리를 위협하는 건 아닌가? 그렇게 걱정하겠지.”

“으음, 그래도 황제가 소호랑 호형호제하는 사이지 않습니까? 관직도 안 받고 나왔고요. 그런데도 감히 건드리려는 사람이 있을까요?”

“그러니까 더 난리를 치겠지.”

“예?”

“나랏일 하는 사람들이 보기엔 개국공신만큼 위험한 자가 없는 법이야. 그 기옥이라는 놈을 용상에 앉힌 소호는 개국공신이나 마찬가지고. 안 그래도 자꾸 공을 세워서 눈에 거슬리는데 심지어 새로 용상에 오른 황제랑도 친하네? 관직을 안 받아? 황실의 명령을 안 받는다고? 그럼 고위관직에 있는 놈들이 어떻게 생각할까?”

“위험한 인물…….”

“그래. 아마 지금 이 순간에도 천무련이라는 곳을 어떻게 하면 괴롭힐까, 어떻게 하면 트집을 잡아서 끌어내릴까 고민하는 자들이 저 자금성에 수백 수천 명일 거다.”

팽자연이 서둘러 주변의 인기척을 살폈다.

주기옥을 놈이라고 부른다.

자칫 말이 새어 나갔다간 역모죄를 뒤집어써도 할 말이 없을 지경이다.

그녀는 한참이나 주변에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지만 숙부님. 적은 어디서나 생기는 법 아니겠습니까? 큰일을 하고 눈에 띄면 언제나 적이 생겨나잖아요? 당연한 일이 아닐까요?”

“그래. 명성을 떨치면 적은 어디서나 생겨나지. 다 좋은데, 그런데 이번에 정무관 건으로 그놈들한테 빌미를 줘 버렸어.”

추룡은 심경이 복잡해 보였다.

미간을 좁힌 채 가만히 술잔만 들여다보는 그에게서 깊은 고뇌가 느껴졌다.

“젠장, 차라리 이상한 짓을 하고 잘못을 하면 혼내러 갈 수나 있지. 정무관? 좋은 일이지. 좋은 일인데……. 그걸 이렇게 일을 크게 벌이면 어쩌자는 거야?”

“숙부님……?”

“정무관이 다 뭐냐. 왜 그딴 짓을 하냔 말이다. 사람들한테 무공을 베풀고 민심을 얻으면 어쩌자는 거야? 젠장, 망할 놈의 조카 같으니. 사람 마음 불편하게 만드네.”

추룡은 자신의 머리를 벅벅 긁었다.

민심.

흘려들을 수 없는 말을 듣자 그제야 조서인도 추룡의 의중을 짐작할 수 있었다.

“민심이라고 하시면 혹시 역……?”

텁.

팽자연이 황급히 손으로 조서인의 입을 막는다. 조서인은 물론이고 팽자연의 안색도 창백했다.

추룡은 혀를 찼다. 조서인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젓고 있지만, 세상 경험이 많은 추룡이 보기엔 너무나 당연한 추측이었다.

“본인이 그럴 생각으로 움직였나? 아니면 모르고 움직였나? 그런 건 나도 모르겠다. 근데 이런 일은 자기가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중요하지 않아. 주변에서 그렇게 생각할 여지가 있으면, 그냥 그렇게 되는 거다.”

“설마 그러려고요. 그저 불쌍하고 힘든 사람이 있으면 최선의 방법으로 도울 뿐이에요. 소호는 그런 친구입니다.”

“그래. 그렇겠지. 대형도 그랬어. 뒷일은 생각 안 하고 일단 저지르는 게 아주 쏙 빼닮았네. 문제는 그 당시 대형의 위치랑, 지금 소호의 위치랑 다르다는 거야. 내가 볼 땐 이번 건은 정말로 위험해.”

오량액 한 잔을 입안에 털어 넣은 추룡이 불그스름해진 얼굴로 벌떡 일어섰다.

“나 잠깐 나간다.”

“어딜 가시려고요?”

“둘째 형님을 만나 봐야겠어. 황실 이야기 들으려면 그쪽이 빠르겠지.”

“저도 가겠습니다!”

“저도요!”

조서인과 팽자연이 황급히 뒤따랐다.

추룡은 거침없는 발걸음으로 고관대작들의 저택이 즐비한 북경의 중심가로 향했다.

***

“둘째 형님을 만나고 싶소.”

추룡은 으리으리한 저택들이 즐비한 거리에서 땔감을 한가득 지게에 매고 걸어가는 나무꾼을 붙잡고 그리 말했다.

“예? 둘째 형님이 어떤 분입니까? 쇤네는 대인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뢰안(雷眼)의 사람들은 자기 무공은 잘 숨기는데, 출신 문양은 꼭 몸에 하나씩 새기고 다니더라고. 쓰고 있는 망건에 까만 실로 조그마하게 새겨 넣은 그거. 뢰안각 문양 아닌가?”

건들거리면서 대충 말하는 것 같지만 그 안에서 드러나는 식견이 칼날처럼 날카롭다.

나무꾼의 인상이 대번에 변했다.

“문양이라니요?”

“남궁가의 형수님께 다 들었소.”

안휘의 명가 남궁세가.

그 안에서 각지의 정보를 수집하는 뢰안각은 무림인들도 잘 안다.

하지만 하오문이나 개방처럼 각지에 실제로 정보원을 투입하는지는 잘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

나무꾼으로 위장한 정보원은 길에 사람들이 없는 것을 확인한 뒤 조용히 말했다.

“망건이 티가 많이 납니까?”

“모르는 사람이 보기엔 모르겠지. 근데 내가 보기엔 잘 보이는데?”

뢰(雷) 자를 사람의 눈처럼 길쭉한 타원형 안에 작게 새겨 넣은 문양.

사실 나무꾼이 쓴 망건에 새겨진 문양이라고 해 봤자 눈에 잘 안 띄는 정수리 부근에 새끼손톱만 한 문양일 뿐이었다.

보통 사람들은 발견하는 것도 어렵고, 설령 보더라도 신경 쓸 리가 없다.

뢰안각 사람들끼리의 접선이나, 꼭 만나야 할 정보원끼리만 서로를 판별하기 위한 장치일 뿐.

그걸 한눈에 찾아낸 추룡이 대단할 뿐이었다.

“어느 도시든지 가장 부유하고 높으신 분들이 사는 거리에 가면 한 명쯤은 몸에 문양을 새기고 있을 거라 하시더라고.”

“아아, 그러셨군요.”

추룡은 맨살이 다 드러난 팔로 팔짱을 낀 채 자신의 턱을 쓰다듬었다.

“나처럼 찾는 입장에서는 좋지만, 그거 적들이 보면 위험하지 않나? 형수님께 바꿔 달라고 말 좀 할까?”

“혹시 그 형수님이라는 분이 저희 각주님이신지……?”

“알면서 뭘 물어보는 거요?”

“아뇨!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제가 더 조심하면 되지요. 네.”

나무꾼은 공포에 질린 채 몸을 부르르 떨었다.

각주가 언급되는 것만으로도 두렵다는 듯한 반응이다.

“이국적 복장에 그 흉터. 추 대인이 맞으시지요?”

“그렇소.”

“이 거리의 남쪽 끝으로 가시면 만두를 파는 노점이 하나 있고 그 앞에 사람들이 많을 것입니다. 그곳에 계시면 반 시진 안에 답을 받아 가겠습니다.”

“반 시진은 너무 긴데. 둘째 형님이 많이 바쁘신가?”

“아마 북경에서 가장 바쁘신 분을 찾으라면 그분이실 겁니다. 늘 서류와 일거리에 파묻혀 계시지요. 싸움도 마다하지 않으시고요.”

나무꾼에게서는 직위 고하와 상관없이 부운화를 향한 인간적인 존경이 느껴졌다.

“과연. 둘째 형님은 일을 미뤄 놓는 분이 아니셨지.”

“예. 지금도 그러십니다. 그러니 대인께서도 부디 양해 부탁드리겠습니다. 제가 최대한 서둘러 보겠습니다.”

나무꾼은 그 말을 끝으로 태연하게 지게를 고쳐매고는 어딘가로 걸어가 버렸다.

추룡은 몇 발자국 뒤에서 가만히 상황을 지켜보던 조서인과 팽자연을 데리고 나무꾼이 말한 만두 노점으로 향했다.

노점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커다란 연잎에 담아 주는 주먹만 한 만두를 먹기 위해 사람들이 끊임없이 찾아왔다.

“숙부님, 맛있네요. 자연 누이도 한번 먹어 봐요. 괜찮아요.”

형식상 주문해서 산 만두인데 제법 맛이 괜찮았다.

만두피는 과하게 두껍지 않았고 한 입 크게 베어 물면 진한 풍미의 육즙이 입안에 한가득 흘러넘쳤다.

추룡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며 만두를 먹었고, 팽자연은 정중하게 웃는 얼굴로 거절했다.

그들이 그렇게 서서 만두를 먹길 잠시.

반 시진이라 말했던 것과는 달리 나무꾼은 이 각 만에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여기도 만두 하나만 주시오!”

나무꾼은 추룡을 스쳐 지나가면서 말했다.

“관성대(觀星臺)로 가십시오. 그곳에서 기다리신답니다.”

나무꾼은 추룡을 단 한 번도 쳐다보지 않았다.

추룡 또한 그를 보지 않고 만두만 묵묵히 다 먹은 뒤 그곳을 떠났다.

관성대는 정통 일 년에 세워진 높은 건물로, 멀리서 보면 성벽을 뚝 잘라서 떼어 놓은 것처럼 생긴 건축물이었다.

이름 그대로 별을 살피는 곳으로서 약의, 혼의, 혼상과 같은 커다란 천문 기구들을 설치하고 아래에는 물시계도 배치되어 있었다.

나라의 근간은 농업.

농사를 짓는 데 중요한 역법과 천문은 그야말로 종묘와 사직을 좌우할 정도로 커다란 비중을 차지한다.

관성대는 그런 의미로 만들어진 장소였다.

본래는 나라의 관료들이 관리하고 병사들이 엄중하게 지키고 있을 장소였지만, 추룡이 도착했을 때는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인기척이 없이 한산했다.

“추룡. 여기다. 얼굴이 좋아 보이는구나.”

부운화는 관성대 위에서 언제나처럼 단정한 모습으로 선선히 웃고 있었다.

추룡은 그 모습을 보자마자 웃으면서 소리쳤다.

“뭔 일이 있었던 거요? 둘째 형님은 왜 그리 얼굴이 상했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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