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권 16화
제40장 백호마왕(白虎魔王) (16)
“그래? 피곤해 보이나?”
부운화는 자신의 볼을 손으로 문질렀다.
삼십 대라고 해도 믿을 정도의 젊고 생기 넘치는 얼굴, 단정하게 수염을 다듬은 그는 미중년의 표본과도 같다.
검사답게 팔다리가 길고 손가락도 길다.
검은색 무복을 입고 팔꿈치와 무릎에 비구를 찬 모습에선 가만히 있어도 ‘현역 무인’의 전의(戰意)가 선명하게 느껴졌다.
지난번에는 녹색의 관복을 입은 문인(文人)의 모습이었는데, 이번에는 무복을 입고 싸움을 앞둔 무인의 모습으로 만났다.
표풍검 부운화.
무당에서 무공을 익히고, 전장에서 무공을 완성한 절대 고수의 존재를 강호는 아직도 제대로 알지 못한다.
등허리에 차고 있는 한 쌍의 장군검은 잠이 든 용과 같다.
언제 어디서 전투가 벌어지더라도 찰나의 순간이면 곧장 저 한 쌍의 장군검이 벼락처럼 튀어나올 것이다.
‘저번에도 느꼈지만 여전히 막강하시군.’
추룡은 괜스레 자신의 무력과 부운화를 견주어 보고는 곧바로 혀를 내둘렀다.
세계를 둘러보며 다듬어진 추룡의 무공으로도 부운화를 상대로는 답이 보이질 않는다.
막강한 무형기.
자연체로 편안하게 서 있는 모습에선 무공의 경지를 감히 짐작할 수도 없다.
다만 한 가지, 지난번과는 다른 점이 있었다.
부운화의 눈빛은 침잠되어 있었고, 눈 밑에 그늘이 져 피곤이 역력했다.
‘형님이 저렇게 될 정도라니.’
경지를 넘어선 무인이 피로를 느끼려면 대체 어떤 상황이어야 가능할는지.
추룡은 안타까워하면서 혀를 찼다.
“얼굴만 보면 그냥 피곤하다는 말로 끝날 게 아니오. 북로에서 삼 일간 안 자고 싸웠을 때 이후로 그런 얼굴은 처음 보는데? 둘째 형님은 혹시 요즘도 안 자고 안 먹으면서 싸우고 다니는 거요? 거 너무 열심히 사는 거 아닌가?”
“하핫! 넌 여전하구나, 추룡. 그러고 보니 잠을 제대로 못 잔지 그쯤 된 것 같군.”
관성대에 올라선 추룡이 부운화와 반갑게 포옹을 했다.
“지난번에 봤을 때 내 기억엔 분명히 다음번엔 회포를 풀자고 했었는데, 지금 형님 얼굴을 보니 오늘도 그른 모양이오.”
“그렇구나. 어서 풍운객잔에 가서 술이라도 한잔해야 할 텐데 말이다.”
시간이 흘러 중년의 나이가 되었음에도 부운화는 여전히 차분했고, 추룡은 여전히 다혈질이다.
부운화는 추룡의 어깨를 반갑게 두드렸다.
“슬슬 내게 연락할 거라 생각하곤 있었다. 천무련에서 황실까지 소호랑 함께 왔다면서?”
“다 알고 있었소? 그럼 우리가 북경에서 빈둥거리는 것도 알았겠네? 둘째 형님도 너무하네. 그럼 한번 불러 주지 그랬소?”
“그럴 상황이 아니야. 지금 나랑 얽히면 평생 황실에 주목받으며 살 텐데, 그러고 싶은 거냐?”
“그건 싫지.”
추룡은 즉답하며 손을 내저었다.
부운화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잔잔하게 웃었다.
“이번에 하늘이 바뀌면서 내가 음지의 주목을 많이 받는 중이다. 행동을 조심하는 중이니 네가 이해해다오.”
“음지가 어디오? 동창? 강호?”
“둘 다라고 해야겠지.”
황실의 첩보 기관인 동창과 신비로운 강호 무림의 주목을 동시에 받는다니.
추룡은 헛웃음을 흘렸다.
부운화니까 이 정도지 보통 사람으로서는 견딜 수 없는 압박이리라.
“하여간 큰일을 하시느라 매일 바쁘구만. 내가 도울 일이 있으면 언제든 말씀하쇼.”
“말만으로도 고맙다. 하지만 지금 네가 하는 일은 내가 하는 일만큼. 아니, 어쩌면 그보다 더 중요한 일이지 않으냐?”
마치 추룡이 지금 하는 일을 안다는 듯한 말투다.
추룡의 눈에서 기묘한 빛이 번뜩였으나, 상대가 부운화임을 새삼 깨닫고 허탈하게 웃었다.
“하여간 둘째 형님은 모르는 게 없소. 참! 저번에 그놈들은 잘 해결되었소?”
“그놈들?”
“우리를 비밀통로로 내보내고 둘째 형님이 직접 검 들고 싸우던 놈들 말이오. 이상한 무공을 쓰던데.”
“칠성태극교 말이군. 당장 해결은 됐는데, 그놈들은 너무 질겨서 끝이 없다. 바퀴벌레 같은 놈들이야. 사교(邪敎)의 무리는 그래서 어렵다. 도대체 박멸을 할 수 없어서 이렇게 매번 고생 중이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부운화에게서는 허탈함이 느껴졌다.
“매사에 철저한 둘째 형님이 그런 말을 할 정도라니. 난 상상이 안 되는구만. 칠성태극교? 그놈들이 그렇게 대단한 놈들이오?”
“기반도 탄탄하고 집념이 강한 놈들이다. 특히 교주가 영민한 자라 매번 꼬리를 잡히지 않는구나.”
“거 신기하네. 둘째 형님 무공으로도 해결이 안 되는 거요? 형님 혼자 쳐들어가도 다 이길 수 있을 것 같은데?”
“하핫, 혼자서 거대한 집단에 달려드는 건 우리 대형밖에 못하는 일이지.”
천하에 짝이 없는 걸물, 무쌍귀.
북로전쟁에서 몽고기병들을 휩쓸던 붉은 악귀 장기린 정도는 되어야 그런 일을 할 수 있지 않겠는가.
“내가 보기엔 둘째 형님도 별 차이 없는 괴물인데.”
“난 아직 멀었다.”
턱도 없는 소리라는 듯이 겸양을 보이지만, 추룡이 보기엔 부운화의 무력은 대형인 장기린과 크게 다르지 않다.
두 사람이 환담을 나누는 사이 관성대로 뒤따라 올라온 조서인과 팽자연이 부운화를 향해 정중하게 인사를 건넸다.
“둘째 숙부님을 뵙습니다.”
“부 대인을 뵈어요.”
부운화 역시도 그들을 알아보고 반갑게 맞아 주었다.
“서인이. 그리고 지난번에 보았던 팽가의 소저로군.”
부운화는 두 사람의 등장을 기꺼워했다.
“인연이 있는 사람들을 만나는 건 언제나 기쁜 일이지. 다만 상황이 좋지 않아 길게 대화를 나눌 수 없다는 것이 아쉽군. 세 사람은 아마 소호 때문에 날 찾아온 것일 테지?”
추룡과 조서인이 고개를 끄덕인다.
부운화는 차분한 모습으로 웃으며 되물었다.
“무엇이 궁금한가? 정무관에 대한 게 궁금한가? 모든 민초들에게 무공을 익힐 기회를 준다는 생각은 훌륭하지 않던가?”
차분하고 진중한 표정이라 착각하기 쉽지만, 그는 장난스러운 눈빛으로 마치 그들을 시험하는 듯했다.
추룡이 투덜거리듯이 말했다.
“민초들에게 무공을 가르치면 뭐하나. 그래 봤자 우리 본가에 사람이나 늘겠지.”
“녹림수로맹에 사람이 늘어난다? 도적 떼가 늘어날 거란 말이냐?”
“힘이 생기면 쓰고 싶은 게 사람이오. 무공을 익히고 나면 예전엔 참았을 일을 참겠소? 이상한 짓이나 하는 현령 밑에서 참고 살던 농민들이 익힌 무공으로 들고일어나지 않겠소?”
“재미있군. 너는 그렇게 생각했나 보구나.”
“거친 놈들 사이에서 나고 자랐으니 그놈들의 사고방식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어서 그렇소. 둘째 형님. 두고 보시오. 정무관이 많아질수록 불의를 참지 못하고 들고 일어나는 인간들이 많아질 테니.”
“그럴지도 모르지. 그런데 그게 왜 나쁜 것이냐?”
“무슨 말이오?”
“난이 일어날 만하니까 나는 거겠지. 부패한 관료 놈들이 얼마나 민중을 쥐어짰으면 난이 일어나겠느냐? 난 좋아 보이는구나.”
“아니, 그거 진심으로 하는 말이오?”
“그래. 그리고 민초들만 힘이 생기는가? 관료들도 똑같이 무공을 익힐 텐데 그건 어찌 생각하나?”
“그건 다르오. 무공을 익히고, 정신과 육체를 가다듬은 자들은 예전처럼 작은 일에도 주눅 들고 굴복당하는 민초들과 다를 것이오.”
“그래. 그거다.”
부운화는 부드럽게 웃었다.
“결국은 정무관이 많아질수록 건강하고 강한 정신을 가진 민초들이 많아진다는 소리야. 그들이 무기를 들지 말지는 관료들의 공명정대한 일 처리에 달려 있는 것이고. 그러니 아까 한 질문을 다시 해야겠다. 정무관이 많아질수록 난이 많이 일어날 것이다. 그래, 그게 나쁜 일이더냐?”
“그건…….”
“혹시 너는, 농민들이 평생 주눅 들고 살면서 별로 문제나 일으키지 말기를 바라는 것은 아니었더냐?”
추룡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는 충격을 받았다.
처음엔 울컥 화가 났으나, 곰곰이 생각해 보니 정말로 자신의 무의식적인 생각엔 그런 면이 있었다.
자신의 본분에 최선을 다할 것.
군주는 군주로서.
신하는 신하로서.
농민은 농민으로서.
자신의 자리에서 있는 힘을 다해야 하는 것은 유학의 기초이자 중화의 기본적인 가치관이다.
신분이 나눠진 세상이니 당연한 일이고 욕먹을 생각 또한 아니다.
다만 나라의 법을 피해 산적이 된 사람들 사이에서 태어나, 서역에 가서 자유롭게 주유하던 그조차 그러한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이 추룡에게 큰 충격을 주었을 뿐.
“그랬군. 내 생각이 짧았던 모양이오. 역시 형님이오. 나랑은 생각의 깊이가 달라. 좋소. 분명 그게 나쁜 일은 아닐지도 모르겠소. 그런데 그렇다 해도 납득이 안 되는 게 있소. 그걸 왜 내 조카가 해야 하는 거요?”
“왜 소호가 그 일을 주도해야 하냐는 말이구나.”
“그렇소. 그게 얼마나 위험할지. 황제랑 저 윗놈들이 소호를 어떻게 생각할지. 그렇게 생각이 깊은 둘째 형님이면 이미 다 알고 있을 것 아니오?”
추룡은 답답한 마음에 자신의 가슴을 두드렸다.
쿵쿵.
몸을 두드리는 울림이 부운화에게도 전해졌다.
“추룡. 네 마음은 잘 알겠다.”
“둘째 형님은 나랑 생각이 다른 거요?”
“똑같다. 다만, 소호는 그게 자신의 의무라고 생각하더구나.”
“의무? 그게 어떻게 의무가 되는 거요?”
“추룡, 그때를 기억하나? 우리가 카라코룸으로 가기 직전에 말이다.”
“……대형이 원가 놈이랑 싸우던 그때 말이오?”
“그래. 원 장군한테 부대에 제대로 물자를 보급하라고 싸우던 그때. 난 그때와 똑같다고 생각한다. 그때도 우린 대형한테 따졌었지. 왜 굳이 대형이 나서냐고. 결국 안 좋은 대가는 대형한테 다 쏟아질 텐데. 그때 대형께서 뭐라고 하셨는지 기억하느냐?”
“내가 해야 할 일이라고, 그렇게 말했던 것 같소.”
“그래. 내가 해야 할 일이다. 그리 말하셨지. 소호가 똑같이 말하더구나.”
“하아.”
추룡이 한숨을 내쉰다.
부운화의 마음을 그제야 이해한 추룡이다.
‘둘째 형님도 속상해하셨군. 대의를 위해 나서는 조카의 기백이 가상해서 말리지 못했을 뿐.’
조서인과 팽자연도 충격을 받은 모습이다.
역모죄를 뒤집어쓸지도 모르는걸 뻔히 알면서도 소호는 그 일을 행했다는 게 아닌가.
“어찌…… 그런…….”
조서인은 너무 큰 충격에 차마 말문이 막혀 말도 잇지 못했다.
부운화는 그런 조서인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하지만 추룡의 걱정도 일리가 있다. 나도 언제나 생각하지만 소호는 과해. 한 가지 일에 몰두하면 자잘한 피해와 잡음은 무시한 채 저돌적으로 달려나가 버린다.”
“맞소. 그게 문제요. 그러다 천무련이니 뭐니 다 날아가게 생겼는데.”
추룡의 목소리에도 걱정이 가득했다.
탐탁지 않은 면이 많다고 한들 그렇다 해도 어린 시절부터 보아 온 조카였다.
역모죄를 뒤집어쓰고 모조리 잃어버리는 것은 도저히 두고 볼 수가 없는 일이다.
“물론 그 정도 결단력이 있으니 큰일을 하는 것이겠지만, 이대로는 위험한 건 사실이지. 커다란 소가 쟁기를 걸고 움직이면 밭은 갈 수 있겠지. 하지만 원래 땅에 살던 개미나 두더지에겐 잔혹한 일이 아니더냐.”
“둘째 형님도 그리 생각하고 있었소?”
“물론이다. 그렇기 때문에, 서인아. 우린 네가 필요하다.”
“……예?”
갑자기 지목당한 조서인이 깜짝 놀라 되물었다.
“제가 필요하시다고요?”
“그래. 예전에 대형. 네 사부가 말한 적이 있을 것이다. 네가 소호를 막아다오.”
부운화의 단호한 요구에 조서인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졌다.